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그루의 자작나무(?). 레르몬토프가 그린 수채화.)

 

 

운명론자도 비슷하다. 주인공인 불리치는 건장한 체구에 용맹스러운 세르비아 전사로서 동료 병사들 사이에서 대단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여자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고 대신 그 모든 열정을 도박에 쏟는 것도 그의 매력의 한 요소가 된다. 불리치의 영웅주의는 그가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제안하는 유희(도박)에서 극에 달한다. , 운명이라는 것이 정말로 있는가, 아니면 인간이 자기 의지대로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가? 운명과의 이 한판 싸움에서 불리치는, 어쩐지 그가 오늘 죽을 것 같다며 운명 쪽에 패를 걸었던 페초린을 이긴다. 하지만 귀가 길에 비명횡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페초린의 예언을 실현시켜 준다. 이어, 페초린의 운명과의 한 판 승부가 시작된다. 여기서 그는 불리치의 살해범이기도 한 카자크를 거의 혼자 힘으로 생포함으로써 운명에 맞선 인간의 의지의 승리를 확증해주는 것 같다.

 

(많은 페초린들 중 하나 ^^;)

 

 

하지만 의지-운명의 변증법보다 더 절대적인 진리는 다른 곳에 있다. 살해된 멧돼지를 발견했을 때 페초린은 형이상학을 집어던지고 발밑을 보기 시작했다라고 말한다. 이 말 속에는 어떤 형이상학도 없으며 그가 발밑에서 발견한 것도 한낱 돼지 시체일 뿐이다. 그러나 이 돼지가 불가해한 운명의 힘과 연결되어 있음을 생각한다면 진리는 정녕 형이상학이 아닌 발밑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형이상학적인 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 막심의 심드렁하지만 동정이 흠뻑 배어 있는 한 마디와도 일맥상통한다. “무슨 귀신에 씌어서 한밤중에 술 취한 사람한테 말을 붙였는지······! 하긴 그럴 팔자였겠지.” 안타깝게도, 페초린 역시 막심의 투정 섞인 예언(막심 막시미치)대로 젊은 나이에 객사한다.

 

(이 페초린은 처음 보네요-_-;;)

 

 

주인공 페초린의 삶이 마감되는 순간(“Finita la comedia!”) 독자의 시선은 작가 레르몬토프에게로 향한다. 구체적인 양상이야 어떻든 인물과 작가의 운명 사이에 다분히 신비스러운 유비 관계가 성립되어, 모종의 신비감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페초린-레르몬토프는 데카브리스트 난 이후 이른바 환멸과 절망의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청년의 전형으로서, 심지어 하나의 아이콘으로서 러시아문학사에 아로새겨진다.

 

 

(브루벨이 그린 페초린. / 브루벨은 민음사판 표지로 사용된 그림([악마])의 화가이기도 합니다.)

 

물론,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러시아소설의 정점으로 본다면, <우리시대의 영웅>은 이 작품을 영어로 옮기고 훌륭한 서문까지 단 나보코프의 냉혹한 지적대로 결함이 많은 작품이다. 작품의 많은 부분이 건방진 아포리즘과 진부한 비유로 가득 차 있고 베라를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실제 삶이 아니라 서유럽의 낭만주의 소설에서 옮아온 것처럼 창백하다. 작가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사적 거리는 결단코 확보되지 못했으며 장편소설에 대한 야심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어쨌거나 기나긴 이야기 사슬에 머물고 말았다. 여러 모로 젊은 시인이 쓴 미숙한소설이라는 혐의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나보코프의 애정과 감탄 섞인 말을 빌자면, 러시아 소설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 겨우 이십대 중반의 작가가 이처럼 훌륭한 소설을 쓴 것이다. 레르몬토프의 젊음-어림은 당시 러시아문학의 연령이었던 셈이다.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도저한 낭만성과 소설적, 즉 리얼리즘적 형식을 통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시도 사이의 긴장, 그리고 나의 영혼을 증명하기 위해서 떠나는근대적 주인공 페초린의 창조는 러시아문학사에서 가히 혁명적인 성취라고 할 수 있겠다.

 

* * *

 

 

 

 

 

 

 

 

 

 

 

 

(이십대에 써서 출간한 소설책들.)

 

불혹의 나이가 되면 절로 대가가 될 줄 믿었던 대학 시절, 처음으로 레르몬토프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다.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때론 열정적이고 강렬한 그의 시에 매료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헤어졌지만, 너의 초상은은 대학교 4학년 때 발표된 내 등단작의 제목의 일부이자 제사가 되기도 했다. 역시나 그 무렵에 처음 읽은 <우리시대의 영웅>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페초린-레르몬토프는 내 안의 몬스터처럼 무섭게 자라버린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의 배아였던 것이다. 이 작품이 내 청춘의 비망록처럼 읽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도...키 소설의 주인공들 중 레르몬토프-페초린의 직계는 아무래도 [악령]의 스타브로긴이죠.^^; 이른바 '지하인'은 페초린의 변태, 돌연변이랄까요. )

 

실상 <우리시대의 영웅>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데미안>처럼 우리 모두의 성장기, 우리 모두의 청춘에 대한 솔직한, 그래서 아름다운 기록이다. 고로, 이 작품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대가적인 필치로 펼쳐지는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아니라, 즉 삶 자체가 아니라 삶에 대한 풋풋한 기대와 애달픈 불안, 때로는 낯 뜨거운 엄살이다. 말하자면, 레르몬토프는 (그 시절의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사랑에 실패한 비극적인 연인의 역을 맡고자 했고, 삶을 채 살아보기도 전에 그것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본 양 조로와 피로의 포즈를 취했으며, 꿈을 제대로 키워보기도 전에 그 실현 불가능성에 탐닉하는, 또 삶에 배반당할 겨를도 미처 없었건만 그 배반에 분노하는 환멸의 시인이고자 했다.

 

 

 

 

 

 

 

 

 

 

 

 

 

 

 

작가에게 있어 환멸의 유일한 형식이 침묵이라면, 레르몬토프는 차라리 가슴 속에 펄펄 끓는 마그마를 담고 있었던 영원한 낭만주의자, 즉 영원한 청춘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자신의 초상이 곧 우리시대의 초상이 되기를 갈망했다. ‘우리시대의 영웅(주인공)’이라니, 얼마나 당돌한 제목인가. 이 작품보다 조금 더 전에 쓰인 비슷한 경향의 작품이 주인공의 이름을 제목으로 내건 것에 비하면(샤토브리앙의 <르네>, 콩스탕의 <아돌프> ) 이 역시 러시아문학 특유의 대책 없는 오만함과 극단의 발현일 것이다.

 

 

 

 

 

 

 

 

 

 

 

 

 

 

 

오랫동안 소망했지만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내 손으로 번역한 <우리시대의 영웅>을 내놓는다. 이로써 레르몬토프에게, 또 이 작품에 진 빚을 갚는 기분이다. 폭탄이라도 맞은 양 35세라는 나이테를 뒤집어쓰고 보니 27세라는 나이가 자살이라면 모를까 그냥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고 서러운 나이라는 것을 알겠다. 그러니까 레르몬토프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가 훗날 성공적인 데뷔작을 내놓으며 작가 인생을 막 시작할 나이에 목숨을 날려 버린 것이다! 27이라는 숫자를 곱씹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정확히 그 나이에 동경의 썰렁한 병원에서 죽어간 우리 문학의 영원한 청춘이자 모던 보이’, 이상(李箱)이 떠오른다. 문학이 좋으면 요절도 작가에게는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다. 한 인간으로서 레르몬토프의 비극은 오래 전에 끝났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작가로서 그의 희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민음사판 <우리시대의 영웅>에 표지를 제공한 브루벨의 <악마>. 레르-프의 서사시 <악마>의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레르몬토프-페초린의 문학적 자아. 몽환적이죠? ^^; 실제로 봤을 때 '악마'의 하체를 덮은 파란색이 무척 뇌쇄적이었던 것 같은데요...)

 

-- 오랜만에 내 소설책들을 (표지만^^;) 다시 보는데요, 특히 개인적으로 가장 실험적(??)이라고 생각하는(그래서 정말 너무 안 팔린 ㅠ.ㅠ) <그러니 어찌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에 제목을 제공한 소설(<얼음의 도가니>)의 저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네요. 어제 막 다 읽은 그의 최근 작품집,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두 권 짜리 <페스트>를 읽어내면서 고전한 기억도 있습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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