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공존 - 하랄트 뮐러의 反 헌팅턴 구성
하랄트 뮐러 지음, 이영희 옮김 / 푸른숲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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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 나온지도 벌써 10년이 된 것 같다. 문명의 충돌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그 책을 사서 읽어보았다. 내가 고등학교나 대학교 1,2학년 때였던 것 같다. 벌써 꽤 오래전 일이라서 자세한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당시에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이 복잡한 세상을 나름대로 잘 쪼개 놓았구나...라는 생각과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들을 나름대로 설득력있게 제시한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물론 그때도 우리나라를 중국문명의 한귀퉁이에 넣어 한국의 독자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면서도 일본은 독자 문명으로 나누었던 것에 대해 반감과 함께 약간의 의구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랄트 뮐러의 ‘문명의 공존’을 읽게 된 것은 새뮤엘 헌팅턴의 ‘미국’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그의 문명의 충돌과 관련하여 책장에 오랫동안 처박혀 있던 ‘문명의 공존’에 눈이 갔기 때문이다.(문명의 충돌은 내 친구에게 빌려주었는데 그 친구는 책도 돌려주지 않고 지금 미국에서 유학중이다. 그 친구는 놀랍게도 헌팅턴의 사상과 맥이 통한다고 볼 수 있는 보수적인 연구소에서 공부하고 있다. 이런 우연의 일치가...) 각설하고 문명의 충돌에 대한 막연한 기억만 가지고 문명의 공존을 읽게 되었는데 문명의 공존은 그렇게 쉽게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명의 공존을 읽다보면 적어도 한가지는 분명해진다. 문명의 충돌이 경험적 사실에 반하는 오점 투성이의 이론이라는 것 말이다.


헌팅턴은 국제적인 사회, 문화, 정치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세계의 수많은 국가들을 대여섯개의 문명권으로 나눈다. 그리고 각 문명권에는 문명권을 이끄는 핵심국가가 존재하고 각 문명권은 근본적인 문명적 차이 때문에 서로 대립하고 충돌한다는 것이 그 주장의 핵심이다. 그렇지만 이는 하랄트 뮐러가 지적하듯이 지나치게 단순하여, 그래서 잘못된 결론으로 이끄는 사고의 틀이다.


단적인 예로 중국의 유교문명권에 포함되어 있다는 우리나라가 중국과 항상 함께 행동하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충돌을 일으킬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가? 물론 헌팅턴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듯한 증거들이 곳곳에 눈에 띄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9.11.테러 이후 헌팅턴의 주장이 더 힘을 받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헌팅턴의 주장에 부합하지 않는, 그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의 이론이 전혀 타당하지 않음을 가리키는 훨씬 더 많은 증거들이 있음을 이 책은 상세히 보여준다. 특히 표면적으로는 헌팅턴의 이론대로 문명의 충돌이 있는 듯한 지금의 사회현상도 한꺼풀만 역사적 배경을 벗겨보면 문제의 본질이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경우가 많음을 이 책을 통해 배울 수 있어 좋았다.(아프리카, 이슬람의 사례등)


문명의 충돌이나 문명의 공존이 나온 이후 세상이 점점 더 문명의 충돌에 나온 것처럼 변해가는 것 같아 씁슬한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명의 충돌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미국과 이슬람권과의 대립이 점점 격화되고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요즘의 상황을 보면, 세계의 지도자들이 헌팅턴의 잘못된 사고의 틀을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사태가 점점 악화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문명의 공존에서의 하랄트 뮐러의 충고가 더욱 값지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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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 서울대 이태진 교수의
이태진 지음 / 태학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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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서울대 이태진 교수가 동경대 학생들을 상대로 구한말, 그리고 대한제국 시대의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국권찬탈에 관하여 10여회에 걸쳐 강의한 내용을 그대로 편집한 것이다. 책의 본문도 강의하는 대화체 그대로 되어 있고, 각 강의 뒷부분에는 일본 학생들의 질문도 수록되어 있다. 이태진 교수가 이 강의를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은 구한말, 그리고 대한제국 당시 고종황제로 대표되는 우리나라의 황실이 자생적 근대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고, 그러한 노력이 상당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는 상황에서 일제의 방해와 압력으로 자생적 근대화의 길이 좌절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교수는 책의 뒷부분에서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합시키기에 이른 일련의 조약들이 위조와 강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국제법적으로 효력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일단 이 책을 통해 고종황제가 열강의 압력 속에서도 국권을 지키고자 몸부림쳤으며 우리 스스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루고자 했던 노력과 능력이 있었음을 안 것은 큰 성과라 하겠다. 고종이라고 하면 이 책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일제의 식민사관에 영향을 받은 바가 크겠지만, 구한말 나라를 빼앗긴 무능한 군주의 전형 쯤으로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새삼스럽게 식민교육, 나아가 교육을 통한 왜곡된 가치관 형성의 파괴력을 느낀다. 일본에 병합당한 사실만으로 과거 우리 역사 전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우리 민족은 당파성이 강하다느니, 서로 단결을 잘 못한다는 식의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관념이 모두 식민사관의 영향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강의내용을 그대로 책으로 펴낸 것이다 보니, 출간을 위한 책보다 논리적인 면이나, 독자에게 배경지식을 제공한다는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았던 것 같다. 동경대생들을 상대로 강의한 한국사라는 막연한 책 제목만 가지고 책을 보게 된 독자의 입장에서는 배경지식에 대한 설명없이 곧바로 이어지는 강의내용을 제대로 따라가기 어려운 점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짜투리 시간에 책을 읽다보니 집중을 제대로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책을 읽고 나서 머릿속에 기억이 나는 것이 별로 없는 느낌이랄까...물론 앞에서 말한 핵심은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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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방 전후 - 1940-1949
유종호 지음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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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지금은 70살이 넘은 노학자가 자신의 유소년기(대략 6살에서 15살까지)에 해당하는 해방전후기(1940년~1949년)의 기억을 복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36년간의 일제치하에 있다가 해방을 맞고, 해방이후에도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혼란했을 그 시절을 실제로 산 사람이 당시 소년의 눈으로 해방전후의 생활상을 복원한 것이다.


내가 뒤늦게 해방전후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우연히 읽었던 소위 ‘운동권적 성향’의 역사책을 통해 내가 이전에 알고 있던 막연한 역사적 지식과는 너무나도 다른 우리의 현대사를 접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방면에 더 관심을 가져 책을 몇권 읽다 보니 역사적인 fact는 하나인데 그것을 상반되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우도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격변기였던 해방전후의 시기는 더욱 그러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래서 실제 그 당시에 살았던 사람의 눈으로 당시 일어났던 일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한 책은 없을까하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하던 중에 신문지상에서 ‘나의 해방전후’를 접하고 읽게 된 것이다.


격변기를 실제로 겪은 사람의 객관적인 fact의 서술 -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기대한 것이었고, 이 책은 그 기대에 너무나도 딱 들어맞는 책이었다. 저자는 ‘들어가면서 - 기억의 복권을 위하여’라는 책의 서두에서 이 점에 관하여 무척 공감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람의 사고는 개인적인 경험의 틀을 벗어나기 어렵고 실제로 겪지 못한 과거의 일을 떠올리거나 이를 평가할 때 당시의 역사적 배경이나 생활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주위에서 주워들은 단편적인 생각만으로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책을 읽을 때 종종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일상적이고 당사자들은 별의미도 부여하지 않았을 행위가 예상치 못한 큰 역사적 파장을 불러일으키거나, 또는 그러한 파장조차 없이 단순히 후세 역사가들이 그러한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도 많지 않을까하는 생각말이다. 그래서 실제로 역사적 사건의 실제 상황을 포착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거시적 역사와 미시적 역사의 불일치하는 지점을 찾아보고 싶은 욕구랄까.


물론 이 책을 읽고 그 욕구를 모두 충족시킨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내가 기대한다고 생각했던 것에 충실했고, 다만 내가 객관적 사실의 진술보다 내가 보고자 했던 어떤 것 - 기술된 역사와 실제 사건이 달랐다는 진술 등 - 을 읽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책을 읽다보면 부모님을 통해 조금씩 들었던 당시의 생활상이 저자의 놀랍고도 성실한 기억의 복원작업을 통하여 많은 부분 재생된다. 그리고 저자는 정말로 객관적으로 당시의 생활을 그려내려고 노력하고 있고, 글 중간중간 드러나는 그의 삶이나 인생관을 통해 정말 그가 객관적으로 기억을 복원했으리라는 점에 대한 강한 신뢰가 생긴다. 복원된 기억 중 일부분은 동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활했었나 하고 쉽게 믿기지 않는 것도 있고, 불과 십수년 전에만 해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일도 있고, 지금도 남아 있는 일도 있다. 그것이 아마 시대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제 겨우 30대를 바라보고 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어린 시절을 추억해보는 것도 무척 의미가 있었다.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불완전한 기억이 더욱 흐려지기 전에 어린 시절을 조금씩 기록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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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 연대기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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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을 충동구매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대다수의 독자들이 그랬겠지만, 반지의 제왕에 버금가는 환타지 대작이라는 나니아 연대기가 영화로 출시된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우연히도 반지의 제왕이 영화로 출시되기 얼마 전 소설을 다 읽고 영화로 반지의 제왕을 접했을 때 느꼈던 감동을 또한번 느껴보고 싶었기에, 나는 알라딘을 검색하여 불과 며칠 차이로 할인쿠폰을 놓치고서도 3만원에 육박하는 육중한 무게의 - 혹자는 이 책을 들고 있으면 아령을 하는 기분이라거나 누워서 책을 읽다가 책을 놓치면 부상이 우려된다고도 하였다 - 이 책을 덜컥 구매하고 말았다.


사실 책을 구매하기 전에도 약간 미심쩍은 구석은 있었다. 똑같은 제목의 책이 7권으로 나누어져 동화책으로 출판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니아 연대기가 원래 동화책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영화개봉에 맞추어 출판사에서 이른바 ‘성인판’을 낸다고 했을 때는 막연히 어린이 동화책과는 무언가 좀 다르겠지 라는 기대가 조금은 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어보니 - 사실 책 자체가 그렇게 비난받을 것은 아니다. 원래 동화책이었으니까. 사실 다른 것을 기대한 내 잘못이고, 그런 심리를 알게 모르게 이용하여 똑같은 내용을 성인판이랍시고 웬만한 법서보다도 두꺼운 분량으로(사실 책이 그렇게 두꺼워진 것은 책의 가격을 높여보려는 출판사의 얄팍한 편집기술에 기인한 바가 크다) 출판한 출판사의 상술에 놀아난 것도 내 잘못이다. - 나니아 연대기는 영락없는 동화책이었다. 그것도 기독교적 세계관에 충실한, 거의 기독교 동화책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조금 흥분하여 서두를 시작한 것은 내가 허황된 정보와 기대를 가지고 책을 접했고, 동화책을 읽으면서 감동을 느낄만한 동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후자에 관해서는 나도 안타깝게 생각한다. 나니아 연대기 자체만 가지고 평가한다면 동화책으로서는 꽤 훌륭한 책인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곳곳에 교훈적이고 어린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만한 내용들이 동화에 잘 녹아들어 있다는 느낌도 받았고, 옷장속으로 나니아라는 전혀 다른 별개의 세계로 통할 수 있으며 그 안에 말을 하는 동물들과 요정과 난쟁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것 같다.


다만,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 책은 기본적으로 기독교적 세계관에 충실한 책이다. 적어도 이 책을 읽기 전에 그 점에 관해서는 독자들이 분명히 알고 있는 편이 좋으리라고 본다. 동심을 잃어버린 내 자신을 탓하며 내 아이가 이 책을 읽을 때까지 잘 간직해 두어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이가 읽기도 전에 책의 두께와 무게 때문에 질려버리지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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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6-03-24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기는 한데, 그 기독교적 색채는 별로...-_-;;;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은데..;

외로운 발바닥 2006-03-25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기독교적 색채가 강하다는 것을 에피소드 두개쯤 읽었을 때 알았지요. 아이들은 배경지식 없이 읽으면 그냥 환타지로 읽지 않을까 해서요 ^^;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
새뮤얼 헌팅턴 지음, 형선호 옮김 / 김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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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은 미국의 정체성, 즉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를 밝히면서 그에 관한 어떠한 도전이 있으며 미국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보다 미국에서 더 오랜 기간 생활한 사촌형이 나에게 선물로 준 것인데, 1년 넘게 책장에 내버려 두었다가 최근에 꺼내어 읽게 된 것이다.


새뮤얼 헌팅턴을 처음 접한 것은 그 유명한 ‘문명의 충돌’을 통해서인데,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으나, 전세계를 여러개의 문화권으로 나누고 그러한 문화권간의 충돌로 세계질서를 설명했던 것 같다. 헌팅턴은 일본은 중국과 별개의 독립된 문화권으로 분류하면서 우리나라는 중국 문화권에 포함시켰었는데 일본의 국력과 중화문화권에 속한다고 스스로도 생각해온 우리나라의 처지를 생각하면 이해못할 바는 아니지만, 당시 마음이 좀 상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문명의 충돌에 대한 비판서로 ‘문명의 공존’이라는 책이 나왔고(이 책도 갖고 있는데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다. 조만간 읽어보아야 겠다.) 자세한 내용은 알지도 못한 채 헌팅턴이 미국의 일방적인 시각에서 세계질서의 대립구도를 강조하는 보수적인, 어쩌면 매파적인 수준의 논객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던 것 같다. 그 후로부터는 헌팅턴의 책을 별로 접할 기회가 없었고, 또 별로 손이 가지도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을 우연히 읽고 나니 그가 보수적 논객이라는 사실은 어느정도 확인하였지만, 그를 단순히 미국의 일방주의적 시각을 강요하는 학자라고 보기는 힘들다는 생각도 들었다.


헌팅턴은 자신의 주장을 표면적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드러내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주장이나 통계적 조사결과와 함께 슬쩍 드러낼 뿐이다. 그렇지만, 그의 주장은 현상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유용한 도구개념들과 적절한 통계결과 - 통계조사의 결과와 방법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하더라도 - 를 통하여 상당히 설득력을 지닌다.


미국의 정체성 미국의 정체성으로 헌팅턴이 제시하고 있는 것은 그가 ‘미국의 신조’라고 불리우는 것 - 자유, 평등, 민주주의, 근로윤리, 시민권, 정의, 인권 등등 - 에 더해 앵글로-개신교도 문화이다. 사실 그는 신조만으로 국가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한다고 하는 점에서 앵글로-개신교도 문화, 특히 개신교를 포함한 기독교의 종교적 요소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미국의 신조’는 우리가 미국에 대하여 떠올리는 소위 긍정적 이미지들이다. 최근 표면적으로까지 노골적이 된 미국의 정책 때문에 - 전에는 적어도 겉으로는 아닌 척을 했다 - 미국의 신조에 냉소적인 웃음이 나오고 중국이 발행한 미국인권보고서를 보고 고소한 생각이 드는 것이지만, 적어도 미국이 ‘미국의 신조’ 위에서 건국된 국가이고, 지금도 그러한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사실이다.(미국 정부의 행동이 그와 일치하지 못하는 것은 현실적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미국의 신조’가 여전히 미국의 정체성에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또 그래야 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입장을 바꾸어 내가 미국인이라면, 특히 내가 WASP라면 헌팅턴의 주장처럼 앵글로-개신교 문화(특히 단일어로서의 영어)가 홍수처럼 밀려드는 이민자들에 의하여 흐려지는 것에 상당한 위협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민’ 자체가 미국의 정체성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미국과 단일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우리나라에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민이 폭주하여 이질적인 문화를 가지고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국민이 전체 인구의 20%를 넘는다면 토종 한국인들인 우리가 당연히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겠는가? 비록 헌팅턴이 인종주의적 편견을 드러내는 부분이 몇몇 있어 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다문화, 다인종, 다민족국가인 미국으로서는 앵글로-개신교도 문화, 특히 단일어로서의 영어,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는 것이 국민들의 힘을 모아 국력을 유지하는데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체성에 대한 도전 미국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으로 헌팅턴은 하부국가적 정체성의 강화(미국사회 내에 주류 미국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미국보다는 민족 등의 하부집단에 더욱 종속감을 느끼는 개인들이 늘어나는 것) 특히 미국사회의 급격한 히스패닉화, 엘리트들의 대중과 동떨어진 탈국가주의(헌팅턴은 엘리트들이 일반대중과 유리된 채 미국의 국익과 일치하지 않는 이상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데 부시가 재선된 것을 보면 적어도 일반대중과 진보적 엘리트들이 유리되었다는 그의 지적은 상당히 타당한 면이 있다.) 등을 들고 있다. WASP에 속하지 않는 미국인이라면 한인입양아들이 느끼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정체성 혼란을 느낄 것 같다. 그리하여 무수하게 다양한 문화와 민족이 뒤섞여 사는 미국에서 한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지표로서 ‘미국인’이 아닌 다른 요소를 우선시한다면 미국 입장에서는 국가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팍스아메리카나의 원동력이 되어온 이민과 문화적 다양성이 거대해진 제국의 분열의 씨앗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는 한편, 미국의 입장에서 불법이민의 규제, 영어교육의 강화 등 소위 보수적이라는 정책들을 시행할 필요성에 대해 제3자인 나도 어느 정도 공감을 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미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단일한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일고 있는 국사교과서와 학교교육에서의 편향성을 둘러싼 논쟁과 유사한 상황이 1970년대 무렵부터 미국에서 이미 국가주의와 다문화주의간에 존재해왔다는 사실이 흥미로웠고, 영어 문화권과는 거리가 먼 우리나라에서조차 영어공용화 논쟁이 있었는데 정작 본토인 미국에서 영어가 단일어로서의 지위를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기도 했다.


정체성의 회복 헌팅턴은 정체성 회복의 방안으로서 앵글로-개신교도 문화를 미국의 정체성의 핵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간접적으로 주장한다. 물론 어느 정도 공감한다. 하지만, 앵글로-개신교도 문화가 백인이라는 인종적인 색깔을 제거한다면 ‘미국의 신조’와 명백히 구분되는 개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책에 인용된 것처럼 미국인들이 국가에 대한 높은 자부심을 갖는 것이 민족이나 기독교 문화에 대한 일체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WASP만으로 미국사회를 이끌어갈 수 없는 이상, WASP가 아닌 미국인들에게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하여 국력을 통합하려면 미국정부가 소위 ‘미국의 신조’에 더욱 충실해야 되지 않을까. 민주주의, 자유와 평화 등의 깃발아래 미국정부가 국제적으로 행하는 수많은 테러와 학살 등의 잔혹행위에 대하여 헌팅턴 같은 학자나 그의 주장을 충실히 따르는 듯한 대다수 일반 대중이 침묵하는 한 미국의 신조를 통해 정체성을 형성하는 미국인은 많지 않을 것이고, ‘미국의 신조’가 없는 앵글로-개신교도 문화는 너무나도 공허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하여 미국에 대해서는 타자일 수밖에 없는, 그래서 일방적일 수밖에 없는 나의 시각을 조금이나마 넓힐 수 있었던 것 같다. 헌팅턴의 주장에 상당부분은 동의하지 않지만, 그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는 점 또한 인정한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미국의 지도자라면 어떻게 할까라고 종종 생각해 보았는데 그때마다 너무나도 상충적인 고려요소가 많아 머릿속이 곧 엉켜버리고 말았다. 그 정도로 미국은 책 몇 권 읽은 것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들고 어느 한 주장이 맞다고 주장하기 힘든 무척 복합적이고 다양한 사회라는 생각이 든다. WASP(앵글로 색슨계의 백인 개신교도)가 아닌 나의 사촌형(물론 사촌형은 미국시민권자이고 우리말도 잘 하지만 영어가 모국어에 더 가깝다)이 전체적으로 보면 WASP의 정체성을 되찾자는 이 책을 내게 선물로 준 역설적인 사실만 봐도 그렇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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