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 범죄? 완벽한 소설을 꿈꾸다!
- 나보코프, 「절망」
나보코프의 <절망>은 제목만큼이나 강렬하고 아찔한 소설이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말의 더미 속에서 ‘분신’과 ‘범죄’가 포착된다. 그러나 실제 소설은 환상적인 고딕풍의 범죄소설을 예상하는 독자의 기대를 배반한다.
주인공 게르만 카를로비치는 베를린에 살고 있는 서른여섯 살의 러시아계 독일인으로서 변변찮은 초콜릿 사업자이다. 1930년 5월 9일, 업무차 프라하에 들렀던 그는 풀밭에서 속 편하게 자고 있는 한 부랑아(은근히 목가적인 풍경이다!)가 자신과 무척 닮았음을 확신하고서 모종의 영감에 휩싸인다. 문학 속의 분신을 현실에서 살려내듯 문학 속의 범죄를 자신의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 즉, 분신이라는 개별성과 유일성을 위협하는 요소를 이용하여 전대미문의 독창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것. 이 미적 행위의 준비와 실행 과정에서 많은 거짓말이 창조된다. 펠릭스를 꾀기 위한 현란한 수다는 물론이거니와 아내 리다 앞에서 웅장하게 토로하는 숨겨진 동생 이야기는 한 편의 소설에 가깝다. 게르만의 미학적 환희가 극점으로 치달아갈수록 두드러지는 것은 그의 자기기만이다. 펠릭스는 정말로 그와 닮았는가. 그의 범죄는 정말로 ‘무관심’과 ‘무목적’의 행위(예술)인가. 혹시 기울어져가는 사업을 만회하려는 속된 욕망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리다와 아르달리온의 ‘부적절한’ 관계는 또한 어떠한가. 이런 유의 기만을 전혀 몰랐다면 그는 나보코프의 소설에 곧잘 등장하는 눈 뜬 장님인 것이고, 만약 알았다면, 알고서도 죽였다면 정녕 희대의 악당인 것이다.
파리의 한 호텔에서 범행의 기록에 열중하던 중 게르만은 <죄와 벌>을 언급한다. 라스콜니코프를 그토록 괴롭힌 묵직하고 날카로운 감각, 즉 ‘수치’ 대신 그야말로 후안무치한 유희가 전면에 나선다. 그에게 있어 문제는 살인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그것과 동시에 탄생하는 소설이다. 이미 완료된(그렇다고 생각되는) 완전 범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로, 이미 쓰인 원고에 걸맞은 이름이다. “언젠가 제목을 붙였던 것 같은데. 뭐더라, 무슨 무슨 ‘수기’라는 말로 끝났다. 그러나 누구의 수기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튼 ‘수기’는 끔찍이도 진부하고 따분하다. 제목을 뭐로 한다? ‘분신’? 하지만 그런 제목은 이미 있다. (중략) 닮음? 인정받지 못한 닮음? 닮음의 옹호? 좀 건조하고 철학적인 경향이 있다…”(223-224) 어떤 절박한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여 놓고서 미학을 논하고 그것에 탐닉하는 것, 이것이 “보석금을 얼마를 내든 결코 잠시라도 지옥에서 풀려날 수 없는”(<절망> 영어판 서문) 악당인 게르만의 ‘죄’이다. 그렇다면 ‘벌’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로 (저에게는^^;) 유명한 파스빈더 감독이 만든 <절망>의 한 장면, 이랍니다. 이 영화, 보고 싶은데, 어디서 구하죠? ㅠ.ㅠ)
게르만이 멋지게 완성했다고 믿은 살인 예술은, 그러나, 하찮은 물건(펠릭스의 이름과 출신지가 새겨진 지팡이) 때문에 추악한 실패작이 되고 만다. “나는 사형수의 미소를 지었소. 그리고 고통스러워 비명을 질러대는 뭉툭한 연필로 첫 페이지에 재빨리 그리고 단호하게 ‘절망’이라는 단어를 썼소. 이보다 나은 제목은 찾을 수 없소.”(226) 공들여 쓴 원고가 천재적인 소설이 되기는커녕 “쓰레기 더미”(226)일 뿐이라는 사실 앞에서 절망은 불가피하다. <절망>에서 가장 명민한 인물이자 예술가의 전범인 아르달리온이 따끔하게 지적하는 것도 이 점이다. 게르만처럼 위장 살인으로 보험사를 속이는 수법은 “날림에다가 진부”(229)한 것이거니와 “이 피투성이의 혼란상과 혐오스러운 미스터리”, “음울한 도스토예프스키적 성향”(227) 역시도 게르만이 제멋대로 해석하고 재생한 어설픈, 따라서 애처로운 패러디에 불과하다는 것. 무엇보다도, 게르만이 유달리 집착을 보였던 ‘닮음’과 그것을 통해 증명하고자 했던 ‘유일성’(천재성)의 강박관념에 대해 아르달리온은 세상에 닮은 사람은 없다는 논리로 응수한다. 역시나 그의 일관된 입장인바, “모든 얼굴은 유일무이”(51)하기 때문이다. 닮음 어쩌고 하는 게르만의 수작에 산골무지렁이 같은 단순함과 질박함으로 응수한 펠릭스야말로 존재의 건강한 고유성을 대변하는지도 모르겠다.
(<절망>의 밑텍스트들 중 도..키 작품들.)
나보코프가 러시아 문학의 적자로서 가진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는 러시아 문학 특유의 ‘억압’(도덕, 정치, 종교 등)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했으며, 온갖 이데올로기를 비워냄으로써 문학을 오롯이 문학이게끔 하고 작가를 오직 예술에만 헌신하는 독특한 성직자이게끔 했다. 휴머니즘의 강박과 진득진득한 메시아 콤플렉스로 고통 받는 인텔리겐치아의 굴레 혹은 십자가는 더 이상 작가의 몫이 아니다. 나보코프가 유미적인 문체주의자로 비난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소위 미학 선언의 저변에 깔린 맥락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즉, 그는 러시아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후예로서 볼셰비키 혁명 때문에 영원히 조국을 떠나야 했다. 그 와중에 어이없는 희생양이 된 그의 아버지는 그가 항상 깊은 존경을 표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사랑한 러시아 문학은 아무리 독특한 시각과 해석의 잣대를 갖다 댈지라도 예의 그 ‘억압’까지 포함하는 문학이다.
나보코프는 탁월한 언어 조탁 능력을 타고 났을 뿐더러 문화적인 열등감이 거의 없는 작가였다. 그럼에도 자신의 천재성과 박식함에 도취되는 대신(곧잘 게르만처럼 건방지게 굴긴 했다!) 평생 겸손한 자세로 문학에 임했다. 학자로서도 성실한 편이었으며 꼼꼼한 번역가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소설가로서 염두에 둔 것은 문학사와의 대결이었던 것 같다. 특히 삼십 대 초반, 유럽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쓴 <절망>은 의심의 여지없이 “열병으로 인한 발작성 정신이상과 자존감 상실로 인한 일탈 행동 분야의 우리 전문가”(101), 즉 도스토옙스키에게 던지는 도전장이다. 거장을 향한 질투가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거나 이 지점에서 나보코프의 문학이 시작된다.
한 시절 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에서 정의됐던 나보코프의 서사 전략, 즉 각종 유희는 얄팍한 허영의 산물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문학사에 대한 깊은 통찰, 나아가 기존의 문학이 없이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인식과 절망(!) 이후에 나온, 소설가로서 그가 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존재 형식이다. 경제적 여건과는 무관하게 평생을 부랑아처럼, 유목민처럼 떠돌며 그가 찾아 헤맨 ‘님펫’(<롤리타>)의 이름은 결국, 기존의 문학이 아닌 삶의 샘물에서 곧장 퍼 올린 투명한 문학(가령 푸시킨)이었으리라.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그의 문학이 가닿을 수 없는 문학의 유토피아, 영원히 되돌아가지 못한 유년의 고향 러시아와 같은 것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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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번역의 <롤리타>가 출간되어 무척 기쁩니다! 표지도(어디 영어판 표지였던 것 같기도 한데) 완전 마음에 들고요. 특히, 옛날 <민음사판> 표지에 비하면, 완전 좋아요 ㅎㅎ 한데 <롤리타>에 대해서는 아직 마땅히 쓴 글이 없어(언제 기회가 주어지면 기꺼이 쓸 텐데요!), <절망>에 관한 글을 올립니다. 이걸로는 지금 논문 써야 되는데..-_-;;
-- 아래, 나보코프 가족 사진입니다. 저 아들(드미트리)이 커서 아버지의 작품들을 관리하게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