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고등학교에 들어간 아들이 추천하여 읽게 되었다. 아들이 권한 단편은 책 이름이기도 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그 한 편. 추천할 만 하다 흐뭇하게 첫번째 단편을 맛있게 읽고 나니 그 다음은 죄다 소화하기 거북한 욕망 덩어리들이다. 저열하지만 한번쯤 남자들이 했을 뻔한 상상들이 활자가 되니 화사하게 여겼던 노란 표지는 이젠 누런 토사물같이 보인다. 내 취향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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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7-05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이 책 막 낄낄거리면서 재밋게 봣던거 같은데.... 읽은지 오래 돼서 기억은 가물가물하네요. 둘째가 고등학생이군요. 여전히 꽃미남이겠죠? 그래도 간간히 조선인님 소식 올려주시니 좋네요. ^^

조선인 2022-07-05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미남은요. 여드름 덕지덕지입니다. 너무 간간히라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어려서 나는 봄을 싫어했다. 사춘기 시절에는 무서워하기까지 했다. 겨우내 죽은 듯 잠들어있던 나무들이 미친 듯이 꽃을 피워올리고 황무지인 줄 알았던 대지가 하루가 다르게 시퍼렇게 울창해질 때, 그 미친 듯한 생명력이 나를 두렵게 했다. 엘리어트가 괜히 4월은 잔인한 달이라 목멘 것이 아니라 믿었다.
언젠가 지구는 식물들에게 점령되고 말 거야. 우리 동물들은 다 저들의 양분으로 잡아먹힐 거야. 어쩌면 저들이 먹이로 삼기 위해 일부러 동물을 만들어내고 키우고 있는지도 몰라. 약간의 공상과학적 상상력이 더해져 식물이 떨어뜨려주는 과일 한쪽으로 간신히 연명해가며 덩굴에 묶여 오도가도 못하고 온몸을 뒤덮은 잔뿌리에 쪽쪽 내 몸이 빨려나가는 악몽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초록색 물감에 독 성분이 있었기에 많은 화가들이 죽거나 아팠었다는 걸 읽은 뒤에는 이거야말로 멋모르고 나대는 인간에 대한 식물의 준엄한 경고라 여겼다.
대학교 교양으로 <환경과 인간>이라는 과목을 들은 건 반성의 계기였다. 수업은 정말 지루하고 재미없었지만 교재만은 매우 흥미로웠다. 인간이 지구의 다른 생명체에게 가하는 폭력에 대한 고발이 책장마다 선연히 이어졌고, 가이아 지구에 대한 강사의 신념이 서슬 퍼랬다. 연구는 열심히 하면서, 책은 잘 쓰면서, 왜 교수법은 엉망이냐 조금은 안타까워하며, 그 수업은 잠자는 시간이거나 다른 수업 과제하는 시간으로 유용했다. 그렇게 잊고 있었던 강사의 모습이 왠지 이 책의 저자와 닮은 꼴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예삐꽃방을 비난하며 차라리 화분을 사라고, 아니면 아예 식물을 기를 생각을 하지 말라던 그녀의 당부가 이 책에서 느껴져 혹시 동일인물인가 작가의 나이를 슬쩍 확인해보기도 했다. 수업태도는 한없이 불량했으나 그녀 덕분에 환경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걸 뒤늦게나마 전해주고 싶다.
다만 이 책은 그때 그 분과 목소리는 매우 다르다. 때로는 마이크에서 삑 소리가 날 정도로 쇳소리로 열변을 토하던 그녀와 달리 저자는 시종일관 차분하고 자분자분하다. 여러 번 접힌 자국이 있기에 인간이 어우러진 식뮬 풍경을 더 너그럽게 보고 계시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조용하고 낮지만 더 힘있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울림이 있다.
뱀꼬리) 내 손으로 화분을 사진 않지만 어쩌다 선물 받으면 참 열심히 보살피는 편인데 항상 몇 달 못 가고 죽었다. 드디어 그 원인을 이 책 덕분에 알게 됐다. 난대 또는 아열대 지방에서 온 식물이 살기에 우리집은 항상 너무 추웠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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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식물상담소 - 식물들이 당신에게 건네는 이야기
신혜우 지음 / 브라이트(다산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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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쪽. 접힌 채로면 또 어떤가. 접힌 모양으로 다른 걸 만든다면 더 멋진 무엇이 될 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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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탐구하는 미술관 - 이탈리아 복원사의 매혹적인 회화 수업
이다(윤성희) 지음 / 브라이트(다산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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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틴토레토의 그림을 좋아했다는 게 기억났다. 언젠가는 내 눈으로 직접 이 그림을 보러 가리라 결심했던 사춘기 시절이 분명 내게 있었다. 그러니 베네치아는 무조건 가야 한다. 듀칼레 궁전에 가서 그의 한없이 어둠에 가까운 '천국'을 봐야 한다. 이왕 듀칼레 궁전에 가는 거니 만테냐의 ' 부부의 방'도 봐야 한다. 그 토실토실한 천사 궁둥이를 올려다 봐야 한다.

산 로코 회당에 도배된 틴토레토는 필수 코스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안 봐도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은 봐야 하니 성 조르조 마조레 성당도 가야 한다. 조각가 중 자코메티를 가장 좋아하는 나로선 그가 틴토레토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에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도 했다.


다음으로 갈 도시는 밀라노다. 패션이나 명품과는 담 쌓은 나이니 브레라 미술관만 들리면 된다. 핵심은 만테냐의 '죽은 그리스도'이다. 유독 이 삽화는 2번이나 책에 실린 것으로 봐서 작가는 이 그림을 제일 좋아하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브레라 미술관에서 봐야 할 두번째를 꼽는다면 '브레라 제단화'이다. 절대 미학의 원근법이 주는 입체감을 나도 느껴보고 싶기 때문이다.


두 도시를 보고도 시간과 돈이 허락된다면 피렌체가 세번째 코스다. 브랑카치 예베당에 가서 마사초의 세례받는 젊은이를 봐야 하고, 산마르코 수도원에 가서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도 봐야 한다. 산 미니아토 성당에 가서 세례 요한의 게자리를 보고 싶은 생각도 있긴 한데 6월 24일에 맞춰가면 이미 한여름일까 아니면 북부니 괜찮을까 벌써부터 걱정해 본다.


이렇게 이탈리아의 북동과 북서에서 중북부로 이동을 한 다음에도 여유가 된다면 비첸차에 들러 올림피아 극장에 가보고 싶다. 다만 이렇게 되면 동선이 꼬인다. 사실 비행기 노선을 생각하면 밀라노로 입국한 뒤 비첸차에 들렀다가 베니스로 갔다가 피렌체에서 출국하는 게 맞다. 아니면 그 역순이거나. 어떤 식으로 동선을 짜더라도 그 여행의 준비물 중 하나는 이 책일 것이다.


읽는 내내 여행 계획을 병행하느라 마음은 한없이 즐거웠고, 풍부한 삽화 덕분에 눈은 더욱 즐거웠다. 다만 르네상스의 아름다움으로 추앙받았던 시모네타 베스푸치의 일화는 뒷맛이 아렸다. 남의 집 유부녀의 사후에 지 맘대로 홀딱 벗겨 상상화를 그려댔던 화가들의 파렴치함이 성범죄와 무엇이 다르리오. 신이 아닌 인간에 시선을 돌리고 이성과 과학을 찬양했던 화가들에게 성모 마리아를 제외한 여성은 여전히 눈요기감이었던 걸까 아쉬웠다. 틴토레토의 딸 마리에타 로부스티가 끝내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숨겨진 화가로 살아야 했던 시대적 한계가 느껴지는 일화였다.


그나저나 이탈리아 여행은 아직 요원한 꿈이니 당장은 이건희 전시회 4차에 재도전할 일이다. 운이 좋으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건희가 무슨 위인이라도 되는 것 마냥 치켜세워지는 것은 마땅치 않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교과서에서 보던 명화들을 한 자리에 모아 볼 수 있는 것에 조금은 감사해도 되지 않을까.


= 다산북스 서평단으로 읽게 된 책이지만, 이렇게 기꺼운 마음으로 리뷰를 쓸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출판사에도 감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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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멩코 추는 남자 (벚꽃에디션) - 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허태연 지음 / 다산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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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어머니 기일이었다. 내려가는 기차여행의 동반자가 된 이 책은 정말 술술 읽혀내리는 필력이 있어 2시간 남짓의 짧은 시간에도 완독이 가능했다. 

소설의 모든 이야기는 작중 아버지의 시선에서 전개된다. 그러나 내가 궁금한 건 둘째 딸의 속마음이었다. 수강생에게 지나치게 세심하고 곰살맞았던 플라멩코 강사는 아니나 다를까, 둘째 딸의 연인이었다. 아버지의 건강과 패션을 챙겼던 건 실상 강사가 아니라 그를 경유한 둘째 딸이었을 거라는 꽤 강력한 심증을 가지게 된다. 어머니나 자신에게 참으로 무뚝뚝하고 무관심하며, 사랑을 물질적 여유로만 표현할 줄 알아 일에만 열중했던 아버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째딸은 아버지를 퍽이나 사랑하는 듯했다. 외동딸인 줄만 알았는데 사실은 둘째딸이라는 건 안 순간의 배신감은 과연 치유될 수 있을까. 끝내 큰 딸을 데리고 여행 가는 아버지에게 둘째딸은 한 푼이라도 여행경비를 대주고 싶었을까. 아버지가 기념품을 사오면 기꺼이 받았을까. 하필 어머니를 보러 가는 길이었기에 나의 상상력은 한없이 둘째 딸에게 투영될 따름이었다.

작가에게 살짝 원망하는 마음도 생겼다. 우리나라에 몇 없는 여성작가의 이름을 단 문학상 수상자인데 어찌 딸이 아니라 아버지의 시선에서 써내려갔단 말인가. 마구마구 투덜대다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게 이 작가의 진짜 영리함이구나 작은 깨달음이 왔다. 만약 둘째 딸 또는 첫째 딸의 관점에서 소설을 썼다면 이 나라에서 참 흔하디 흔한 소재, 뻔한 신파극 혹은 눈물 짜내는 드라마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접근했기에 무거워지지 않고, 살짝 코믹이 감미된 가족주의 소설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게다. 아마도 심사위원들도 그 영리함에 상을 내주기로 결정했지 않았을까.

어쨌든.

청년일지라는 이름은 아니지만 나름 버킷리스트를 이미 써봤던 나로선... 청결하고 근사한 노인 되기... 이 하나는 공감해주기로 한다.


※ 다산북스 서평단 지원을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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