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오랜만에 연재 재개를...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드디어 다음 편이 끝이다ㅠ.ㅠ

 

 

 

Queen - 퀸

 

선정작 - <그리스 관 미스터리> by 엘러리 퀸

 

 

 

 

 

 

 

 

 

 

 

 

 

 

최종 후보작 - <열흘간의 불가사의> by 엘러리 퀸

 

 

 

 

 

 

 

 

 

 

 

 

 

 

'퀸'이라고 해서 여왕이 나오는 추리소설을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비록 사촌형제(남자) 두 명의 합작 필명이지만 엘러리 퀸이 추리소설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해보면 여왕이 아니라 황제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들은 특히 퍼즐풀이 본격 추리소설에서 40편이 넘는 왕성한 활동을 보였는데, 희대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만 세도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이다. 흔히 퀸과 함께 퍼즐 미스터리 3대 작가라고 일컬어지는 동시대의 라이벌 중 존 딕슨 카가 주로 밀실의 기발함을 내세우고, 애거서 크리스티는 의외의 범인과 수준 높은 트릭이 돋보인다면 엘러리 퀸에게도 필살의 무기가 있다. 그것은 바로 '논리'로써, 사건에 휘말린 탐정이 그간 수집한 단서를 토대로 무수한 용의자들을 논리적으로 하나씩 제거해 나가다 마침내 단 하나의 진범으로 압축하는 과정을 철두철미하게 그려낸다. 간단히 예를 들자면, 어느 아파트에서 정체불명의 손님과 함께 있다가 그에게 살해당한 남자가 있다고 하자. 화장실에 가보니 변기 뚜껑이 올려져 있다. 보통 남자가 소변을 볼 때 변기 뚜껑을 올리니 용의자 중 여자는 전부 제외. 방 안의 텔레비전이나 오디오의 볼륨이 피해자가 평소 듣던 것보다 훨씬 큰 걸로 짐작컨대 범인은 청력이 시원찮거나 노인일 확률이 높다. 이로써 귀가 멀쩡하고 젊은 남자는 전부 제외. 이런 식으로 용의자의 갯수를 줄여 나가다 마침내 범인만 남기는 것인데, 이게 논리학에서 말하는 '소거법'이다. 나야 아주 시시하고 말도 안 되는 예를 들었을 뿐이지만 작가와 동명의 탐정 엘러리 퀸은 이 논리와 소거법의 명수이기 때문에 대단히 복잡한 사건들도 척척 잘도 해결한다. 작가 엘러리 퀸 형제는 본격 추리소설 전성기였던 1930년대에 선배 추리작가인 반 다인의 대성공에 자극받아 <로마 모자의 비밀>로 데뷔했고, 작품 제목에 전부 나라 이름을 넣은 '국명 시리즈'와 <X의 비극>, <Y의 비극> 등 'XYZ'로 이어지는 '비극 시리즈'로 일세를 풍미했다. 이중 개인적으로 가장 높이 사고, 좋아하는 작품이 <그리스 관 미스터리>이다. 논리에 살고 논리에 죽는 엘러리 퀸 스타일의 정점으로 강력하게 추천한다... 한편 최종 후보작인 <열흘간의 불가사의>도 그 못지않은 작품인데, 이 소설은 30년대식 과장된 명탐정 캐릭터였던 엘러리 퀸을 전후인 1950년대의 무겁고 사색적인 분위기에 맞춰 진지하게 변모시킨 '라이츠빌 시리즈'에 속한다. 입만 열면 지식 자랑에 평범한 경찰들을 빈정대던 천재형의 엘러리 퀸이 부쩍 진지해진 모습으로 변신해 근친상간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인간적인 비극 앞에 침몰하는 과정이 세세하게 그려진다. 흥미롭게도 집필에 거의 20년의 간극이 있는 <그리스 관 미스터리>와 <열흘간의 불가사의>의 플롯에는 강력한 유사점이 있는데, 이는 읽어보면서 직접 확인해보시길.

 

 

 

Reverse - 도서(倒敍)

 

선정작 - <제1의 대죄> by 로렌스 샌더스

 

 

 

 

 

 

 

 

 

 

 

 

 

 

 

최종 후보작 - <후루하타 닌자부로> by 미타니 고키

 

 

추리소설을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분들이라면 도서 추리소설이라는 용어가 생소할 터이다. 도서라는 말은 '도치서술'의 줄임말이니 도서 추리소설은 일반적인 추리소설, 즉 앞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뒤에 범인을 잡는 구조를 뒤집는(reverse) 형태의 추리소설을 뜻한다. 한마디로 책 도입부부터 범인임이 분명한 인물이 떡하니 등장해 범행을 벌이는 장면이 상세히 나오는 것이다. 천재적인 범인이 공들여 짠 살인계획이 처음부터 제시되고, 그보다 더 천재적인 탐정이 그 음모를 하나하나 분쇄해 나간다. 마치 공정한 규칙 아래 한 수, 한 수 체스를 두는 듯한 두 천재 간의 짜릿한 이 두뇌대결이 도서 추리소설의 진정한 흥미 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다. 처음 도서 추리소설을 쓴 사람은 과학자 탐정 손다이크 박사로 유명한 오스틴 프리먼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1900년대초 불세출의 셜록 홈스로 촉발된 추리소설의 1차 중흥기 때 이 신선한 방식을 처음 선보였다. 탐정이 온갖 고생 끝에 범인 잡는 걸 보는 낙으로 읽는 게 추리소설일진대 처음부터 범인의 정체가 나온다고? 얼핏 생각하면 납득이 안 가는 도서 추리소설을 프리먼은 왜 시도했을까. 아마도 당시 그야말로 쏟아져 나오다시피 한 홈스의 아류작들에 자기까지 하나 더 추가하기보다는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픈 작가의식의 발로였으리라. 아무튼 프리먼 이후 도서 추리소설은 퍼즐파의 주류까지는 되지 못했지만 간간히 좋은 작품들이 나와 흔히 3대 도서 미스터리라고 불리는 <살의>, <백모 살인사건>, <크로이든발 12시 30분> 같은 작품들이 유명하다. 다만 개인적인 취향도 그렇고, 역시 추리소설은 결말에 의외의 범인에게 뒤통수를 맞는 맛으로 읽는 사람들이 많아 대중적인 인기가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그런데 1970년대에, 그것도 쓰는 것마다 베스트셀러라서 별명도 '미스터 베스트셀러'였던 로렌스 샌더스가 왜 하필 <제1의 대죄>에서 이미 주류에서 밀려난 지 오래인 도서 추리소설을 들고 나왔을까. 게다가 막상 작품을 읽어보면 구시대 도서 추리소설의 핵심이었던 범인과 탐정의 두뇌싸움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실제로 범인은 오히려 범죄지능이 떨어지는 편에 가깝고. 샌더스가 걸작 중의 걸작인 <제1의 대죄>에서 범인을 첫머리에 등장시킨 이유는 좀 극단적이긴 해도 평범한 사람이었던 범인이 연쇄살인에 빠지는 심리를 시작부터 냉철하고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해서였다. 즉, <제1의 대죄>가 도서 추리소설의 형식을 취한 이유는 범인을 미치도록 잡고 싶어 분투하는 에드워드 델러니 지서장만큼이나 살인범이 아무 죄책감 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구체적인 심리를 보여주는 데 있어 이 방식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샌더스의 의도는 멋지게 맞아떨어져 <제1의 대죄>는 요즘 모르는 사람이 없는 단어인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탄생을 예고했으며, 범죄심리와 현대사회의 인간소외 등을 고발하는 심리 스릴러로로써, 또한 엄청나게 정교한 경찰 수사물로도 1급인 완벽한 걸작으로 남게 되었다...위에서 도서 추리소설의 대중적인 인기가 떨어지는 편이었다고 썼는데 한 가지 반론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 유명한 <형사 콜롬보> 드라마가 바로 대표적인 도서 추리물이 아닌가. 다만 <형사 콜롬보>가 너무 오래되어 보기 싫다는 사람을 위해 일본판 콜롬보인 <후루하타 닌자부로>를 추천한다. 메이저리거 이치로, 아카시야 산마, 스맙, 야마구치 토모코 등 일본의 슈퍼스타들이 총출동해 범인 역할을 맡아 보는 맛이 쏠쏠할 것이다. <후루하타 닌자부로>는 왜 도서 추리물의 규칙을 차용했을까. <제1의 대죄> 같은 거창한 목적성보다는 기왕에 슈퍼스타들이 출연하는데 중간부터 나오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범인으로 등장해 충격을 주면서 오래오래 나오는 게 시청률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겠지.

 

 

 

Spy - 스파이

 

선정작 -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by 존 르 카레

 

 

 

 

 

 

 

 

 

 

 

 

 

 

 

최종 후보작 - <디미트리오스의 관> by 에릭 앰블러

 

 

 

 

 

 

 

 

 

 

 

 

 

 

 

추리소설이 인기 있는 본질적인 이유는 아마도 인간이 본능적으로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해서가 아닐까 싶다. 왜 누군가 무서운 이야기를 꺼내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겉으로는 귀를 막으면서도 속으로는 귀를 쫑긋 세우고 듣지 않나. 이것은 어쩌면 옆집 사는 누군가, 혹은 추리소설 속의 등장인물은 팍팍 죽어 나가지만 그 이야기를 듣거나 읽는 나만큼은 안전하다고 느끼며 일종의 비열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 때문이리라. 꼭 그런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공한 추리소설은 대개 독자들의 공포심을 잘 이끌어내는 게 많은 것 같다. 아니, 가만히 생각해보면 추리소설 중에 공포스럽지 않은 게 없다. 유산 때문에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친구가 친구를 죽이고, 버림받은 애인이 버린 애인을 죽이고...뭐 따지고 보면 사람이 사람 죽이는 게 무서운 일인 건 당연하겠지만, 예를 든 것처럼 예전 추리소설에서의 범죄는 확실히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서 비롯되는 게 많았다. 가족, 친구, 친척, 그것도 아니면 한동네 이웃 등으로 말이다. 하지만 추리소설 역시 당당한 문학으로써 명실공히 시대를 반영한다. 자신이 살고 있던 마을 안에서의 좁은 인간관계가 전부였던 과거와는 달리 양차대전 이후 세계는 놀랄 정도로 빠르게 확대되었고, 당연히 공포의 대상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돈이나 명예를 위해 고작(?) 한두 사람 죽이는 범죄자와 달리 수백만 명이 한꺼번에 죽는 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스파이야말로 전쟁을 경험한 세대에겐 호환, 마마보다 공포스런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스파이소설은 바로 이런 시류에서 출발했다. 양차대전을 전후해 수많은 인기작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중에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소설 주인공 중 하나도 포함되어 있다. 숫자 세 개로 표기하는 유명인사 말이다. 냉전시대가 저문 요즘은 스파이소설의 인기가 조금 시들해진 느낌이지만, 2016년 현재 여든다섯임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는 스파이소설의 거장이 한 분 계시니 그 이름도 찬란한 존 르 카레이다. 실제 영국정보부 소속이었던 그는 이번에 소개할 스파이 추리소설의 역대 최고 걸작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의 저자로서 이 작품으로 영국과 미국의 양대 추리소설상을 석권했으며 평생공로상 격인 그랜드마스터도 아울러 받았다. 사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는 지난 50년 동안 나온 추리소설 중 최고로까지 평가받고 있는데 나 또한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다. 서독과 동독을 가른 냉전시대의 상징 베를린장벽이 건재했던 1963년을 배경으로 영국과 독일 첩보부의 숨막히는 암투가 실감나게 그려지며, 강철 기계 같은 국가 조직의 냉정한 논리에 희롱당하는 장기말 신세의 첩보원이 결국 가닿을 수밖에 없는 허망한 최후가 절로 비애감을 불러일으킨다. 추리소설적인 절묘한 플롯과 놀라운 반전, 첩보 세계의 리얼리티, 휴머니즘과 연민, 애절한 사랑 등 훌륭한 문학이 담고 있어야 할 모든 것이 들어 있다...한편 스파이 추리소설은 일반적인 추리소설가가 아닌 문인들도 많이 손을 댔다. 적국을 속이기 위해 늘 정체를 숨기고 거짓말을 일삼는 스파이들이 크게 보면 정체성을 상실한 현대인을 상징하는 좋은 매개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팔리기도 잘 팔리고, 잘만 하면 문학적 야심을 실현시킬 수도 있는 장르에 솜씨 좋은 문학가들이 뛰어들지 않는 게 이상하렷다. 우리가 익히 아는 조셉 콘라드, 서머싯 몸, 그레이엄 그린 등의 이른바 문호들이 스파이소설을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디미트리오스의 관>을 쓴 에릭 앰블러 역시 비슷한 동기로 스파이소설에 천착한 작가로 당시 유행했던 스파이소설의 외피를 쓴 모험물과 달리 <어느 스파이의 묘비명>, <디미트리오스의 관> 같은 그의 작품들은 스파이 세계의 비정함, 스파이들의 고뇌와 비애 등 문학적인 여운이 훨씬 짙다. 그중 단지 호기심 하나로 국제적인 범죄자 디미트리오스의 기묘한 삶을 재구성하는 평범한 작가가 엄청난 위기를 겪는다는 <디미트리오스의 관>은 언급한 문학성뿐 아니라 줄거리도 흥미로우니 일독의 가치가 크다.

 

 

 

Train - 열차

 

선정작 - <점과 선> by 마쓰모토 세이초

 

 

 

 

 

 

 

 

 

 

 

 

 

 

 

최종 후보작 - <열차 안의 낯선 자들> by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인류 역사를 바꾼 획기적인 발명품을 꼽으라면 다양한 답이 나올 테지만 열차와 철도도 누군가는 꼭 지적할 것이다. 열차의 발명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떠나 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으니 노동시장과 산업계에 혁명적인 변화가 생긴 셈이다. 전쟁을 할 때도 예전처럼 말을 타고 세월아, 네월아 쳐들어 가는 게 아니라 열차를 타고 수만 명의 병력이 단숨에 적진을 향해 들이칠 수 있게 되었으니 전쟁사에서도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심지어 우주선으로 달나라까지 가는 오늘날에도 그 잘난 우주선을 운반할 다른 방법이 없어 철도 크기에 맞춰 제작한다고 하니 가히 열차만큼 현대 사회를 일궈낸 게 또 있을까 싶다. 새로운 문명이기가 출현하면 즉시 이걸로 트릭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만 고민하는 추리소설가들이 열차를 놓칠 리 만무하다. 당연히 비교적 이른 추리소설의 여명기부터 열차를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이 나왔는데, 대표적인 작가가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이다. 그는 대표작 <통>과 <프렌치 경감 최대사건> 등을 통해 열차를 이용한 알리바이 트릭을 전매특허로 내세웠다. 열차와 다른 열차의 환승시간이나 열차가 쉬는 잠시의 빈틈 등을 교묘히 이용해 알리바이를 조작하는 열차 트릭은 실제로 열차가 운영되는 방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현실감이 넘쳤으며, 작중에 제시되는 온갖 열차시간표를 일일이 대조해가며 추리하는 식이라 꼼꼼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성향의 추리소설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다만 크로프츠는 무려 1879년 태생, <통> 역시 1920년작으로 요즘 보면 어쩔 수 없이 읽기 버겁다. 그런 이유로 마쓰모토 세이초의 <점과 선>을 추천한다. 물론 <점과 선>도 1957년 작품이라 다소 낡은 감은 있지만 철도부터 비행기, 여객선 등 현대적인 교통수단이 거의 완성된 시대라서 요즘 읽어도 거의 이질감은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일본 최남단의 규슈에서 발견된 두 남녀의 시체, 하지만 용의자는 일본 최북단의 홋카이도에 머무르고 있었으니! 열차로 꼬박 하루가 넘게 걸리는 두 지역을 기반으로 한 철벽의 알리바이가 무너지는 짜릿함을 결코 놓치지 마시라.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는 태평양전쟁 전 대인기를 끌었던 에도가와 란포풍의 괴기, 엽기 추리소설에서 탈피해 당대의 일본 사회를 반영하는 현실적이고 공감 가는 추리소설을 주창했으니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사회파' 추리소설이다. 퀸, 카, 크리스티의 3대 작가처럼 일본 추리소설가 중에서도 세 명을 꼽으라면 란포, 요코미조 세이시, 그리고 세이초를 들 수 있겠다. 특히 일본 추리소설계에 끼친 영향만 놓고 보자면 셋 중 세이초를 가장 높이 치는데, 원래 순문예를 지향한 덕분에 작품의 문학성이 높아 추리소설을 어른들의 엔터테인먼트로 격상시킨 공로가 크며, 1,000여 편에 달하는 저작으로 추리소설의 상업적인 가치를 극대화시킨 점에서 오늘날 일본 추리소설의 탄탄대로를 거의 혼자 닦았다고 봐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일본 추리소설계 마지막 천황이다...열차의 발명으로 달라진 또 하나의 풍경은 낯선 사람과의 빈번한 대면일 터. 열차 이전 시대에는 한동네 사람 말고 전혀 낯선 사람을 볼 기회가 극히 적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열차를 통해 전국 방방곡곡을 다닐 수 있게 된 이후로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열차 옆자리나 앞자리에서 자주 볼 수 있게 되었다. 같은 열차를 타지만 역에서 내리면 다시는 안 볼 이방인들. 누구도 의미를 두지 않을 이 찰나의 만남에서 교환살인의 씨앗이 싹튼다면? 열차에서 우연히 알게 된 두 사람이 상대방이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을 각자 제거해준다. 친구도 뭣도 아닌 단 한 번의 만남이니 경찰도 혐의를 발견할 수 없다.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은 이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탄생한 심리 서스펜스이다.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쥐락펴락 하는 데는 따라올 자 없는 대가인 하이스미스의 날카로운 필치에 절로 손에 땀이 쥐어지는 탁월한 작품.

 

 

 

Underdog - 약자

 

선정작 - <죽음의 전주곡> by 나이오 마시

 

 

 

 

 

 

 

 

 

 

 

 

 

 

최종 후보작 - <두 아내를 가진 남자> by 패트릭 퀜틴

 

 

 

 

 

 

 

 

 

 

 

 

 

조금 불평을 하기 위해 일부러 '언더독' 항목을 만들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도로시 세이어즈, 마저리 앨링엄 등과 함께 영국 추리소설 4대 여왕으로 꼽히는 나이오 마시가 왜 약자냐고? 한국 추리소설 시장에서는 당연히 약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으니까. 30편이 넘는 마시의 작품 중 국내에 출간된 게 <죽음의 전주곡> 딱 하나이다. 크리스티와 더불어 콜린즈 출판사의 간판으로 1930년대부터 70년대까지 거의 매년 추리소설을 냈던 스타 추리소설가의 출간작이 단 한 권이라니 참으로 비극이다. 이것도 그나마 다행인 게 크리스티도 즐겨 읽는다고 고백했던 마저리 앨링엄은 국내 출간작이 전무하다. 크리스티와 비슷하게 정통적인 후던잇 미스터리를 발전시킨 두 작가가 한국에서 이리 홀대받는 까닭은 무엇일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미스터리가 아닐까. 하긴 딕슨 카나 로스 맥도널드를 비롯해 우리나라에서 별로 출간되지 않는 작가가 어디 한둘이겠냐만 크리스티가 인기 있는 나라에서 그녀와 유사한 마시와 앨링엄이 전혀 나오지 않는 건 도통 설명이 되지 않아 몇 마디 불평을 남겨보았다. 뉴질랜드에 살았던 나이오 마시의 <죽음의 전주곡>은 크리스티를 강하게 연상시키는 영국 시골 미스터리로 미스 마플 시리즈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크게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엘러리 퀸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두 남자의 합작(웹&휠러)으로 비슷한 퍼즐 미스터리를 냈던 패트릭 퀜틴 역시 국내 추리소설계의 홀대라면 어디서도 뒤지지 않는다. 퀜틴은 엘러리 퀸의 국명 시리즈처럼 <배우를 위한 퍼즐>, <친구를 위한 퍼즐>, <바보를 위한 퍼즐> 등 제목에 항상 '퍼즐'이 들어가는 시리즈도 썼으며 출간작도 40편이 넘는다. 흔히 본격 추리소설하면 영국만 떠올리고 미국 본격파하면 퀸이나 반 다인 등만 소소하게 맞섰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패트릭 퀜틴 또한 당당히 미국 본격파를 대표하는 작가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또 하나의 불평을 하자면 지금 소개하는 퀜틴을 비롯해 크레이그 라이스, 렉스 스타우트, 샬롯 암스트롱 등 미국 본격파 작가들의 출간도 너무 적은 것 같다. 물론 요즘 시대에 황금기(1930~40년) 작가들을 소개해봐야 얼마나 팔릴까도 싶지만 추리소설 애호가로서는 어쩔 수 없이 아쉬울 따름이다. <두 아내를 가진 남자>는 퀜틴의 후기작으로 전처와 현재 아내 사이에서 방황하던 남편이 몇 번의 사소한 실수를 하는 바람에 모든 걸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불륜과 치정 등 멜로드라마 같은 전개와 공감 가는 심리 묘사로 독자들을 빨아들이다 마지막에 의외의 범인과 진상이 밝혀지는데, 전혀 본격 추리소설 같지 않게 펼쳐지던 이야기가 결국 본격으로 멋지게 끝나는 걸 보고 퀜틴의 역량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앞으로는 그의 전성기 시절의 대표작들도 좀 만나볼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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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찌는 듯한 늦더위 힘드시죠? 여름 배경의 재미난 소설 한 권 보면서 더위를 이겨내시라고 책 팔러 왔어요^^;; 그전 책들이 보기만 해도 더워지는 아저씨들이 죽고 죽이는 얘기라면, 이번 <그녀를 찾습니다, 여름>은 풋풋한 대학생들이 주인공인 라이트노벨풍 미스터리입니다. 주인공들이 대학생이다 보니 당연히 대학 다니면서 가장 열심히 해야 할 공부 얘기는 거의 안 나오고ㅎㅎ, 연애나 음주가무 등 주로 노는 얘기들이 많아요. 물론 장르가 '미스터리'이다 보니 가끔 미스터리도 해결해야죠^^ 아무튼 부족한 책이나마 많은 관심 부탁드리고, 언제 와도 따뜻하게 맞아주시는 이웃님들 막바지 늦더위 조심하셔요. 꼭 이번 책이 아니더라도 가끔 리뷰 올릴 때마다 외면하지 않아주시는 것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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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변호사 고진 시리즈 5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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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찾아오는 반가운 선물, 도진기 작가의 추리소설 신작이다. 검색해보니 2010년부터 올해까지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작품을 냈는데, 현직 판사로서 업무량이 만만찮을 텐데도 이처럼 왕성한 생산력을 보여주는 게 참으로 놀랍고 반갑다. 좋은 작품을 내놓고도 후속작에 3-4년씩 걸려 팬들의 뇌리에서 잊혀지는 작가가 많은 게 늘 아쉬웠던 판에 도진기 작가의 꾸준한 행보는 한마디로 만점이다. 열혈팬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 응원 반, 호기심 반의 마음으로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를 읽어보고 또 한 번 반가웠다. 개인적으로 도진기 작가에게 가장 기대했던 장르를 마침내 그가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법정 추리소설. 직업적인 특성상 우리나라에서 법정물을 가장 잘 쓸 수 있는 대표적인 작가라고 늘 생각해왔기에 시리즈 탐정 고진이 드디어 법정에 입성했을 때 환호성을 지르고 말았다.



예전의 존 그리샴이나 스콧 터로, 다카기 아키미쓰 등을 비롯해 장르소설 강국들은 유독 법정물이 인기가 많다. 법정을 다룬 영화도 심심하면 한 번씩 나온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법정이라는 곳이 법지식이나 논리 등 고도의 전문적인 무기를 가진 법조인들의 진검승부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승자가 있으면 반드시 패배자도 나오는 지적 유희의 콜로세움이랄까. 맨날 주먹으로 치고 받는 악다구니 싸움만 보다가 가끔씩 논리와 증거로만 싸우는 두뇌 대결을 보면 머리가 다 시원해진다. 특히 거대 세력의 부당한 압력에 맞서 외로이 분투하던 법조인이 기발한 한 수로 다 진 재판을 역전시키는 장면이 나오는 법정물이라면 짜릿함의 강도가 몇 배는 커진다. 지적 쾌감, 논리와 말의 향연, 게다가 일발 역전의 흥분까지 갖춘 장르가 성공하지 않는 게 차라리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재미있는 창작 법정물을 우리나라에서 별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뭘까? 좀 안 된 얘기지만 굴곡진 현대사의 영향으로 인해 법조계가 비교적 투명해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서양처럼 칼 같은 공정함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정의를 부르짖어봐야 그전의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공허한 외침이었달까. 또한 법정물은 고도의 법지식을 요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작가가 몇 달 공부해서는 그럴싸한 현실감을 줄 수 없다는 것도 고려할 대목이다. 하긴 전국에서 날고 기는 사람도 통과하기 어렵다는 사법시험이니 일반 작가들이 손쉽게 접근하기 힘든 게 당연할 수밖에... 그렇다면 '법잘알'인 법조인들이 직접 써보면 좋지 않을까? 잘 알겠지만 그 양반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지 않나. 존 그리샴처럼 떼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한낱 소설을 그 잘나가는 분들이 쓰신다고? 더구나 법을 잘 안다고 해서 소설까지 잘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각각의 분야에서 요구되는 능력, 즉 법논리의 엄정한 냉철함과 창작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은 완전한 평행선에 가깝다. 거의 만날 수 없는 두 선이라 할 것이다.



다만 세상일에 '절대'라는 게 없듯이 가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재능 몇 가지를 동시에 발휘하는 사람이 있는데, 도진기 작가가 딱 그런 경우인 것 같다. 뭐 법조인으로서의 활약은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추리소설에서의 탁월한 창작력은 이미 여러번 보여주지 않았는가. 우리나라에서 마침내 전문가의 손에 의해 정확하게 쓰여진 법정 추리소설을 만나게 되어 흥분한 나머지 잡설이 좀 많아지는 느낌이니 후다닥 작품을 들여다보자.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는 분량의 70-80퍼센트 정도가 법정에서만 진행되며, '어둠의 변호사'라지만 절대 법정에 서지 않는 고진이'슈퍼 페리 메이슨'이 되어 미모의 중년 여성의 남편 살해 혐의를 벗겨주기 위해 대활약하는 이야기이다. 아, 고진이 꼭 사건 의뢰인이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해야지만 사건을 맡는 사람이 아니란 건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나. 시리즈를 이쯤 읽었으면 그 사람, 성격 비딱한 걸 모를 리가 없을 터. 그러므로 의뢰인이 무조건 누명을 썼다고 확신하지는 마시길.



법정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공간이 아니다 보니, 당연히 고진과 적대하는 카운터파트너도 출현한다. 조현철 검사라는 영감님(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예전에는 검사를 보통 이렇게 불렀다고)인데, 한 번 기소하면 반드시 유죄를 먹이는 일종의 법조계 독사이다. 추리소설로서 이 작품의 핵심 기조는 누가 뭐래도 알리바이 트릭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고진과 조현철이 재판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벌이는 책략 대결도 주목할 부분이다. 역시나 법조인 작가다운 리얼리티와 기발함이 철철 넘친다.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에서 작가가 법정물로서의 정체성을 제외하고 가장 공들인 부분은 역시 사건의 동기와 감동으로 보인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대학을 다닌 네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성, 무려 5각관계에서 파생된 범죄의 진짜 동기, 그리고 그 저류에 흐르는 애틋한 사랑이 밝혀질 때의 감동은 그전의 도진기 소설에서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트릭과 장르는 전혀 다르지만 대히트했던 일본의 모 추리소설의 정서가 특히 생각나는데, 성공한 작품의 성공 요인을 냉철히 분석해서 본인 작품에 접목시키는 태도는 전반적인 한국 추리소설의 낮은 시장성을 생각해볼 때 반드시 칭찬받아 마땅하다. 장르 특성상 일발 역전의 쾌감을 위해 고진이 더욱 입조심을 한 관계로 전편에서 왓슨 역할을 맡았던 이유현 경감은 이번 작품에서는 독자와 같은 관찰자의 역할로 강등되지만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러시아로 같이 조사여행도 떠나는 등 두 사람의 우정은 계속된다. 알리바이 트릭은 여태까지 도진기 작품 중 가장 단순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스케일은 가장 커졌다. 법정물이라고 추리소설 마니아가 실망할 이유는 없다는 얘기다.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는 법정물로서의 탄탄함과 추리소설의 기발한 트릭, 게다가 감동과 애절함까지 갖춰 내 생각에 지금까지 도진기 작품 중 가장 잘 팔릴 듯하다. 전문 장르에서 기대했던 완성도를 보여준 도진기 작가의 내년 신작이 벌써부터 몹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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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지 않음, 형사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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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3.67>로 홍콩 추리소설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찬호께이의 신작이지만, 실은 전작이 워낙 인기가 있어 먼저 쓴 작품이 나중에 나온 경우이다. 즉, <기억나지 않음, 형사>는 2011년작, <13.67>은 2014년작이다. 1967년부터 2013년까지 홍콩의 변화하는 시대상 속에서 몇 가지 사건들을 해결했던 전작이 연작 단편집의 흐름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오롯이 한 사건만을 다룬 장편소설이다. 전작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기에 이번 신작도 무척 기대를 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충분히 기대에 부응할 만큼 재미있는 추리소설이었다. 남편과 부인이 살해당한 홍콩의 서민 아파트 현장을 조사하는 형사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도입부부터가 벌써 군더더기가 없고 바로 핵심을 찌른다. 주인공이 소속된 형사반은 부인과 불륜 중이었던 내연남의 흔적을 처참한 현장 도처에서 발견하고 그가 사건을 저지른 것이라는 단순한 결론을 도출한다. 끔찍한 사건이지만 불륜에서 비롯된 치정 살인극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다른 형사들은 별 고민 없이 이대로 보고서만 쓰면 끝이라고 희희낙락하지만 주인공은 왠지 찜찜한 느낌을 감출 수 없다. 이런 게 흔히 말하는 '형사의 감'이라는 걸까?



동료 형사들과 수사의 견해 차이로 주먹다짐까지 불사하고 홧김에 술을 진탕 마신 다음 날, 주인공은 자신의 차 안에서 눈을 뜨고 뭔가 이상한 걸 발견한다. 아파트에서 부부 살인사건이 일어난 건 2003년, 그런데 오늘은 2009년이다! 동화처럼 딱 하룻밤 새에 무려 6년이 흘러버린 건 아니고, 원래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던 주인공에게 기억상실 증세가 일어난 것이다. 이제 주인공의 지상 과제는 두 개. 과연 기억을 잃어버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밝혀야 하고, 내내 찜찜했던 과거의 사건을 재수사해 한 점의 의혹도 남기지 않아야 한다. 비교적 사회 구조나 가치관 등이 단순했던 옛날보다 사회가 복잡해지다 보니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의 머릿속도 복잡해져서일까. 예전에는 듣도 보도 못한 정신병도 참 많아진 것 같다. <기억나지 않음, 형사>에서는 그 많은 정신병리적인 증상 중에 특히 기억상실을 주된 소재로 삼고 있는데, 사실 가벼운 기억상실 증세라면 우리에게도 그닥 낯선 분야는 아니다. 지금 당장도 번화가를 나가 보면 술이 떡이 되어 집도 못 찾고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가 아닌가. 단 하루, 몇 시간 동안이라도 자기가 한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엄연한 기억상실, 보통 무서운 일이 아니다. 일행이랑 싸우지는 않았는지, 술값은 제대로 냈는지 깨고 나서도 며칠간은 별별 생각이 다 든다.



하다 못해 술자리에서 몇 시간 필름 끊긴 것만 해도 이렇게 공포(?)스러운데 그게 살인사건과 연관된 기억이라면 어떻겠는가. 세상에 그보다 소름 끼치는 일이 또 있겠는가. 이처럼 기억상실은 모든 독자의 관심을 단숨에 모을 만한 참으로 매력적인 소재이다. 더구나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의 자아찾기 투쟁이라는 넓은 의미에서의 문학적인 상징성도 있고. 그런데 막상 생각해보면 이렇게 먹음직스런 소재인 기억상실을 다룬 추리소설들이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예전 아동용 축약본으로 나왔던 윌리엄 아이리시의 <검은 커튼> 정도. 그 이유가 뭘까? 어쩌면 핵심 주제가 너무 근사하면 오히려 작가의 상상력을 압도해버릴 수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기억상실을 당한 주인공이 찾아나서는 자신의 정체가 악당일 수도 있고, 첩보원일 수도 있고, 탐정일 수도 있고, 알고 보니 이 모든 게 가벼운 소동극일 수도 있고 등등 뻗어나갈 수 있는 갈래가 지나치게 많아 플롯을 짜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닐 터이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읽기도 전에 독자들이 재미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소재에 섣불리 도전하는 건 보통 작가의 뱃심으로는 하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찬호께이는 한마디로 이 힘든 일에 도전해 일정 부분 이상의 성과를 거두고 보기 좋게 물러났다. 질투가 날 정도로 멋진 솜씨를 보여주면서 말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실패작이라고 생각했다. 줄거리가 내가 짐작한 것과 한 치도 다를 바 없이 흘러갔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소 시시한 범인의 정체도 딱 맞췄다만, 아뿔싸 남은 페이지가 무려 100쪽! 그때부터 연속적인 반전이 펼쳐지는데 가히 피스톤 펀치가 복부에 연속으로 너댓 방 꽂히는 느낌이었다. 반전의 질과 양이 가히 놀라운 수준이라 연신 감탄하면서 찬찬히 다시 복기해보니 결국 진범의 정체도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고, 적당히 머리를 굴려 보면 충분히 맞출 만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완벽하게 속은 이유는 아마도 작가가 깔아놓은 오답이 너무도 선명해 다른 가능성을 오히려 막아놓아서였던 것 같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찬호께이에게 완벽히 '현혹'당했다고나 할까. 작가의 영리함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대목은 주인공과 조연들의 직업을 형사나 스턴트맨처럼 액션과 밀접한 세계로 설정해 영상화의 가능성도 높였다는 것이다. 참고로 '쇼 브라더스 영화사'를 연상시키는 '허 브라더스 영화사'에서 무명시절의 성룡이나 원표 같은 무술배우들이 등장하는 내용들은 단순한 곁가지가 아니라 작품의 미스터리 플롯이나 손에 땀을 쥐는 클라이맥스에 꽤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억하라, 찬호께이는 무엇 하나 버리는 게 없는 작가다.



개인적으로 홍콩이라는 도시를 유달리 사랑해 <13.67>처럼 홍콩의 구체적인 지명이나 홍콩인의 삶에 대한 얘기가 많은 것도 좋았다. 작가는 홍콩 독자를 상대로 하는 책이라면 너무 당연해서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얘기도 꼭 설명하고 넘어가는데, 이는 홍콩 독자보다는 외국 독자를 의식해서인 것 같다. 아마도 본인이 홍콩을 대표하는 홍콩 추리소설 '국가대표' 같은 의식이 있는 듯하다. <기억나지 않음, 형사>는 대만에서 개최되는 '시마다 소지 문학상'의 2회 대상작이다. 아마도 시마다 소지는 본인의 이름을 딴 문학상에서 '21세기 본격 미스터리'라는 의제를 제시하면서 그에 걸맞은 작품을 기다렸던 것 같다. 그가 말하는 21세기 본격 미스터리라는 것은 미스터리의 환상성과 논리를 갖추면서도 21세기에 통용되는 최신 과학의 지식과 방법론이 녹아 들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고전적인 미스터리의 장점은 고스란히 갖추되, 늘 하던 얘기만 늘어놓는 것이 아닌 현대적인 미스터리의 새로운 길이 제시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에서 찬호께이가 21세기의 뇌과학이나 신경병리학 등을 꺼내든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이 제시한 문제를 멋지게 풀어낸 찬호께이에 대해 시마다 소지는 이런 상찬의 말을 남겼다.



"작가의 이번 작품은 그의 이해력과 고도의 글쓰기 능력을 활용해 21세기 본격추리라는 새로운 용어와 창작 방법에 모범답안을 제시한 셈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작가의 머릿속에 자발적으로 떠오른 창작이라기보다 자신의 재능 일부를 활용해 타이완에 상륙한 21세기 본격추리라는 새로운 생각에 반응한 것이며, 작가에게 있어서는 비주류성의 습작일 뿐이다. 정말로 그렇다면 이 작가의 무한대한 재능이 더욱 확연히 드러나는 지점이라고 하겠다."

과연 추리소설계 대작가답게 시마다 소지의 예언은 정확했다. 최신 과학을 등장시킨 21세기 본격추리라는 문제에서 무난히 합격점을 받은 찬호께이는 3년 뒤 외부로부터 요구받은 비주류성의 습작을 벗어나 자신만의 주제와 방법론으로 자발적인 창작을 하게 되는데, 그 작품으로 무한대의 재능을 만천하에 보여주었다. 그 작품이 바로 <13.6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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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무게 1
케빈 길포일 지음, 이옥용 옮김 / 북앳북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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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출간된 <그림자의 무게>는 케빈 길포일이라는 미국 작가의 처녀작으로 그야말로 완전히 묻힌 책이다. 아마 국내 장르소설 중에서 비교적 인기가 적은 SF 설정이 깔려 있어 그런 게 아닐까 짐작되는데 일독의 가치가 분명히 있는 책이라 예전부터 아쉬웠었다. 출판사는 문학수첩의 성인 브랜드인 '북앳북스'. <해리 포터>로 대성공해서 그런지 이곳은 주로 영미권의 책만 내는데, 당시 참신한 데뷔작으로 각광을 받고 있던 케빈 길포일도 국적 덕분에 문학수첩의 레이더에 포착된 것 같다. 전체 680쪽의 분량이라 분권을 했는데 아마 독자들이 분권을 싫어하는 요즘 나왔다면 분명히 비난을 받았으리라. 개인적으로는 분권을 해서 사랑받은 책도 있고, 만약 분권으로 판매가 망한다 해도 그것 역시 출판사의 선택이라 크게 투덜대지 않는 편이지만 독자들의 기호가 단권에 있다면 귀 기울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뭐니뭐니 해도 지갑 여는 사람이 갑 아니겠는가. 리뷰를 쓰기 위해 다시 읽어본 이 책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전에 읽었을 때만 해도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는데, 성인끼리의 경우에 한정하여 남자는 모두 반말, 여자는 모두 존댓말을 쓰고 있는 것이다. 번역자가 여성이었음에도 자연스럽게 이랬던 걸로 알 수 있듯이 10년 전만 해도 그게 자연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첫 출판사에서 이런 것도 무의식적인 남녀차별이라며 반기를 든 여성 편집자로 인해 번역 말투에 관한 회의를 열었던 기억도 난다. 새삼 세월은 많은 걸 변화시킨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도 변하고, 생각도 변하고, 말투도 변하고...



<그림자의 무게>는 이른바 '하이 콘셉트'가 빛나는 책이다. 그게 뭐냐 하면 줄거리를 한 줄로 요약할 때 과연 독자에게 먹히는 쌈박한 게 있느냐는 것인데, '공룡 화석 속에서 공룡의 피를 빤 모기를 채취해 그 DNA로 공룡을 현대에 부활시킨다. 하지만 관광 상품화된 공룡이 탈출해 온 세상이 쑥대밭이 된다.'는 한 줄 줄거리라면 아마 어느 누구도 책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이 책의 하이 콘셉트 역시 간단하지만 매우 효과적이다. '딸을 살해당한 복제 전문 의사가 우연히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범인의 DNA를 얻게 된다. 딸의 살인자를 찾기 위해 의사는 불법으로 범인을 복제하고, 복제당한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주변에서 관찰한다. 이 아이가 성인이 되면 살인자의 얼굴과 똑같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초반 100쪽 안에 이런 흥미진진한 줄거리가 제시되는데 어찌 읽기를 중단하겠는가. 요약된 줄거리 몇 줄만으로도 책을 집어들게 만드는 힘, 이게 바로 하이 콘셉트의 궁극적인 역할일 테고 그런 면에서 <그림자의 무게>는 완벽하게 성공했다. 내 생각에 비록 뒤의 이야기는 바꾸더라도 초반 설정만큼은 우리나라에서도 영화화를 시도해볼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듯하다.



이야기의 진행은 여타의 미국식 스릴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1, 2, 3...식으로 숫자를 붙인 짤막한 챕터들이 나열되며 20년의 세월을 관통하는 것이다. 하드보일드나 본격 추리소설을 보면 철저하게 주인공이나 관찰자의 시점에서만 그들의 눈에 비친 풍경들이 제시되며 시공간 이동도 어느 정도 제한적이다. 그러나 스릴러는 짤막한 챕터마다 A에서 B로 자유자재로 등장인물이 전환되며, 배경도 뉴욕이었다가 바로 다음 장에서 시카고로 이동하는 등 그 제약이 덜한 편이다. 혹시 이런 형태를 보면 생각나는 것이 있지 않은가? 씬 넘버가 있는 짤막한 챕터, 등장인물과 시공간 배경의 유연한 변화... 바로 영화 대본 말이다. 내 생각에 할리웃 영화는 1900년대 초반부터 미국(을 넘어 전 세계까지) 엔터테인먼트의 확고한 기준이 되었고, 범죄소설 작가들 역시 그 영향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받아들여 스릴러 소설이 영화 대본의 형식과 비슷해진 게 아닌가 추측된다. 



강력한 초반 콘셉트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림자의 무게>는 의외로 느긋한 페이스를 보인다. 특히 사립탐정들이 어쩌다 사건에 끼어들어 헛다리를 짚는 장면들은 분량도 만만찮고, 내용 진행상 곁가지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굳이 전개에 비효율적인 이런 장면들을 추가했을까. 물론 분량이 늘어나야 200페이지 책이 300페이지가 되고, 20달러 하드커버를 30달러에 팔아먹을 수 있는 마법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좀 잔인하게 농담한 말이고, 실은 마땅히 작가적인 야심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오락적인 재미에 방점을 찍은 다른 스릴러와 달리 <그림자의 무게>의 주제는 제법 진지한 편인데, 아무래도 인간 복제가 주소재이다 보니 복제를 감행한 의사, 그리고 원치 않게 살인자의 DNA로 태어난 아이의 정체성 찾기에 꽤 비중을 두고 있다. 이런 정체성의 문제는 소설 속에서 <심즈>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합친 듯이 묘사되는 '섀도 월드'라는 게임에서 가상의 '나'를 키우는 유저들의 이야기로 확대된다. 더구나 이 책을 가장 가슴 아프게 기억되게 만드는 결말부의 두 가지 반전은 인간이 인간을 창조하는 신의 영역에까지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식에 한계가 있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지를 수밖에 없는 실수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전개상 꼭 필요하지 않은 사립탐정들의 이야기도 바로 이런 주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쓰였다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그림자의 무게>는 현실과 게임에서 벌어지는 두 가지 연쇄살인을 추적하는 스릴러로서도 충분히 매력 있고, 진지한 주제를 곱씹는 맛도 제법이다. 하드 SF도 아니니 어려울까 걱정하지 말고 이번 기회에 꼭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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