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 영화가 개봉 전부터 진보진영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들이 한껏 기대를 가졌던 건 영화가 보여주는 뚜렷한 '반미적' 시각 때문이었다. 포름알데히드(였던가?)를 한강에 방류한 주체는 미군이었고, 이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었다. 또한 곳곳에 배치된 영화적 장치들은 '제국' 미국에 대한 감독의 불편한 인식을 드러내주고 있었다. 그것뿐인가? 386운동권 세대에 대한 약간의 우호같은 것들은(박해일은 출신성분이 그것을 설명해준다.) 감독의 편향이 어느쪽인지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히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적 장치로 인해 이 영화를 정치적으로 보는 시도를 나는 불편하게 생각한다. 물론 다분히 정치적이지만 그것이 영화를 밀고가는 내러티브라고 보기는 어렵다. 영화는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정치사에 관심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인간과 집단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묵직하게 내러티브를 밀고 가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의 '반미적' 시각이란 시퀀스를 이루는 한 요소일 뿐, 이것이 영화의 주부도, 술부도 될 수는 없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국가와 개인이 주부이고 가족이 술부이다. 영화는 국가(혹은 집단)와 개인을 대립항으로 몰고 가면서 가족을 술어로 비벼넣는다. 국가와 개인의 싸움은 이미 끝이 나있는 싸움이지만 가족은 이 싸움이 쉬이 끝나지 않을만한 주제이다. 그리고 그 지리한 싸움 속에서 '개인'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티게끔 해주는 동인이기도 하다. 그런면에서 이 영화는 세 축을 중심으로 팽팽하게 갈등하고 있다.

 이러한 내러티브 안에서 비로소 영화는 두 가지 물음을 관객에게 건넨다. "개인은 어떻게 황폐화되는가?", 그리고 "황폐화된 개인은 어떻게 극복해가는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영화가 여실히 보여주었다면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제 우리들의 몫이다. 물론 영화에서 강두는 극복해낸다.(TV를 발로 끄는 엔딩장면에서 강두는 통괘하고, 멋지게 괴물같은 국가를 조롱한다.) 그렇다. 이제 황폐화된 우리 존재의 자리를 찾아주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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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숙주(host)인 국가를 통해 주조된 guest인 대중들은 철저히 이합에서 집산으로 이동한다. 이제 그들은 '여럿이 아닌 하나', 즉 동일자로 헤쳐 모여 자신들의 공포를 공유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마치 대중들을 조롱하는듯한 화법으로 진행된다. 예컨대 쿨럭거리는 사람을 하나같이 기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하얀색 마스크를 뒤집어 쓴 사람들로 채워진 거리라든가 하는 장면들은 대중의 무지를 조소하는 장치들이다. 이러한 장치들은 한 인간이 어떻게 한 집단 안에 '포섭'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며,(레비나스에게 있어서 '포섭'이라는 개념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집단화된 인간이 얼마나 가차없는 것인지를 보여준다.



 철저히 '조작된',  바이러스라는 교집합 속에서 개개인들은 공통분모를 발견하며 자신들의 울타리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 울타리란 고작해야 국가 혹은 거대 권력 집단에 의해 기획된 장치다. 그들은 애초부터 '공포'라는 무시무시한 바이러스로 대중들을 감염시켰고, 여기에서 강두는 괴물보다 더 무서운 적인 것처럼 이용당한다.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이라는 개념처럼 이제 강두는 대중의 공포 해소를 위한 '예수'이다. 그러나  예수와 강두의 차이는 '받아들임'과 그렇지 못함의 간극에서 발생한다. 바이러스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 강두는 이 허위의 굿을 깨뜨리기 위해, 그리고 물론 자신의 딸을 위해 도주한다.

 그러나 세상은 벽과 같다. 조금 덜 떨어진 듯한 강두와 무모한(?) 그의 가족들만이 제정신인 세상에서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는 제정신이 아닌 듯 하다. 하지만 대다수가 그러하기에 제정신이 아닌 자, 소위 광인은 강두와 그의 가족들이다. 이 처연하기 그지 없는 대립을 보며 나는 몸서리쳤다. 푸코의 말처럼, 원래부터 광인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전무하던 세상에서 권력 집단들은 세상을 정화시킨다는 목적으로 정신병원을 설립했고, 감옥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본래 정상도, 비정상도 존재하지 않던 세상에는 이제 분명한 경계선이 그어졌다. 광인. 미친 건 괴물이 아니라 권력집단들이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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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의 자유보다 집단의 의무를 우위에 두었던 지난 시대의 유물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 철저히 '자기만의 방'으로 진입한 '개인'들에게조차 여전히 집단의 이데올로기는 온갖 장치를 통해 개입한다. 그 장치란 대개 미디어를 필두로 한 선전/선동 전략을 통해서 주조되는데 이를테면 한 대상에 대한 왜곡된 정보의 유출과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구분한다든가 하는 것들로써 이를 통해 사회 집단 간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각자의 내밀한 의식 가운데 금기의 영역을 조장해내는 것들이다. 이러한 개인들은 집단 속에서 자신들의 의식을 공통적으로 확인-합의하고 일련의 규제장치들을 만들어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한다. 이는 월터 리프먼이 주창한 '동의의 조작'이란 개념처럼 집단(사회 혹은 국가)이 개인을 '쓸모있는 존재'로 빚어내기 위한 얼개들이다. 여기에서 '쓸모있게'빚어진 존재들이란 결국 집단의 이익에 종속될 수 밖에 없는, 예속 상태에 처한 개인들에 다름 아니다.

 영화 '괴물'은 이와 같은 주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일단 영화는 한강에서 신출귀몰하는 괴물을 통해 '보이는 적'을 설정하고, '박강두'를 바이러스의 원흉으로 지목한 국가와 보건기구, 미디어를 '보이지 않는 적'으로 설정한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관객은 (보이는 적과 보이지 않는 적 중에서)진정한 적이란 괴물이 아니라 국가이며, 국가가 곧 괴물의 숙주였음을 감지할 수 있다. 괴물이 바이러스의 숙주라는 미디어의 보도는 바이러스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잠식해 들어간다. 기실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바이러스를 생성했다는 점에서 일체의 권력 집단들은 바이러스의 숙주이며, 나아가 바이러스 그 자체이기도 하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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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참이나 때 지난 영화를 우연한 기회에 찾아보게 되었다. 시간을 때우자는 심드렁한 의도와는 반대로 나는 완전히 영화에 매료된 채 1시간 반 남짓한 시간동안 완전히 속수무책이었다.



 이제 겨우 17살의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한다. 파랑같은 그들의 사랑은 때론 낮고 느리게 때론 폐허같은 정열로 타오른다. 말그대로 '쿨'한 나이에 걸맞게 그들의 사랑도 겉으로는 그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인지도 모르게 서로가 서로를 '미친듯이' 갈구한다. 어쩔 도리없는 사회적 현실과 가정 환경을 넘어 그들은 그들의 사랑을 '위해' 이제 떠난다. 서로 너무나 다른 환경에서 다른 삶을 살았던 그들은 서로를 위해 자신을 포기한다. 자신이 한 남자의 여자로서, 한 여자의 남자로서 헌신하기로 다짐하는 것이다.

 혹자는 어쩌면 그들의 사랑이 너무나 위태로운 것이라고 말할른지도 모른다. 하고보면 그들은 너무나도 감정에 충실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니까. 그래서 그들의 모습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너무 미화시키는 거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영화를 떠나서 본디 사랑이란 미친 '짓'이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짓'이다. 그들이 미쳤거나 아름답거나 어쨌든 그들은 사랑으로 먹.고.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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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다 비상을 꿈꾼다. 그러나 참된 비상이란 속세에서의 성공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날개를 달아 참 자유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아닐까?



  윤종찬의 청연을 마주하면서 인간의 영혼에 날개를 다는 일은 자신의 꿈을 이루게된 결과에서 평가될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발견되어야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줄곧 나의 머릿 속을 맴돌았다. 속세의 눈으로 비추어볼 때 '결과적인' 비상은 대중의 환호를 얻을 수 있지만 인간 자신에게 있어서 올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곧 비상하는 날개는 이미 부러져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한다는 말일 수 있겠다.

  박경원. 친일파라는 역사적 오명 이전에 한 인간이 고뇌했던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나에게 있어 이상의 성취, 곧 비상을 위한 현실과의 타협으로 비추어졌다. 이유인즉슨 과정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감독 자신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그녀의 날개는 결과적으로도 부러지고 말았다. 그것이 숭고한 죽음으로 묘사되었다 해도 숭고함을 느끼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그녀의 죽음은 말그대로 '허무'했기 때문이다.

  뉴스를 켠다. 오늘도 황우석에 대한 검찰의 조사는 계속되고 있다. 황우석의 재기를 기대하지는 않지만 나는 '소름'에서 보여줬던 윤종찬 감독의 역량에서 여전히 희망을 본다. 그의 재기를 기대한다.

(2006. 2. 3. 작성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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