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는 새삼스레 착해지려고 한다
언니야, 옛날에 독후감 쓰는 게 참 싫은 아이가 있었거든, 생각나?
동화책을 읽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말이야, 그래도 우리 언니 최고
조르기만 하면 일필휘지로 숙제 끝, 아이는 우수상을 받았지,
참 즐거운 추억이야, 그치?
옛날에 리포트가 딱 질색인 대학생이 있었거든, 그것도 생각나?
말은 이렇게 쉬운데 글은 왜 이리 어려우냐고 컴퓨터 앞에서 한탄하면
기계 타고 내려온 신처럼 서울에서 부산으로 강림한 우리 언니
스타카토로 자판을 톡톡, 이번에도 A+, 참 신나는 인생이었어, 그치?
부지런하고 야무진 우리 언니 차츰 눈 멀고 머리도 나빠지고
잠 잘 자고 밥 잘 먹던 나는 불면증과 소화 불량을 알게 되고
우리 둘의 천덕꾸러기 동생은 저 먼 나라로 떠나고, 세상에 더는 좋아질 것이 없어,
이제는 무한히 늙어가며 소소하게 더 나빠질 일만 남았지, 뒷골 여시도 담벼락 구렁이도 없더라
그래도 언니야, 어린 시절처럼, 두 손 꼭 잡고 타박타박 산책을 나서자
고분고분한 옷차림에 하나밖에 없는 충직한 운동화를 신고, 산책은 구원이니까,
아무 목적 없이 그저 산책을 위한 산책, 길이라 부르는 것은 결국 망설임일 뿐,
일관된 망설임 외에 어떤 목적도 있을 수 없다, 콩나물을 사와, 두부를 사와, 그건
심부름일 뿐, 산책이 아니다,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가을 길을 걷는 나와 언니에게
머나먼 목적은 없어,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의 좌표와 목표는 있을 거야, 이렇게 겨울까지
걷고 걷고 또 걸어 동화나라의 발저처럼 눈 덮인 산책길에 드러눕고 싶다, 영원히
원래도 착한 나는
오늘 새삼스레 더 착해지려고 한다
가을인가 보다, 언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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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카프카, 로베르트 발저, 김영민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목적이 없어도 되는 삶을 위하여 | 중앙일보 (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