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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솔직히 상식이 부족한 나로서는 MB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파시즘'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하였는데, 이 정권이 내게 남긴 두가지는 파시즘, 공황의 명확한 의미와 데모하다 만난 애인되겠다.
어쨌거나 이 책 역시 1937년 유럽에 파시즘의 기운이 넘쳐나고, 스페인 내전의 소식이 전해지던 무렵 나왔다. 슬프게도 요즘 한국 상황에 아주 잘 맞아떨어지니 읽는 내내 머리를 끄덕이고, 무릎을 쳤으며 호탕하게 웃어준 대목도 여러번이다. 동물농장을 생각해보라. 조지 오웰은 아주 위트가 있으면서 날카로운 글쟁이이고 이 책도 그렇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번째 단락은 조지 오웰이 어느 단체의 청탁으로 북부 노동자지대를 두달한 취재하여 쓴 르포다. 노동자들이 묵는 하숙집에 묵으며, 남의 집에 문 열고 들어가 비새는 곳도 보고, 변변한 이부자리도 없는 침대까지 꼼꼼하게 살펴 기록한 글이다.
왜 가난하고 더러운 곳에 살아야 하는가? 그들의 벌이로는 그런 집세 밖에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모든 사회에서 구성원의 상당수는 실업자로 살 수 밖에 없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이 어렴풋이 이제 알아가듯이 개인의 문제라기 보다는 일자리가 더 없기 때문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면 수십억을 들여서 관청을 지을 돈은 있어도, 쪽방촌에 사는 이들을 위한 싼 주택을 제공할 돈이 없다. 저 위에 있는 누군가들은 노동자들은 입에 풀칠만 해야지, 한달에 영화한편 아니 고기 한근을 사먹는 것도 사치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최저임금 수준만 봐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조지 오웰의 시대에도, 그리고 지금도 참이다.
조지 오웰은 임신한 여성이 탄광에서 기면서 석탄을 채굴한 것이 불과 한세기 전의 일이며, 만일 지금도 그렇게 밖에 석탄을 얻을 수 없다면 석탄없이 살기 보다는 그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산업사회의 맨 얼굴임을 말한다. 광부들의 작업과정, 그들의 삶터, 일터, 수입, 질병, 실업 등을 세밀하게 데이터와 함께 보여주면서 우리에겐 하나의 상품인 석탄 뒤에 우리가 빚지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매일 아침 마술처럼 깨끗해지는 건물, 믿을 수 없는 속도의 택배, 놀랍도록 싼 농산물 등 모두 우리가 누군가에게 빚지고 있지만 그 사실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들 말이다.
이 책의 두번째 부분은 계급과 사회주의에 대한 조지오웰의 생각들을 그리고 있다. 이 글만으로는 정확히 그가 그리던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보이지는 않지만 그 비판만은 지금도 꽤나 유효해 보인다.
공산주의와 가톨릭주의가 비슷한 점 하나는 '배운' 사람들만이 완전한 정통파라는 사실이다. (중략)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정말 흥미로운 점은, 정통이다 싶은 것을 실생활과는 전혀 무관해질 정도로 밀고 나간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심지어 우리가 마시는 음료도 정통적이거나 이단적일 수 있다. (중략) 이는 공산주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순결한 형태의 신조는 진짜 프롤레타리에게선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238~239쪽)
사회주의의 '근본' 취지에 공감하는 평범하고 수수한 사람은 어느 심각한 사회주의 정당에도 자기 같은 부류를 위한 자리는 없다는 인상을 받는다. 더 나쁜 것은 그가 사회주의란 실현될지도 모르지만 가능한 한 저지해야 하는 운명 같은 것이라는 냉소적인 결론을 내리도록 내몰린다는 점이다.
(245쪽)
우리가 함께 목표로 삼고 단결할 수 있는 이상은 사회주의의 바탕이 되는 이상 밖에 없다. 바로 정의와 자유다. 허나 이런 이상은 거의 완전히 잊혀버려 '바탕'이란 말을 쓸 수도 없는 지경이다. 이 이상은 이론 일변도의 독선과 파벌 다툼과 설익은 '진보주의'에 층층이 묻혀버렸다.
(290쪽)
조지 오웰은 중산층이 사회주의자가 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선거 때 진보정당에 표를 던지는 것 뿐(우리나라 자칭 사회주의자들은 이마저도 안한다) 자기 계급 사람들과 어울리며 부르주아적 취향을 즐기며, 자기 계급의 사람들과 결혼한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시간의 절반은 자본주의 체제를 비난하는 데 쓰고, 그 나머지는 버스 차장의 무례함에 분을 터뜨리느라 허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지 오웰은 요즘 흔히 유행처럼 번지는 자신이 속한 계층을 조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런 양식의 차이를 넘어 그들을 어떻게 사회주의로 포섭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조지 오웰은 나름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동의하면서도 사회주의자에 대한 반감을 갖는 이유를 분석해 간다. 전통적이고 기본적인 미감을 소중히 생각하는 보통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사회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할까? 조지 오웰의 대책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본질을 희생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외관은 크게 희생해 마땅하다고 본다. 이를테면 사회주의 운동에 아직도 붙어다니는 괴팍스러움의 기미를 떨쳐버릴 수 있다면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샌들과 베이지색 셔츠를 싾아놓고 태워버릴 수만 있다면, 채식주의자와 금주주의자와 위선자를 '웰윈 가든 시티'(전원도시란다)로 돌려보내 조용히 요가나 하며 지내게 할 수만 있다면! 하지만 그렇게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단, '가능한' 것은 훨씬더 지적인 사회주의자들이 지지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어리석고 다분히 엉뚱한 방식으로 멀어지게 하는 일은 그만두는 것이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융퉁성 없이 구는 일이 너무 많은데, 그런 것들은 너무 쉽게 근절할 수 있다. (중략) 거기다 거의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구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끔찍한 전문용어도 문제다. 일반인들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니 '프롤레타리아의 연대'니 '수용자들에 대한 수용'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영감을 받는 게 아니라 정나미가 떨어질 뿐이다. (중략) 평범한 문의자들을 사회주의자는 샌들을 신고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 입에 거품을 무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가버리도록 만드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다. 사회주의 운동에도 인간미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지 않는 한 게임은 끝이다.
(299~301쪽)
이를테면 여기 있는 나는 교육으로 보면 부르주아지면 소득으로 보면 노동 계급이다. (중략) 하지만 나와 거의 같은 처지인 수만 수십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그리고 그보다 훨씬 다수인, 이번엔 수백만에 육박하는 부류는(온갖 종류의 사무직 종사자와 검정 코트를 입고 다니는 종업원들) 어쩌란 말인가?(중략)
그것은 우리가 쓰는 도구가 곡괭이든 만년필이든, 빈곤은 빈곤이라는 핵심적인 사실로부터 주의를 빼앗아버린다.(중략)앞으로 몇 년 안에 중산층 가운데 상당 부분이 갑자기 우파 쪽으로 대거 몰려갈 위험이 상당히 크다.
(303~308쪽)
우리가 효과적인 사회주의 정당을 출범시키지 못한다면, 내가 이 책의 1부에서 기술한 여건을 바로잡거나 영국을 파시즘에서 구할 가망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으로 혁명적인 의도를 가진 정당이어야 할 것이고, 행동할 수 있을 만큼 수적으로도 충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정당은 우리가 일반인도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일 만한 목표를 제시할 때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다른 무엇보다 지능적인 선전이 필요하다. 신성한 세 자매 정, 반, 합은 언급하지도 말고 '계급의식'이니 '수용자에 대한 수용'이니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니'니 '프롤레타리아의 연대'니 하는 말은 줄이는게 좋다. 정의와 자유, 그리고 실업자들의 공경에 대해 더 이야기 하는 게 좋다. (중략) 필요한 것은 두 가지 사실을 대중의 의식 속에 각인하는 것 뿐이다. 하나는 모든 피착취 인민의 이해관계는 같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사회주의는 상식적인 양식과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다.
(308~309쪽)
- 강조는 내가 했다.
이 글을 보니 사회주의자들의 모양새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어려운 운동권 용어를 남발해 심정적 동조자들에게도 꿈꾸는 소리나 하는 먹물들로 오해받고, 나누고 찢어져서 니가 이단이네, 너는 좌경이네 우경이네 하며 싸우는 행태 말이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입장을 취하기 위해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라는 걸 자꾸 깜빡깜빡하게 된다.
오웰의 말대로 실업자들, 자꾸만 살림살이가 어려워만지는 도시 소상공인들,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이해하기 쉽고, 그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할 만한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녹색성장, 부동산 일확천금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지고 또 질 수 밖에 없다. 그 시절에도 지금도 역시 우리가 파시즘에 이기는 방법은 그것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