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테로전...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몇 마디 하자면, 휴일에 미술관을 가는 것은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뛰어다니는 어린이들과 그 아이들을 따라온 무심한 부부, 끈적한 커플들, 숙제하러온 학생들 등 엄청난 인파에 파묻힐 각오를 단단히 다져야 한다.
사실 평일에 갈 생각이었는데, 라주미힌님이 서울에 올라왔다며 보고싶은데 같이 볼 사람이 없다고 꽤나 애처롭게 말해 은평에 선배집에서 부랴부랴 땡볕 더위에 덕수궁으로 향했다. 도착하고 보니 참 잘왔다는 생각이 든것이 그 더운 날씨에 까만셔츠를 예쁘게 차려입고 덕수궁 벤치에서 낮잠을 즐긴 라님을 발견했기 때문인데.. 전화보다 훨씬 더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어쨌거나 누군가를 너무나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라님이 물한목음 마실 틈을 주지 않고 덕수궁으로 내달려서 엉결에 타는 목마름으로 전시를 관람하게 되었다..
아~~~ 덕수궁 미술관에는 어째 식수대도 안보이는지 --;;
이 후기가 몹시 목마른 상태에 더위와 사람에 지친 휘모리가 쓴 것임을 고려해 주기 바란다.
색
전시관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작품들은 정물이다. 가장 보테로의 특징을 쉽게 잘 볼 수 있다. 흔히 그의 작품을 떠올리면 볼륨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내겐 그 색채가 더 먼저 떠오른다. 그의 나라 국기의 색깔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노랑, 녹색, 빨강 이 한 캠퍼스 안에서 쨍한 남미의 날씨처럼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 사람 색을 많이 칠할 면이 필요해서 볼륨있게 그리는게 아닐까?
그림 속 여자들
그의 작품 속의 여자들은 크다. 남자들만큼 튼실한 허벅지와 왕발들을 가지고 있다. 사랑을 나누는 순간에도, 속옷차림으로 담배를 꼬나문 모습도, 춤을 추는 순간에도 큰 몸을 당당히 드러내고 있다. 라틴의 그녀들은 풍성하고 당당하고 아름답다.
에우로페의 납치를 다룬 작품을 보자. 하얀 소로 변한 제우스 위의 올라탄 에우로페의 모습은 납치당하고 있다기 보다는 소를 잡아챈 듯한 모습이다. 라님의 말대로 힘줄이 터질 듯 힘겨운 것은 제우스지 에우로페는 마냥 당당하다. 나는 나의 욕망의 승리자!
라틴 아메리카
그의 작품은 분명히 그가 누구인가를 말해준다. 작품 속 열린 창문 뜸새로 보이는 작은 풍경마저 라틴아메리카의 그것이다. 거기엔 아름다움도 있고, 아픔도 있고, 민초들의 힘겨움도 있다.
자그마한 바느질 공장의 모습, 마약과 독재정권으로 긴장감이 흐르는 거리풍경, 도박장에서 엉덩이 밑에 살짝 카드를 숨긴 도박사의 모습, 댄스홀에 춤추는 남녀.. 그의 작품중에 가장 따스한 작품들은 이렇게 소소한 소시민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그리고 사진이든 그림이든 나는 대상에 대해 애정이 묻어나는 이런 작품에 시선을 빼앗긴다.
커다랗게 그려진 교황이 욕조에 누워있다. 그 아래 그의 1/10만하게 그려진 작은 사내가 수건을 들고 있다. 교황은 하얗고 작은 사내는 검다. 모두가 평등하게 사랑받아야할 종교 안에서도 세상의 권력구조와 다름이 없다. 웃사람은 희고, 아랫사람은 검고, 윗사람은 즐기고 아랫사람은 그를 보살펴야 한다.
서커스를 그린 장면들도 보자. 그의 작품답게 현란하고 볼륨감 있는 인물과 동물들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가만히 보고 있자면 공연 시작 전의 무표정, 고단함이 서글프게 묻어난다.
그 자신이 투우사 양성학교를 다녔기에 투우를 그린 그림 역시도 화려한 볼거리라기 보다 치열한 삶의 현장 같다는 생각이 든다. 칼에 찔려 죽어가는 소의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어떤 동정도 없다. 소나 투우사나 그저 불꽃같은 한 생의 삶을 살고 마감한 것 뿐이다..
투우든 서커스든 누군가에겐 유흥이고 누군가에겐 일이고 삶의 터전이다..
무엇보다 유머
그가 우리나라에서 유명하게 된 것은 고전에 대한 페러디 때문이다. 스물에 미술대회에서 입상한 상금을 가지고 유럽으로 건너가 그곳에 미술관들을 전전하며 모사품을 팔면서 공부를 했던 그다. 이 사람의 작품은 잰 척 하지 않는다. 콧대 높아 보이지 않는다. 원래의 우아한 귀족 여인, 모나리자도 좋지만 그가 그린 터질듯 몽글몽글한 모나리자도 사랑스럽지 뭔가.
아, 나는 이 남미 사내가 필시 다정하고 소박하리라는 느낌에 빠져든다. 자기 고향의 산천을 저렇게 사랑스럽게 볼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림 속의 워터메론을 깨어물고 싶을 만큼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관람한 전시였지만, 그의 작품 세계를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는 훌륭한 전시였다.
인천에서 8시간 때양볕에 걷게 했다고 그 더운 날씨에 맛난거 사준다며 덕수궁에서 인사동까지 걷게 한 라님도... 이제 그만 마음의 앙금을 풀기 바란다. (밥도 내가 사지 않았소..) 인천에서는 정말 내가 미안했소.. 정말 몰랐단 말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