램 차란의 위기경영
램 차란 지음, 김정수 옮김 / 살림Biz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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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불황. 오래전부터 심심하면 한 번씩 우리에게 다가와 과거의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린 경제문제다. 잘 나가던 세상이 갑자기 어둠이 닥치듯 모든 것이 불확실해지고, 돈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상황으로, 어제만 해도 시끄럽던 장터가 파리만 날리고, 주문받기 바빳던 상인들이 매장에 앉아 창밖만 내다보게 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살아오면서 불황이란 말을 들어본 게 세 번인 것 같다(기억나는 것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오일쇼크’. 당시 기름 값이 천장 부지로 올라감으로 인해 기름을 원료로 하는 모든 상품가격이 올라갔고, 이러한 가격인상은 거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한창 경제성장 부르짖으며 기름 소비 면에서 세계 몇 째 안가는 나라인 우리나라에서는 난리가 났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기름 값이 오른다 하니 말이다. 그때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 세계 모두가 세상 끝인 것처럼 난리를 쳤다. 일본만 조금 거들먹거리며 ‘우리는 괜찮아!’ 한 것 같고.

두 번째가 바로 IMF의 관리를 받았던 1990년대 말이다. 어느 날 갑자기 외환이 바닥이 나서 IMF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뉴스에 나오더니 순식간에 구조조정이란 칼날이 수많은 기업체의 목을 쳐 버렸다. ‘대마불사’라고 큰소리치던 대기업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핵심기업들 중 많은 수가 외국기업으로 넘어갔고. 현재 국내은행 중에 토종은행이 거의 없는 것도 당시 외화만 가져올 수 있다면 심장이고 콩팥이고 다 주겠다는 고매한 관리들이 작정한 결과다. (당시 결정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는 먼 훗날 평가하겠지만)

그리고 지금이다. 생각지도 않은 요상한 투자기법이 세상의 자금흐름을 왜곡시켜 세상을 공포의 분위기로 몰고 갔다. 돈 없는 사람에게 돈 꿔주고 그것이 대박 터지는 사업이라고 큰소리치며 샴페인을 터트렸으니 이런 비정상적인 일이 얼마나 오래가겠는가. 혹자는 그것을 자본시장에서는 극히 상식적인 상황이라고 하기도 한다. 집이 필요한 사람이 있고, 꿔 줄 돈이 있고, 그것을 운영할만한 곳이 있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니겠느냐는 논리다.

어쨌든 지금 상황은 전문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임에는 틀림이 없다. 석유문제는 특정 원자재의 문제였기에 석유가 있는 나라들은 별 고생 없이 건널 수 있는 다리였고, IMF는 특정 몇 개 나라만이 겪었던 고통이지, 그 외 나라들, 특히 미국 같은 나라는 그 상황을 활용해서 떼돈 벌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요즘 불황은 피신처가 없다. 어디로 도망갈 수도, 다른 선택지를 찾아보기도 어려운 전 세계적인 문제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경영자 입장에서는 무척 난감한 상황이다. 물건을 싸게 만들어도 과거처럼 살 사람이 많지 않고, 외국으로 판매 선을 바꿔본 들 그쪽도 우리가 별로 다를 게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해답 찾기가 어렵다.

이 책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해답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책으로,  내용은 간단하게, 핵심은 분명하게 정리했고, 경영자 개인의 문제를 넘어 기업의 전체 업무 흐름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게 기술했다.

저자가 주장하는 핵심은 ‘무엇보다 현금흐름에 중점을 두고 기업을 운영하라’다. 아무리 좋은 상품도, 기업운영전략도 버티는 뚝심이 있어야만 도움이 되는 것이기에 단순히 매출증대, 시장점유율 확대, 생산량 증대 같은 호황기 때의 전략은 별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지금은 과거 정책을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내 통장에 들어있는 돈이 얼마이며, 이것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고민하라고 한다.

또 하나는 ‘현장에서 직접 시장을 느끼고 세심하게 이를 관리하라’다. 아무리 현금흐름을 중시한다고 해도 이를 의자에 앉아서 보고받은 것만으로는 관리가 어렵다. 가장 실질적인 흐름은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리를 하겠다면 중장기 전략이 어쩌니 연간 목표가 무엇이지 하며 조직원들을 밀어붙이지 말고 시장의 흐름에 즉각 대응하라고 한다. 아주 세밀하고 꼼꼼하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직역량을 최대한 가동시켜라’는 말이다. 무작정 ‘하자!’해서 될 일이면 세상이 이렇게 변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의지보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내가 원하는 현금 흐름에 맞추기 위해 기업 전체를 유심히 관찰하며 비용 최소화, 현금 흐름 최대화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다 취하라는 말이다. 예를 들면 자본 지출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제품 라인을 단순화하고, 가능하면 외주시스템으로 돌리며, 재고 관리를 철저히 하라는 식이다.

지금의 불황은 한두 개의 해법으로 헤쳐 나가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종합적인 대책이 이뤄져야 하고, 이 안에서 호황으로 돌아설 때까지 힘을 키우며 버텨야 한다. 이를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 해답을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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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수업 - 상처받고 지친 영혼을 치유하는 인생의 지혜
제럴드 G. 잼폴스키 지음, 막시무스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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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세상의 모든 것은 있는 현실 자체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렸다고 한다. 무척 단순하면서도 진리에 가까운 말이다. 동일한 상황에 처한 두 사람이라도 그 일에 대한 태도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느 날 상관이 직원 세 명을 불러 야단치기 시작했다. 일이 잘못된 탓이다. 아마도 야단맞을 동안 기분 좋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야단맞는 것은 육체로 치면 매를 맞는 것이나 진배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동일하게 상관에게 불려가 야단을 맞았다고 해도 그들이 모두 같은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잘못한 것을 반성하고 다음부터는 잘해야지 마음먹는 가하면, 어떤 사람은 상관이 자신의 잘못된 점만 찾아내 트집을 잡는다고 씩씩거리기도 하고, 더 심하면 회사 더러워서 못 다니겠다며 사표를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결국 동일한 사건이지만 그 일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나에게 와 닿은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는 말이다. 특히 이 책의 전반적인 주제는 사랑과 두려움, 용서와 관련된 상황에서는 우리들이 가진 태도가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한다.

이 책은 1970년대에 쓰여 진 책이다. 지금부터 거의 40년 전에 출간된 책이다 보니 책 내용이 무척 낮 익다.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이 저자의 이야기를 여러 곳에서 인용하고 해석하면서 자신의 글을 썼기 때문인 것 같다. 간단한 문장으로 핵심만 저술한 저자의 글에 앞뒤좌우에 해석을 붙이면서.

하지만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가 떨어졌을까. 그 동안 많은 변화가 있다고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별로 변하지 않은 것 같고, 특히 저자가 말하는 사랑과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계속 진행 중이다. 어쩌면 지구상에서 인간이 멸망할 때까지도 계속될 주제인지도 모르지만.

저자는 인간이 가진 감정에는 두 가지 감정이 있는데, 하나는 사랑이고, 또 하나는 두려움이라고 한다. 사랑이 있으면 두려움은 함께 할 자리가 없지만 두려움이 생기는 순간, 사랑은 저 멀리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러 책에서 그 동안 많이 들어본 말이다. 하지만 이 내용을 실감하고 자신의 마음에서 사랑을 키우고자 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저자는 공격이란 두려움의 표현이고 무엇인가 자신이 원하는 게 있다는 표시라는 말을 했지만, 그런 시각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40년 전에 한 이야기지만 말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은 자기 하기 나름이다’라는 저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른다. ‘그래. 어차피 내가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린 것이니까’ 하면서. 하지만 돌아서는 순간, ‘왜 세상은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지’ 푸념하는 게 우리다.

나는 이 책과 같은, 거의 고전과 같은 책을 볼 때면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너무나도 명백한 이야기들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향수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기에 왠만한 말에는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고, 그저 새롭고 또 새로운 것만 찾는 지식노마드같이 되어버렸다. 이런 세상 속에서 과거의 것은 지나간 유물과 같은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지나간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는 관념 속에서 말이다.

최근에 나온 책 중에서 이 책과 유사한 주제를 갖고 쓴 책이 몇 권 있다. 그것들과 이 책의 내용을 놓고 문맥분석을 해 본다면, 아마도 거의 동일한 시각으로 작성된 책이란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들이 주장하는 바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내 자신을 먼저 들여다보고, 우리가 신처럼 믿는 ‘자아’라는 게 바로 우리의 시각을 왜곡시키는 최대의 적이라는 주장 같은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두 책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까? 물론 책이란 것은 동일한 주제라도 저자에 따라 다르게 표현할 수밖에 없고, 독자는 그 다름에 이끌려 책을 선택하는 게 당연한 상황 같지만 아마도 ‘최신’의 것을 고르지 않을까. 40년 전에 이미 다 한 말을 아직도 진리를 찾듯이 이곳저곳을 헤매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조금은 처량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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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의 백지수표 -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19가지 특별한 주문
페기 맥콜 지음, 김소연 옮김 / 서돌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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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이 책에서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부자다. 내 삶은 풍요롭다’는 말로 끝나는 (단순한) 암시가 아닌, 그 메시지와 동반된 시각적 이미지와 충만한 감정을 온몸으로 느껴라. 그러면 의욕이 충만해지고, 수많은 기회와 마주치게 되며, 마침내 힘들이지 않고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고, “난 이미 부자야.“라고 선언하며 그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만 있다면 꿈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다만, 잊지 말 것은 단순한 상상이나 바람이 아닌 그 상황을 실제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많은 돈이 예금된 통장을 보며 행복감을 느끼듯이 말이다. 우주를 움직여 ‘부’를 끌어오기 위한 에너지가 바로 감정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에서 ‘부’를 얻을 수 있는 19가지 방법을 제시했는데, 이들을 요약하면 ‘첫째, ‘부’와 ‘돈’은 제한적인 것이 아니며, 공기처럼 무한하다는 것을 믿어라.‘ ’둘째, ‘부’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바라보며 내가 이미 갖고 있다고 확신할 때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셋째, 현재의 상황에 충실하며, 항상 감사하라. 감사의 마음은 자신의 감정을 더욱 긍정적으로 만들어 준다.‘이다.

그러나 저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를 얻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돈을 실컷 가져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면서도 ‘부’란 자기 손에는 닿지 않는 것으로, 자신은 도저히 가질 수 없으며,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만이 누리는 것이라고 단정 짓고 ‘부’를 가질 수 없는 이유만 줄줄이 늘어놓는다고 한다. 그런 좁은 생각과 편견이 (부를 막는) 장벽임을 모른 채.

저자가 말한 ‘부’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들은


첫 번째, ‘부(돈)’는 제한된 것이다. 띠라서 누구나 원한다고 다 가질 수는 없다.

두 번째, ‘돈 버는 사람은 나와는 다른 사람이기에 내가 그들처럼 되기 전에는 ’부‘를 가질 수 없다. 근데 나는 그렇게 되기 어렵다.

세 번째, ‘돈을 벌려면 정상적인 행동으로는 안 된다.’ 따라서 더럽게 살거나 아니면 청렴하게 살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결국 사람들은 ‘부’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부’는 제한된 것이기에 남보다 먼저 갖거나, 남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세금을 안 내거나, 남을 속이거나, 줘야 할 돈을 안 주는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그리고는 “나는 정직한 사람이니 당연히 돈을 못 벌수밖에 없지.” 생각하며 돈 없는 자신을 합리화시킨다. ‘가질 수 없어 못 가진’ 것을 ‘가질 수 있지만 스스로 포기한 것’이라고 위로하면서.

상상할 수 없으면 감정을 움직일 수 없다.

나는 [시크릿]류의 책에서 말하는 [끌어당김의 법칙]을 믿는다. ‘정말 맞아!’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꿈이 실현될 것임을 믿고 확신하면서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이뤄질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런 종류의 책에서 말하는 것과 내가 종교에서 배운 믿음이란 게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도리어 맨 날 입으로는 ‘믿습니다.’ 하면서 ‘진정으로 원한다면 반드시 이뤄진다’는 말을 안 믿는 게 이상한 것 아닌가?

그러나 문제는 내가 모르는 것과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상상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며 더 나아가 저자 말처럼 이를 감정으로 느낀다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포르쉐’를 원한다면 내가 지금 그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질주하며 앞 차를 따돌리는 순간의 긴장감과 스릴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상상력과 확신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단순한 바람, 되면 좋고 안 되어도 그만인 모습이, 게다가 머릿속에서 급조한 상상이 어떻게 감정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 어쩌면 우리는 현실적으로 꿈꿀 수 없는 것을 꿈꾸며 자신의 바람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푸념하는 것은 아닌지. (여기서 현실적이라는 말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환경이 열악해 도달할 수 없는’ 이란 개념이 아니라 어떤 것이든 ‘감정적으로 이뤄졌다고 느낄 수 없는’ 이란 의미다.)


‘돈’으로 허전한 마음을 달래는 현대인들.

‘돈은 현대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교환도구’로써, 경제학자들의 말처럼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원하는 것과 바꿀 수 있는 카드의 조커(Jocker)와 같은 것이다.(‘돈(화폐)’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수행하는 역할이 가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요즘, 아니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돈의 가치가 교환가치를 넘어선 것 같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서 모리교수가 말한 것처럼 ‘마음이 허전하고 의지할 곳이 없다보니 대안으로 돈에 맹종‘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학생들이 보낸 메일에 가끔 이런 말이 들어있다. “교수님. 요즘 제가 왜 사는지 모르겠어요. 하루 종일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이리 뛰고 저리 뛰다보면 하루가 그냥 지나가죠.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요?” 이런 내용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려오는 이유는 나도 한 때 이런 생각을 하며 내 자신을 학대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물론 지금도 이런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돈이 있어야 학비도 내고, 결혼도 하고, 집도 장만하고, 아이들 과외공부도 시킬 수 있고, 남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인정받으며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니고. 그러다 보니 우리들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했으면서도, 하루를 마감할 때가 되면 항상 허전하다. 내가 뭐 때문에 살고 있는지 모를 때가 많다. ’나는 돈 벌기 위해 태어난 건가?‘

이제는 ‘부’의 개념을 바꿀 때가 된 것 같다.

4년 전, 직장을 그만둘 때 무척 두려웠다.(퇴직하는 직장인들 모두가 비슷한 감정을 겪을 것이다.) 안락한 목장을 떠나 황량한 들판으로 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퇴직 후 육 개월 동안 나는 세상이 너무 두려워 사람도 거의 못 만나고, 낮에는 외출도 하지 못했다. 옆 집 사람이 “지금 이 시간에 왜 집에 있어요?” 라고 물을 것 같았다. 특히 오랜 세월동안 달고 있던 계급장을 떼고(명함 No, 직급 No, 회사브랜드 No, 안정된 급여 No) 맨 몸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너무나도 낮 설었다.


직장을 그만둔 후 가장 두려웠던 것은 돈 문제다. 퇴직할 때 받은 퇴직금도 곧 바닥날 터인데 그 후 어떻게 살 것인지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직장인일 때 받던 연봉에 맞춰 가계부는 커질 때로 커진 상황이라 더더욱.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조금씩 변해가는 내 모습을 느낄 수 있었는데, 바로 일에 선택 기준이었다. 나는, 일전에 잠깐 이야기한 것처럼, 헤드헌터에게 전화가 오면 엉뚱한 조건을 제시했다. 당장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면서도 학교 강의를 위해 일주일에 이삼일은 회사출근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헤드헌터들은 난감한 표정을 짓고. 기업고문으로 취직하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일주일에 이틀 출근하겠다고 하니 당황하지 않겠는가.(아마 이런 상황에서 기업체에 근무할 방법은 사외이사나 자문위원 같은 직책밖에 없을 것 같다.)

‘부’라는 말은 ‘풍요로움’과 같은 의미 아닌가?

당시 내가 이런 조건은 내건 것은 ‘돈’이 필요 없거나 직장 다닐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도리어 간절히 원했다고 하는 데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조건을 겁도 없이(?) 내 걸게 된 것은 ‘부(돈)’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라졌기 때문이다. 즉 ‘부’라는 게 ‘통장에 들어있는 돈’만으로 측정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 ‘부와 돈’은 ‘여유로움과 풍요로운 삶을 위한 수단’이지 여유로움과 풍요로움 그 자체는 아니라는 생각, 따라서 ‘부’란 개념을 ‘돈’이 아닌 ‘풍요로움’으로 바꾸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에게 ‘돈’ 대신 풍요로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기 시작했다. (물론 돈 많다고 과시하려는 사람은 이런 생각에 동의하기 어렵겠지만)

집안청소하고 설거지하고 빨래 널고 아이에게 점심을 차려주는 것도 풍요로움을 주는 소중한 일이었고, 다가오는 사람에게 미소 짓는 것도 풍요롭게 만드는 중요한 일이며, 한 평생 고생하신 어머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도 과거에는 느껴보지 못한 풍요로운 일이었다. 특히 새벽에 글을 쓰고, 학교에서 강의할 때에는 나도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줄 것이 있다는 마음에 더욱 알찬 풍요로움을 경험할 수 있었다. 백만장자라고 모두 여유롭고 풍요롭지 않으며, 지갑 속에 돈 천만 원이 들어있다고 세상 고민이 다 없어지는 것도 아니잖는가.(예전에 내가 자살을 생각했을 때 받았던 연봉이 억 단위였다) <몰입>을 쓴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말한 것처럼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먹고 살 수만 있다면 그 이상의 돈은 행복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에 감정이입하면 되지 않을까.

저자는 ‘부’를 얻으려면 실제 ‘부’를 얻은 것처럼 느끼고 풍요로움과 긍정적인 마음으로 세상으로 바라보며 항상 감사하라고 한다. 그러면 ‘부’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것이다. ‘내가 부자가 될 수 있을까? 돈 벌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는데?’ 고민하지 말고 실제 부가 생긴 것처럼, 그래서 풍요롭다는 것을 감정적으로 느낄 수만 있다면 나머지는 우주가 알아서 해 준다는 것이다.(인간의 뇌는 현실과 감정이 동반된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상할 수 없는 생각하려 애쓰지 말고 우리가 쉽게 감정이입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 그 모습을 꿈꾸면 되지 않겠는가?

나는 ‘부’를 풍요로움으로 대체했지만, 당신은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가?

나는 요즘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오늘도 보람찬 하루였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이런 시간을 허락해 준 ‘신’에게 감사하게 된다.(물론 그런 자리에 있게 해준 선배님에게도 고마움을 느끼고) 그리고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보며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듯한 안락함을 느낀다. 직장인일 때는 느껴보지 못한, 직급과 결재권을 흔들며 폼 잡을 때는 상상도 못해본 풍요로움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풍요로움’의 감정을 마음 한 가득 느끼며 그런 감정과 함께 살고 있는 미래의 내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는 점이다. 바로 눈앞에 있던 것처럼 말이다. 만약 이런 감정이 많은 돈이 들어있는 통장을 바라보는 마음과 같다면, 그래서 이런 감정이 [끌어당김의 법칙]을 움직일 수 있다면 ‘부’는 자연스럽게 내가 느끼는 풍요로움에 맞춰 따라오지 않겠는가.

나는 ‘부’보다는 ‘풍요로움’을 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책에서 말하는 백만장자의 모습은 잘 모르겠지만 풍족한 마음으로 커피 한잔 마실 때의 모습은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지 상상하지 어려운 ‘돈’을 생각하기보다 ‘풍요로움’을 생각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것이 내가 상상하며 감정적으로 느낄 수 있는 최적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신도 당신 나름대로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고, 자연스럽게 마음이 열리는, 그래서 주위사람들을 보며 ‘감사하다’는 말이 나올 수 있는 뭔가가 있지 않겠는가. 세상이 요구하는, 남보다 앞서기 위해 필요한,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얻어야 하는 뭔가가 아닌 진정으로 당신의 영혼이 기뻐 춤출 수 있는 그런 것 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이 상상하며 감정적으로 느낄 수 그런 것 말이다.

[끌어당김의 법칙]에서 원하는 감정이입. 쉽지는 않지만 해볼 만한 가치는 있다.

물론 이런 마음을 갖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나도 자주 ‘경제적인 문제’때문에 고민도 하고, 내일 일을 걱정하며 안절부절 못할 때가 많다. 게다가 통장에 든 돈이 바닥날 때면 두려움은 더욱 커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돈 들어올 때가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심호흡을 하며 아래 말을 생각한다.

‘오늘 나는 내 희망과 꿈을 이루기 위해 정확히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내가 걱정해서 달라질 것은 무엇인가?’
  

'걱정 대신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나는 이 일을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대부분의 경우 대답은 지금 상황에서 필요한 일을 찾아하면서 일이 해결되리라 믿고, 현재의 풍요로움에 감사하자는 것이었다. 고민한다고 안 될 일이 될 리도 없고, 두렵다고 해서 누가 나를 대신해서 문제를 해결해 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리 [탱큐! 스타벅스]에 나오는 마이클 게이츠 길처럼 60 넘은 노인이지만 커피 잔을 나르며 그 일에서 만족과 풍요로움을 얻는다면, 그리고 그 감정이 진심이라면 저자 말대로 나의 풍요로운 에너지가 우주의 에너지를 움직여 내가 바라는 모습에 한 발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여지라도 생길 것 같다.




‘부’를 ‘돈’ 대신 ‘풍요로움’으로 바꿔보자는 것.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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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지능혁명 - 내 아이의 성공적인 미래 설계
홍성훈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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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큐검사. 오래전에 학교에서 받았던 검사이지만 지금도 당시 내가 몇 점 받았는지 기억이 난다. 아이큐검사를 통해 좋은 점수를 받으면 그것 자체가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선생님의 눈초리가 달라졌으니까 말이다. 마치 한 인간의 우수성과 미래 자체를 결정해 버리는 듯한 검사였다.

하지만 요즘엔 아이큐라는 말이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것 같다. ‘아이큐가 밥 먹여 주냐’는 농담도 나오는 것을 보면 더더욱 아이큐에 대한 가치가 평가 절하되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이렇게 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강점혁명’이란 말이 세상의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성공한 CEO들, 그들 모습에서 아이큐가 높은 엘리트의 모습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잘할 수 있는 일을, 자신이 편한 방식으로 일을 풀어가고 있다는 것을 자주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강점을 자기 식으로 풀어나가는 성공한 경영자들 모습 속에서 자연히 ‘아이큐가 밥먹여주냐?’ 하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학교의 우등생이 사회의 우등생이 아니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이 반드시 성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학점과 사회생활과는 반비례한다’는 이야기들이 모두 이런 분위기를 설명해 주는 말들이다.

이 책을 보면 평소 우리가 알고 있던 내용과 상이한 내용들이 가끔 나온다. 하지만 가끔 나온다고 해서 내용의 비중이 작다는 의미는 아니다. 몇 가지 내용이지만 일상적인 인간평가 개념 자체를 뒤바꿔버리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지능과 재능은 같은 것이다’ ‘한 인간이 한 가지 강점만 가진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몰입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재능보다는 능력에 중점을 둔다’ ‘재능에는 8가지가 있는데 이들은 다시 특수재능과 기본재능으로, 다시 주 재능과 보조재능으로 나뉜다’ 등의 이야기다.

언뜻 들으면 과거처럼 점수 하나같고 사람을 평가하던 것보다 복잡한 것 같지만 책을 읽다보면 고개가 끄덕거리는 부분이 많다. 뭐라고 할까. 좀 더 인간적인 평가방식이라고 할까. 과거의 아이큐검사에서는 인간미를 제외한, 한 사람의 능력을 수리적인 판단 하나에 근거해 평가했다면 이 책에 나온 다중지능은 인간적인 면을 보다 많이 강조한 척도 같다. 인간이 원래 다중적인 면을 가진 생물이건만 그것을 무시한 채 하나의 숫자로 사람을 평가하겠다는 게 문제 아니었을까 싶다.

이 책의 주제인 다중지능은 용도가 무척 다양할 것 같다. 특히 사회인으로 살아갈 때 반드시 필요한 직업과 일을 선택하는 데 있어 무척 많은 도움을 줄 것 같다. 어떤 일이든지 간에 그 일에 관심을 갖고 몰입하면 해당분야 전문가가 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하지만 동일한 시간을 투자해도 일에 대한 결과는 사람마다 다르다. 왜냐하면 일의 결과는 시간도 중요하지만 그 순간 얼마나 자신의 일에 몰입하느냐에 따라서도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자신이 잘하고,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는 게 가장 바람직한 상태가 아니겠는가. 다중지능 평가는 바로 이런 점에서 한 인간의 재능을 파악하여 그것과 일치하는 직업과 그의 일을 선택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저자는 각 직업마다 필요로 하는 재능이 있기에 직업을 재능으로 인수 분해한 다음, 그것에 합당한 재능을 가진 사람에게 그 일을 추천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거꾸로 말하면 자신이 가진 재능이 무엇인지 알고, 그 재능이 가진 요긴하게 사용되는 직업을 선택하면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재능과 연결된 일이니 남들보다 훨씬 쉽고 빠르게 일을 배울 수 있고, 동시에 재미있으니 몰입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 책에는 다중지능을 평가할 수 있는 방법까지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모습을 한두 개의 수치로 평가해서는 안 되며 그가 가진 다양한 재능을종합적으로 봐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 아이의 재능은 스스로 인지하도록 만들어야지 그것을 사회적인 잣대나 부모 개인의 욕망에 의해 강제해서는 안 된다는 저자의 말은 자식을 키워 본 부모가 아니고서는 말할 수 있는 진정한 자식사랑의 표현인 것 같다. 아이의 재능은 부모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아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척 멋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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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게 말걸기
대니얼 고틀립 지음, 노지양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대니얼 고틀립. 그는 서른세 살에 전신마비가 되어 30년 가까이 휠체어를 탄 채 살아가고 있다. 평범한 어느 날, 자동차를 몰고 아내의 생일선물을 찾으러 가던 그에게 닥친 거대한 차. 그는 정신을 잃었고 깨어나 보니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여러 가지 일들이 그의 주변에서 벌어졌는데, 아내와 이혼(아내도 암으로 고생했다)했고, 누나와 부모님 마저 세상을 먼저 떠났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 것은 자신의 손자인 샘이 자폐증환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다. 저자 자신이 심리학자였기에 자폐증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봤는지 모르겠지만 ‘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이 바로 저자가 자폐증환자인 손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써 놓은 책이다. 나는 그 책을 보며 가끔 가슴이 울컥하는 것을 느꼈는데, 아래 문장은 오랜 시간동안 기억에 남는다.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에서 파커J.파머가 ‘상대방에게 충고하기보다 그가 자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한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내가 어두운 터널에 있을 때, 난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 터널 밖에서 어서 나오라고 외치며 출구를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기꺼이 내 곁에 다가와 나와 함께 어둠속에 앉아 있어줄 사람. 샘, 상처를 입으면 널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가거라. 널 비난하지도, 섣불리 충고하지도 않는, 네 아픔을 함께해줄 사람 곁으로.”

저자는 오랜 세월동안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왔기 때문인지(전신마비이기에 대. 소변 가리는 것은 물론이고, 물건 집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뭔가를 하고 싶다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바라보라는 말을 자주 한다. 항상 포기할 수밖에 없었기에 더욱 절실했는지는 몰라도 그가 깨달은 삶의 방식은 ‘내려놓음’의 모습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하게 요구하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주목하는 것, 내 자신과 주위사람, 그리고 세상을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했으면 하는 방식으로 이끌거나 고치려 하기보다 현 상태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저자는 책 중간에서 큰 딸 알리 이야기를 하는데 이 부분은 슬프다 못해 가슴이 아려왔다. 나도 저자처럼 자식을 키우는 부모이고 아이를 바라보며 안타깝고 가슴 아플 때가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 식으로 표현하면 상처받은 아이를 끌어않지도, 위로의 말도 전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상황이다.

내용은 큰딸인 알리가 얼마 전에 사랑하는 개 모리스를 하늘나라로 보냈는데(9년 동안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것이 알리에게는 큰 충격이 되었다고 한다. (개 한 마리 죽은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당사자에게는 큰 충격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어머니를 봐도) 그 후 알리는 사람 만나는 것도 기피하고, 저자가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한번은 전화통화가 되어 그녀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하자 그녀는 지금은 괜찮다며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겠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저자는 그런 딸을 보며 울었다고 한다. 도와주고 싶어도 도울 수 없는 아버지의 마음(딸에게 도와주겠다고 해도 싫다고 하는 상황이니까 말이다), 뭐라고 한 마디 위로라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가슴이 아팠기 때문이다. 어쩌면 저자 스스로가 평소 아이들에게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더 가슴이 아팠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을 돕기보다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인생보다는 아이들의 감정과 권위를 존중해주자는 것이다. 아이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이미 알고 있다. 진정한 도움은 열린 손을 내미는 것이다. 아이들을 돕고 싶을 때는 먼저 이런 질문부터 해야 한다. ‘혹시 내가 필요하니?’ ‘내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우리의 무력감과 두려움 같은 감정을 미리 잘 다스려서 아이들에게 도리어 짐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먼저 요청하지 않는 한 절대 충고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는 아이의 인생이 있고,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있다. 아이들도 자신의 길을 걸어가며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기에 그들의 아픔을 줄어주겠다고 나서기보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때가 더 나을 수도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아플 때면 언제든지 손을 내밀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절대로 네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믿음을 주는 게 전부가 아닌가 싶다. 물론 이렇게 한다는 게 쉽지 않다. 특히 힘들어하는 아이를 그저 바라만 본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럴 것이고, 저자도 당연히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었다고 고백한다.

나도 가끔 내 아이를 바라보며, 학생들을 바라보며 뭔가 도와줘야 하는데, 뭔가 좋은 말을 해 줘야 하는데, 뭔가 경고를 해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들 때가 많다. 그들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렇게 하면 반드시 후회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저자 말대로 그들의 인생을 내가 대신할 수 없다면 그들의 회복력(상처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는 힘)을 믿고 바라봐주는 것도 그들을 사랑하는 방법이란 생각도 든다. 안타깝고 어렵지만 말이다.

몇 년 전 저자에게 한 아버지가 전화해 스물세 살 난 아들을 만나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대학도 자퇴하고 무슨 일이든지 꾸준히 하지 않아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아들과 면담을 진행하면서 아들의 문제가 자신보다 아버지로 인한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을 포기하고 아들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아버지, 즐거움보다는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아들은 고마움보다 삶에 대한 두려움을 강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저자는 아버지에게 전화해 이렇게 말했다. “(아들에게 도움이 되려면) 아주 간단하면서도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먼저 자신의 인생부터 돌보세요. 그것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아이들이 아버지의 인생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의미와 기쁨과 충족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저자는 책에서 ‘자아’나 ‘정체성’이란 말을 자주 한다.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자신을 안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세상과 소통하는 것을 가로막은 최대의 적일 수도 있다고 한다. ‘내’가 있기에, ‘나’란 존재를 한정짓고 있기에 세상의 많은 것들을 검열하게 되고, 그런 가운데에서 상대방과의 관계도 일정 선 이상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내 안에서 들리는 이런 말이다. ‘내가 왜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지?’ ‘이런 말은 내가 들을 필요가 없는 말인데...’ 또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지? 내가 바라는 게 이런 것이었나? 나라면 최소한 이 정도 대우는 받아야....’ 나를 비우기만 하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많은 이야기들이 이런 검열 속에서 차단된다.

책 내용 중에서 개의 모습을 우리의 행동과 비교한 구절이 있다. 개는 기쁘면 기쁘고, 배고프면 먹고, 배부르면 아무리 맛있는 게 눈앞에 있어도 먹지 않는다. 그들은, 물론 아프고 고통스럽고 싫은 것을 감지할 능력은 있지만, 누군가를 사랑한다면서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해도 되나? 혹시 나중에 고통 받는 것 아냐?’하며 딴 생각을 하거나, 먹을 것을 줬을 때 배가 부르더라도 ‘혹시 지금 먹지 않으면 나중에 굶는 것 아냐?’ 하는 의구심으로 꽉 찬 위장에 꺽꺽대고 밥을 쑤셔 넣지는 않는다. 그들은 사랑하면 사랑하는 것이고, 고마우면 고마운 것이지 그 이외 다른 생각을 하며 이중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로 현재,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게 살기 때문이다. ‘경청’하려면, ‘현재’에 살려면 우선적으로 ‘나’란 존재를 지워야 한다는 말,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는 항상 ‘나는 이래야 하고, 이런 생각과 저런 행동을 해야 하며, 나에게 알맞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내가 상대방에게 보여줘야 하는 태도는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 속에서 살아간다. 스스로 만든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한발 한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짐을 바라보며 주위사람과 세상을 원망한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졌다고, 왜 그들은 나에게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게 했을까 하면서 말이다. 내가 만들었다는 것도 잊은 채. 있는 그대로의 삶. 뭔가를 규정짓고 이래야만 한다는 고정관념만 털어내도 그만큼 삶이 가벼워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래에 있는 저자의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꼭 내가 생각하는 내가 되지 않아도 된다.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사랑스럽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를 괴롭혀 온 그 오랜 불안과 열등감과 서서히 자취를 감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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