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말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한 사회의 헤게모니를 지배하는 권력에 대항하여 진실을 말하기란 얼마나,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한 사회의 도덕적 척도를 가늠하는 일은 미디어의 건강도를 통해서 결정된다. 촘스키의 말처럼 어쩌면 현대사회에 있어서 "미디어는 권력 그 자체"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우리가 권력에 의미에 상관하여 먼저 권력의 생산적 기능(푸코)를 인정한다고 한다면 권력 그 자체인 미디어는 긍정적 힘을 창출할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한 것이다. 미디어는 이처럼 육중하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미디어는 생산적 기능을 수행하는 반면 그만큼, 혹은 그보다 더 부정적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사회의 총체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회망 안에서 미디어는 권력의 대항이거나 권력의 시녀이다. 당연히 모든 권력이 그렇듯이 미디어는 생산적 권력을 형성하고 그 힘을 창출하여 사회의 건강도를 높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또 모든 권력이 그렇듯이 자신의 안일을 담보하기 위한 생존투쟁에서 지배적인 권력의 시녀 역할에 수월하게 능하다. 이러한 현실에서 미디어의 몸과 각 기관에는 암 세포가 점점 전이된다. 암 세포의 전이로 인해 미디어는 본래의 그 목적과 역할을 잊은 채 자기 정화기능을 상실한다. 자신의 목숨만은 부지하기 위해 산소통 만을 붙들고 있다.

 영화 "굿나잇 앤 굿럭"은 시종일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으면서 권력과 진실 사이에서 팽팽한 대결 구도를 그려 놓는다. 보는 이는 이 지적인 영화를 보며 권력과 진실 뿐 아니라 이념과 진실, 그리고 현실과 진실에 이르기까지 '진실'의 수많은 대척점들과 불편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원래 '진실'과 진실하게 싸워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

 이른바 '매카시즘'이라 불리는 지난날 미국 내 이념 논쟁과 마녀사냥은 고뇌하는 지식인들의 입에 재갈을 물렸고, 손에는 수갑을 채워놓았었다. 하지만 그 틈에서도 진실을 향한 몸부림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만신창이가 어떤 것이었는지 영화는 보여준다. 그 만신창이는 진실과 함께 살아남아서 관객에게 정확히 목도된다. 숨쉴 틈 없는 영화의 호흡을 한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영화가 막을 내리면 사람들은 우르르 극장문을 나선다. 그리고는 다시 영화가 그리워져 극장 안으로 들어가 마음을 수습한다. 극장 밖의 미디어에는 진실이 없어 보여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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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해 전 '말죽거리 잔혹사'로 화려하게 데뷔한 유하 감독. 시인인 그가 영화로 눈을 돌렸을 때 그의 역량에 대해 반신반의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70년대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학원 폭력'이라는 소재로 그려냄으로써 영화적 완성도 뿐만 아니라 볼거리에도 충실한, 소위 '볼만한'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두 번째 작품인 '비열한 거리'로 더 심도있고, 더 재미있게 돌아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말죽거리 잔혹사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의해 폭력화된 인간상을 그렸다면 비열한 거리는 인간 내면의 모순으로 눈을 돌린다. 기실 '의리에 살고 죽는 건달들의 이야기'가 현실에서 존재할 법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한국 '조폭영화'의 통념상 '의리'는 하나의 등식처럼 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판타지를 비열한 거리는 거부한다. 오히려 영화는 조폭들의 세계를 인간세계의 하나의 상징으로 넘나들며 '의리란 인간세계에서는 아예 존재할 법 하지 않은 것'으로 일반화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일반화가 낯설거나 어색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사람되기는 힘들어도 괴물되지는 말자'(생활의 발견)던 한 영화의 대사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은 별 수없이 때론 '괴물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괴물들은 타인에 대한 이해와 연민보다는 자신의 이득을 존재 기반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사람과는 다르다. 이러한 괴물들은 영화에서처럼 자신의 출신성분(철거촌/초등학교 동창/심지어는 '식구')과는 상관없이 당면한 이해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관계의 지도를 다시 그려나간다. 과격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이러한 이야기가 인간사회의 축소판이자 현실임은 인정할 만하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비열한 거리'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자아낼만하며, 기존의 조폭 판타지 영화와는 분명히 차별화된 길을 걷는다. 그 차별화된 길이란 바로 '의리로 똘똘 뭉친 거리'가 아니라 '비열한 거리'이며 인간들의 비루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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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환. 그 영화에 대한 입소문이 퍼져나가면서 사람들은 극장을 찾았지만 나는 애써 외면하던 터였다. 술을 한 잔 걸치면 우리의 대화는 코스대로 일상에서 맴돌고, 몇 순배 돌고나면 이미 정치나 이념에 대한 토론의 장으로 이동하기가 마련인데,(참고로 그 마지막 종착역은 '사랑'이라는 주제이다.) 그 목청 높아지는 시간을 환기시킬 즈음이면 종종 '송환'이라는 영화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피력하는 시간이 돌아오곤 하였다.(가끔식 일간지의 섹션처럼 문화에 대한 소개나 후기를 털어놓는 지면이 펼쳐지곤 하는데 대체적으로 비주류의 책 혹은 영화들이다.) 그러한 시간에 나는 평소와는 달리 잠잠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유인즉슨 앞에 밝힌 것처럼 나는 무던히도 '송환'이라는 영화를 피해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피하고 싶은 것은 영원히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애타게 그리워 마주친다는 것조차 두렵기도 한 그런 사람을 마주치는 순간은 반드시 오는 것처럼. 그런 순간은 좀처럼 오지 않아도 언젠가는 꼭 온다. 송환도 결국 그렇게 마주쳤다.

 내가 송환을 멀리했던 이유는, 이를테면 자기기만의 뚜렷한 특징을 보여준다. 피하고자, 피하고자 하는 생각은 그 반대되는 생각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으니 피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없다면 피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게된다. 그러니까 사실은 송환이 무지 보고 싶었던 게다.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보고 싶었던 게다. 그러다가 나는 봤다.

  실은 이 '묵직한'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한 나의 견해는 비우고 싶다. 영화에 대한 접근으로하여 영화가, 송환이 쉬워지거나 단정되어서는 아니된다. 지금 내 안의 그 막연하고 암담한 느낌들을, 그 흐린 구름같은 것들을 걷어내고 싶지 않다. 나는 이것들을 담아두고 오래오래 열어볼 것이다. 그리고 빛바랜 책표지처럼 세월이 나도 흐르게 하면 또 열어볼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여, 되도록이면 송환을 멀리하시고, 참다 참다 못 견디면 불콰해진 볼을 하고 슬쩍 열어보시라. 정치적으로 좌측통행을 하시는 분들 중에 그 신념이 투철하시거나, 아니면 이념과는 상관없이 감수성이 풍부하거나, 또는 졸려우신 분들은 손수건이나 휴지를 준비하시라. 그러나 되도록이면 손수건이나 휴지를 사용하지 마시라. 그냥 눈물이 흐르면 턱 끝 간질간질해 질 때까지 그냥 두시라. 그리고 소주를 한 병 쯤만 더 마시고 주무시라.

 뜬금없지만,

 행복은 자유로부터 오지 않는다 의지로부터 온다,

 의지는 풍요로부터 오지 않는다 결핍으로부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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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
탄줘잉 엮음, 김명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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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06년 한 해도 어느덧 1달 여 남짓 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매해 그렇듯이 저물어 가는 한 해를 바라보는 마음은 언제나 허허롭습니다. 그건 아마도 한 해를 살아내는 동안 우리가 달성하고자 했던 목표들과 성취하고자 했던 꿈들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 듯 싶습니다. 그 아쉬움으로 인하여 어떤 사람은 낙관보다는 비관으로, 희망보다는 절망으로 한 해를 마감하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늘 지난 세월에 대한 만족보다는 불만이 더 많이 남는 법이기에 우리들 대부분은 서툴기만했던 한 해를 후회로 접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아침이 밤을 향하여 가고, 밤은 또 내일의 아침을 향해 가듯이 오늘의 저무는 해는 다시 떠오를 내일을 향합니다. 내일이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우리에게는 늘 희망이 있습니다. 그 희망의 내용이란 비록 오늘의 어려운 상황들 가운데서도 내일은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그 기회인 따름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어질 새 날을 오롯이 마주하기 위해선 저무는 한 해를 잘 갈무리해야만 합니다. 세밑 정리. 지난 한 해 간을 돌이켜보면서 아픔과 어려움으로 인해 무너졌던 마음자리를 다잡고, 새해에 대한 기대를 품는 일입니다. 그리고 올해는 그 일을 책과 벗삼아 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조선 후기 문인 이덕무 선생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면 책을 벗삼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일에 퍽 흥미를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슬픔이 밀려와 사방을 둘러봐도 막막하기만 할 때에는 그저 땅을 뚫고 들어가고 싶을 뿐, 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에게는 두 눈이 있고, 글자를 알기에 한 권의 책을 들고 마음을 위로하면, 잠시 뒤에는 억눌리고 무너졌던 마음이 조금 진정된다."

 그 한 권의 책으로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를 추천합니다. 이 책은 그야말로 '가슴 뻐근한'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의 일들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사실 그 일들이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만 온갖 핑계로 미뤄두었던 일들이 대부분입니다. 대개 그 핑계들이란 시간이 없다거나 형편이 어렵다거나, 그리고 쑥스럽다거나 난처하다는 등과 같은 것들이었지요. 그러나 책은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바로 그 일을 하라고. 그동안 미뤄뒀던 그 일들을 통해 행복을 나누고 맛보라고, 또한 감동을 느끼고 그 감동 바이러스를 전하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49가지의 이야기들과 함께 지난 한 해동안 우리가 했던 일들과 우리가 하지 않고 남겨놓은 일들을 한 번 곱씹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한 해동안 과연 얼마나 행복과 감동을 나누며 살았는지 말입니다. 혹 몸서리치도록 후회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후회일랑 접고 얼른, 꼭 해야할 49가지의 일들로 내년도 계획을 세워보는 것은 어떨른지요? 이 책을 편저한 탄줘잉의 말처럼 그것은 "정말이지, 후회없는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물론 후회없는 삶이란 불가능하지만 최대한 노력하는 삶이 후회를 조금 더 줄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 책과 함께하는 옹근 세밑정리, 곧 남은 한 해에 대한 갈무리, 그리고 오게 될 새해에 대한 준비를 통해 우리의 삶은 더욱 아름다워지리라고 봅니다. 49가지 일들을 계획하고 실천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갈 날들만큼 세상 또한 더욱 밝아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날들이 우리에게 쇠털처럼 많은 행복의 순간으로 남을 것을 믿습니다.

"행복했던 나날들이 모두 모여 바로 오늘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쇠털처럼 많은 행복했던 순간이 모여 당신의 오늘을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하루를 감사하며 살아야 할 뚜렷한 이유입니다."(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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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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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일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더군다나 그것이 법과 제도로 정해져 있다면 정말 문제가 있는 거지요. 사형이란 제도 말입니다. 이미 사형이란 제도를 폐지한 몇몇 나라들이 존재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여전합니다. 구태의연한 법과 제도, 문화 탓도 존재하지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때문 아닐까요? 사형. 누군가를 죽였기 때문에 응당한 대가로서 너도 죽어야 한다는 그 논리가 익숙해진 사람들의 심성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과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처벌에 다름 아닙니다. 속된 말로 '화풀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어떤 여지도, 가능성도 남겨두지 않은 곳, 그곳은 바로 사형입니다.

 <전도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희망이 있다. 비록 개라고 하더라도, 살아있으면 죽은 사자보다 낫다."(9:4) 살아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희망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살아있음, 그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러주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읽는 내내 저는 이 전도서의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희망이 있다...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희망인지...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감사인지...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지를...

 "그래도 산다는 것, 죽을 것 같지만, 죽을 것 같다. 이건 사는게 아니야, 라고 되뇌는 것도 삶이라는 것을. 마치 더워 죽겠고 배고파 죽겠다는 것이 삶이듯이,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삶이듯이, 그것도 산 자에게만 허용되는 것, 그러므로 삶의 일부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이제 죽고 싶다고 말하는 대신 잘 살고 싶다고 바꾸어서 말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303쪽)

 윤수의 죽음 앞에서 유정은 이렇게 읊조리고 있었습니다. 오직 산 자에게만 허용되는 그 삶의 일부를 이제 유정은 감사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대신 잘 살겠다고. 윤수의 죽음으로 인해서 그녀는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사형이라는 제도를 존속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모니카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도, 극악무도한 인간이라 해도, 설사 악마의 화신이라 해도 그를 포기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지요. 우리는 모두 전적으로 선하지 않으니까, 우리는 누구도 결백하지만은 않으니까, 우리는 다만 조금 더 착하고 조금 더 악하니까, 산다는 것이 속죄를 하든 더 죄를 짓든 그 기회를 주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한테는 그걸 막을 권리가 없는 거니까......"(302쪽) 

 이처럼 산다는 것은 기회를 주는 것인데도, 그걸 막을 권리가 없는 우리 인간들은 기회를 박탈해버립니다. 기꺼해야 조금 더 선하거나 악한 인간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천부인권설. 본래 사람의 목숨이란, 인간의 권리란 하늘로부터 부여된 것이기에 사람이 어찌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한 인간의 목숨을 업수이 여기는 것은 아닐지요. 그저 죄에 대한 대가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미래도, 희망도 없이 말입니다. 그간 우리들은 "모른다"는 말로 그 진실을 외면하며 살아 오진 않았는지요. 그러나 이제 인간에게 주어진 한 생이  그 무엇보다 소중함을,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그간 잊고 살아왔던 우리 사회의 일면을 재삼 바라보게 됨으로서 말입니다. 그 속에 뒤섞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고백한 공지영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그 행복한 시간 속으로 초대해주신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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