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익 소장본 세트 -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 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 + 사람이 뭔데
전우익 지음 / 현암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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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디어를 통해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책을 접한뒤 얼마지나지 않아 '전우익 소장본 세트'가 출시된 것을 알고, 이전에 구입했던 단행본은 쟁여둔 채로 세트를 구입했습니다. 무엇보다 '전우익 사색노트'가 부록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동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소장본 세트'를 구입한 뒤 실망이 적지 않았습니다. 조악함의 극치라고 할까요? 대강 대강 급히 만드느라 미처 손볼틈없이 내놓은 것 같은 느낌. 참 좋은 책들을 두루 내어놓고 있는 현암사 측에 원망같은 말들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정작 당사자인 전우익 선생님이 이 '소장본 세트'라는 것을 보면 뭐라 말씀하실까하는 생각조차 품어볼 정도였습니다. 허나 세 권의 책을 읽고난 뒤 이 원망은 사그러들 수 있었습니다. 아주 말끔하지는 않지만 말이지요. 여하튼 '세트'라는 이름으로 보지 말고, 책 한권 한권, 글 한줄 한줄에 의미를 담는다면 기실 최고의 도서로 손꼽기에 주저함이 없을 듯 합니다.

어느 시인은 전우익 선생님에 대해 '정직한 세월의 초상, 정돈된 아름다움'이라고 이야기 했다는데, 그 '정직한 세월의 초상'은 그럴 듯 하지만 '정돈된 아름다움'은 좀 불편해보여요. 이유인 즉슨 전우익 선생님 스스로도 정돈된 걸 그리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뭐 깔끔하고, 정리된 그런 삶이 아니라 그저 되는대로 살아내기도, 살아지기도 하면서 그렇게 사는 것 같거든요. 스스로도 정돈하려고 하다보면 그것에 얽매이고, 갇히게 되고 뭐 그런거라고 말씀하시대요. 물론 지독한 욕심쯤은 품고 살아야된다고도 하시긴 했지만 말이에요. 그게 정리되고 정돈하려고 하는 것 아니겠지요? 하긴 역설적이게도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사는 것이 가장 잘 '정돈된 아름다움'일 수도 있지 싶습니다.

이처럼 전우익 선생님은 '꼭' 무엇을 해야되고, 어떻게 살아야하고라는 정언적 사고의 틀에 익숙한, 더욱이 '성공'과 '경쟁'에 찌들어있는 우리들과는 다른 삶의 자세를 가르쳐줍니다. 하긴 어찌보면 가르쳐준다는 말도 참 불편부당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전우익 선생님의 글쓰기는 무엇을 어떻게 어떻게 하라는 명령형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찌 어찌 했으면 좋겠다는 청유나 권유형도 아니고, 무엇을 내놓고 떠들고자하는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궁극적으로 독자들을 염두에두고 무슨 바램이라든가 깨달음같은 것들을 기록한게 아니기 때문이에요. 쉽게 말해서 책 내려고 쓴 글이 아니란 것이지요.

스스로도 그렇게 말씀하시듯 전우익 선생님의 글쓰기(편지)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좀 더 제대로 살아보고자함에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지인 한 사람과 주고받는 1:1서신이라는 이유로 무슨 계몽이나 선도, 또 그럴듯한 미사여구나 구구장창 설교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그 편지들을 모아 끝내 책을 내어놓아준 분들의 덕택으로 우리는 그저 훔쳐보는 것이지요. 전우익이라는 사람의 기록을 '받을 사람'아닌 우리가 마치 중간에서 엿보는 심정으로 그렇게 그렇게 도둑질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지만 몰래 엿본 그 편지는 '받을 사람'뿐 아니라 모든 우리에게도 큰 의미가 됩니다. '보내는 사람'(전우익)의 글에 담긴 반성과 성찰, 깨달음의 고백은 어쩌면 그걸 훔쳐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더 적정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또한 편지를 읽어가다보면 '노신'이나 '도연명', '사마천' 등...참 많은 사람들 또한 만나보게 되는데, 우리는 또한 그들의 범상치 않은 삶을 통해서도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노신의 '아Q'를 만났고, 그 속에서 나도 만났고, 또 이 땅의 민초들을 만나게 되는 대목에서 반성, 또 반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부끄러울 따름이지요.

전우익 선생님이 그러대요. 운명과 싸울게 아니고, 놀라고. 모쪼록 전우익 선생님의 글쓰기가 그러하듯 우리의 훔쳐보기 또한 자신을 돌아보고 좀 제대로 살아보고자-놀아보고자-하는 깨달음의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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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 현대문학북스의 시 1
안도현 지음 / 현대문학북스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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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시의 미덕은 무엇보다 고도의 상징성이나 난해한 은유, 현학적인 용어의 사용을 극히 절제하고, 현실적이고, 직유적이며, 대중의 언어를 고루 사용하는데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시의 서정성이나 낭만주의적인 요소들이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되려 현실주의와의 변증법적 원융을 통해 시의 지평을 넓혀주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로 위와같은 성격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하여 제목에서 느껴지는 어떤 관념적인 방향이 아닌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낭만적이기도 한 시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시집에서는 '나무'가 제재를 이루어 절반에 가까운 시들에 포진해 있는데, 하나같이 시인은 '나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그 '나무'를 보며 안타까워 합니다. 특히 '나무생각'이라는 시에서처럼 시인은 '무조건 무릎꿇고 한 수 배우고 싶'어하는(마치 신앞에 선 인간처럼)겸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거의 모든 시의 소재는 '자연'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거대한 '자연'이라는 공간이 아니라 '자연'을 이루는 작은 것들 말입니다. 이를 통해 시인의 눈이 결코 '거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미시'를 말하면서, 끝내 그것을 관통하여 우리네 삶의 아픔을 구구절절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밖에도 시인으로서의 삶을 중얼거리는 시들을 만날 수 있지만 대체적으로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것을 말하자면 위와 같다고 할 수 있겠어요.

여전히 안도현 시인은 작은 것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사색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라고 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깊이와 속깊은 통찰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범상치 않게'라고 하는게 맞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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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신영복 서화달력 - 탁상용
신영복 글.그림, 돌베개 편집부 엮음 / 돌베개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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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매해 세밑이면 이곳저곳에서 날아드는 달력들이 한무더기 입니다. 버리자니 보내준 사람의 입장에 서보건대 참으로 미안하지 싶고, 또 책상 맡에 두기엔 조잡한 광고들이 눈에 거슬리는 것 같아 어느 구석에 박아뒀다가 그해 세모가 되어서야 개운한 마음으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나름으로는 달력이란 것이 좀 무언가 의미있는게 되었음 싶은데, 온갖 광고나 문구들로 인해 그 소중한 하루하루, 날들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 같아 마뜩찮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올해에도 각별한 달력을 책상 맡에 두고 싶은 욕심에 쇠귀 선생님의 서화달력을 구입했습니다.

정성어린 서화들을 보면서 매일같이 나의 마음을 다잡고, 무엇보다 하루를 참되게 살라는 뜻을 마음에 아로새기며 살아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대요. 그리고 이듬해 첫달까지 합해 놓은 배려가 고맙기 그지 없었습니다.

올해가 아직 스무날도 넘게 남아있지만 전 벌써 쇠귀 선생님의 서화달력을 펼쳐놓았습니다. 1월의 서화를 보며 '어제의 결실'이 되기위한 옹골찬 오늘을 살기 위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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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 문학동네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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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일년을 두고 볼때 내가 읽는 시라고는 고작 10편 내외로 한정된다. 그리고 그 10편 내외의 시라고 해야 늘 알고있는 시를 한번 더 읽어보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4월이오면 김수영과 신동엽 시인의 시를, 가을이면 김현승과 윤동주, 김광균 시인의 시를 다시 펼쳐드는 정도이다. 그러한 시들도 처음 접하게 된 것이 고등학교 시절 입시준비를 위해 공부했던 시들을 다시 읽는 것이니 문학에 관심이 있다고 하는 사람으로서는 아주 미천한 수준의 시읽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 나에게 절친한 교회후배가 시집 한권을 선물해줬으니 바로 그 책이 <바닷가 우체국>이라는 안도현의 시집이다. 신문지면이나 잡지 또는 인터넷을 통해 안도현 시인의 시를 간간히 접해보았던 경험이 있는지라 나름대로는 이 기회에 시집 한번 제대로 읽어보리라고 생각하며 펼쳐들었다.

이미 듣던 바대로 안도현의 시는 구수했다. 시 한절 한절 마치 어린아이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할머니처럼, 주름진 손으로 화롯불에 구워주시던 그 밤맛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순간 순간 절절하게 마음을 울리는 시구들이 꼿꼿한 마음을 녹아내리게도 해주는 듯 하였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부박한 현실과 이상 속에서 괴리하던 나의 마음을 더 복잡하고, 답답하게 만들어준 것은 나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p.13 '고래를 기다리며' 中)

'세상은 혁명을 해도
나는 찬 소주 한 병에다
숭어회 한 접시를 주문하는 거라
밤바다가, 뒤척이며, 자꾸 내 옆에 앉고 싶어하면
나는 그날 밤바다의 애인이 될 수도 있을 거라'
(p.16 '숭어회 한 접시'中)

'삶이란,
버선처럼 뒤집어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
(p.40 '양철지붕에 대하여'中)

다른 시인에게서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 분명 있었다. '삶'이라는 화두에 의미를 부여하고, 미사여구로 치장하는 시쓰기가 아닌 '삶'그대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 몸뚱이로 살아내려는 마음들이, 그 언어들이 시 속에 구구절절 박혀있었다.

그 누구라도 삶이 지치고 힘들다면, 이 시집 한권 읽어보며 힘든 삶에 눈물 흘려봅시다. 찬 소주 한병에 숭어회 한 접시 먹은 것처럼 콸콸해진 마음을 느낄 수 있을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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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하느님
권정생 지음 / 녹색평론사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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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우리들의 하느님이란 책 읽어봤냐?'
-'예. 읽어봤지요. 언제드라... 지난 4월인가...암튼 읽어봤어요'
-'나도 요며칠 전에 읽어봤그든...너는 어떻디?'
-'뭐가요?'
-'책읽고 어땠냐고...느낌이'
-'뭐...그냥 좋았죠. 아 이렇게 사는 분도 계시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또 그 생각대로 살아가는 분도 계시는구나 했지요 뭐...'
-'그르냐?...'
-'왜요? 형은요?'
-'난 무섭드라. 권정생이란 사람 참 무서운 사람이구나 했다...'
-'하하, 원래 무서워요. 이제야 알았어요?'
-'그 분 책은 처음읽어본 거그든, 책 중간쯤 읽다보니까 열나 무서워지더라구...그래서 고만 읽을까 하다가...암튼 다 읽었스'

간만에 만난 선배(내가 삶의 스승으로 모시는 선배임을 밝혀둔다)와 술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다. 그 선배는 권정생이란 사람이 무섭다고 했다. 지난 96년도에 입학해 지난해까지 신학을 전공했던 그 선배는 <우리들의 하느님>이란 책을 읽고 권정생이란 사람이 무섭다고 했다.

-'지금은 이 모양으로 살지만 한때는 신학하지 않았었냐. 물론 지금도 신학하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근데요?'
-'내가 X나 왜 신학을 했을까? 권정생같은 사람 앞에서 내가 신학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신학을 하지 않아도 그렇게 신학적으로 생각하고, 신학으로 살아가는 분 앞에서 말이야...'
-'그쵸? 그러네요 정말... X도 아닌게 신학 나부랭이를 하고 있었네요...'
-'이 새끼, 나한테 하는 말이냐?'
-'네. 하하... 형이랑 나 둘다, 아니 신학한다는 사람들, 전부다...'

그 선배와의 만남을 파하고 집으로 돌아와 나는 그 책을 다시 펴보았다. 그리고 여기저기 밑줄 그어놓았던 구절들을 읽어나갔다. 그러다보니 나도 무서워졌다. 권정생이란 사람, 그리고 이 책이 무서워진 것이다. 그리고 다음의 구절에서 나는 내가 '신학도'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신학(神學)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지만 올바른 신학을 한다면 농학(農學), 인간학, 자연학을 함께 공부해야 한다고 본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는 추상적이며 관념에 머문 신학을 가르치지 않았다. 입으로 설교하는 목회가 아니라 몸으로 살아가는 목회자가 있어야 한다. 밭을 갈고 씨뿌리고 김매고 똥짐을 지는 농군이 바로 이 땅의 목회자다. 창세기의 하느님나라는 말씀으로 되었지만 지금은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하느님나라가 다시 창조되고 천국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 몸으로 살지 않고 수천만번 주기도문만 외운다고 하느님나라가 이루어지는건 절대 아니지 않는가.'(p.27)

'이 땅의 천재들은 머리로 살아가지만 바보는 몸으로 산다. 부처님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랬고, 진정 이 땅위의 위대한 인간은 바보로 돌아갔다. 머리로 산 것이 아니라 몸으로 살았다.'(p.106)

나는 당장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픈 생각이 들어 몇권을 주문했다. 하지만 지금, 받아든 책들을 누구에게 주여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 그들도 나와 같을거라면 주고 싶지 않다. 허나 주어야 한다. 이 땅위에 하느님나라 이루어갈 함께할 이들, 더 많은 동지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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