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동거인에 대해서 내가 모르는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니까 말이다. 마치 양파 껍질을 하나씩 벗기듯, 그는 지금까지 내가 본 적 없는 속살을 보여준다.
앉아서 오줌을 누는 것이냐?
동거인이 앉아서 오줌을 눈다는 걸 나는 오늘 처음 알았다. 동거인이 화장실에 있는 줄도 모르고 문을 벌컥 열었는데 변기 위에 그가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당연히 그가 큰일을 보고 있는 줄 알고 문을 닫으려는데 똥냄새가 안나는 것이다. 대신 쉬이 하는 오줌 누는 소리만 들렸다. 볼 일을 보고 나오는 그에게 물었다. “앉아서 오줌 누는 것이냐?” “그렇다”고 동거인은 대답한다. 우하, 앉아서 오줌을 누다니, 언제부터, 왜, 그런 것이야?
나의 호들갑에 동거인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서서 누면 오줌이 튀잖아.” 그래? 오줌이 튀거나 말거나 굳건히 서서 누는 남자들이 수두룩한데, 너는 어찌하여 오줌 튀는 걸 그리 예민하게 받아들인 것이냐? 오줌 튄 자국이 누런 땟국물로 변해도, 변기에 오줌방울이 묻어 찐득거려도, 화장실에 오줌냄새가 진동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오늘도 서서 조준하는 느낌을 즐기는 남자들이 대부분이거늘, 너는 어찌하여 앉아서 누면 오줌이 튀지 않아 좋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이냐?
어쩐지, 우리집 화장실은 늘 변기가 내려져 있었다. 동거인이 작은 일을 보건, 큰일을 보건 변기는 언제나 내가 쓰기 편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남자들은 오줌을 눌 때 늘 변기를 올리고 서서 일을 본다. 그리고 일을 본 후 변기를 내려놓지 않아 아내나 딸들에게 잔소리를 듣는 경우가 많다. 많은 여자들이 신혼 초에 오줌 튄 변기를 청소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온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집 변기는 여자들만 쓰는 것처럼 깨끗한데다 항상 변기가 내려져있었다. 동거인이 오줌을 누고 나서 한번쯤 변기 내리는 걸 까먹을 만도 한데 말이다. 나는 동거인이 참 예의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가 다음에 화장실을 이용할 나를 위해 예의바른 배려를 해준 것이 아니었다. 그도 나처럼 앉아서 오줌을 눴기 때문에 후속조치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건 나도 예상치 못한 일이다. 갑자기 그가 평생의 동지처럼 느껴졌다. 단지 ‘오줌을 튀기지 않아 쾌적한 화장실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실용적인 이유로 그는 그렇게 했지만, 나는 그 행위 뒤에 숨은 의미가 더욱 중요하다.
오줌 튄 변기 청소해봤어?
그가 앉아서 오줌 눈다는 사실에 내가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건, 그가 소위 ‘남성성의 관철’에 그닥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것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앉아서 오줌 누는’ 행위는 남성성의 도식으로부터 자유로운 결정판이 아닌가. 변기에 오줌이 튀어 냄새가 나고 더러워도, 서서 오줌 누는 것이 ‘남자’라는 생각 때문에 아직도 대다수의 남성들이 변기 앞에 서서 조준을 하고 있지 않은가. 화장실을 같이 쓰는 여성들의 불쾌함이나 잔소리도 ‘남자’답게 사는 것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아니, 그런 ‘사소한’ 이유로 앉아서 오줌을 눌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어떻게 남자가 앉아서 오줌을 눠?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십년도 더 된 일인 것 같다. 서울의 모 대학교에서 남학생들이 ‘앉아서 오줌 누기’ 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남자들이 앉아서 오줌 누는 걸 운동씩이나 벌이다니, 이건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남성 페미니스트들이라 자칭하면서 운동에 참여한 남학생의 인터뷰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서서 오줌 누는 것은 남성성의 중요한 부분이다. ‘쭈그려’ 앉아서 오줌 누는 여자들에 대한 우위성을 ‘서서’ 오줌 눌 때마다 확인하는 것이다. 앉아서 오줌을 누는 건 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한번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라는 요지였다. 자기 안의 남성성을 성찰하고 여성을 이해하기 위해 쉽지 않은 시도를 한 그 남학생이 참 멋져보였다.

▲서서 오줌누는 아이상. 어렸을 때부터 남자들은 오줌을 누면서 성기크기와 오줌발 등을 경쟁한다.
남학생들의 앉아서 오줌누기 운동
그의 말처럼 서서 오줌을 누는 행위는 ‘남자됨’을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는 중요한 행위다. 어렸을 때부터 남자아이들은 오줌을 누면서 성기의 크기와 오줌발 등을 비교하고 경쟁한다. 두 발을 널찍이 벌린 채, 더욱 강하게, 더욱 멀리 오줌을 쏴대는 모습은 강한 남성의 상징처럼 여전히 대중문화 속에 등장하기도 한다. 서서 오줌 누는 강한 남성의 이미지는 ‘쭈그려’ 오줌 누는 여성에 대한 비하를 근간으로 한다. 여성들이 볼 일을 보기 위해 앉는 자세를 ‘쭈그리다’고 표현한다든가, ‘찔끔찔끔 싼다’는 말들이 그렇다. 서서 오줌발을 날려대는 남성 이미지와, 쭈그리고 앉아 찔끔찔끔 싸는 여성 이미지가 대조되는 것이다. 그렇게 여성은 오줌 누는 행위까지도, 서서 오줌누는 남성들에 비해 열등한 이미지로 훈육된다.
이처럼 하루에도 수차례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행위 속에 숨어있는 권력의 의미를 간파해내기란 쉽지 않다. 간파해냈다 해도, 앉아서 오줌 누는 것을 실천에 옮기기란 쉽지 않다. ‘앉아서 오줌 누기’는 ‘여자처럼’ 되어간다는, 남성들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낙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몇 년 전 앉아서 오줌누기 운동을 벌였던 그 남학생들이 아직도 앉아서 오줌을 누고 있는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학교를 떠나 사회로 직장으로 나갔을 그들이 여전히 자기안의 남성성의 어두운 그림자를 떨쳐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 대한민국은 그나마 조금씩 진보하고 있는 것이다.
남성성의 어두운 그림자를 떨쳐내자
동거인은 물론 그런 ‘정치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그의 ‘앉아서 오줌누기’는 다분히 실용적인 측면에서 시작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변기 크기만큼의 공간에 맞춰 오줌을 서서 잘 누기란 쉽지 않다. 오줌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속도와 양으로 나오는 것도 아닌데 서서 누다보면 거의 조금씩 흘리게 되어 있다. 앉아서 누면 그럴 위험은 거의 없고 다리도 안 아프니 서서 눌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 시작은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었을지 모르나, 그 의미는 다분히 정치적이다. 앉아서 오줌을 누는 남자는, 서서 오줌발을 날려대는 남자들보다 훨씬 더 타인의 괴로움과 고통에 대해 민감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모두의 쾌적함을 위해 남성성의 이미지를 버릴 수 있다면, 그것이 진보이고 진화이지 않겠는가.
퍼온곳 : http://blog.ohmynews.com/feminif/3356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