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친구네 돌잔치가 있었다. 옆지기는 피곤하다 하여 열외시키고, 마로와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낮잠을 제때 못잔 딸아이는 타자마자 도르랑거리며 잠이 들었다. 나도 따라 설풋 잠이 들었다가...
싸움소리에 잠이 깼다. 비몽사몽 무슨 일인가 둘레 둘레. 경로석에 앉아계신 2분 할아버지가 말다툼을 하셨고, 그 앞에는 남산만한 배를 한 임산부와 5살 가량의 사내아이가 서 있었다. 두분의 오가는 언성을 대충 종합해보니 원래 임산부와 사내아이가 같이 앉아있었는데, 약주를 하신 할아버지께서 타셨고, 이분이 노골적으로 비틀거리며 임산부를 무릎으로 툭! 팔꿈치로 툭! 이리 툭! 저리 툭! 그리하여 양보를 받자, 그 옆에 계시던 할아버지께서 아직 젊어보이는데 굳이 임산부한테 자리양보를 받냐며 한소리하신 게 싸움의 발단이었나 보다.
임산부는 그 앞에 계속 서있기 민망했는지 일반석쪽으로 슬쩍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새로 앉은 할아버지는 나도 환갑이 넘었다, 노인장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 하냐 계속 역성을 내셨고, 칠순은 족히 넘으신 할아버지는 꽤나 조목조목 이치를 따지셨지만, 상대가 그럼 너나 양보해라 반말짓거리를 하자 덩달아 언성이 높아져갔다.
마로를 품에 안고 앉아있던 나로선 임산부 바로 앞에 앉은 청년이 일어나기만 기다렸다. 20대 초반의 청년은 열심히 싸움구경을 했지만, 바로 앞에 서있는 배부른 여인도, 다리 아프다며 몇 정거장이나 더 남았냐며 연신 물어대는 사내아이도 눈에 들어오지 않나 보다. 일요일 저녁시간이다 보니 등산후 피곤에 지쳐 잠든 어르신들이 좌석의 대부분인지라 난 정말 열심히 "일어나라 청년"을 속으로 외쳤지만, 싸움구경에 흥미를 잃고 오락을 하는 꼴을 보자 치사하다 싶어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이런. 선잠이 깬 마로는 비명을 지르며 울고, 무안하게도 난 도로 앉아 마로를 다시 재워야했다.
이제 나의 희망은 다시 청년. 아줌마 기질을 발휘해 혼자말인양 떠들었다. "어휴, 애가 힘들겠다. 산모도 만삭인데. 누가 자리양보해주면 좋을텐데." 순간 무심코 고개를 돌린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으나, 청년은 재빨리 다시 핸드폰게임에 열중. 헉. 강적이다.
그 순간 다행히 맞은편 좌석에 자리가 생겼다. 난 흥분해 소리쳤다. "뒤에 자리났어욧!" 그러나 임산부가 고맙다고 내게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리는 사이, 이미 한쌍의 젊은 남녀가 잽싸게 이동했고, 남자의 양보를 받으며 여자는 좋아라 앉았다. 임산부는 몹시 멋적게 웃으며 다시 나를 봤고, 나 역시 씁쓸한 미소로 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옆자리 승객이 일어나길래 내가 "또 자리!"를 외쳐봤지만, 이번에도 젊은 연인이 재빨랐다. 여자가 잽싸게 가방을 옆으로 던져 자리를 맡아 남자친구를 앉힌 것이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화가 너무 나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버둥거리는 마로를 안고 일어났지만, 임산부는 아들을 데리고 내려버렸다. 목적지에 도착한 걸까?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에게 더 이상 몰상식한 사람들을 보여주기 싫어 내린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저주뿐이다. 어이~ 청년! 그리고 한쌍의 연인! 얼른 결혼해서 애 열명만 줄줄이 낳아라. 분명 니들한테 양보해주는 사람이 1명도 없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