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살에 미국에 간 여자의 외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셨다고 한다. 그녀는 6년에 걸쳐 이 책을 썼다는데 아마도 그 6년 동안 방대한 자료조사를 했나 보다. 일본 식민지 시절을 산 인물들의 평전을 맨하튼에서 얼마나 구했을까. 그녀의 수고와 노력은 분명히 인정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소설 속 인물들 이야기 대부분이 누군가의 일화를 차용해온 거라면 그 인물들은 어디까지 창작된 거라 봐야 할까. 한국근현대사의 인물을 모르는 미국인들에게는 ˝톨스토이 스타일˝의 작품이라 찬사를 받았을 수 있겠지만, 국사를 배우고 자란 한국인에게 이 소설의 의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 노래가 연상될 만큼 수많은 일화는 너무 성기게 나열되어 있어 새로운 비단필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엔 한 숨 아쉽다.
주제의식의 불투명성은 오히려 납득이 간다. 어쩌면 외할머니는 인생사 새옹지마를 주문처럼 외우며 고달픈 이민생활을 이겨냈을지도 모른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로서 그녀에게 독립투사든 친일파든 지금은 머나먼 작은 땅에서 함께 사는 후손들이다. 그녀가 미국에서 온갖 인종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것과 매일반이라 생각했을까. 인물 하나 하나의 부침은 과거일 뿐 오늘날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 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세 여인의 인생사만은 간섭하고 싶다. 타고난 아름다움을 가진 월향은 결국 그 내적인 아름다움까지 알아본 양키와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가 딸과 함께 행복을 찾는다. 게으르고 의뭉스럽고 성급하며 용모도 예쁘지 않은 연화는 딸도 뺏기고 인생도 구렁텅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평범함과 예쁨의 딱 중간에 있으나 매력있던 옥희는 실패로 점철된 연애만 하다 자식도 없이 오래 오래 이 땅에서 늙어간다. 어쩐지 외모와 비례하는 삶인 거 같아 문득 불쾌한 건 나의 지나친 자격지심일까.
어쨌든 2016년에 이미 완성된 프롤로그가 이 소설의 가장 좋은 점이라는 것, 그리고 미국인들에게 이 땅을 살았던 야수들 이야기를 해준 것 두 가지만은 꽤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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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역꾸역 [작은 땅의 야수들]을 읽느라 힘들었던 거와 달리 <숲의 대화>는 술술 읽힌다. 역시 번역의 문제였던 걸까 잠깐 망설여 보기도 하지만. 아냐, 이건 편췌와 창작의 차이야 라고 마음을 굳히게 된 게 [혜화동 로터리]를 읽으면서. 절대 악도 절대 선도 아닌, 극좌도 극우도 없는, 만수산 칡넝쿨처럼 이러구러 살아가는 사람들인 건 마찬가지인데, 인물들이 훨씬 생생하다. 심지어 단편이라 지난 세월의 사연을 구구절절 보따리 풀지도 않았는데 더 맛있다.
확실히 정지아 작가는 나의 확증편향에 딱 들어맞는다. 좋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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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14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지아 작가 아버지의 해방일지 얼마전에 인상적으로 읽었어요. 그 삶에 대해서는 저는 뭐라고 말을 보태기가 힘들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리뷰는 패스했는데 또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건 참 신기하다고 할까 그렇네요. ^^

조선인 2022-11-14 1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쩌다가 정지아 작가의 소설을 연속적으로 읽고 있는데 <아버지의 해방일지>도 읽어보고 싶어요. 갑자기 베스트셀러가 되는 바람에 대출하기는 어려워 살까 말까 망설이는 중임다.

castle67 2023-02-07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취향의 차이일 수 있겠으나 <작은 땅의 야수들>이 읽기 힘들었다는 첫 줄에 공감력 덜어졌지만 정지아를 편향한다는 글엔 호기심 상승
 

직장인이라면, 갑질이라면 지긋지긋한 사람은 <판단>을 완독하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다 못 읽을 거, 스트레스 받지 말고 건너뛰시길. 내 경우 3쪽을 읽고 포기했는데 왜 굳이 3쪽이나 읽었을까 깊이 후회.
평소 스트레스지수가 높은 사람이라면 <슈퍼 사이버펑크 120분>과 <차세대 대형 로봇 플랫폼 구축 사업>도 마저 건너뛰길 추천한다. sf소설이라고 해놓고 이런 하이퍼리얼리티 소설을 싣다니 박사님, 실망이에요.
그래도 나머지는 다 재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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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07 2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곽재식씨 책 얼마전에 한 권 읽었는데 소설은 한번도 못봤네요. 재밌다고요? 생활밀착형 SF소설이라는 말이 또 재밌어서 일단 찜해봅니다. ^^

조선인 2022-11-07 20:33   좋아요 2 | URL
재밌습니다. 강추

책읽는나무 2022-11-07 2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도서관에서 이 책 빌리려다가 다른 책 먼저 빌려왔었거든요.
조금 후회되네요^^;;;
훗날 꼭 빌려와야겠네요.

조선인 2022-11-07 21:15   좋아요 1 | URL
꼭 보세요. 아주 단숨에 읽었어요
 














1. 에밀졸라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에밀 졸라의 글은 '나는 고발한다' 외에는 읽은 적이 없는 줄 알았는데, '목로주점'도 읽었던 걸 뒤늦게 깨달았다. 세 작품의 주제가 너무 판이하지만 저변의 공통점은 이 작가가 프랑스를 진심 사랑한다는 것이라 느낀다. 혼자라면 안 읽었을 책이나 막상 좋았다. 딸에게 읽으라고 강권중.
















2. 천선란 "노랜드"

도서관에서 우연히 골랐을 수도 있었겠지만, 찾아 읽지는 않았을 듯. 그러나 덕분에 생각이 참 많아졌고, 뒤늦게 수십번은 족히 봤던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을 찾아볼 생각도 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소설도 영화만큼 명작.















3. 양귀자 "희망"

읽어본 적도 없으면서 드라마나 영화로 많이 제작되었기에 편견을 가지고 꾸준히 멀리 했던 작가. 생각보다 사회성이 짙어 대학 시절 기억이 많이 떠올랐다. 유튜브에 올라온 옛 드라마 '희망'도 다시 보고, 고인이 되신 이낙훈 선생 모습도 보고, 뽕짝아줌마 신신애의 젊음에 감탄도 해 보고.















4. 합체

청소년 소설? 안 읽는다. 청소년 연극? 보러갈 리가. 근데 그 2개를 내가 다 했다. 심지어 연극 '합체'는 꼭 보라고 지방에 쫓아가서라도 보라고 온 사방에 광고를 냈더랬다. 원작이 좋은 것 이상으로 무장애 연극의 완성도가 높아 감동했다. 연출가, 배우, 수화통역가, 모두 만만세다. 


결론? 올 한 해 나의 시간이 뜻밖에 참 풍성했다. 하지 않았을 선택을 만날 때마다 초입은 늘 긴장이었지만, 모임을 할 때면 늘 할 말이 많았다. 회사에서도, 사적으로도 꽤 힘든 2022년이었는데, 지원사업이 내 숨통이 되어 주었다. 가끔 우리 딸은 나보고 잡학박사라며 알고 보면 환생 N번째? 실없는 농담을 하는데, 요새는 자신 있게 딸을 구박한다. 책을 읽어. 100권의 책을 읽으면 100권의 환생 체험이 가능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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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2-10-20 2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00 권의 책을 읽으면 100 번의 환생 체험!!ㅋㅋㅋ
전 100 번의 환생을 한 것 같진 않은데요 읽고 난 그 순간만큼은 환생한 것 기분을 느낀 것 같아 조금 공감되긴 합니다.
저는 한 40 번 정도의 환생 체험을 했???^^
올 해 풍성한 시간을 보내셨다니 축하드립니다^^

조선인 2022-10-20 21:31   좋아요 1 | URL
알라딘에서 같이 환생체험을 하던 시간이 그리워집니다. ^^

바람돌이 2022-10-20 2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100권의 환생체험에 확 꽂혔습니다. ㅎㅎ지난번에 말씀하신 독서모임인가봐요. 책들이 다양하네요. 독서모임은 다양한 책들을 읽을 수 있어 좋을거 같네요.
청소년 소설은 이제 안 읽는데 합체는 좋다고요? 작가를 보니 박지리 작가네요. 우리집 둘째가 이 작가님 좋아해요. 너무 빨리 돌아가셔서 안타까움이 더하는 작가네요.

조선인 2022-10-20 21:32   좋아요 1 | URL
박지리 작가 진짜 멋진데? 알아보니 이미 졸했다 하여 정말 충격먹었어요. 진짜 아까운 작가에요

mini74 2022-10-20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2회차가 아니고 인생100회차인가요 ㅎㅎ 따님 귀여워요 *^^*

조선인 2022-10-20 2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실 이면은 슬픈 이야기입니다. 우리 애들이 책을 안 읽어요. 너무 슬퍼요
 
[세트] 레슨 인 케미스트리 1~2 - 전2권
보니 가머스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다산북스 서평단으로 1권만 받았다. 뭐 그럴 수도 있지, 한꺼번에 2권을 보내는 건 출판사에게 부담이었을 거야 라고 생각했다. 1권을 읽고 보니 상술이었던 거다. 도서관에서 2권은 늘 대출중이었기에 얼른 2권을 사는 것만이 답이었던 거다. 그만큼 한 번 손에 들면 내처 끝까지 읽으야 하는 매력이 넘치는 책이다. 인물 하나 하나의 대사는 찰졌고, 각 인물의 성격은 그의 어휘나 말투에 생생히 배어 있다. 소설이 아니라 드라마가 먼저였던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생동감 넘치는 각자의 개성있는 대사를 보자면 왜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고, 드라마 판권이 팔렸는지 수긍이 간다. 게다가 그 묘미를 살린 번역이라니 심연희 님에게도 감사할 따름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1권보다 2권이 더 재밌었다. 1권은 엘리자베스 조트의 이야기에 집중되어 있다면, 2권은 그녀 주변의 여성들 이야기를 포함한다. 화학은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때 엘리자베스가 연구한 화학진화는 생명의 탄생의 비밀을 밝히는 것에 기여한 것 뿐 아니라 이 사회의 여성의 지위와 역할이 진화하는 것에도 기여한 것이다. 그녀의 딸, 그녀의 이웃, 그녀의 동료, 그녀의 방청객, 그녀의 인척 등 엘리자베스의 영향력은 동심원처럼 주변에 퍼져나갔고, 아마도 기꺼이 그녀의 자매가 된 여성들은 또 다른 동심원이 됐을 거라 믿는다. 


일면 로맨스 소설 같기도 하고 일면 판타지 소설 같기도 한 면면은 이 책의 흠이 아니다. 이 책이 획득한 대중적 인기는 요리 프로그램을 화학 수업으로 만들어 영향력을 행사한 조트의 궤적과 일치한다. 미국 페이퍼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붉은 옷의 여인과 칼라풀한 색상 배치 역시 흠이 아니다. 일견 흔한 겉표지를 벗겨보면 아름다운 원소기호의 알맹이가 나오는 것이 세상이 엘리자베스에게 씌운 굴레와 그 속에 있는 조트의 실체를 대비시키는 것 같아 오히려 재미있다. 사실 원자번호 49번 In 역시 의미심장한데, 인듐은 녹는 점이 낮은 부드러운 금속으로 쉽게 변화가 가능하며, 특히 TV 모니터에 사용되는 금속이라는 게, 이중 삼중의 함의를 가진 거 같아 흥미롭다. 하여 이 책의 디자인을 담당했을 이은혜님과 표지 디자니어에게도 깊이 감사 드린다.


무엇보다 이 흥미로운 책을 써주신 보니 가머스님에게 감사 드리는데, 은퇴 이후 쓴 최초의 소설이 최후의 소설이 되지 않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난 드라마 역시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바라는데, 시즌2, 시즌3를 거듭하면서 조트 외 수많은 여성의 이야기가 분명한 서사를 가지고 그려지길 바라며, 조트가 연구자로 성정하여 어쩌면 노벨화학상도 타는 이야기를 보고 싶고, 그녀의 딸이 가계도를 완성해나가는 이야기를 듣고 싶기 때문이다.


리뷰를 쓰며 감사를 거듭하는 건 내가 내 앞을 걸었던 여자 선배들을 감사하는 마음가 맞닿아 있다. 비록 이 소설은 실화를 다룬 게 아니지만, 난 실제로 수많은 엘리자베스 조트가 있었던 걸 알고 있다. 뉴턴만 거인의 어깨에 올라선 것이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시대를 앞서간 여성들의 어깨에 올라서 조금 더 수월하게 우리 인생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이고, 이제는 우리가 딸들의 세상이 더욱 평등하기를, 더욱 평화롭기를, 더욱 공존과 상생이 가능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함이다. 카피라이터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흔치 않은 여성 조정선수로 살았던 작가였기에, 본인이 살아온 시대에 도움을 주었던 자신의 선배 이야기를 쓴 거라 생각해 본다. 나는 내 딸에게 어떤 이야기를 더 들려줄 수 있을지 곰곰히 더 짚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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