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 세상의 소풍

 

 

 

 

 

쉰 살에 장가를 갔어

쉰 한 살에 아이를 낳았어 

쉰 나이를 세며 육아라니

이건 분명 드문 일인데 늘 만감이 교차해

 

시옷 둘에 시나브로 시들시들 시어터지고

발음도 영 시원찮고 눈도 시답잖은 쉰 살에 

이건 분명 드문 일이라 딴 세상의 소풍 같아

29년 동안 피운 담배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

 

 

 

*

 

 

 

 

 

 

 

 

 

 

 

 

 

 

 

"어린 토끼는 처음 맞는 이상한 광경에 어리둥절 달아나지도 못하고, 이런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라 아마 딴 세상의 소풍일 거라 짐작했다."

 

- 어느 지인과 주고 받은 문자에서:  "... 이건 분명 드문 일인데 늘 만감이 교차..." 이런 사실도, 사용된 어휘도 재미있지만, '- 인데'라는 연결이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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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개구리에게

 

 

 

 

 

그러게, 왜 벌써 나왔니?

너무 살고 싶어서 너무 빨리 죽었구나

올해 경칩은 3월 5일인데

 

(2021.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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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감염

 

 

 

 

 

1년이 넘도록 소설을 쓰지 못했다

1년 동안 너무 많은 이야기가 범람했기 때문에

오히려 서사를 구축하지 못했다는 것은  결코,

변명이 아닙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요, 물실호기라잖아요  

기회비용이 많이 들어도 놓치지 말아요

면역 저하 숙주라면 시시한 바이러스도 살판난답니다

 

범람하는 이야기 틈새를 비집고

인간 숙주의 배를 찢고 터져 나온 에이리언처럼 

시가 태어났노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매일 아침 죽다 살아난다

봄이여 서슴없이 오라, 야멸차게 맞아주겠노라!

 

 

 

 

 

*

 

지난 연말 이유없이! 고열에 배탈에 체중이 쭉쭉 빠진, 남편의 동료 겸 친구가 악성림프종 진단을 받았고, 연초부터 항암 중이다. 마침 중*대 병원에서 강남가* 병원으로 전원한 한 30대 여성의 죽음을 두고 남편이 올린 청원도 인상적이어서, 이것저것 찾아보게 되었다. 아시다시피, 나의 아버지도 이른바 암환자이고(과연 '완치'라고 할 만한 병이 있는가, 우리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돌이켜보건대 아이 때문에 1년에 최소 한 두 번은 응급실을 다니는 엄마로서, 질병과 사고와 장애, 그 다음 각종 의료 행위와 의료인의 정체성, 그것(그들)의 한계, 우리-환자의 자세 등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모든 병이 그렇듯, 세부 진단은 무척 다채롭지만, 혈액암은 특히 더 그런가 보다. 그런 만큼, 아마 치료 방식도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중병일 수록 각종 합병증(부작용!)도 크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와중에 '기회감염'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기회'는 좋은 말인데, '기회감염'은 말하자면, 바이러스와 세균에게 좋은 말이다 -_-;;

 

얼마 전에 부고가 뜬 최정례 시인 역시 비슷한 질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동안 시를 워낙 읽지 않아서 따로 읽어본 적은 없는 시(시인)지만, <레바논 감정>이라는 시집은 들어본^^;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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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미치광이의 우아함

 

 

 

 

1

 

1984년초 겨울

아이는 덕유산 자락에서 눈썰매를 탔다

어느덧 빳빳한 비료포대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더 이상 미끄러질 곳이 없다니 너무 좋아, 짜릿했다

보이는 건 맑고 파란 하늘과 맨몸의 나무

꽁꽁 언 맨손과 사촌의 돕바가 눈 투성이였다

 

 

2

 

산과 호수가 많은 동화나라에 산미치광이 한 마리가 살았다

얼굴이 뾰족하고 등짝과 엉덩이에 살벌한 털 가시가 있지만

그래서 참 괴이한 형상이지만 마음씨 착한 어른이었다

산미치광이는 아침 먹고 약 먹고 콩 분류하고

점심 먹고 편지봉투 접고 하염없이 산책하고

저녁 먹고 약 먹고 몇 시인지 모르는 시각에 잠들고

또 아침 낮 저녁 밤, 또 봄 여름 가을 겨울

오 아름다운 산책이여! 오 거룩한 루틴이여!

오 숭고한 집이여! 내 쉴 곳은 집, 내 집, 요양병원뿐!

 

예수가 온 날도 산미치광이는 산책을 나갔다

눈이 소복히 쌓인 거리에 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뽀송한 함박눈이 축축한 진눈깨비가 되어

호저의 거친 바늘처럼 얼굴과 등짝에 내리꽂혔다

검은색 정장 차림에 중절모와 지팡이, 아니 우산까지

신사 놀이하며 천천히 설원을 걸었다

막다른 골목 따위는 없는 나라

산책이 있는 한 길은 영원히 있는 나라, 동화나라

 

아무도 나를 몰라보고 몰라주는 이 정황

가진 것이 없어 잃을 것도 없는 정황 

갖고 싶은 것도 없는 정황이 너무 좋아, 짜릿했다

 

산미치광이는 뒤로 꽈당 넘어지며 벌러덩 나자빠졌다

산책하듯 자연스럽게, 우아하게

하얀 눈밭에서 영원히 잠들기 전 하늘을 보았다

멀찍이 날아간 중절모, 완만한 구두 발자국 

간결한 울타리 옆 포큐파인 두 마리까지

구도가 너무 완벽해, 짜릿했다 

 

 

3

 

그것은 오류였다, 덕유산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아이의 헌 돕바는 메마른 풀과 갈색 흙으로 더러워졌다

더 이상 더러워질 것이 없다니 너무 좋아, 짜릿했다

진짜 눈이 온 것은 2021년초 겨울날이었다  

어른이 된 아이는 꽁꽁 언 아스팔트 눈길을 걸었고

앞으로 꽈당 엎어지며 뜨거운 커피를 쏟았다  

 

- 제기랄, 이건 아닌데

 

 

4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잘 죽었답니다

 

 

*

 

 

 이 사진 누가 찍었는지 아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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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1-02-16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른괭이님, 저는 저 책 다 읽고도 아직 책상위에서 치우지를 못하고 있으면서도 눈 밭 위의 저 사진 있는 페이지는 의식적으로 안보고 넘기려고 해요. 정말 누가 찍었을까요.
1984년의 저 아이는 푸른괭이님이신가요?
오늘도 2021년 이땅엔 눈소식이 있네요.

푸른괭이 2021-02-16 15:11   좋아요 0 | URL
경찰이 찍었다고 하네요, 찾아보니^^;
 

 

삶에게 물어!

 

 

 

 

 

 

오늘밤도 요 위에 쪼그리고 앉아 발뒤꿈치 각질을 뜯는다

오, 관악구의 시시포스여, 참을 수 없는 바윗돌의 가벼움이라니!

 

누가 죽고 누가 살지

도무지 인간은 정할 수 없는 일

잘못 정했다가는 몰매 맞기 십상이지

그런 일을 떠맡으라고 신이 있는 것

오 주여, 분발하소서!

 

인간은 어떤 일은 무조건 믿고 싶어진다

느낌과 앎을 넘어 믿음으로

감성과 지성과 영성의 삼위일체

- 삶의 목적은 무엇?

- 삶에게 물어! 

 

오늘밤도 거실에 쪼그리고 앉아 생살에 포비든 요오드를 바른다

피와 요오드를 구분할 수 없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

포비든 요오드는 다시 냉장실에 보관된다

 

 

 

 

*

김영민 생각의공화국 인구위기의 다른측면 -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칼럼!

https://news.joins.com/article/23985602

"삶의 목적은 무엇?" "삶에게 물어!" 삶의 목적을 묻는 학생들에겐 일단은, 두꺼우니까!(그래서 읽기 힘드니까!) <카라마조프>를 권한다고 ㅋ  그 책에 마땅히 답이 있는 건 같지만 읽다 보면 한 며칠, 심지어 2-3주가 지나 있다, 두꺼우니까! ㅋㅋ 번역하다 보면 보면 인생의 한 시즌(삼십대 초반)이 지나 있다, 두꺼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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