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집에 있자니 날도 너무 덥고 해 혼자 극장에 가서 해운대를 봤다. 
(쬐그마한 원룸은 더운 날이면 지글지글 익는다 익어 --;;) 

어쨌거나 영화는 재미있었고 눈물 질질 흘리며 보고 나오는데,
뜬금없이 초등학교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이 나더라. 

우리 아버지, 참 그 영화속 설경구의 케릭터와 거의 흡사하다. 

부모가 하는 식당을 명목상으로만(?) 공동운영을 하고 있던 우리 아버지는
장가 가고나서는 또 마누라를 열심히 식당에 내보내고 자기는 술로 한세월 보낸 사람이다.  
(하지원의 앞날이 보인다 보여 ^^;;)

술한잔이 안들어가면 입도 뻥끗 안하는 이 사람의 특이점은
벌어먹이는 마누라와 딸들을 엄청나게 귀애했다는 거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들한테는 꽤나 엄하고 무뚝뚝했는데,
언젠가 오빠가 군대에서 쓴 자서전 같은 일기를 훔쳐본 적이 있는데,
(그런 일기를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딸들에게 차별받는 가운데 낀 아들의 
절절한 서러움이 묻어나는 글이었다 ^^ 

아버지의 취미는 마흔둥이인 나를 주름치마에 레이스 블라우스로 곱게 차려입혀서,
친구분들 술자리에 데리고 나가서 자랑하는 것이었다. 

설경구가 하는 '니네 아들 몇 등해?'
이거 우리 아버지 주요 멘트 중에 하나였다.
(지금 공부잘했다고 자랑하는거냐고? 맞다 ㅎㅎㅎ) 

엄마한테 무지 구박당하면서도 나를 술자리에 달고나가서
닭발하나를 쥐어주며, 요거 먹고 엄마한테는 비밀이다는 눈짓을 해보이던~  

한때 기타에 미쳐서 가출했다 들어와 그 실패를 술로 달랬던 걸까?
식당이 끝나면 마누라랑 식당 집기를 밀어놓고 사교춤을 추던 사내.
참 로맨틱한 구석이 있던 그 남자는.. 

긴 세월 참 불쌍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듯 한데,
불쌍한 건 엄마지 아빠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 

고등학교 입학 했을 때 어머니가 어느 날 나를 부르더니
'옥아 저 장롱에 모시비개 안에 통장이 있다.
고거는 언니 오빠도 모른다.
니 대학공부할 돈이다,
혹시 내가 잘못되거나 집에 불이라도 나거든  
꼭 니가 가지고 가라.' 

그 헐렁하고 노래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고 술이나 먹던 경제관념이라고는 없던 사내가 공부잘하는 막내딸은 꼭 서울 유학 시킬 거라며 따로 떼어놓은 돈. 

그 통장으로 아버지는 내게 다시 한번 왔다. 

부모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열심히 살아야 할 책임이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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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09-08-10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이리 슬플까요... 눈물이 나와요...

무해한모리군 2009-08-10 08:43   좋아요 0 | URL
저희 아버지 경상도 사내 시리즈를 풀었어야 하는데~ ㅎㅎ
배꼽 잡습니다.
간큰 남자 시리즈는 댈 것도 아닙니다 ㅋㄷㅋㄷ
후애님을 울린 죄로 조만간 한번 풀겠습니다.

2009-08-10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10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9-08-10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휘모리님 설경구 캐릭터에서 아버질 보셨군요.
가슴이 짠해지는 단상이에요.
식당집기 몰아놓고 홀에서 사교춤을 추시는 모습.. 상당히 낭만적이셨네요.
갱상도 사내 시리즈 저도 기다려져요.^^

무해한모리군 2009-08-10 13:02   좋아요 0 | URL
잡기에 능하셨어요 ㅎ

저희 어머니가 티브이에 터프가이가 나오면 늘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터프가이, 데불고 살아봐라' ㅎㅎㅎ

카스피 2009-08-10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슴이 짠해 오네요.
휘모님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무척 많이 느껴집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8-10 13:03   좋아요 0 | URL
시대를 앞선 하우스 허즈번드? ^^
음식해주고 애들 예쁘게 꾸며주고 이런걸 즐기셨어요.
어머니는 장부스타일, 아버지는 아기자기~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후의 제 옷차림이 확 달라졌다는 슬픈 이야기가 --

무스탕 2009-08-10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곁에 계셨으면 얼마만큼의 사랑을 쏟아부어 주셨을까요..

무해한모리군 2009-08-10 13:13   좋아요 0 | URL
본인이 그리 술을 드셨으니, 얼마 못살줄 아셨던거 같아요.
마흔에 들어 낳은 자식이라 약간 손주처럼 언니오빠 키울때랑 좀더 다른 느낌이었다고 하시더라구요(엄마왈)

제가 생긴것도 아빠 많이 닮았는데 하는 짓도 비슷한지.. 아 놀기만 좋아라 하고, 살아계셨으면 시집안가는 막내딸 때문에 밤잠을 못이루셨겠죠 ㅎㅎㅎ

머큐리 2009-08-10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딸은 아빠구나...에고...아들은 엄만데...그래서 난 두 아들과 전쟁 중이다...ㅎㅎ

라주미힌 2009-08-11 01:08   좋아요 0 | URL
아직 늦지 않았어요... 크.. 딸을 키우는 재미가 장난 아니라는데.. ㅋㅋ

무해한모리군 2009-08-11 07:56   좋아요 0 | URL
라님 그러다 아들 셋되믄 어떻해요ㅋㄷㅋㄷ

라주미힌 2009-08-11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흔드는 글이네용.. 앞 뒤로...

무해한모리군 2009-08-11 07:56   좋아요 0 | URL
더 흔들테닷!! 마구마구

Forgettable. 2009-08-11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해운대 보면서 질질 짜고 왔는데 보고 와서 보니까 괜히 더 마음이 뭉클하네요-

무해한모리군 2009-08-11 23:33   좋아요 0 | URL
가족은 애뜻하기도 하지만 저를 단단하게 해주기도 하는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