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미치광이의 우아함

 

 

 

 

1

 

1984년초 겨울

아이는 덕유산 자락에서 눈썰매를 탔다

어느덧 빳빳한 비료포대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더 이상 미끄러질 곳이 없다니 너무 좋아, 짜릿했다

보이는 건 맑고 파란 하늘과 맨몸의 나무

꽁꽁 언 맨손과 사촌의 돕바가 눈 투성이였다

 

 

2

 

산과 호수가 많은 동화나라에 산미치광이 한 마리가 살았다

얼굴이 뾰족하고 등짝과 엉덩이에 살벌한 털 가시가 있지만

그래서 참 괴이한 형상이지만 마음씨 착한 어른이었다

산미치광이는 아침 먹고 약 먹고 콩 분류하고

점심 먹고 편지봉투 접고 하염없이 산책하고

저녁 먹고 약 먹고 몇 시인지 모르는 시각에 잠들고

또 아침 낮 저녁 밤, 또 봄 여름 가을 겨울

오 아름다운 산책이여! 오 거룩한 루틴이여!

오 숭고한 집이여! 내 쉴 곳은 집, 내 집, 요양병원뿐!

 

예수가 온 날도 산미치광이는 산책을 나갔다

눈이 소복히 쌓인 거리에 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뽀송한 함박눈이 축축한 진눈깨비가 되어

호저의 거친 바늘처럼 얼굴과 등짝에 내리꽂혔다

검은색 정장 차림에 중절모와 지팡이, 아니 우산까지

신사 놀이하며 천천히 설원을 걸었다

막다른 골목 따위는 없는 나라

산책이 있는 한 길은 영원히 있는 나라, 동화나라

 

아무도 나를 몰라보고 몰라주는 이 정황

가진 것이 없어 잃을 것도 없는 정황 

갖고 싶은 것도 없는 정황이 너무 좋아, 짜릿했다

 

산미치광이는 뒤로 꽈당 넘어지며 벌러덩 나자빠졌다

산책하듯 자연스럽게, 우아하게

하얀 눈밭에서 영원히 잠들기 전 하늘을 보았다

멀찍이 날아간 중절모, 완만한 구두 발자국 

간결한 울타리 옆 포큐파인 두 마리까지

구도가 너무 완벽해, 짜릿했다 

 

 

3

 

그것은 오류였다, 덕유산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아이의 헌 돕바는 메마른 풀과 갈색 흙으로 더러워졌다

더 이상 더러워질 것이 없다니 너무 좋아, 짜릿했다

진짜 눈이 온 것은 2021년초 겨울날이었다  

어른이 된 아이는 꽁꽁 언 아스팔트 눈길을 걸었고

앞으로 꽈당 엎어지며 뜨거운 커피를 쏟았다  

 

- 제기랄, 이건 아닌데

 

 

4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잘 죽었답니다

 

 

*

 

 

 이 사진 누가 찍었는지 아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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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1-02-16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른괭이님, 저는 저 책 다 읽고도 아직 책상위에서 치우지를 못하고 있으면서도 눈 밭 위의 저 사진 있는 페이지는 의식적으로 안보고 넘기려고 해요. 정말 누가 찍었을까요.
1984년의 저 아이는 푸른괭이님이신가요?
오늘도 2021년 이땅엔 눈소식이 있네요.

푸른괭이 2021-02-16 15:11   좋아요 0 | URL
경찰이 찍었다고 하네요, 찾아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