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더 큰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숙주(host)인 국가를 통해 주조된 guest인 대중들은 철저히 이합에서 집산으로 이동한다. 이제 그들은 '여럿이 아닌 하나', 즉 동일자로 헤쳐 모여 자신들의 공포를 공유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마치 대중들을 조롱하는듯한 화법으로 진행된다. 예컨대 쿨럭거리는 사람을 하나같이 기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하얀색 마스크를 뒤집어 쓴 사람들로 채워진 거리라든가 하는 장면들은 대중의 무지를 조소하는 장치들이다. 이러한 장치들은 한 인간이 어떻게 한 집단 안에 '포섭'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며,(레비나스에게 있어서 '포섭'이라는 개념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집단화된 인간이 얼마나 가차없는 것인지를 보여준다.
철저히 '조작된', 바이러스라는 교집합 속에서 개개인들은 공통분모를 발견하며 자신들의 울타리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 울타리란 고작해야 국가 혹은 거대 권력 집단에 의해 기획된 장치다. 그들은 애초부터 '공포'라는 무시무시한 바이러스로 대중들을 감염시켰고, 여기에서 강두는 괴물보다 더 무서운 적인 것처럼 이용당한다.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이라는 개념처럼 이제 강두는 대중의 공포 해소를 위한 '예수'이다. 그러나 예수와 강두의 차이는 '받아들임'과 그렇지 못함의 간극에서 발생한다. 바이러스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 강두는 이 허위의 굿을 깨뜨리기 위해, 그리고 물론 자신의 딸을 위해 도주한다.
그러나 세상은 벽과 같다. 조금 덜 떨어진 듯한 강두와 무모한(?) 그의 가족들만이 제정신인 세상에서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는 제정신이 아닌 듯 하다. 하지만 대다수가 그러하기에 제정신이 아닌 자, 소위 광인은 강두와 그의 가족들이다. 이 처연하기 그지 없는 대립을 보며 나는 몸서리쳤다. 푸코의 말처럼, 원래부터 광인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전무하던 세상에서 권력 집단들은 세상을 정화시킨다는 목적으로 정신병원을 설립했고, 감옥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본래 정상도, 비정상도 존재하지 않던 세상에는 이제 분명한 경계선이 그어졌다. 광인. 미친 건 괴물이 아니라 권력집단들이다.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