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게 福

 

 

 




아이를 키우기 전에는 몰랐다
어린 나의 '경끼'가 뇌전증 발작이라는 것을 

도스토옙스키나 앓는 천재의 표식이 아니라

그저 안타까운 질환일 뿐이라는 것을


남동생이 뇌종양 수술을 받기 전에는 몰랐다

한 번 자른 두개골은 붙지 않는다는 것을

뇌종양에는 총 네 등급이 있고 종양을 떼낸 사람도

세상에, 술담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아빠가 대장암에 걸리기 전에는 몰랐다

독한 암 순한 암, 깊은 암 얕은 암, 큰 암 작은 암

어떻든 암은 다 죽을 고생, 생고생이라는 것을

사람 몸에 암 세포 안 생기는 데가 없다는 것을

 

그런데 말입니다

중증 질환 중 암이 최악은 아니며 예상 가능한 불행 중에서도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그밖에 어떤 것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은 당신이 그만큼 삶에서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즉 '복'을 누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모른 게 약, 아니,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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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품으로

 

 

 

 

 

 

어젯밤 꿈에 평생 읽은 적 없는 <자유론>이 나왔다 

이 비천한 몸이 심지어 그이의 품에 안겨 있었다

<자유>와 <론>의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참 좋았다

생각의 자유, 취향의 자유, 그것을 말하지 않을 자유까지

 

그 직후 아우슈비츠에 들어갔다 

어두웠다 시큼했다 더러웠다

 

모스크바 외곽, 폐건물처럼 낡은 기숙사 

지하까지 수직으로 내려꽂힌 쓰레기 통로를 

가로로 깔아 둔 아우슈비츠를 겨우 통과하고

마침내 다시 자유의 품에 안긴 나는 

 

계몽된 민주 사회의 교양과 윤리를 갖춘 시민이 되어 있었다  

 

 

 

*

 

 

 

 

 

 

 

 

 

 

 

 

 

 

실제 꿈에서는 <알릴레오 3>과 유시민이 직접 나왔고, 정말 엉뚱하게도, 1년 내내 책 한 자 안 읽는 남편이 거기 출연자로 초대받았고 나는 배우자로 배석했다. 정말이지 개꿈 똥꿈이지만 넘나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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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의 가을

 

 

 

 

 

해바라기야

넌 머리가, 얼굴이 어쩜 그렇게 크니

머리에 든 것도, 얼굴에 박힌 것도 너무 많아

얘, 너 정말 무겁겠다, 이 가분수야

 

해바라기라고 언제나 머리를 쳐들고 있어야 하니

너의 여름은 충분히 위대했는데 말이야 

 

이제는 가을, 示의 시간

그만 고개를 숙여도 돼

속절없이 미련없이 시들려무나

다 널 위해 하는 말이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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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적으로 아름답다

 

 

 

 

아이의 아침 등굣길

그림글자 落葉이 실현된다

단풍의 떨어짐이 절찬리  

또렷한 가을빛 꼭지점이

살랑살랑 연약한 듯 살벌하다 

초속 5센티미터보다는 빠를 테지

 

낙하 직전의 낙엽

착륙 직전의 낙엽

필사적으로 아름답다

 

 

 

*

 

 

 

 

 

 

 

 

 

 

 

 

 

 

 

 

떨어지기 직전의 나뭇잎은(?) 결사적으로 아름답다. 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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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짓다, 라는 낱말 

 

 

 

 

'복'도 사전에 있고 '짓다'도 사전에 있지만 '복짓다'는 없다

 

밥과 옷과 집을 짓듯, 약을 짓듯

시와 소설과 편지 속 글을 짓듯

복을 짓자 

복 짓자

복짓자

 

45년 평생 얼마나 많은 복을 지었는지

내 머리카락, 저 위엄을 좀 봐

여전히 검고 윤기도 나는 것 같아

꼬박꼬박 착실한 달거리에 맞먹는 수준이야

내 머리카락에 감사와 존경을 표함과 동시에 

 

복짓고 살자  

내 검은 머리카락 더 풍성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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