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쥘리엥 소렐의 환멸과 좌절

 

쥘리엥 소렐은 책을 읽는다는 이유로, 즉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비의 집에서 거의 기생충 취급을 받았다. 이방인이라는 꼬리표는 어딜 가나 그를 따라다닌다. 우선 지방 귀족 사회에 가정교사로 편입된 청년의 지위는 제법 애매하다. 지적인 능력과 야망의 크기에 비해 그 사회적 처지는 어쩔 수 없이 굴욕적이며, 쥘리엥처럼 성격이 예민한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는 추상적인 의미의 상류 사회는 흠모하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인다. 가령, 가난하되 오만한 사람의 특징인 바, 추상적인 돈은 동경하되 구체적인 돈은 경멸하고 대체로 이해타산과 축재(재테크!)에 둔하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유일한 가치인 순수를 지키려는 본능적인 방어기제의 산물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출세욕이 강할수록 속물적 가치에 대한 혐오는 더 커지는 역설이 발생한다. 이것이 그가 시장 집에서도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한편, 브장송의 신학교는 그야말로 시련의 도가니이다. 성직에 대한 소명감보다는 최대한 손쉽게 빵과 안정을 얻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온 거친 평민의 아들들이 모두 쥘리엥의 적이 된다. 그의 장점(우수한 성적, 순수에의 집착, 성취욕구, 성실성 등)이 질투와 힐난을 불러온다. 일등을 하면 세상살이가 피곤해진다. 이런 현실을 통감할수록 쥘리엥의 소외감은 더 커진다. 피라르 신부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그의 인생은 정말 우울했을 터이다.

 

드 라 몰 후작의 저택은 어떠한가. 작가는 쥘리엥이 시골 출신임을 수시로 언급하면서 파리라는 공간의 특수성을 강조한다. 실제로 파리 귀족사회는 지방 귀족사회와는 사뭇 다르다. 쥘리엥의 두 연인 드 레날 부인과 마틸드는 그 상징 같다. 전자가 신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온화하고 다정한 모성에 가깝다면(, 촌스럽고 그렇기에 숭고하다!) 후자는 도발적이고 자극적이기에 더욱더 정복의 욕구를 자극한다. 그럼에도 그 욕구를 성공리에 실현하기에는, 즉 파리의 노회한 귀족 사회를 감당하기에는 그는 너무 순수했거나 너무 어리석었다. 타고난 능력 덕분에 후작의 밀사가 될 만큼 신임을 얻어놓고서도 고작(!) 여자 문제 때문에 파멸하다니!

 

 

 

 

 

 

 

 

 

 

 

 

 

 

 

하지만 쥘리엥의 매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은 그의 야망이 좌절됐을 때이다. 후작의 손에 떨어진 드 레날 부인의 편지(실은 어느 사제가 쓴 것을 부인이 베껴 적은 것이다)를 마틸드에게서 건네받고 그것을 다 읽자마자 그는 말한다. “나는 드 라 몰 후작님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 어떤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기 딸을 이런 작자에게 주려 하겠소! 잘 있어요!”(2, 319) 그러곤 그 길로 베르에르 시로 달려가 성당에서 기도를 하고 있던 드 레날 부인을 권총으로 쏜다. 이 과정에 대한 묘사는 무척 짧을뿐더러 그의 심리에 관한 언급이 없다. 부인을 쏜 것은 과연 복수심 때문이었을까.

 

어떻든 이후 우리가 보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의연히 받아들이는 쥘리엥이다. 굳이 발뺌을 하지도 않거니와 자살의 유혹도 나폴레옹을 떠올리며 일찌감치 물리친다. “나는 아직 대여섯 주일을 살 수 있다. 자살! 안 될 말이지. 나폴레옹도 자살하지 않고 살아갔는데.”(2, 331) 브장송의 지하 감옥에 갇힌 채 죽을 날을 세는, 더 정확히 남아 있는 날을 조용히 향유하는 쥘리엥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숭고하다. 진정한 높이는 오히려 밑바닥으로 추락했을 때 확보된다는 것, 대단한 역설이 아닌가. 법정 가득 울려 퍼지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여러분에게 용서를 청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본인은 조금도 환상을 품고 있지 않습니다. () 내 범죄는 잔혹한 것이며 또한 계획적인 것입니다. 배심원 여러분, 그러므로 본인은 사형을 당해 마땅합니다. 그러나 내 죄가 좀 더 가벼운 것이었다 해도 사람들은 내 젊은 나이가 동정을 살 만하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나를 통해 나와 같은 부류의 젊은이들을 징벌하고 그들을 영원히 의기소침하게 하려 한다는 것을 본인은 잘 알고 있습니다. 즉 하층 계급에서 태어나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다행히 좋은 교육을 받았고 부유한 사람들의 오만이 사교계라고 부르는 것에 대담하게 끼어들려 한 젊은이들 말입니다. / 여러분, 그 점이 바로 본인의 범죄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나는 나와 같은 계급의 동료들에게 판결받지 못하는 만큼, 내 범죄는 더욱더 준엄한 징벌을 당할 것입니다. 본인의 눈에는 배심원석에 부유한 농민 하나 보이지 않고 오직 분개한 부르주아들만이 있을 뿐입니다.”(2, 373-374)

 

살인미수는 큰 죄이지만, 쥘리엥의 주장을 피해의식의 산물로만 볼 수는 없다. 문제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여러 정황(드 라 몰 후작과 프릴레르 부주교의 해묵은 반목, 남작에다 시장이 된 발르노의 복수심, 마틸드의 영웅주의가 빚어낸 역효과 등)과 사회 구조이다. <적과 흑>의 초반부에 등장한, 지방 권력의 농간으로 브장송에서 사형을 당한 루이 장렐의 운명이 실로 복선이었던 셈이다.

 

한편 통렬한 계급의식에 사로잡힌 쥘리엥의 고백에 따르면, 그의 죄는 상승 욕망, 말하자면 꿈꿀 권리를 가진 것이다. 더 깊이 파고들면, 상류 사회에 편입하고자 하면서도 그것을 경멸하고 또한 그러면서도 상승 욕망을 버리지 못한 것이야말로 자기기만의 핵심이다. 그러나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이 자기 모순 덕분에 쥘리엥은 19세기 판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끝까지 운명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최후을 맞이하는 영웅! 그 운명의 이름이 사랑이라는 점에서 <적과 흑>은 확실히 연애소설이다.

 

 

 

 

 

 

 

 

 

 

 

 

 

 

 

 

4. 연애의 법칙, 인생의 법칙

 

스탕달은 <연애론>에서 사랑을 열정적인 사랑, 취미적인 사랑, 육체적인 사랑, 허영적인 사랑 등 네 종류로 구분한다. 이 분류법을 <적과 흑>의 주인공에게 적용시키면, 드 레날 부인과의 사랑은 열정적인 사랑에, 마틸드와의 사랑은 허영적인 사랑에 해당하겠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도 그 출발점은 허영적인 사랑이다. 스탕달의 비유를 빌자면, 프랑스 남자라면 누구나 훌륭한 말[]을 갖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사랑 말이다. <적과 흑>을 놓고 보면 문제는 우리의 연인들이 소설을 읽는지 어떤지로 볼 수 있다.

 

우선 드 레날 부인은 사랑이 모방 욕망의 산물인 파리(“파리에서는 사랑이란 소설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1, 66)가 아닌 시골에 산다. 물론 지방 여성도(가령 엠마 보바리처럼) 소설을 읽을 수 있으나 그녀는 소설은커녕 대체로 책 자체를 별로 읽지 않는다. 때문에 그녀의 삶도, 사랑도 ‘-처럼의 유혹으로부터 거의 완전히 자유롭다. 현모양처의 삶이든, 10세 연하의 정부를 둔 서른 살짜리 유부녀 연인의 역할이든 모두 심리적, 육체적 욕구에 따라 자연스레 주어진 것이다. 그녀의 사랑도 스스로 발견하고 또 창조해가는 본능적인 형식에 가깝다. 가령, 쥘리엥이 파리로 떠나기 전, 12일에 걸친 마지막 밀회는 너무나 대담하다. 쥘리엥의 부재를 견디는 방식, 즉 그녀의 종교는 거의 광신에 가깝고 그나마도 별 효과를 얻지 못한다. 몸과 마음의 욕망에 따라 발생하여 성장한 사랑의 열병은 오직, 그 대상과의 합일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그녀가 쥘리엥이 처형된 지 사흘 만에 죽는 것은 (병명도 명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개연성이 좀 떨어진다!) 이 사랑의 논리에 따르면 당연하다.

 

레날 부인 역을 캐롤 부케가 맡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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