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살을 3년 앞두고

 

 

 

 

 

 

쉰 살은 시로도 써 먹을 수 없는 나이다 

마흔둥이는 감동이지만 쉰둥이는 징그럽고 우습다

50도 오십도 아무런 맛도, 멋도 없는 숫자 글자

암 진단에 약 오르면 쪼잔하다는 소리 듣기 십상이겠다

 

쉰 살은 아무래도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나이다 

지천명이 되어도 천명이란 절대 알 수 없는 것

그럼에도 걱정보다 기대, 불안보다 설렘이 앞서는 것은

오 갱년기 증상이 분명하구나!  

 

 

*

 

서른살, 마흔살에 관한 시나 소설은 본 것 같지만 쉰 살을 다룬 책은?? 아무래도 없는 것 같다, 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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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손가락의 시

 

 

 

 

 

 

 

손가락은 머릿속 신경세포

시는 머리가 아니라 손가락이 쓰는 것

짧은 손가락으로 짧은 손가락의 시를 써 봐요

긴 손가락의 시가 되면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요

출처를 잃어버린 인용을 하나씩 삭제해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숨만 쉬어요 

우울할 수 있다면 담배는 피워도 돼요

꼭 피우도록 해요, 그것도 많이, 독한 걸로 

이 불미스러운 장수와 질 나쁜 불멸에 무감해지는 몰골이라니, 참  

 

손가락도 제대로 못 쓰는 놈이 무슨 과학자야

 

얌전히 앉아서 종이나 씹어요, 멜랑꼴리 염소처럼

소리의 반사도 모르는 과학자님, 멸치볶음 좀 드세요

저민 아몬드 조각도 꼭꼭 씹어요

그동안 짧은 손가락은 무얼 하고 놀까요

그냥 무사히 존재하기나 해요

긴 시를 쓰다가는 짧은 손가락이 하나씩 잘릴걸요  

인용과 각주와 출처와는 아주 손절해요

 

멸치도 안 먹는 놈이 무슨 노동해방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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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얼굴은 유일무이하다

 

 

 

 

 

 

 

배달기사입니다

요청하신 대로 음식 문앞에 두고 갑니다

 

똑같은 내용임에도 똑같은 문장은 하나도 없고

신기하다, 겹치는 숫자조합이 하나도 없다는 게

 

지금 이 순간에도 이 관악구 땅에는

수많은 얼굴이 수많은 음식에게 배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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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의 기원

 

 

 

두툼하고 큼직한 제주 은갈치 세 토막을 해동했다

몰래 녹은 뱃살을 가르는 칼집 사이로 4-5센티 알집이 나왔다 

마지막 토막에서 나온 알집은 10센티는 족히 될 법했고 

위 아래 싹둑 잘린 흔적이 야멸찼다, 토막이 통째로 알배기

 

나 역시 포유동물의 암컷으로서 배꼽과 그 주변을 가득 채울 만큼, 그래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만큼 큼직한 새끼를 밴 적이 있는데, 나의 곧추선 몸통과 새끼의 동그랗게 만 몸통을 위 아래로 싹둑 잘라 급속냉동하여 완속해동한다고 생각하니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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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구의 위엄

 

 

 

 

1

 

2021년 신축년 구정을 맞이하여 

우리는 어김없이 서울역에 갈 것이다

서울역은 싸늘하겠지만 우리는 서울역의 거지와

햄치즈 샌드위치와 바닐라향 뜨거운 커피에 감동할 것이다

 

우리 열차는 지금 종착역인 부산역에 도착하겠습니다

부산역에서 내리시는 손님 잊으시는 물건 없이 안녕히 가십시오!

부산역은 심드렁하겠지만 우리는 부산역의 화장실과 

메마른 거지와 기름진 비둘기의 조합에, 왁자지껄한 지하철이나 괴팍한 택시에 열광할 것이다  

 

우리는 황령산 자락, 부산진구 전포교회 아래

다락방이 딸린 2층짜리 주택에 머물 것이고

그렇다, 태종대 근처 영도구에도 갈 것이다

 

 

2

 

1926년생 제동댁 김점순은 영도구에서 아흔여섯번째 해를 맞이하고 있다

 

그녀는 145cm 40kg 정도의 체구에 건더기 없는 된장국과 김치만 먹고 살았다 

온순한 그녀가 괄괄한 유씨 남자와 낳은 아이 중 총 일곱 명이 성년에 이르렀다

장남 은율은 알코올 의존증이 유발했을 치매와 공황장애에도 불구하고 잘 살고

장녀 숙이는 암 투병 중인 남편과 부전시장에서 과일과 유자차 떼다 팔며 잘 살고

차남 종율은 환갑에 애 딸린 여자와 결혼해 '하나님' 안에서 알콩달콩 잘 살고

차녀 을이는 시집 간 직후 양잿물 마시고 친정까지 기어와 시름시름 앓다 죽고

삼녀 정이는 아들 딸 남겨둔 채 마흔도 넘어 술병으로 간이 붓고 복수가 차 죽고

삼남 성율은 쉰 살에 뇌경색, 목숨도 건지고 산재보험도 건져 얼씨구나 잘 살고

사녀 득이는 요양보호사에 무자식이 상팔자, 노모 돌보며 착하게 잘 살고 있다

 

영도구의 위엄은 그 덕분에 유지된다

좁다란 임대 아파트와 모진 슬레이트 집들

그리고 사람들, 오 가난한 사람들!

오 굴욕과 상처 가득한 무참한 사람들!

오 달동네 옥탑방과 지하방, 죽음의 집에서 부활하라! 

 

3

 

부산행 KTX 열차 안에서 우리는 터널 안팎을 드나들며

간밤에 잠자리에서 나눈 대화를 변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어머니, 왜 사람은 태어나고 병들고 죽는 것일까요?

- 오 아들아, 그런 멋진 말은 어디서 배웠느냐?

- <원효대사 해골물>에서요

- 오 꿈에서 원효대사를 만나거라, 일체유심조를 배우거라

 

아흔해가 넘도록 잘 살고 있는 사람은

어딘가 초월적인 데가, 신의 관념과 형상을 닮은 데가 있다 

우리의 제동댁 김점순 여사는 백살을 넘길 것인가

'신'이라는 낱말에서는 인육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

 

 

*

 

도-키, <가난한 사람들>, <학대(상처) 받은 사람들>(The Insulted(Humiliated) and The Injured)), <죽음의 집의 기록>

나보코프 <절망>: 신이라는 관념에서는 인육 냄새가... (?)

 

*

 

 

작년 1월 1일에 부산에 있었으나 아이가 급-아픈 바람에(진짜 또 영화 한 편 찍었다) 가지 못했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아무래도 힘들지 않을까 한다. 그녀는 아무튼,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 들 중 유일한 생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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