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종말의 바보
이사카 고타로 지음, 윤덕주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한일 양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사카 고타로의 최신작. 예전에 스티븐 스필버그가 좋은 영화의 조건을 '20자로 요약 가능할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확실히 그의 영화는 '외계인과 우정을 나누는 지구 꼬마'. '현대에 부활한 공룡' 등 20자 미만으로 쉽게 요약될 수 있다. 이른바 '하이 콘셉트'라는 것으로 내용 요약이 짧게 가능하다는 건 그만큼 중심 내용이 분명하고, 소구점이 명확해 보는 사람들이 골머리 썩히지 않고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종말의 바보]는 전형적인 하이 콘셉트의 법칙을 따른다. '지구의 종말이 3년 밖에 남지 않았다면?' 20자를 넘지 않는다. 심리 테스트나 심심풀이용 100문100답에나 나올 듯한 뻔한 질문이지만 막상 답변하기는 어렵다. 닥치는 대로 폭음, 폭식, 폭연애(?)를 하면서 되는 대로 막 살 수도 있겠고, 쭉 해왔던 일을 묵묵히 수도자처럼 해나갈 수도 있겠다. [종말의 바보]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8명의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머릿 속으로 슬며시 생각해보고 책장을 넘기도록.
비교적 다작 작가인만큼 신선도와 필력이 빨리 소진되지는 않을까 팬으로서 항상 걱정되는데 [종말의 바보]는 어깨에 힘을 완전 빼고 쓴 작품임이 느껴진다. 아마도 잡지에 연재하지 않았을까 추측되는 짤막한 8개의 단편들은 다소 평범한 느낌이다.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이나 이리저리 꼬인 플롯이 하나씩 맞아가는 짜릿한 구성의 재미를 느끼기는 어렵고, '종말'에 맞닥뜨린 사람들의 심리를 비교적 정공법으로 그리고 있다. 만약 이사카 고타로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종말이라는 소재 자체가 주는 흥미와 이사카 고타로의 또하나의 장기인 피식 새어나오는 유머, 무거운 주제를 가볍고 경쾌하게 풀어내는 능력에 감탄하고 말 것이다. 물론 이사카 고타로의 오랜 팬들이 보기엔 전작들의 재기를 별로 느낄 수 없어 약간 심심하겠지만.
거대한 운석이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카운트다운은 벌써 시작되었고, 남은 시간은 이제 단3년. 폭력과 살인으로 울분을 풀던 시민들도 이젠 지쳐 적당히 평화가 찾아온다. 서서히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 믿기지 않는 현실을 앞두고 일본 동북지방 센다이 시(이사카 고타로의 모든 소설 배경은 센다이다. 아마도 고향인 듯)에 위치한 센다이 힐스타운 아파트에 사는 8명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죽음을 앞두고 소원해진 가족과 화해하는 남편도 있고, 임신한 아이를 낳을 것인지 말 것인지(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의 수명은 단 2년에 불과하니까) 고민하는 부부도 있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당신의 선택지도 채워져 있을 것이다.
8개의 단편 중에는 그저그런 것도 있고, 꽤 그럴싸한 것도 있다. 개인적으로 <강철의 킥복서>나 <소행성의 밤> 같은 것이 좋았고 <형제의 복수> 같은 건 시간낭비였다. 짤막한 만큼 쉽게 읽히고 제법 감동도 있다. 읽고 나서 크게 후회할 수는 없는 단편집이다. 다만 이 정도의 감동 소설은 다른 작가들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사카 고타로라면 종말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좀더 독특하고 재기발랄하게 요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열성팬의 투정을 마지막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