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오래간만에 개인적으로 기쁜 소식이 있어서 올립니다. 이번에 운 좋게도 <브라더>라는 창작 장편소설을 출간하게 되어, 홍보영업광고선전선동을 위해서 한 1년만에 글을 쓰네요. 무명의 신인 작가이다 보니, 출간 직후 열흘이 지나도 별 반응이 없고 조용히 잊히기만 해서 뭐라도 해보자 해서 예전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이곳에 글을 남겨봅니다.

 

요즘은 들어오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서도, 혹시나 간혹 제 서재에 들어오시는 분이 있으면 <브라더> 꼭 기억해주세요. 조폭세계가 주된 배경이지만 추리소설풍의 트릭도 있고, 남녀 4인의 시각으로 전개되는 등 구성적인 면에서도 재주껏 힘을 기울였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을 테지만, 겸허하게 반응을 기다려보고 싶네요. 지금은 악플보다 무서운 무플 상태라ㅠ.ㅠ 솔직히 독자분들의 반응이 너무 궁금하거든요.

 

그럼 모처럼 들어와 홍보영업광고선전선동만 하고 가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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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3-07-07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대박 나시길!

jedai2000 2013-07-07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대박은 기대도 안 하고요^^;; 소박...아니, 중박만ㅎㅎ 야클님 응원 정말 감사드립니다!

쥬베이 2013-07-07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님!!!!!!!! 제다이님!!!!!!!!!!
이런 완전 대박 소식을 들고 오시다니!!! 이제 소설가 제다이님으로 불러야 하나요??ㅋㅋ
소설가 데뷔 축하드립니다^^
제가 꼭 읽고 서평 남기겠습니다.
사적인 감정없이 최대한 객관적으로 냉정한(ㅋ) 평가를 내리겠으니 긴장하세요ㅋㅋㅋ

소설가 제다이님 만세!!!!!! ^^

2013-07-07 2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08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3-07-07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좋은 반응 얻기를 바랍니다^^

이매지 2013-07-08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제다이님 <브라더> 기억하겠습니다. ㅎㅎㅎ

jedai2000 2013-07-08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베이님...아이고, 반갑습니다ㅠ.ㅠ 반가워해주시니 너무 기뻐요. 실은 1년만에 나타나 홍보 글만 띡 던져놨다고 뭐라고 하실까 봐(멘탈이 유리라서요ㅎㅎ) 엄청 걱정했거든요. 이래서 오래된 곳이 좋은 곳인가 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냉정...하지 않으셔도^^;; 다시 한 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프레이야님...네,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랜만에 보는 프레이야님 아이디, 너무 반갑네요^^

이매지님...이매지님도 정말 반갑습니다. 브라자도 아닌 브라더! 꼭 기억해주세용. 저도 이제 나이를 먹어서, 아저씨 저질 개그 죄송합니다(__)
 
빅 클락
케네스 피어링 지음, 이동윤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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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는 괜찮은 할리우드 스릴러영화들이 제법 있었다. 얼핏 기억나는 작품을 몇 개 뽑아보자면 일단 <해리슨 포드의 의혹>, 스콧 터로의 걸작 법정소설 <무죄추정>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당연히 해리슨 포드가 주인공이다. 지금은 셰익스피어 전문배우로 더 유명한 케네스 브래너가 감독하고, 주연까지 한 <환생>도 으스스한 서스펜스가 넘쳐났던 작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 웨이 아웃>. <언터처블>로 한창 뜨고 있던 케빈 코스트너가 한창때의 멋진 모습을 뽐냈던 잊지 못할 스릴러영화의 고전으로 아주 어렸을 때 봤지만 가슴이 타들어가는 긴박한 장면들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날 정도,

 

 

<빅 클락>이 그런 <노 웨이 아웃>의 원작이라고 해서 읽어보았다. 알고 보니 <노 웨이 아웃><빅 클락>의 두 번째 영화판이더라. 5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가 원래 있었다고. 아무튼 <노 웨이 아웃>이 미해군을 배경으로 소련(당시 기준) 스파이까지 나오는 등 스케일이 좀 더 크다면, 원작 <빅 클락>은 주로 출판사에서 모든 일이 벌어지는 살짝 소소한 이야기다. 물론 <고질라>가 최고의 스릴러영화가 아니듯이 스케일의 크기와 스릴의 크기는 아무 상관이 없다. 절묘한 상황 설정과 심장이 죄어오는 듯한 긴박한 분위기, 폭발적인 클라이맥스만 유지한다면 8평짜리 아파트에서 등장인물 두 명만 갖고도 충분히 매력적인 스릴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 <빅 클락>은 위에 언급한 몇 가지 잘된 스릴러의 필요, 충분조건을 남김없이 갖고 있는 소설이었다. 먼저 대강의 줄거리를 보자. 거대 출판사 사장의 애인과 불륜관계에 빠진 주인공 스트라우드. 홧김에 애인을 살해한 사장은 스트라우드에게 유일한 목격자인 어둠 속의 남자를 찾아내라는 지시를 내린다. 하지만 어둠 속에 있어 사장이 얼굴을 보지 못한 그 목격자는 다름 아닌 스트라우드 자신이었던 것이다. 이제 스트라우드는 자기 자신을 추적하는 팀을 조직해 스스로를 사냥해야만 한다!

 

 

한마디로 해설에서 멋지게 표현한 것처럼 자신을 추척하는 사람이라는 끝내주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제목의 <빅 클락>이 상징하듯, 시계 부속처럼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현대인들이, 영원히 멈추지 않고 재깍재깍 돌아가는 현대 문명의 거대한 시계 속에서 조금씩 그 본질을 잃어간다는 주제도 마음에 든다. 각 장마다 화자가 달라지는 구성 또한 독서의 지루함을 줄여주는 역할을 해서 만족스러웠다. 개인적인 취향에 가깝겠지만 분량이 다소 짧은 점도 나쁘지 않았다. 주인공의 대소사, 가정사, 여담, 객담을 끝없이 늘어놓는 요즘 스릴러에 독자들이 과연 진정한 스릴을 느낄 수 있을까. 내 생각에 서스펜스 스릴러는 플롯 진행에 꼭 필요한 이야기 위주로 날렵하고 군더더기 없이 뻗어나갈 때 가장 밝은 빛이 나는 것 같다. 반드시 몰입할 수밖에 없는 줄거리에 마치 히치콕 영화와 같은 경제적인 진행, 그것이 <빅 클락>이 가지고 있는 궁극의 장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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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2-11-28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님 간만에 리뷰 남기셨네요. ^^ <노 웨이 아웃>의 원작이라면 안 볼 수 없군요.

jedai2000 2012-11-28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야클 님.

리뷰를 쓰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는데, 그놈의 시간이 발목을 잡네요ㅜ.ㅜ
앞으로는 자주 쓰겠습니다. 자주 뵈어요~~
 
7년전쟁 세트 - 전5권 7년전쟁
김성한 지음 / 산천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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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소설을 즐겨 읽는다. 물론 대다수의 역사소설은 권수가 무척 많은지라 자주 붙잡을 수 없고, 또 슬프게도 오랜 시간을 기꺼이 투자할 만큼 만족스러운 역사소설도 그리 왕왕 눈에 띄지는 않아 1년에 한두 편에 불과하지만. 언제 역사소설을 읽고 싶으냐면, 저녁 밥값을 고민할 때나 장바구니에 넣어둔 물건을 살까 말까 줄기차게 재는 상황에서 주로 생각난다. 다시 말해, 팍팍한 현실에 움츠러든 내 모습이 싫어지는 순간 억눌린 내 마음은 장쾌한 역사의 현장 속으로 달음박질 쳐가는 것이다.

 

역사소설은 이미 끝이 정해져 있는 얘기다. 그래서 역사 속 실존인물들의 행보를 가슴이 터질 만큼 조마조마하게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 충신열사, 재자가인, 장삼이사, 기군역적의 다채로운 인간군상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흥미로운 인간 드라마를 때로는 감탄하며 혹은 비분강개하며 죽 감상하면 되는 일이다. 소설보다 실제 있었던 일이 더욱 흥미롭다는 말처럼 대부분의 역사는 알면 알수록 재미나고, 게다가 오늘날의 삶에 충분히 되살릴 수 있는 교훈까지 제공하고 있으니 읽어서 손해 볼 걱정이 없다.

 

역사소설이 이렇게 재미있고 가치 있는 것이라지만 그래서 내가 무엇을 읽었나를 생각해보면 조금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3할이 사실이요, 7할이 허구라는 <삼국지> 등의 중국 고전이나 일본의 역사소설 거장 시바 료타로의 작품들을 주로 읽어왔는데, 남의 나라 역사만 줄기차게 들고파는 것도 물론 장점이 있겠으나, 먼저 우리 것을 알고 밖으로 눈을 돌리는 게 순서가 아닐까 하는 의문은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다른 나라의 뛰어난 역사소설에 버금가거나 혹은 능가하는 작품을 쉽사리 찾지는 못했다. 그러던 차에 만나게 된 김성한의 <칠년전쟁>은 과장을 조금 보태 내게는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일독의 가치가 있는' 우리의, 우리만의 역사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국어 교과서를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90년대 중고교 교과서에는 김성한의 <바비도>나 <오분간> 등의 단편이 실려 있었다. 당시에도 우리나라 작가가 중세 유럽의 종교재판을 소재로 소설(<바비도>)을 썼다는 게 이채로웠는데, 이른바 '순문학' 작가로 활동하던 시기에도 첨예한 역사적 순간을 배경으로 삼았던 걸 보면 원래 역사에 예리한 감각이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작가인 듯하다. 실제로 60년대에는 영국에서 역사학을 정식으로 공부했고, 작가생활의 말년에는 본격적으로 역사소설을 집필했다고 한다. 아마도 임진왜란을 다룬 <칠년전쟁>을 이 시기, 김성한의 대표작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 같다.

 

임진왜란이 왜 일어났고, 어떤 양상으로 전개됐으며, 어떻게 끝을 맺게 되었는가. <칠년전쟁>의 핵심이라 할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백년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했고, 조선은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운 절체절명의 상황까지 몰리다가 수군대장 이순신이 분전해 일본군을 쳐부수어서 전쟁이 끝났다, 이 정도밖에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전쟁이 7년 동안 지속된 것도 몰랐고, 정유재란이라는 일본군의 2차 침공에 대해서도 깜깜했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임진왜란에 대해 나와 비슷한 수준의 지식만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내가 너무 얕보는 건가)? 임진왜란이 동북아 삼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던 대전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상황에 대한 무지는 가슴 아픈 부분이다. 오늘날에도 한중일, 삼국은 각자의 이익과 자구를 위해 열심히 경쟁하고 있는 처지니까. 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있듯이 과거의 전쟁을 자세히 알면, 그 공부 속에서 오늘날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찾아내어 향후의 전략을 세워볼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에 나온 김성한의 <칠년전쟁>이 요즘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리라.

 

전5권으로 된 <칠년전쟁>의 각권 내용을 거칠게 요약해보자면 1권에서는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거쳐 명나라까지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부리자, 조선과 일본의 중계무역으로 먹고 사는 쓰시마(대마도) 도주 이하 신하들은 전쟁을 막기 위해 총력을 다한다. 서서히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막후에서 펼쳐지는 이 치열한 외교전은 임진왜란을 다룬 어느 매체에서도 본 적이 없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마침내 20만 일본 대군의 침공이 시작되는 2권에서는 문치주의를 숭상해 전혀 방비가 되지 않은 조선이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조선 왕, 선조가 명의 국경과 맞닿은 의주까지 피난을 갈 정도였으니 그 참상이 오죽했겠는가.

 

전쟁 초기의 충격에서 벗어나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전라도 수군대장 이순신이 바다에서 일본군을 격파해 그들의 보급망을 끊어버리는 조선의 반격이 3권의 줄거리다. 이즈음 선조는 명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고 지난한 노력 끝에 마침내 명의 파병 승인을 이끌어낸다. 명나라의 원군과 조선군의 합동작전으로 평양을 탈환하고,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지친 일본군이 서울에서 방어선을 치며 전쟁은 장기화 조짐을 보인다. 한편 명에서는 희대의 걸물 심유경이 등장해 삼국의 화평을 중계하여 크게 한탕을 할 계획을 세운다. 민간에서 땅 한 뙤기 파는 것만 중재해도 구전이 떨어지는 판국에 항차 나라 간의 거래를 성사시키면 그 이득이 어떻겠는가. 4권은 이 화평회담에 얽힌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핵심이다. 대미의 5권에서는 결국 화평회담이 결렬되고, 재침공한 일본군(정유재란)은 다시 위세를 북돋우다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인해 본국으로 철수한다. 이러한 일본군의 퇴각 과정에서 최후까지 적을 추격하던 명장 이순신은 전사하고 만다.

 

대강의 줄거리만 봐도 알 수 있듯이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의 양상이 무척이나 선명하게 제시된다. 게다가 이건 그저 줄거리일 뿐, 실제 책을 읽으면 그 압도적인 정보량과 정교한 당시 정세의 묘사에 마치 그 시대에 살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이다. 10년에 걸친 작가의 자료 조사와 치밀한 고증에 힘입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삼국의 궁정과 초유의 사태에 고뇌하는 고관대작, 전쟁의 참상에 신음하는 민간 등 어느 곳이라도 소홀히 다뤄지는 법 없이 고유의 빛을 발하고 있다. 때로는 아이맥스 카메라로 전국을 멀찍이서 조망하는가 하면, 가끔은 다큐멘터리 8밀리미터 카메라로 치열한 전쟁터 한복판에서 들고 찍는 등 변화무쌍한 서술 방식이 일품이다.

 

아무래도 역사소설은 과거를 다루다 보니, 당대의 고색창연한 대화법이나 뜬구름 잡는 고담준론이 별로 익숙하지 않아 독서를 방해한다고 투덜대는 분도 있을 것이다. 단언컨대 <칠년전쟁>은 그렇지 않다. 인물 간의 대화는 대개 두 줄 이상을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짧으며 점잔빼는 꾸밈이나 꿈지럭거리는 서두 없이 꼭 필요한 핵심만 제시된다. 대화에 있어서는 일부 리얼리티를 벗어난 형국이지만 그만큼 속도감이 넘치며 독자들이 대화 속에 담긴 정보를 받아들이기에도 훨씬 수월하다. 하드보일드에 가까운 날렵한 묘사는 꼭 인물의 대화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서술에도 적용되는데, 빠르고 날렵하여 한마디로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

 

조선, 일본, 명의 수많은 인사들이 등장해 한 폭의 풍경화를 이루고 있지만 각각의 인물이 거대한 풍경에 매몰되는 일 없이 오롯이 개성을 지키고 있다. 누군가(특히 이순신)의 무조건적인 장점만 보는 신격화나 적군이랍시고 사람의 형상을 한 악마 식으로 묘사하는 유치한 이분법도 보이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방불케 하는 화법으로 무지몽매한 군신을 일깨우는 정승 정유길의 지혜, 초일류의 군인다운 청결한 고상함과 기품을 지닌 이순신, 비록 전쟁에는 나왔지만 인명을 살상하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평화를 갈구하는 천주교 신자 고니시 유키나가, 히데요시의 미친 야욕을 진심으로 믿고 진군 또 진군하는 전쟁중독자 가토 기요마사, 물건을 사고파는 시시한 장사치가 아니라 나라를 거래해 천금을 희롱하려는 명나라의 심유경 등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전술한 대로 이들 군상들이 이합집산하며 펼치는 인간 드라마가 <칠년전쟁>의 정수가 아닐까 싶다.

 

유독 전쟁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들도 충분히 만족할 만하다. 각 군의 분포도와 주요 전장의 형세에 얽힌 지도 등 소규모 전투의 양상을 통찰할 수 있는 자료도 풍부하고, 무엇보다 다른 나라가 아닌 우리나라 안에서 펼쳐진 전쟁이라 한국 사람이라면 직관적으로 전쟁의 세부도가 들여다보인다. 예컨대 경상도 전역을 제압한 일본군은 여세를 몰아 전라도로 침투하려 하는데,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진입하는 목줄이 바로 진주여서 전쟁의 향방을 가늠하는 이 진주를 둘러싸고 치열한 교전이 몇 차례에 걸쳐 펼쳐진다. 만약 다른 나라의 전쟁이라면 이곳이 핵심 장소니 어쩌니 해도 깊이 다가오지 않는다. 잘 모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조금 안 된 얘기지만 <칠년전쟁>의 주요 전장은 대개 우리가 잘 아는 곳이라서 따로 공부할 필요 없이 그냥 읽기만 하면 되니까 그런 점에서도 편하다.

 

아주 허접한 책이 아닌 이상 한 권의 책 속에는 으레 교훈이 있게 마련이고, <칠년전쟁> 같이 좋은 책에는 당연히 더 많은 교훈이 있다. 예컨대, 전쟁을 잘 모르는 군신들이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에게 총공세를 지시해 수군을 전멸시킨 일화를 통해서는 농사는 농사를 잘 아는 농부에게, 전쟁은 전쟁을 잘 아는 군인에게 맡기라는 소박한 원칙을 확인할 수 있다. 화평회담을 이끌기 위해 온갖 거짓말을 불사한 심유경의 파멸을 통해서는 비록 뜻이 좋다 해도 큰일에 있어서는 역시 신의가 중요하다는 교훈도 느꼈다. 무엇보다 '무능한 지배자는 만번 베어 죽여도 부족하다'는 말이 대선을 앞둔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훈일 테지만. 결국 한 권의 책에서 3할을 얻을 것인지, 절반을 취할 것인지, 작가가 의도한 전부를 얻을 것인지는 개인의 깊이 있는 독서를 통해 결정될 테니 부디 뜻 있는 독서를 하시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내가 <칠년전쟁>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직접 전쟁(6. 25)을 경험한 작가만이 쓸 수 있는 휴머니즘에의 갈구였다. 전쟁을 통해 무고한 백성들이 수도 없이 일본군은 물론이고, 도와주러 온 중국군의 손에도 죽어나갔다. 작가는 그 참상을 낱낱이 묘사해 하늘 아래 더는 이러한 인면수심의 지옥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부르짖고 있다. 비록 적장이지만 7년 내내 평화를 위해 막후에서 눈물겨운 노력을 펼친 고니시 유키나가, 그와 작가 김성한이 왠지 겹쳐 보이는 건 나만의 부질없는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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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야수 블랙 캣(Black Cat) 24
마거릿 밀러 지음, 조한나 옮김 / 영림카디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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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거의 소개된 적 없는 영어권 서스펜스 거장 마거릿 밀러의 대표작이다. 본연의 확고한 작품세계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스 맥도널드의 아내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는데, 이번 <내 안의 야수> 출간을 계기로 그녀의 대표작들이 더 많이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해본다.

<내 안의 야수>는 평범한(해 보이는) 인물들이 범죄와 악의에 맞닥뜨리면서 느끼는 공포와 불안감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심리 서스펜스 계열의 선구자 격인 작품으로 1955년에 나온 고전이지만 지금 봐도 손색 없는 깊이와 완성도를 자랑한다.

서스펜스라는 용어가 낯선 사람을 위해 적절한 예를 찾아본다면 아마도 동화 <푸른 수염> 같은 게 아닐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러 명의 아내가 죽은 남자에게 시집간 평범한 새 아내에게 남편 '푸른 수염'은 열쇠를 하나 주며 다른 방은 다 들어가도 좋지만 마지막 방은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말한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새 아내가 방문을 열자 그곳에는 죽은 아내들의 시체가 줄줄이 놓여 있고, 푸른 수염은 자신의 비밀을 눈치챈 새 아내 역시 살해하려고 하는데...

여기에 서스펜스의 모든 것이 있다. 비밀을 간직한 배우자, 호기심 많고 영리하지만 연약한 주인공, 마침내 드러나는 진실과 경악스런 결말! 굳이 동화에서만 이런 얘기를 찾을 필요도 없는 게 얼마 전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결혼한 남편들마다 수면제를 먹여 재운 다음 눈을 바늘로 찔러 실명시킨 악녀가 신문지상을 장식하지 않았는가. 만약 이 악녀의 남편이 잭 리처였다면? 잘 훈련받은 헌병 출신답게 바늘을 붙잡은 손을 뒤로 꺾어버린 다음 악녀 위에 올라타 망치와 같은 주먹을 내리칠 것이다. 아마도 숨이 끊어질 때까지. 악녀의 남편이 링컨 라임이었다면? 악녀 소매에 묻은 흰 가루를 몰래 분석해 수면제와 동일한 성분이라는 걸 밝혀내겠지. 그리고 함정을 파놓고 기다린 후에 기분 좋게 범인 체포~

그러니까 서스펜스의 주인공은 범죄수사의 천재도, 완력이 남다른 터프가이도 안 된다.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평범한 남녀에게 닥친 위기를 통해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게 필수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내 안의 야수>의 여주인공 헬렌이 신경쇠약 직전의 광장공포증 환자인 건 적절했다. 옛 친구의 전화 협박을 받고 불안에 떤 그녀가 아버지의 투자상담가였던 블랙쉬어에게 협박을 한 친구 에블린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면서 이야기는 굴러가기 시작한다.

당대에는 결정적인 반전으로 유명했을 듯한데, 요즘에는 영화나 소설 등에서 수십 번은 써먹은 듯한 반전이라 그쪽에서는 유효가 다했다고 본다. 다만 간결하면서도 선명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문장과 폭력 장면을 거의 넣지 않고도 스물스물 공포감이 피어오르게 하는 솜씨에서 거장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은근히 유머도 있고, 특히 처절하리만큼 아름다운 마지막 장면은 다섯 번쯤은 다시 읽게 만든다. 여러모로 명성에 부끄럽지 않은 클래식이라는 생각이다.

1955년 에드거상 수상작으로 당시 라이벌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재능 있는 리플리 씨(태양은 가득히)>였다. 그 작품은 아직 읽지 않았는데, 이참에 읽은 다음 비교해보고 싶다. 그리고 서두에도 썼지만 <엿듣는 벽>, <천사처럼>, <내 무덤의 이방인>, <이 뒤에는 괴물들이 산다> 등 마거릿 밀러의 다른 심리 서스펜스 걸작들도 꼭 다시 만나보고 싶다.


p.s/ 스포일러가 될 소지가 다분한 제목과 표지는 불만족. 특히 팝아트풍의 느낌을 내려 했던 것 같은 표지는 작품 내용이나 밀러의 명성과 그다지 맞지 않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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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벽하게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 2010년에 출간된 책만을 포함하며, 당연히 국내에 출간된 모든 일본 미스터리를 읽지는 못했습니다.    

 

 5위 가다라의 돼지 - 나카지마 라모

 
 

 

 

 

 

 

오컬트에 미친 괴짜 소설가 나카지마 라모의 대표작으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다. 주인공은 아프리카 민속학의 권위자 오우베 교수. 8년 전, 그는 현지 연구를 위해 케냐에 온 가족을 데리고 갔다가 사고로 딸을 잃어버린다. 딸의 시체는 찾지 못했지만 죽었을 것이라는 심증은 거의 명백한 상태. 일본으로 돌아온 오우베 교수는 알코올중독에 걸려 시시껄렁한 오컬트 방송에 게스트로 참여하는 웃음거리 신세로 전락한다. 한편 딸의 죽음을 자신의 탓으로 여긴 탓에 실의에 빠진 아내는 마음의 평안을 찾기 위해 사이비 종교에 가입하고, 자연스레 가족은 거의 붕괴 직전. 이 책은 총 3부로 되어 있는데, 1부는 오우베 교수가 탁월한 마술사와 손잡고 아내가 심취한 사이비 종교지도자의 가짜 기적을 폭로하는 내용이다. 2부에서는 다시 아프리카로 떠난 오우베 교수 일행이 무시무시한 아프리카 주술사의 손에서 그의 영능력의 기반이 되는 보물(?)을 되찾아오고, 3부는 보물을 빼앗긴 아프리카 주술사가 일본으로 찾아와 이 대명천지에 주술 대결을 펼친다. 즉, 일본-아프리카-일본의 순으로 진행된다는 얘기. 간단히 말해서 1부는 완전히 일본 드라마 <트릭>이고, 2부는 <솔로몬의 동굴>, <인디아나 존스> 같은 모험물, 3부는 주술이 난무하는 일본식 전기물 같은 느낌이다. 몇 가지 물리트릭이 나오는 1부를 제외한다면 정통적인 추리소설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특히 3부는 어떻게 봐도 추리소설이 아니다), 주술, 밀교 등에 관한 작가의 해박한 지식과 빠르고 박력 있는 전개에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특히 3부는 스플래터 호러, 좀비물 같은 B급 호러영화 스타일의 흥미도 주니까 그쪽 팬이라면 더 재미있어 할 듯. 잡종 장르 엔터테인먼트물로 강력하게 추천한다.

 
4위 리라장 사건 - 아유카와 데쓰야 

 

 

 

 

 

 

  

일본 추리소설계의 역사적 거장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미지수였던 아유카와 데쓰야의 작품이 출간되었다. 에도가와 란포, 요코미조 세이시, 마쓰모토 세이초급의 작가가 이제서야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아쉽지만, 늦게라도 볼 수 있게 됐으니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유카와 데쓰야는 흔히 철도 알리바이 트릭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국내에서는 이 장르가 그다지 인기가 있다고 볼 수 없어 정통 본격 추리소설 <리라장 사건>이 먼저 소개된 듯하다. '리라장'이라는 여름별장(한정된 공간)에 머무르게 된 일군의 예술가 지망생들(한정된 등장인물)이 하나씩 살해되는 연쇄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다른 본격 추리소설처럼 경찰들은 무수히 쌓인 단서와 복선을 건드리지도 못하고 변죽만 울리다 두 손을 들어버리며, 결국 죽을 만한 사람이 다 죽고 나서야 명탐정이 슬금슬금 등장해 멋지게 사건을 해결한다. 한마디로 애거서 크리스티 스타일이랄까, 익숙한 만큼 편안하고 기분 좋게 읽을 수 있다. 흔히 SF소설은 아무리 과학적인 설정을 바탕에 깐다 해도 결국은 비현실의 이야기라는 장르의 특성을 감안하고 읽어야 하는 것처럼, 본격 추리소설의 인공적인 작위성 또한 이 장르의 고유한 특징이 아닐까 싶다. 작가와 독자가 공동으로 합의한 규칙에 따라 공정하게 펼치는 두뇌싸움. 이러한 퍼즐 추리소설의 역사는 벌써 150년이 훌쩍 넘었고, 아직까지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리라장 사건>을 150년 간의 은밀한 즐거움을 아는 모든 독자들에게 권하는 바이다. 개인적으로 고전 본격 추리소설의 팬으로서 앞으로도 <리라장 사건>과 같은 훌륭한 작품이 많이 소개됐으면 좋겠고, 아울러 <검은 트렁크>를 비롯한 아유카와 데쓰야의 철도 알리바이 트릭도 한두 권쯤 꼭 맛보고 싶다는 바람을 전한다.

 
3위 이방의 기사 - 시마다 소지 
 


 

 

 

 

 

 

  

시마다 소지가 창조한 명탐정 미타라이와 왓슨 역할을 하는 이시오카 콤비의 원점이 되는 작품. 작가는 습작 기간 동안 이 작품을 최초로 썼지만 출간이 불발되었고, 오히려 두 번째로 쓴 <점성술 살인사건>으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래놓고 몇 년을 잊고 있다가 출판사들의 신작 독촉이 거세지자, 혹시 <이방의 기사>를 재활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읽어보니 이게 웬걸, 지금 발표해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는 내용이 아닌가! 겨울바지 주머니에 만 원짜리 한 장을 넣어두고 다음 해 겨울에 우연히 발견한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그 공돈이 생긴 듯 신나는 느낌, <이방의 기사>야말로 시마다 소지에게는 복권 같은 짜릿한 책일 것이라는 짐작에 슬며시 미소를 짓게 된다. 여담이지만 최근 몹시 바쁘기도 하고, 또 스포일러를 당할 우려가 워낙 커서 타인의 추리소설 리뷰를 읽지 않은 지 좀 됐다. 그저 스쳐 지나가면서 덧글이나 볼까 말까 하는 정도인데, 이 작품은 대개 평이 좋지 않은 것 같더라. 국내에 나온 시마다 소지의 작품 중에 <이방의 기사>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조금 아쉽지만 취향 차이를 운운하며 그냥 밀어붙이는 수밖에. 환상의 시체 유기 트릭을 선보인 <점성술 살인사건>이나 황당하리만큼 스케일이 큰 건축 물리 트릭을 사용한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에 비하면 추리나 트릭이 평범해서 반응이 그저 그런 걸까? 일면 수긍이 가는 부분이지만 개인적으로 <이방의 기사>만의 장점이 다소 평범하고 작위적인 트릭이라는 약점을 충분히 상쇄한다고 믿는다. 중반부에 펼쳐지는 AV(?) 혹은 가츠메 아즈사를 연상시키는 능욕당하는 유부녀와 그 복수담 같은 전개나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절절한 로맨스는 그간 트릭 지상주의자로만 보였던 시마다 소지의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펼쳐 보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미타라이, 이시오카 콤비의 빛나는 우정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채 황량한 이방의 땅에서 위기에 처한 이시오카를 구하기 위해 현대의 말, 그러니까 오토바이를 타고 출전하는 기사 미타라이의 장쾌한 모습은 몇 번을 봐도 그저 황홀하다.     


2위 은폐수사2: 수사의 재구성 - 곤노 빈

 
 

 

 

 

 

 

원제는 <과단>. 작년에 출간되었던 <은폐수사>의 속편이다. 세상이 다 아는 고집불통에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은 죽어도 안 통하는 원리원칙주의자 류자키가 겪는 새로운 사건을 기다렸던 분들께 무척이나 반가운 작품이 아닐까 싶다. 경찰청 본청의 고위직에서 일하던 전편에서 모종의 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일선 경찰서장으로 강등된 류자키. 그는 도내에서 권총 강도가 인질극을 벌이는 사건 현장을 지휘하다가 결국 특공대에게 침투 사살 명령을 내린다. 무사히(?) 범인을 사살하고, 인질을 구출하지만 아뿔싸, 범인의 권총에는 남은 총알이 없었다! 총알도 없는 범인을 사살하다니 과잉대응이라는 비난이 쏟아지지만 류자키는 담담하다. 범인이 총알이 있는지, 없는지를 사전에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이번에도 인질극 현장 대응 매뉴얼을 원칙대로 따랐을 뿐이다. 한편 사살된 범인의 농성 현장을 조사하던 류자키의 부하 경관들은 수상한 증거들을 연달아 발견한다. 과연 류자키는 이번에도 논란을 벗어나 국민에게 봉사하는 국가공무원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전편과 비슷하게 빠른 속도감과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연속되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특히 전편에는 없었던 제대로 된 사건의 수사 과정과 의외의 결말, 반전까지 만끽할 수 있어 딱 두 배 더 재미있다. 작가 곤노 빈은 경찰소설 분야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는 작가로, 다카무라 가오루처럼 가혹할 정도로 정밀하거나, 요코야마 히데오, 사사키 조처럼 비장하지만은 않은 엔터테인먼트형 경찰소설의 제일인자라 불러주고 싶다. 언뜻 보면 재수없는 엘리트지만 알면 알수록 끌리는 류자키라는 캐릭터의 매력만으로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 보장한다.     


1위 마크스의 산 - 다카무라 가오루 
 


 

 

 

 

 

 

 

다카무라 가오루의 전설적인 경찰소설. 1993년에 출간되고 10년쯤 뒤에 작가가 전면 개고한 작품이 이번에 나왔다. 예전에 한 번 본 걸 또 읽을 가치가 있을까 하고 반신반의한 게 사실이지만 막상 읽어보니 역시 예전의 감동은 어디 가지 않더라. 또한 내용적으로도 수정한 부분이 많아 비교해서 읽는 재미도 있었다. 예컨대, 십수 년 전에 미나미알프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를 소상히 기록한 등장인물 중 한 명의 유서가 발견되는 상황 같은 곳은 완전히 새로 썼다. 예전에 나온 단행본판(고려원)과 비교하기 위해서라도 바로 단행본판을 다시 읽을까 생각했지만 이 우울하고 비통한 이야기를 두 번 연달아 읽는 건 도저히 무리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꼭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 모든 이야기의 발아점이 되는 1970년대의 일가족 자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산림노동자의 박살 사건, 그리고 신원을 알 수 없는 백골 사체의 출현을 지나 1991년 현재 도쿄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고다 형사의 활약상을 그린 소설이다. 그러나 고다 형사뿐 아니라 그가 몸담고 있는 수사 1과7계의 모든 형사들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사건 해결을 위해 현장에서 발로 뛰는 그들의 처절한 2주일간의 투쟁의 기록이랄까. 현미경처럼 세밀하고 정교한 수사 과정의 묘사나, 동료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보다 한 발짝 더 앞서 공을 세우기 위한 형사들간의 암투 등은 그전의 어느 경찰소설에서도 본 적이 없다. 가히 입을 못 다물 만큼 압도적인 걸작! 흔히 먹먹하다는 말을 자주 쓰는데, 헤쳐도 헤쳐도 어둠만이 가득한 산을 오르는 '마크스'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그 무엇만큼 읽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장면은 아마 없을 것 같다. 이미 현대의 클래식, 비슷한 시기에 나온 어떤 작품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경지에 오른 작품이라 생각한다.   

 

 

베스트 단편

<유리기린> 중 '닥스훈트의 우울' - 가노 도모코  


  

 

 

 

 

 

  

올해는 좋은 단편집이 제법 나온 해였다. 따라서 선택이 어려웠지만 여러 단편집 가운데 작품성에 비해 별달리 화제를 불러일으키지 못한 단편집을 골랐다. 가노 도모코의 <유리기린>. 한 고등학생 소녀가 살해되면서 시작되는 이 연작 단편집은 소녀의 죽음이 남긴 것, 그리고 쓸쓸히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첫 장면을 제외하고는 거의 살아 있는 상태로 나오지 않는 소녀가 책장을 다 덮을 때쯤에는 피와 살을 가진 분명한 형태로 독자의 가슴속에 맺히는 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결국 작가의 필력이 뛰어다는 얘기겠지. 다소 무리하게 모든 단편들을 하나로 꿰어맞추려고 시도했던 마지막 단편이 조금 떨어지고 그 외의 모든 단편들이 다 좋다. 탐정 역할을 하는 인물은 소녀가 다녔던 학교의 양호선생. 이중 '닥스훈트의 우울'은 평범한 동네에서 고양이들의 다리가 잇따라 칼로 베이는 사건을 그린다. 다들 알다시피 살아 있는 짐승을 붙잡는 것만 해도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다리에 칼을 댄다면 그 짐승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사방팔방으로 뛰며 난리를 피울 터. 이런 난점에도 불구하고 동네에서는 고양이 피습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이 이야기를 들은 양호선생은 사색이 된다.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더 큰 일이 벌어질 거라고...일상 미스터리풍의 간단한 트릭이지만 논리적으로 말이 되고 소름 끼치는 범인의 악의가 느껴져 뒷맛이 쓴 작품이다. 요즘은 어째 이런 단편이 끌린다. 단순하면서도 통렬하게 의표를 찌르는 그런 단편. 꼭 '닥스훈트의 우울'만이 아니라 모든 단편이 흥미로워 이대로 묻히기에는 영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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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1-02-28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위 마크스의 산 ㅠㅠㅠㅠㅠㅠ 정말 여운 긴 이야기에요. 그 다음에 막 흥분해서 산 '조시'는 1권 읽다 말았다는;

2위 곤노 빈. 정말 좋죠? 아주 깔끔하고, 재미난, 별 갈등 없이 주인공 위주로 흘러가는 이야기. 전편도 특이했지만, 2편은 더욱 좋았어요.

3위 이방의 기사는 .... 그냥 사심 가득 담아 나쁘지 않다. 정도

4위 리라장은 작년 일본 미스터리 순위를 거꾸로 하며 개인적으로 뒤에서 4위 정도는 할 수도 있을 것 같; ^^;

5위 가다라의 돼지...가 5위라니! 라고 하지만, 1위가 마크스의 산이다보니 뭐 ^^

무해한모리군 2011-02-28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별찜을 해두고 천천히 봐야겠어요 ^^

jedai2000 2011-02-28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조시>는 공장 묘사가 대박이죠ㅎㅎ 절대 끝나지 않는 기계 묘사-_-;; 결말도 암울하기가 <마크스의 산>의 두 배라죠. 그래도 3편 <레이디조커>까지는 나와줬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ㅠ.ㅠ

곤노 빈은 3편이 소개될지 안 될지 불투명한 것 같은데 꼭 나왔으면 좋겠구요. <이방의 기사>는 개인 취향이 넘 강하게 반영됐어요ㅎㅎㅎ <리라장 사건>은 퍼즐 미스터리로서는 괜찮은 수준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의외네요. <가다라의 돼지>는 정말 신나게 읽었죠^^

고고씽휘모리님...그래요. 다 좋은 작품이니 찬찬히 하나씩 읽어보세염^^

하이드 2011-02-28 23:53   좋아요 0 | URL
곤노 빈 못 나올 것 같다고 하던데, 2편이 재미났고, 입소문의 힘에 힘입어 잘 팔리고, 꼭 나왔음 좋겠어요.

리라장 역시 작가가 싫어서 그러는거니 역시 사심 가득합니다. ^^ 시마다 소지와는 반대의 의미로다가.

<조시>는 읽어보도록 해야겠네요. 여름에 읽어야 좋을 것 같긴 하지만, 우울한 결말이라니, 맘이 갑니다. <레이디 조커> 나오는거 기정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안 나올지도 모른다는 건가요? ㅡㅜ

jedai2000 2011-03-02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시작 출판사 자체가 활동을 안 하는데다, 1, 2편이 썩 잘 나갔다고는 할 수 없으니 3편을 보기 힘들겠죠. <조시>는 늦여름, 가을쯤이 배경인데 가오루 소설 중에서도 가장 어둡고 우울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제가 알기로 S출판사가 <레이디조커>까지는 계약을 안 했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