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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나 - 시드니 셀던 자서전
시드니 셀던 지음, 최필원 옮김 / 북앳북스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또 다른 나>는 베스트셀러 작가 시드니 셀던이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스스로 자신의 지난 인생을 돌아본 자서전입니다. 시드니 셀던이 무슨 간디처럼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위인도 아니고, 헤밍웨이처럼 존경 받는 작가도 아닌데 웬 자서전? 하실 분도 분명히 계시겠지만 꼭 역사책에 나오는 어마어마한 위인만이 자서전을 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시드니 셀던은 1970년 <벌거벗은 얼굴>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총18권의 소설로 전세계에서 3억부를 팔아치웠다지만 분명히 후세에 길이 남을 문호라고는 부를 수 없는 작가입니다. 당대 대중의 기호를 정확히 읽어 잘 팔릴 만한 대중소설을 기획해 충실하게 소설화해낸 상업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위에도 말했듯이 꼭 위인만이 자서전을 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기나긴 인생의 여정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을 만한 교훈을 줄 수 있다면 누가 쓴들 어떻겠습니까. <또 다른 나>는 적어도 저에게만은 큰 교훈을 주었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많은 힘을 준 작품이므로 당당하게 추천합니다.
시드니 셀던은 1917년 시카고에서 출생했습니다. 본명이 시드니 샥텔인 그는 가난한 이민자 부모의 장남으로 그의 가족은 대공황 때 극심한 빈곤의 늪에 빠지고 맙니다.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인 그는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자신과 식구들의 생계를 위해 대학교를 어쩔 수 없이 그만 두고 열일곱 살에 호텔 카지노 휴대품 관리소, 약국 점원, 공장 직원 등으로 살아갑니다.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작가의 꿈은 멀어져가기만 하자 그는 자살을 결심합니다. 일하던 약국에서 수면제를 몰래 빼돌리고 자살을 결행하려 하는 순간, 아버지에게 발각된 시드니 샥텔. 아버지는 절망에 빠진 아들과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시드니, 넌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잖아."
그제야 나는 아버지의 말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건 어제 얘기였어요."
"그럼 내일은?"
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 인생이란 원래 소설 같은 거 아니겠니?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있잖아. 페이지를 넘기기 전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요."
"그걸 어떻게 알지? 하루하루가 새로운 페이지인 거야, 시드니. 곳곳에 깜짝 놀랄만한 일이 숨어 있다고. 페이지를 넘기기 전까진 그 누구도 알 수 없어."
과연 그렇습니다. 인생은 기나긴 장편소설. 페이지를 넘기기 전까진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앞페이지가 우울했다고 해도 뒷장까지 절망적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요?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결국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는 소설을 보고 우리가 크나큰 희망을 느끼는 것처럼 이 자서전에는 마술 같은 희망과 용솟음치는 용기가 가득합니다. 더구나 결말을 알 수 없어 가슴 졸이며 보게 되는 소설과 달리 우리는 이 자서전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온갖 좌절과 고난을 넘어 결국 성공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게 되는 시드니 셀던의 현재 모습을 익히 알고 있기에 편안히 페이지를 넘기면 되는 것이지요. 참으로 간만에 하게 되는 흐뭇한 독서인 셈입니다.
시드니는 발음하기 어려운 성을 셀던으로 고치고 헐리우드로 날아갑니다. 물론 어떤 비전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는 MGN이나 20세기 폭스 등의 거대한 스튜디오들의 전성기. 스튜디오 안에 광대한 촬영지와 150여명의 전속 작가 등을 갖추고 영화를 생산해냈습니다. 실로 미국 영화의 전성기라 해도 과언이 아닌 시기였죠. 시드니는 먼저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시나리오 리더로 일하게 됩니다. 그럴싸한 소설을 읽고 대강의 내용 요약과 느낀 점들을 정리하면 되는 일이었죠. 이 일자리를 잡는 과정 역시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타이프라이터도 버스비도 없는 그에게 저녁 6시까지 4백 페이지 소설을 읽고 30장짜리 페이퍼를 작성해오라고 요구하는 스튜디오. 그는 무조건 말합니다. "물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근처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는 사촌의 전부인을 무작정 찾아가 도와달라고 말합니다. 사촌이 바람펴서 끝난 사이기 때문에 사실 거기 가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사촌의 전부인은 그의 불굴의 의지를 높이 평가해 점심도 굶고 타이프를 쳐줍니다. 시드니 셀던은 당연히 채용되었죠.
그 다음부터 시드니 셀던의 부침 많았던 인생이 재현됩니다. 추간판 탈출증으로 며칠씩 쓰러져있는가 하면, 브로드웨이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뮤지컬을 올리기도 하고, 조울증으로 비정상적인 언동을 보였으며,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합니다. 두 번의 결혼으로 인생의 동반자인 아내를 얻었고, 누구보다 소중한 첫째 딸을 낳았으며, 태어나자마자 병으로 죽은 둘째 딸을 가슴에 묻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아흔에 가까운 노작가의 인생을 깊이 있게 볼 수 있으며, 그가 가졌던 꿈과 희망에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됩니다. 이런 장면도 있으니까요.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시나리오 리더로 일하고 싶어 찾아갔을 때, 문전박대 당한 그가 나중에는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사장 자리를 제의받게 되는...
초창기 미국의 연예 비즈니스계를 알고 싶은 사람에게도 유용한 책입니다. 데이비드 셀즈닉 같은 타이쿤 프로듀서가 활개를 쳤던 스튜디오 전성기부터, TV의 도래로 연예계의 무게추가 TV로 옮겨갔던 시대까지 두루 현장에서 활동했던 사람답게 뛰어난 기억력으로 당대 명사들의 흔적을 재현해놓고 있습니다. 마릴린 먼로와 데이트했던 이야기와 벤자민 '벅시' 시걸의 애인과 데이트하다 죽을 뻔했던 일들은 아주 재미있고, 프레드 아스테어, 버스터 키튼, 세실 B 드밀, 주디 갈란드,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의 유명인들도 다수 출현합니다. 심지어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시드니 셀던의 집 파티에서 설거지를 도맡았다는 이야기는 그 아니면 누구도 말하지 못할 일화겠죠. 시드니 셀던이 그 유명한 캐리 그랜트를 감독했던 것도 정말 몰랐던 일로 우리 생각보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연예계 종사자였나를 깨닫게 만들어줍니다.
웬만한 소설보다 이 이야기들이 훨씬 재미있는 건 역시 실화기 때문이겠죠. 자서전이 보통 용비어천가가 되기 쉬운데 반해 이 책은 비교적 균형적입니다. 그가 받았던 온갖 혹평도 가감없이 실려 있고, 그가 행했던 선행들(예를 들어 작가 생활 초창기에 그는 일을 잡으면 비슷한 처지의 가난한 시나리오 지망생과 항상 공저를 했습니다), 매커시 선풍을 맞아 용기있게 저항했던 일들을 그다지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정작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70년대 이후의 인생은 그리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18편의 책을 어떻게 구상했으며, 어떻게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는가를 공개한다면 작가지망생들에게 참 도움이 될텐데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게 바로 제가 속편을 기대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짐작컨대 "물론 할 수 있습니다"일 것입니다. 시드니 셀던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네버 기브업 정신으로 많은 문제들을 헤쳐나가 왔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성공은 당연히 따라오는 것일테죠. 나약한 정신 상태로 '나는 안 돼', '못 해'만 일삼는 저같은 사람에게 깊은 반성과 귀감을 준 책으로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만약 작가지망생이라면 시드니 셀던의, 영화에서 갈고 닦인 듯한 뛰어난 장면 전환 기법이나 진지함과 유머를 어떻게 황금비율로 조화시키는가 등을 배울 수도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작가로서의 정신 자세를 확실하게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