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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 아이야, 가라 1 ㅣ 밀리언셀러 클럽 46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이틀 전만 해도 난 아니라고 대들었을 거야. 그래, 난 경찰이야. 하지만 운 좋은 경찰이지. 좋은 아내와 좋은 집, 지금까지 투자도 괜찮게 했고 말이야. 20년만 채우면 난 옷 벗고 떠날 거야. 하지만 달라지는 게 뭐가 있지? 빌어먹을 지하실엔 여전히 난도질당한 아이가 있을 거 아냐? 그럼 이렇게 말할 건가? '그래, 좋아. 세상은 개똥 같아. 그래도 내 인생은 쓸 만하잖아? 세계는 어떻든 난 괜찮다고.' 무슨 뜻인지 알겠어?"
보스턴 시를 떠들석하게 만든 유괴 사건이 벌어진다. 유괴당한 아이의 이름은 아만다 맥크레디로 고작 네 살 먹었다. 사건에 개입하게 된 사립탐정 콤비 켄지와 제나로(둘은 파트너이자 연인이다)는 아만다의 엄마 헬렌을 만나고 헤아릴 수 없는 환멸감을 느낀다. 완벽한 백인쓰레기인 헬렌. 술과 마약과 TV에 절은 창녀에 불과한 그녀는 딸 아이를 데리고 해변에 갔다가 뜨거운 모래밭에 아이를 몇 시간이고 방치에 둬 전신화상을 입힐 정도로 생각없는 엄마다. 딸아이의 실종 사건을 조사하러 온 두 탐정에게 한 말이라고는 '화면 가리니까 TV에서 비켜요.' 정도.
켄지와 제나로는 아동범죄팀의 베테랑 형사들인 풀레와 브루사드와 함께 유괴 사건을 조사해나간다. 그날도 헬렌은 남자랑 술을 마시러 술집에 갔었고, 자물쇠로 잠기지도 않은 집에 혼자 자고 있던 아이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고도 열두 시간이나 지나서야 아이가 없어진 걸 알았다니 하늘은 왜 이런 여자에게 아이를 준 것인지 모르겠다. 간절히 원해도 아이를 얻지 못하는 부부도 많은 터에...
사건을 조사해나가다 보니 헬렌은 뜻밖에 거물 범죄자와 연루되어 있음이 밝혀지고, 켄지와 제네로는 어려서부터 친구인, 마피아도 함부로 못 건드릴 정도로 무지막지한 부바의 도움을 요청한다. 마침내 유괴범 측에서 연락이 오고 보스턴의 모든 경찰력이 총동원되어 인질금 교환 장소인 채석장을 포위한다. 그러나 돈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켄지, 제네로, 풀레, 브루사드의 앞에 나타난 건 인형을 든 아이가 아닌, 수백 발의 총탄이었다. 함정에 빠진 네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끝까지 집중하기 바란다. 저리도록 가슴 아픈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가라, 아이야, 가라>는 <미스틱 리버>와 <살인자들의 섬>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이다. 두 작품 이전에 쓰고 있었던 켄지/제나로 시리즈의 네번째 이야기로 역시 대단한 필력을 보여준다. 데니스 루헤인의 강점은 역시 오감을 모두 만족시키는 글을 쓴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 때때로 등장하는 돌발적인 폭력 장면은 근육을 모두 긴장시킬 정도로 강렬하고, 주의깊게 배치된 단서를 두 탐정이 하나씩 깨닫는 대목은 머리를 팽팽 돌아가게 만든다. 찰진 대사의 윤기 역시 대단하고 다소 신경질적인 느낌이 드는 시니컬한 유머 감각도 제법이다.
그러나 역시 데니스 루헤인은 우리의 감정에 직접 호소하는 작가가 아닐런지. 그의 소설에서 살아 숨쉬는 등장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 전작 <미스틱 리버>에서 살해당한 여자의 장례식 장면은 굉장히 길고 자세하지만 사실 플롯과는 무관해 빼버려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빼버리면 작품의 맛이 지금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는 장례식 장면을 통해 살아 남은 가족들의 절절한 슬픔과 인생과 죽음의 허망함 등을 정교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도 마찬가지다. 봉사하고 지키는 일을 너무도 하고 싶었던 두 형사의 절절한 토로나 어쩔 수 없이 안타까운 선택을 해야 하는 켄지, 제나로의 심경에 나는 진실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 재미있고 놀라운 작품의 정보를 무심히 누설하는 것은 일종의 범죄일테니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게 유감이다. 다만 이 작품 결미의 '선택의 문제'에 대해 많은 토론을 나눠보고 싶다. 켄지의 선택, 제나로의 선택 중 무엇도 쉽사리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보도록 하자.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윤리적인지를. 세상에 옳은 일이란 무엇일까, 누가 그걸 판단할 수 있을까. 선택의 문제에 어쩔 수 없는 주인공은 결국 깊은 좌절에 빠지고, 그 좌절감은 내 마음까지 흠뻑 적셔놓고 말았다.
흔한 범죄소설이 절대 아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깊은 회한과 탄식이 비어져나온다. 데니스 루헤인은 이 작품으로 자신이야말로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작가임을 입증해보였다고 생각한다. 올해 책을 한 권만 읽을 수 있다면 이 작품을 택하기 바란다. 그만큼 대단한 걸작이다.
"그는 광장의 반짝이는 형광빛과 기상등대와 무선송신기의 붉은 펄스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아름답군. 하나 알려줄까?'
'뭘요?'
'난 아이들을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