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의 내적 풍경:
권태와 우울을 발명하다
-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파리의 우울>은 작가 자신의 말마따나 ‘이상한’ 책이다. 에필로그를 포함하여 총 51편에 이르는 이 ‘소(小)산문시’는 니체의 아포리즘이나 카프카의 장편(掌篇) 소설을 미리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제목은 어떠한가. ‘파리의 우울’이라지만 이 책 속의 파리는 상당히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이 도시를 향해 시인은 외친다.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오, 더러운 수도여! / 창녀들, 그리고 강도들, 그대들은 대개 그처럼 자주 가져다준다. / 무지한 속물들은 알지 못하는 갖가지 쾌락을!”(「에필로그」, 287) 말하자면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파리의 외면이 아니라 내면이다. 그것에 작가는 ‘우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울과 권태는 모더니티의 수도, 즉 19세기의 파리를 몸으로 살아냈던 보들레르의 발명품이다. 이 독특하고 새로운 정서의 진앙은 시간, 혹은 시간에 대한 의식이 아닐까 한다.
오! 그렇다! ‘시간’이 다시 나타났다. 시간은 이제 지배자로 군림한다. 그리고 이 혐오스러운 늙은이 시간과 함께 추억, 회한, 경련, 공포, 고통, 악몽, 분노, 신경증 등 시간의 악마 같은 수행원들이 모두 되돌아왔다. / 맹세코 초침 소리가 이제 더욱 힘차고 엄숙하게, 일 초 일 초 시계추에서 튀어나와 말한다. “나는 ‘삶’이다. 견디기 힘든, 냉혹한 삶!” / 인간의 삶에서 어떤 희소식을 알려주는 임무를 띤 것은 다만 일 ‘초’에 지나지 않는다. 그 희소식이라는 것도 결국 우리에게 설명할 수 없는 공포를 불러일으킬 뿐이지만. / 그렇다! 시간이 군림한다. 시간이 그의 난폭한 독재권을 되찾았다. 그리고 시간은 마치 황소를 부리듯 그의 두 개의 바늘로 나를 몰아세운다. “이러! 짐승 놈아! 땀을 흘려 일해. 노예 녀석! 살아라, 망할 녀석아!”(「이중의 방」, 41)
무지막지한 시간 앞에서 시인은 정녕 나태의 화신에 지나지 않을까. 거리를 빌빌대거나(산책자!) 정반대로 방바닥을 긁는 것(몽상가!)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 ‘혁명의 시대’에 이어 ‘자본의 시대’가 도래했건만 우울과 권태에 절어 있는 자가 시간과 더불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게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당신의 어깨를 무너지게 하여 당신을 땅 쪽으로 꼬부라지게 하는 가증스러운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 당신은 쉴 새 없이 취해 있어야 한다. / 그러나 무엇에 취한다? 술이든, 시든, 덕이든, 그 어느 것이든 당신 마음대로다. 그러나 어쨌든 취해라. / 그리고 때때로 궁궐의 계단 위에서, 도랑가의 초록색 풀 위에서, 혹은 당신 방의 음울한 고독 가운데서 당신이 깨어나게 되고, 취기가 감소되거나 사라져버리거든 물어라. (중략) 그러면 바람도, 물결도, 별도, 새도, 시계도 당신에게 대답할 것이다. “이제 취할 시간이다!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취해라! 술이든, 시든, 덕이든 무엇이든, 당신 마음대로.”(「취해라」, 206-207)
이른바 취함의 미덕은 부르주아적인 절제와 중용에 정면으로 대치된다. 대체로 보들레르는 데카당스가 하나의 미학 체계로 확립되기 전부터 이미 퇴폐의 시인으로 자리매김 됐다. 놀라운 것은 그것과 첨예하게 대립하며 공존하는 민감한 윤리 의식이다.
(자화상, 이랍니다. 처음 봐요.)
가령 「괘씸한 유리 장수」에 재미있는 얘기가 나온다. 세상에 누구보다도 악의 없는 한 몽상가가 오직 “과연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쉽사리 불이 붙는지 어떤지 보기 위해서” 숲에 불을 지른다. 이어 화자는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준다. 어느 날 아침 무심코 창밖을 내려다보다가 유리 장수를 발견하는데 그에게 “갑작스러운 포악한 증오”를 느낀 나머지 괜히 그를 집까지(7층에 있다!) 불러들인 다음 온갖 생트집을 잡아 그를 밀치다시피 내려 보낸다.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가 다시 문 앞에 나타나자 화자는 발코니에서 조그만 화분 하나를 집어 그의 지게를 향해 수직으로 던진다. 유리 장수는 나뒹굴고 유리는 박살난다. 그러자 화자는 자신의 광기에 더욱더 도취되어 “인생을 아름답게! 인생을 아름답게!”라고 외친다.
‘악’을 향한 끌림은 자주 ‘선’을 향한 갈망을 동반한다. 마찬가지로 패륜적이고 패덕적인 무보상적 행위의 저변에 윤리와 도덕에 대한 강박관념이 깔려 있는 일이 왕왕 있다. 실제로 ‘악’으로 번역되는 프랑스어 단어(mal)에는 ‘고통’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보들레르에게 있어 문학 자체가 악덕에 빠진, 온갖 소외된 자들을 향한 고통과 연민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한데 그의 병적인 자학 속에 자기 연민은 없었던 것일까. 더 이상 웃지도, 울지도, 노래를 부르지도, 춤을 추지도 않는 늙은 광대를 보며 그는 큰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서 이 광경에 마음이 사로잡혀 나의 갑작스러운 고통을 분석해 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방금 본 것은 한 늙은 문학자의 이미지다. 그는 한 세대를 즐겁게 해준 훌륭한 광대였으나, 그 세대는 지나가 버린 것이다.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고, 어린애도 없으며, 그의 빈곤과 몰이해한 대중으로 인해 망가진 늙은 시인의 이미지! 잊기 잘하는 세상 사람들은 그의 막사에는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늙은 광대」, 94)
‘악-고통’의 꽃을 응시하며 우울과 권태에 몸부림치다 고독과 연민과 병마 속에서 죽어간 시인, 그런 시인의 이미지! 보들레르는 시를 통해, 더 정확히 자신의 시보다도 더 시적이었던 그 삶 자체를 통해 자신의 동갑내기인 두 소설가 플로베르,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업적을 성취했다. 바로 근대의 내적 풍경을 발견, 아니 발명하고 창조한 것이다.
-- 네이버캐스트
-- <악의 꽃>을 읽지 않고 보들레르를 말할 수 없지만 시를 읽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져 차선책(?)으로 택한 책이 <파리의 우울>이었는데, 십수년만에 다시 읽고 많이 놀랐더랬지요. 너무 '모던'(!)해서요. 언제부터인가 벤야민과 보들레르가 한 쌍이 됐어요 -_-;;
-- 시를 읽는 일이 어려워진다 했는데, 최근에, 간만에, 그리고 얼른 시집 두 권을 샀습니다. "오다, 서럽더라"와 "사는 기쁨". 두 시인의 (잘은 모르나) 삶의 궤적만큼이나 시 세계도 (일단 표제작부터!) 너무 다르지만, 다르기 때문에 둘 다 좋습니다 ㅎㅎ '정든 유곽'과 '즐거운 편지'가 세월이 흘러흘러 이런 모습이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