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파리의 쓸모 






8월말, 첫 가을비를 맞으며

네덜란드산 관목 더미 위에 앉아 있는

빨간 눈의 노랗고 예쁘장한 똥파리를 본다  


어제는 뜨거운 자줏빛 에키놉스,

오늘은 촉촉한 연초록 목수국, 

내일은 연보랏빛 샐비어 깨꽃, 

나는 똥파리의 역사적 궤적을 안다


갑자기 말라깽이 꺽다리 아주머니가 

뽀얀 분가루와 기도를 뿌려주신다


"예수님 믿으세요!"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길바닥에서 식사 중이던 비둘기 떼가 후루룩, 

전봇대 전신줄에 앉아 있던 참새 떼도 후루룩,

똥파리도 총천연색 뿌리며 웽, 히치콕의 한장면이

관악구 땅에서 재현되고 성수가 흩뿌려진다


"예수님 믿으세요!"

"최후의 심판이 가까워졌습니다!" 


똥파리, 아니, 연두 금파리는 애플망고 농장으로 

갔을 것이고, 오늘의 식사도 역사의 궤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자연과 타연, 알고리즘: 초록 찬미 







오늘의 초록은 어제의 초록이 아니다, 그보다 더 초록이다 

어제의 풀이 오늘은 부쩍 자라 어제의 나무를 덮다

오늘의 나무도 가지 끝에 연초록 잎을 틔워 내일의 나무가 되리라


고독은 접속으로부터의 자유다 

은둔은 나와의, 세계와의 접속이다 

자유와 은둔, 상상과 파상, 

희망과 절망, 중력과 은총, 

자연과 타연, 그리고 

알고리즘의 태연스러움이여!  


'남루함'과 '비루함'이라는 낱말을 떠올리며 

봄의 신록에 노안을 비비고 여름의 녹음에 노안을 적신다

이제는 검색은 그만, 탐색과 사색에, 아니,

정신 줄과 넋 놓기에, 멍 때리기에 전념할 때


거미와 돼지는 회심의 미소를 흘리며 

초록 풀밭에서 영영 만나다, 엉성한 거미줄에 

영영 얽히는 돼지발과 거미다리, 운명이어라  


풀의 저 갸륵한 초록이여, 아모르 파티,

인생은 아름답고, 자연과 타연, 그리고

알고리즘은 사심 가득 의뭉스럽기 짝이 없노라! 




//


김홍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은 거룩한 식사 시간  








1. 애벌레, 먹다 죽다 



달콤한 꽃잎 만찬을 끝내고  

먹이 사냥을 가던 중 공중으로 

붕 뜨더니 찍! 한편,그리하여 

문자 그대로 벌레 먹은 꽃은, 



2. 리시안셔스, 관통당하다 


농장에서 허리째 잘려와 꽃시장에 전시되었다가

꽃집 양동이에 꽂혀 있다가 아픈 아이의 집 꽃병에서  

살기를, 죽기를 기다리는 나, 언제 알을 깠을까? 

내 몸 깊숙한 곳을 갉아먹은 저 짐승은

내 몸을 뚫고 우리 언니 몸 속으로 들어간다



3. 인간, 내 손에 코 묻히긴 싫어  


신나게 식사 중인 애벌레를 발견하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너는 개가 아니니, 베란다 밖으로 휙!



4. 양구의 추억 


배춧잎 갉아 먹는 큼직한 송충이를 

농부 아빠가 붙잡아 고속도로 한복판으로 휙,

이런 해충은 차에 깔려 죽어야 해!

아빠는 잔인하고 애벌레는 징그럽고 

어린 나의 마음은 꿈틀꿈틀, 심란했노라!



5. 똥파리의 쓸모 


꿀벌이 꽃가루 디저트를 뿌려주는 여름 

오늘 샐비어 깨꽃 위에 앉은 건 똥파리, 아니 

노르스름한 윤기 나는 예쁘장한 연두 금파리, 

애플망고 수정은 저밖에 못한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픈 아이의 기도 







"하느님에게 내일은 다시 걷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해 봐." 


"엄마, 하느님은 어디 있는데?" 


"네가 하느님이 있다고 믿으면 네 마음 속에 있는 거야."


"그럼 기도할게. (3초 휴지)

하느님, 하늘 나라로 데려가신 우리 아빠 다시 집으로 보내 주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눈이다 






오늘도 

두 다리로 거리를 걷는 나를, 

카메라 렌즈로 세상을 보는 나를, 

거울을 보는 나를, 사람들의 동공에 어린 나를, 

유리에 비친 나를, 아이들을 돌보는 나를,

시간 속에 봉인한다 


나는 눈이다 


내가 찍은 사진을 정작

나는 별로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들 계신지?


나는 네거티브 필름에 봉인된

눈이다 






비비안 마이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