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만 읽고 달아오르는 일은 별로 흔치 않은데, 요즘 너무 많은 책들의 서문이 나에게 달려든다. 서문을 읽으면 안 읽고는 못배긴다. 서문에서 제시한 문제와 어떻게 풀어나가겠다는 지도가 쫙 펼쳐지면서 아주 진땀나는 트레일러를 본 것 같아서. 멍뭉이와 가벼운 마음으로 애견카페를 찾아 여유롭게 킨들을 펼쳤는데, 그만 한 손으로는 연신 장난감을 던져주며 한 손으로는 킨들을 붙잡고 순식간에 서문을 읽어버렸다. (킨들의 장점은 word wise 기능 덕분에 사전을 찾지 않고도 술술 읽힌다는 점. 현란한 광고창이 없으니 몰입형 독서에는 때로 아이패드보다 낫다. 물론 밑줄 쫙쫙 그어가며 적극적 인터랙션을 일으키는 PDF 독서에는 패드가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지만.)


저자의 말마따나 정신분석학, 신경과학 할 것 없이 인간의 의식 밑에 도도히 흐르는 어떤 강물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 최근 몇십 년 간, 특히 최근 몇년 간 부단히도 노력해왔다. 도대체 인간이 그런 행위를 하는 데는 무슨 동기가 있는가! 그걸 밝히느라 꿈을 분석하고, 트라우마에 접근하고, fMRI에 뇌를 집어넣고, 유전자를 분석하고 등등. 


Psychiatrists and neuroscientists have long debated how best to plumb the deep waters of human motivation. Whatever the method, the objective is clear: to discover the feelings, motives and beliefs that lurk below the mental ‘surface’ of conscious awareness - to chart, in short, our hidden depths.


하지만 ‘hidden depth’ 따위는 없다고 일찌감치 단언한다.


우리는 문학작품을 읽으면 어떤 캐릭터에 대한 해석을 가공해내듯 우리 경험 속에서우리 자신과 타인에 대한 해석을 지어낼 뿐이다. 

We invent interpretations of ourselves and other people in the flow of experience, just as we conjure up interpretations of fictional characters from a flow of written text.


삶을 살아간다는 건 소설의 전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우리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건 자기성찰의 능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게 되는데, 저자는 성찰이란 이해(perception)의 과정이 아니라 이야기를 고안(invention)해내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내적 세계란 신기루에 지나지 않다고.

The very idea of ‘looking’ into our own minds embodies the mistake: we talk as if we have a faculty of introspection, to scrutinize the contents of our inner world, just as we have faculties of perception, to inform us about the external world. But introspection is a process not of perception but of invention: the real-gime generation of interpretations and explanations to make sense of our own words and actions. 


The inner world is a mirage.


The truth is not the the depths are empty, or even shallow, but that the surface is all there is.

많은 종교 또는 철학에서 인간의 의식 단계를 규정한다. 즉자적인 상태에서 의식이 고양될수록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설파하는데. 이건 뭐 그냥 그런 거 따위는 없다고 대놓고 부정해버리니 누군가 잔뜩 쌓아올린 탑을 와르르 부수며 ‘이번 판은 나가리’하고 외치는 격이랄까.


믿음, 동기 이런 것들은 상상력의 산물이자 우리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꾸며낸 거짓말이라는 얘기다. 마치 소설 속의 등장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그러는 것처럼.


Our mind is continually interpreting, justifying and making sense of our own behaviour, just as we make sense of the behaviour of the people around us, or characters in fiction.


하지만 우리 뇌는 나름의 일관성을 갖고 이야기를 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전의 생각이나 행동하고도 얼라인이 맞아야 스스로 붕괴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우리 마음의 비밀은 hidden depth가 아니라 과거에 맞게 우리의 현재를 창의적으로 그려내는 능력에 있다는 것. 


So the secret of our minds lies not in supposed hidden depths, but in our remarkable ability to creatively improvise our present, on the theme of our past.


그리고 다시 한 번 벼른다.

We’ll find that almost everything we think we know about our minds is false.


상식적인 이야기는 고쳐 쓰는 게 아니라 버리는 게 상책이라나?

The common-sense story needs to be abandoned, not patched up.



우리 뇌는 소설을 쓰는 것처럼, 어떤 세계를 전적으로 창조하기 보다는 한 문장 한 문장 개연성 있는 문장들을 이어붙이면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이으면서, 그 순간의 의식적인 해석을 창조해내는 엔진이라는 거다.

Our brain is an engine that creates momentary conscious interpretations not by drawing on hidden inner depths, but by linking the present with the past, just as writing a novel involves linking its sentences together coherently, rather than creating an entire world.


이름하야 extension of perception!!


몇 년 전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라는 호기심 당기는 제목에 이끌려 샀다가 고만고만한 이야기에 책을 덮었던 것과는 좀 다를 것 같은 느낌이 확.


하지만 내 책상에는 <산스끄리뜨 금강경 역해>가 딱 노려보고 있는데!


Our freedom consists not in the ability magically to transform ourselves in a single jump, but to reshape our thoughts and behaviours, one step at a time: our current thoughts and actions are continually, if slowly, reprograming our minds.

매순간 우리는 우리 생각을 다시 프로그래밍하는 거라고. 여기서 실존주의 철학과 만난다.


I have now, somewhat reluctantly, come to the conclusion that almost everything we think we know about our own minds is a hoax, played on us by our own brains. We will see later how the hoax is done, and why it is so compelling.

다소 스포일러 같지만 그렇게 하실 거라고.


This requires a systematic rethink of large parts of psychology, neuroscience and the social sciences, but it also requires a radical shake-up of how each of us thinks about ourselves and those around us.

새로운 시각, 낯선 접근, shake-up은 늘 반갑지만 제발 허세로 끝나지 않길 바래본다.




뇌과학, 마음, 철학, 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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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erm “female” is pejorative not because it roots woman in nature but because it confines her in her sex, and if this sex, even in an innocent animal, seems despicable and an enemy to man, it is obviously because of the disquieting hostility woman triggers in him. 

Nevertheless, the wants to find a justification in biology for this feeling. The word “female” evokes a saraband of images.

남자들이 여성들에 대해 갖는 불안함 감정. 그리고 “여자 암컷”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경멸적인 어조. 남자들이 시도하는 생물학적 정당화. 


Man projects all females at once onto woman. And the fact is that she is a female. But if one wants to stop thinking in commonplaces, two questions arise.

- What does the female represent in the animal kingdom?

- What unique kind of female is realized in woman?


생물학이 여성에 대한 취한 관점을 탐구하는 첫 번째 장에서 보부아르가 제기한 문제는 다음과 같다.

- 동물의 왕국에서 암컷의 위치는 어떠한가?

- 여성에게서 드러나는 인간 암컷의 특징은 무엇인가? 



Males and females are two types of individuals who are differentiated within one species for the purposes of reproduction; they can be defined only correlatively. But it has to be pointed out first that the very meaning of division of the species into two sexes in not clear.

‘양성 평등’이란 단어를 반대하는 이유. 자연계에 그리고 인간계에 양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양성의 구분이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Opinions about the respective roles of the two sexes have varied greatly; they were initially devoid of any scientific basis and only reflected social myths. It was thought for a long time, and is still thought in some primitive societies based on matrilineal filiation, that the father has no part in the child’s conception: ancestral larvae were supposed to infiltrate the womb in the form of living germs. With the advent of patriarchy, the male resolutely claimed his posterity.

남성성에 대한 우위의 신화는 기독교가 전파한 선민사상과 참으로 맞닿아있다. 그들은 (그들이 만든 신으로부터) 약자 위에 군림하며 마음껏 부려도 좋다는 권한을 받는다. 남성들은 온갖 헛소리를 동원하여 여성성이 열등하다는 의식을 퍼뜨려왔다.


모계 사회의 신화들은 그렇게 약자 위에 군림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데. 나와 계약 맺은 신이 나 이외의 이방인들을 섬멸하고, 내 발 아래 두는 것을 용인하신 덕분에 그들은 그들의 살육과 전쟁을 늘 정당화해왔다.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질문.

남성들이 세상의 절반을 착취하는 구조는 어떻게 그렇게 오래 지속될 수 있었을까. ‘공모’는 어떤 기제로 작동했던 걸까? (아, 저 기제를 밝히는 나머지 페이지들 너무 읽고 싶은데 이런 거북이 걸음으로 과연 결승선을 통과할 수 있을지. ㅋㅋㅋ)


아리스토텔레스의 적통을 이어받은 헤겔은 제멋대로 지껄인다.

Hegel thought the two sexes must be different: one is active and the other passive, and it goes without saying that passivity will be the female’s lot. “Because of this differentiation, man is thus the active principle while woman is the passive principle because she resides in her non-developed unity.”


사회 초년병 시절 헤겔의 사상을 이어받은 회사 사장은 헤겔의 논리를 시도때도 없이 지껄였다. 금쪽 같은 자기 아들래미와 뭔가 늘 마땅치 않은 딸래미를 비교하며. 자신의 거지같은 성고정관념이 마치 지고지순한 철학인양, 진리인양, 깨달음인양 떠드는 걸 인내심을 갖고 들어주는 게 너무도 역겨웠다. 


헤겔 시대의 여성들은 저런 거지 같은 이야기를 평생 듣고 또 듣고 지겹게 듣고 신물나게 듣고 살았겠지. 그 와중에도 이런 글을 쓰는 여성들이 나왔다는 게 감격스럽고 고마운 따름이다. 


One of the essential features of man’s destiny is that the movement of his temporal life creates behind and ahead of him the infinity of the past and the future. The perpetuation of the species appears thus as the correlative of individual limitation, so the phenomenon of reproduction can be considered as ontologically grounded. But this is where one must stop.

“인간 운명의 본질적 특성 가운데 하나는 그 순간적인 삶의 운동이 전후에 무한한 과거와 미래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의 영속은 개인적 한계와 상관적인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번식 현상을 존재론적 으로 근거가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The perpetuation of the species does not entail sexual differentiation. 

종의 영속이 성적 분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단성 생식, 양성구유로 구성된 사회를 상상할 수 있다. 


Without coming to any conclusion about life and consciousness, we can affirm that any living fact indicates transcendence, and that a project is in the making in every function: these descriptions do not suggest more than this. 

이 말이 중요한데, 정확히 이해가 안된다. ‘계획된 것이 모든 기능에 작동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번역서에는 ‘모든 활동 속에는 계획이란 것이 내포되어 있다’는 걸로 해석했다. 모든 유전자의 활동이 기능 속에 내포되어 작동한다? 대충 이렇게 이해해야 할 듯. Project를 계획된 플랜이라고 이해하는 데에서 의미가 좀 꼬이는 것 같은데, project를 오히려 현상이라고 이해하면 좀 더 의미에 가깝지 않나 추측해 본다. 유전자가 다 뭐 계획이 있으시다고 보는 건 넘 기계론적 사고 아닌가?



생식세포의 어느 쪽도 우월하지 않음에도 생식세포의 결합을 비유하는 망상에 빠져 여성성과 남성성을 규정지었던 중세 낡은 철학의 잔재 그리고 낡은 비유에 기초한 유희. 성적 구분이 가장 확연한 종들에서조차 수컷인 동시에 암컷인 개체들이 있고, 동물과 인간에게서도 간성의 경우가 발견되는데도 말이다. 


교미 후 수컷을 잡아먹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 사마귀를 ‘양성 투쟁’의 상징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아주 드문 경우이자 일어날 경우는 알을 낳고 종을 영속시킬 힘을 갖기 위해서. 암수를 둘 다 집어삼키는 것은 ‘종’이다. 


어류의 경우 어미는 난자를 배출하고 아비는 정자를 배출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역할은 같다. 무정란 혹은 수정란을 배출하는 어류와 조류는 포유류 암컷만큼이나 새끼들의 포로가 되지 않는다. 


오직 고등원숭이와 여자에게서만 매달 고통과 출혈이 행해진다. 


In periods when she escapes the servitude of maternity, she can sometimes be the male’s equal: the mare is as quick as the stallion, the female hound has as keen a nose as the male, female monkeys show as much intelligence as males when tested. But this individuality is hot asserted: the female abdicates it for the benefit of the species that demands this abdication.

암컷은 포기를 요구하는 종을 위해 자신을 포기한다. 


From puberty to menopause she is the principal site of a story that takes place in her and does not concern her personally. Anglo-Saxons call menstruation “the curse,” and it is true that there is no individual finality in the menstrual cycle. 



The woman is more adapted to the egg’s needs than to herself.

Woman is her body as man is his, but her body is something other than her.


느닷없이 격렬한 생리통에 양호실, 응급실, 급기야 화장실에서 기절에 가까운 상태로 옴쭉달싹 못했던 경험들이 떠오른다. 싸늘한 배를 감싸쥐고 울면서 양호선생님께 물었던 기억이 있다. 왜 이렇게 아파야 하느냐고. 그때는 내가 아이도 낳지 않고 폐경을 얼마 안남길 때까지 생리를 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어렴풋이 아이와 나는 상관없을 것 같은 느낌만 받았을 뿐. 


보부아르는 폐경에 들어선 여성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Woman escapes from the grip of the species by one more difficult crisis; between forty-five and fifty, the phenomena of menopause, the opposite of those of puberty, occur.


So woman finds herself freed from the servitudes of the female; she is no loner prey to powers that submerge her: she is consistent with herself.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순간. 몸의 굴레, 암컷이라는 몸의 구속상태에서 해방되는 그 순간이 기다려진다. 


These biological data are of extreme importance: they play an all important role and rare an essential element of woman’s situation. 

Because the body is the instrument of our hold on the world, the world appears different to us depending on how it is grasped, which explains why we have studied these data so deeply: they are one of the keys that enables us to understand woman. 

But we refuse the idea that they form a fixed destiny for her. They do not suffice to constitute the basis for a sexual hierarchy; they do not explain why woman is the Other; they do not condemn her forever to this subjugated role.


여성의 몸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래서 중요한 것 같다. 하지만 생물학적 ‘조건’이 남녀의 위계를 규정하는 것은 충분한 설명이라고 보지 않는다. 여자가 왜 ‘타자’인지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



As Merleau-Ponty rightly said, man is not a natural species: he is a historical idea. Woman is not a fixed reality but a becoming; she has to be compared with man in her becoming; that is, her possibilities have to be defined. He(She) valorize himself(herself) in the name of certain values.

이항대립을 통해 존재가 규정된다는 것.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형성되는 과정으로서.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 관습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부여하면서. (인칭대명사가 he이던 시절에 쓰여진 글이기 때문에 괄호 속 she, herself를 추가했다.) 


A society is not a species: the species realizes itself as existence in a society.

생물학적 잔지식으로 하나의 성이 다른 성을 예속시킬 수 없다는 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이 장은 그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지 않다고 천연덕스럽게 지껄이는 사람들을 향해 할애된 듯하다.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성,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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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10-10 2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리스토텔레스가 BC시대 사람인데 이 사람의 여성에 관한 규정이 17세기(?) 정도까지 지배했다는 글을 읽고 왜곡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두터운지 실감할 수 있었던것 같아요!ㅠ.ㅠ...질문의 해답을 찾는 그때까지 화이팅 하시죠!ㅎ

나뭇잎처럼 2021-10-11 09:21   좋아요 1 | URL
지금도 멀쩡한 사람이 생물학적 조건 운운하며 신의 섭리 운운하며 여성이라는 숙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 가만가만 이야기하는 거 듣고 있으면 이게 지금 내가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 건지 헷갈릴 때가 종종 많아요. 꼬리치며 달려드는 정자와 움직임이 둔한 난자의 비유를 가지고 여성과 남성을 은유하고 있다는 건 너무 일차원적이지 않나? 그런 걸 보부아르가 콕 찝어 날려줘서 넘 통쾌했어요. 질문을 꼭 쥐고 책을 읽게 해주는 저자의 능력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정말 완주해보려고요. ^^ 응원해주셔서 감사해요!

단발머리 2021-10-11 0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뭇잎처럼 글 읽기만 해도 정리되는 느낌이 드네요. 저도 오늘은 부지런히 읽으려고요 ㅎㅎㅎ (여기에서 결심하고 갑니다)

나뭇잎처럼 2021-10-11 09:24   좋아요 1 | URL
정리하려고 쓰는 거니까요 ㅎㅎ 주옥 같은 문장들이 넘 많은데 책장 덮으면 하나도 생각 안나잖아요? 머 그런 망각도 독서의 일부다, 라고 생각하지만... 망각을 뚫고 내 안에 남는 것들이 진짜다, 라고 변명도 해보지만... 그러기에 아까운 책이었어요. 한 줄 한 줄 다 새겨보려고요. 이렇게 응원해주시니 오늘도 어디 도망 못가고 책상 앞에 딱 붙어 다음 챕터 다 읽어야겠네요. (이거시 함께 읽는 힘?! ㅎㅎㅎ)

다락방 2021-10-11 1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또다시 역시 영어로 된 책을 사는 게 답이다, 라는 엉뚱한 결론을 받아가지고 갑니다. 단발머리님과 나뭇잎처럼 님 댓글 보니 저도 오늘 마음 먹고 좀 읽어야겠어요. 영어본과 같이 읽고 정리해주셔서 너무 좋고 감사해요!!

나뭇잎처럼 2021-10-11 15:38   좋아요 1 | URL
이게 다 다락방님 덕분 아니겠어요? 이렇게 함께 읽는 위력을 널리 알려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ㅎㅎ 한 줄 한 줄 읽다보면 마지막 장을 덮을 날이 정녕 오겠죠? 그쵸? 그런거죠? ;;; (다음책들도 넘나 탐나던데.. 언제쯤 시작할 수 있으려나..ㅎㅎ)
 

'나에게 여자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시몬 드 보부아르는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했다. 

사적 고백록으로 그칠 수 있었던 질문을 보편적 여성 조건을 탐구하는 것으로 전환시켰던 질문. 

집필 당시 그는 심지어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다고 한다. 

여성 문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며 그의 의식이 깨어난 것. 


What is femininity?

오랫동안 이 문제에 천착해왔다. 과연 여성성이란 무엇인가?

여성성은 존재하는가? 여성성은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The female is female by virtue of a certain lack of qualities. We should regard women’s nature as suffering from natural defectiveness.” Aristotle said. 


아리스토텔레스의 얼척없는 이 말은 아마 길이 회자될 인간 의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가 아닌가 싶다.


He grasps his body as a direct and normal link with the world that he believes he apprehends in all objectivity, whereas he considers woman’s body an obstacle, a prison, burdened by everything that particularizes it. 


인간의 의식은 발달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1938년까지 프랑스 여성은 법적으로 신분증과 여권을 소지할 수 없었고, 1944년에 참정권이 허용되었으며, 1975년까지 낙태죄는 사형에 처했다.) 여성이라는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에 들지 않았던 존재가 아리스토텔레스 시절에는 “어떤 자질의 결여”로 생긴 존재이자 “자연적 결함 때문에 고통받는 것이” 여자들의 본질이라는 관점은 심장을 덥게 만든다. 


70년대 이후에나 여성이 법적으로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받게 되었으니 2021년 현재 우리가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해 끝나지 않는 논쟁을 이어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 백 년이 흐른 후 지금의 논쟁을 들여다본다면 마치 백 년 전 여성의 참정권을 두고 설전을 벌이던 때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심정이 들겠지?


중요한 건, 나 자신 또한 여성을 바라볼 때 뭔가 불완전한 존재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어딘가에 고립된 채 문제를 해결하는 여자들이나 격한 신체 운동을 하는 여성들을 보면 생리나 생리통을 떠올린다거나, 내가 어떤 판단을 하거나 결정을 내릴 때 후견인 같은 남자들의 권위와 식견을 보이지 않게 의지한다는 것. 


스스로 독립적인 주체로 생각하지 못하고 좀 더 완전한 존재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보이지 않는 관성은 나 또한 시대와 문화, 관습과 습관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미국 여자들의 경직되고 도전적인 태도는 그녀들이 여성성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했는데, 나는 거기게 덧붙여 여성성이 무엇인지, 여성성을 자신있게 입어도 되는 것인지 혼란스런 상태에서 취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태도가 아닌가 한다. 나 스스로가 여성성에 얽매이기 싫어 반대편으로 질주했던 경험을 돌이켜보면. 여성성에 사로잡혔다기 보다는 여성성을 온전히 들여다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가깝지 않을까. 


Why do women not contest male sovereignty?

In order for the Other not to turn tinto the One, the Other has to submit to this foreign point of view. Where does this submission in woman come from? There are as many women as men on the earth.


소수가 아닌, 인류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이 왜 그토록 오랫동안 남자의 관점에 복종했던 것일까? 좋건 싫건 상호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관계에서 여자들은 왜 그토록 오랫동안 타자화되었던 것일까?


Even when her rights are recognized abstractly, long-standing habit keeps them from being concretely manifested in customs.


개념적으로 여성이 남성과 동일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실제 남녀관계나 가족관계, 직장에서 남녀 임금격차, 그리고 내재화된 관습적 사고는 lag time이 걸린다. 머리에서 몸으로 가는 데 걸리는 시간. 

무엇보다 재생산, 아이의 교육에 남성적 사고가 절대적으로 작용함으로써 남성 중심의 사회는 굳건하게 유지된다. 


The present incorporates the past, and in the past all history was made by males.


현재는 과거의 그늘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과거는 모두 남자들에 의해 씌여졌다. 


Refusing to be the Other, refusing complicity with man, would mean renouncing all the advantages an alliance with the superior caste confers on them.


여성이 억압자와 공모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에서 출발하면 자연스럽게 이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타자화되는 것을 거부하는 건 그 공모에서 얻는 이익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 


Lord-man will materially protect liege-woman and will be in charge of justifying her existence: along with the economic risk, she eludes the metaphysical risk of a freedom that must invent its goals without help.


억압자에게 종속됨으로써 독립적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자유로움을 잃게 된다.


“Blessed be the Lord our God, and the Lord of all worlds that has not made me a woman,” Jews say in their morning prayers; meanwhile, their wives resignedly murmur: “Blessed be the Lord for creating me according to his will.”

아침마다 유대인들이 드리는 기도. 이 무슨 엿같은 일상화가 있는가?


Among the blessings Plato thanked the gods for was, first, being born free and not a slave and, second, a man and not a woman.

플라톤은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어서, 여자가 아닌 남자여서 신께 감사했다.


Males could not have enjoyed this privilege so fully had they not considered it as founded in the absolute and in eternity.

They sought to make the fact of their supremacy a right.

남자들의 착각, 여성들의 공모로 이루어진 고착화. 



Lawmakers, priests, philosophers, writers, and scholars have gone to great lengths to prove that women’s subordinate condition was willed in heaven and profitable on earth.

Those who made and compiled the laws, being men, favored their own sex, and the jurisconsults have turned the laws into principles.



Yes, women in general are today inferior to men; that is, their situation provides them with fewer possibilities: the question is whether this state of affairs must be perpetuated.

종교, 철학, 신학, 생물학,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을 통해 남성들은 여성들의 열등함을 증명하려고 노력해왔다. 실제로 지금 여성들은 열악하다. 열악한 기회에 놓여있다. 그들은 남성과 똑같이 일하고 임금을 적게 받고, 자신들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도 한다. 여성들은 더 많은 기회를 차단당하고 그것을 감수한다. 과연 지금의 상태는 계속되어야 하는가?





여성, 시몬 드 보부아르,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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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0-04 2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나뭇잎처럼 님의 이 글 읽고 영어본 사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저도 영어본 살래요! 글도 잘 읽었지만 무엇보다 영어본에 대한 뽐뿌 감사합니다. 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앞으로 계속 펼쳐질 나뭇잎처럼 님의 글이 너무나 기대되네요! >.<

공쟝쟝 2021-10-04 21:12   좋아요 1 | URL
저두 같이 기대하며 영어에서 입딱 벌리기 ㅋㅋㅋ 😫 우리들 너무 똑똑한거야 😩

나뭇잎처럼 2021-10-04 22:01   좋아요 0 | URL
너무 벅찬 기분으로 휘갈겨 쓰는 바람에 오타가 작열이네요. 영어본 + 오더블 오디오북.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영어문장을 낭독하면 시몬 드 보부아르가 빙의한 느낌이 들어요. ㅎㅎㅎ 같이 가요. 그 길 ㅎㅎㅎ

단발머리 2021-10-06 1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은 페이퍼 잘 읽고 갑니다.
이번달에 여러분들이랑 같이 읽으니 정말 각별한 마음이 드네요. 나뭇잎처럼님의 다음 글도 기대할께요.

나뭇잎처럼 2021-10-08 17:09   좋아요 0 | URL
저두 좋은 글 감사합니다. ^^ 같이 읽는 건 처음인데 왠지 더 의지가 솟는 기분입니다. 요런 재미가 있네요. 한 번 지대로 읽어볼라구요. ㅎㅎ 으쌰!
 

서문을 읽다가 전율이 오는 경우는 

최근 나오미 클레인의 <자본주의는 어떻게 재난을 먹고 괴물이 되는가> 이후에 처음이다.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영어로 된 한 문장을 읽고 감전된 것처럼 무릎을 치다가,

의미가 좀 모호할 때는 번역된 문장을 보고,

번역된 문장으로 몇 줄 읽다가 다시 영어로 된 문장을 찾아보고,

한 단락이나 한 페이지가 끝날 즈음에는 

다시 오더블(audible)을 켜고 기개 넘치는 내레이터와 입을 맞춰

큰 소리로 낭독을 한다.


문장 하나에 소환된 나의 옛 기억들은

다시 또 다른 글쓰기의 소재로 공책 한 바닥을 메우고,

스크리브너(Scrivener) 도큐먼트에 쌓이고,

오늘 아침 골목길에서 광속으로 질주하며

길을 건너는 내게 쌍욕을 퍼부은 낯선 남자에 대한 단상에 주석을 추가한다.


끝을 내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나의 역사, 나의 경험을 온전히 들여다보는 것이야말로

이 책을 통해 내가 가닿을 지점인 것 같다.


옮긴이 이정순은 보부아르가 ‘나에게 여자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사적 고백록’에 그치지 않고 보편적 ‘여성 조건’의 연구하는 것으로 전환된 것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그녀의 엄청난 노작에 감사하면서도

보부아르의 사적 고백도 이 정도의 깊이라면 문학사에 길이 남을 역작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보부아르는 말한다. 어떤 편견 없이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건 불가능하다고.

그래서 자신이 택한 관점을 먼저 밝힌다. 실존주의 윤리관.

이를 통해 여자라는 사실이 우리의 삶의 어떤 면에 영향을 미쳤는지, 어떤 가능성이 부여되었고, 어떤 가능성이 거부되었는지, 우리 다음 세대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고 우리는 어떤 방향을 가리켜야 하는지.


How will the fact of being women have affected our lives? What precise opportunities have been given us, and which ones have been denied? What destiny awaits our younger sisters, and in which direction should we point them? But it is no doubt impossible to approach any human problem without partiality.


The perspective we have adopted is one of existentialist morality.

Every subject posits itself as a transcendence concretely, through projects; it accomplishes its freedom only by perpetual surpassing toward other freedoms; there is no other justification for present existence than its expansion toward an indefinitely open future.


Every time transcendence lapses into immanence, there is degradation of existence into “in-itself,” of freedom into facticity; this fall is a moral fault if the subject consents to it; if this fall is inflicted on the subject, it takes the form of frustration and oppression; in both cases it is an absolute evil. Every individual concerned with justifying his existence experience his existence as an indefinite need to transcend himself.


Woman’s drama lies in this conflict between the fundamental claim of every subject, which always posit itself as essential, and the demands of a situation that constitutes her as inessential.


그간 남성들이 쓴 과거에 기반해 여성들이 열등하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 온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유대인이나 흑인처럼 소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이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착취 당했는지, 

어떻게 그런 ‘공모’가 가능했는지 남은 900여 페이지에서 밝힐 것이다.


그녀는 하나의 질문에서 출발했다.

What is a woman?


그리고 다음과 같이 질문을 쪼갰다.

How, in the feminine condition, can a human being accomplish herself? 

What path are open to her? Which ones lead to dead ends? 

How can she find independence within dependence? 

What circumstances limit women’s freedom and can she overcome them?


위대한 질문은 위대한 여정을 출발시킨다. 

얼마나 걸릴지 모를 출항을 시작한다.



여성, 시몬 드 보부아르, 페미니스트,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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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10-04 2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항해가 될 것입니다. 즐기소서!

나뭇잎처럼 2021-10-04 20:52   좋아요 1 | URL
멋진 항해에 즐거운 벗이 되어 주시길 ^^ 공쟝쟝님 리뷰 읽고 벌써 반했지만요. ㅎㅎ

다락방 2021-10-04 2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영어본과 함께 하시는군요!!! >.<

막시무스 2021-10-04 2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출발부터 파도가 만만치 않은것 같지만 끝까지 함께 완독하시죠!ㅎ 응원할께요!ㅎ

나뭇잎처럼 2021-10-04 22:0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느낌이 드니까 좀 힘이 납니다. 다 다락방님 덕분이죠 ㅎㅎ 저도 막시무스님 응원할게요. 서문에서부터 뭔가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죠? 막시무스님 글에서 딱 느꼈어요. 그거, 바로 그거! 하면서요. ㅎㅎㅎ

막시무스 2021-10-04 22:07   좋아요 0 | URL
한글로 한번, 영어로 한번! 두번이나 맞았죠!ㅎ
 
초판본 프랑켄슈타인 - 1818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메리 셸리 지음, 구자언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자신을 낳다가 죽은 엄마,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버린 사람의 자살, 그리고 자신이 낳은 아이들이 차례로 죽어나가는 걸 보며, 메리 셸리는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창조해냈다. 프랑켄슈타인.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창조한 이로부터 버림 받았으며, 혐오로 인해 악마가 되고, 창조자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차례로 희생시킨다. 마지막 소원이었던 자신의 동반자마저 완성 전에 잃고 나서는 창조자에 대한 복수로 불타오르나 결국 창조자의 죽음 앞에서 가장 커다란 슬픔을 맞닥뜨린다.


북극을 탐험하는 왈튼 선장이 빅터 프랑켄슈타인으로부터 기이한 이야기를 들으며 누이에게 전하는 편지, 빅터가 창조한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그의 독백, 다시 왈튼의 편지로 이어지는 상자 속의 상자 이야기. 아마 레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에서 메리 셸리를 알지 못했다면 머리에 이상한 나사를 꼽고 퀭한 눈으로 어기적 걸어다니는 프랑켄슈타인을 읽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릇 고전은 뭔가 의도치 않게 넉넉한 시간이 확보되었을 때(언젠가 복사뼈가 부러져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을 때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악령> 총 6권을 완독했더랬지)나 읽는 것이 아니었던가. 열여덟 살에 쓰기 시작해 스무 살이 안되었을 때 완성한 소설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유명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딸이라는 사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남편이 죽고 자신이 낳은 아이들이 하나만 남고 모두 죽은 메리 셸리라는 인물에 이끌려 <프랑켄슈타인>은 읽기도 전에 내 안에 강력하게 자리잡았다.


자신이 태어나면서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은 자신을 바라보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더구나 그 엄마가 <여성의 권리옹호>라는 글을 쓴 진보적 지식인이자 페미니스트였다면. 그리고 그런 엄마와 달리 역시나 진보적 지식인이었던 아빠 윌리엄 고드윈이 새로 결혼한 여자가 자신을 핍박하는 여자라면. 아버지에 서재에 드나들던 제자와 사랑에 빠졌을 때 아버지로부터 의절을 당하고, 결혼을 앞두고서는 그의 전처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첫딸이 2주도 안 되어 죽고, 이후로 낳은 아이들이 차례로 죽어나간다면. 여자가 글을 쓰는 것은 금지되어있고, 설령 쓴다해도 조롱과 비난이 가득한 시대에 그가 살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괴물을 창조해내는 일이 아니었을까. 


프랑켄슈타인은 사지를 이어붙여 흉측하게 태어났다. 프랑켄슈타인을 창조한 빅터는 창조하자마자 그에 대한 혐오로 가득하다. 프랑켄슈타인은 그런 혐오를 먹고 자라며 악마가 된다. 우연히 만난 선한 가족에게 친밀감을 느껴 그들을 위해 남몰래 도움을 주며 그들과 관계 맺기를 원하지만 그의 모습을 본 그들은 혐오에 치를 떨며 그를 때리고 그곳을 떠난다. 


“치명적인 편견이 그들의 눈을 가려 인정 많고 착한 천국의 모습 대신 혐오스러운 괴물의 모습을 볼 뿐입니다.”


우리가 괴물을 괴물로 바라보는 건 결국 우리의 눈이다. 아름다움이 보는 이의 눈에 달려있듯이(Beauty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 괴물이 되도록 만드는 먹이는 지극한 혐오. 자신을 혐오하는 이는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혐오할 수밖에 없다. 혐오는 혐오를 낳고, 키우고, 자라게 만든다. 혐오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방법은? 프랑켄슈타인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그것만이 모든 비극을 마무리할 수 있는 처사라고 여긴 것이다. 


처음 이 소설이 나왔을 때나, 지금이나 이 책에 대해서 여전히 많은 해석이 분분하다고 한다. 과연 프랑켄슈타인을 어떻게 읽을지는 각자의 눈에 달려있는 일이겠지만. 나는 자신을 프랑켄슈타인이라고 여긴 한 창조자의 비극적 심상에 연민이 들었다. 종종 내 안의 괴물을 바라보면서 측은함과 안도감,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맛보듯이. 괴물이 더 자라지 않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괴물의 성난 갈기를 가만히 쓸어주는 것, 괴물에게 먹이를 주는 혐오를 거두고 괴물이 괴물이 된 사연에 깊이 공감하고 위안하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 이외의 방법을 알지 못한다. 


메리 셸리 못지 않게 극적인 삶을 살았던 그녀의 엄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독자가 읽고 나서 저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책”이라고 극찬하며 실제 메리의 엄마와 사랑에 빠지고 메리의 아버지가 된 고드윈. 고드윈이 작가와 사랑에 빠지게 만든 책이 바로 <Letters Written During a Short Residence in Sweden, Norway, and Denmark>. 프랑켄슈타인을 쫓던 빅터가 왈터 선장에게 발견되는 극지방의 풍경은 메리 셸리의 엄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사랑하는 사람 임레이에게 버림 받고 그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향한 스칸디나비아 여행길에 쓴 글이다. 폭력적인 아버지, 여동생의 비극적 결혼으로 말미암아 고아나 다름 없게 된 조카들을 보살피고, 친구를 위해 자신의 생업도 내팽개치고 병구완을 했던,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의 사생아를 낳고 결혼에 회의적이었던 페미니스트가 두 번의 자살 시도 끝에 결혼했던 고드윈과의 짧은 결혼 생활을 마감하고 메리 셸리를 낳다가 죽은 바로 그녀.


물고 물리는 이야기의 인연들이 프랑켄슈타인이라는 불멸의 작품에서 만난다. 


그리고 나는 메리 울스톤크래프트의 북극 이야기에 매료되어 다시 자유롭게 오를 그 여행길을 상상하며 손에 잡히지 않는 오로라를 매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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