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실컷 낮잠을 자고 나면 한동안 꿈과 현실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여 애를 먹었던 적이 있었다.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에 대한 관념들은 이미 그 벼리를 잃었고, 인간에 대한 판단조차 꿈과 현실을 오가며 가늠했던 기억이 있다. 결국 이 삼간(三間) 모두가 꿈, 그리고 현실이라는 경계에서 좌표를 잃었고, 등대를 잃은 난파선처럼 표류했던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 꿈이란 것은 무엇인가? 혹자는 현실에 대한 반영이라고 했고, 또 다른 이는 현실에 대한 왜곡된 반영이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현실에 대한 왜곡된 형태의 뒤틀린 반영이라고 했으니 꿈이라는 것은 딱히 정의할 수 없는 미개의 영역이자, 신비의 보고이다. 그런데 문제는 꿈이 현실의 반댓말이라는 착각은 바로 우리가 만들어내었다는 데 있다. 오히려 꿈은 현실의 연장선이고, 현실은 꿈의 도화선이 아닐까? 아니면 그 반대일수도. 혹은 꿈과 현실은 말그대로 자리없는 뒤범벅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 '수면의 과학'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잃어버린 채 뒤죽박죽 살아가는 스테판을 통해 우리의 인생을 성찰하게 만든다. 자신의 꿈이 성취되지 않는 직장에서 그저 희망을 잃은 존재로 살아가는 스테판에게 꿈은 자신의 비루한 현실을 벗어나 꿈과 희망이 성취된 유토피아로 이끄는 마법이다. 그 마법이 빚어내는 환상 속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완성해간다. 하지만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는 그의 일상에 치명적인 결과들을 낳는다. 세간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그는 어디 한 곳에 나사가 빠진 것 같다. 엉뚱하기는 이를데가 없고, 둘째가라면 서럽다.

 그러한 그에게 사랑이 찾아온다! 스테파니. 옆 집으로 이사 온 그녀의 묘한 매력에 그는 점점 빠져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늘 그녀 앞에서 보여주는 어설픈 모습들은 그녀와의 거리를 좁힐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스테파니는 오히려 그의 기발하고 엉뚱한 행동들이 천진난만하게 느껴질 뿐이다. 스테판과 스테파니는 은연 중에 서로의 공통점들을 발견하며 마음을 나누게 되고 그들의 사랑은 보여지는 것보다 커져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꿈 속의 사랑 또한 완전할 수 없다. 소심함으로 인해 완성되지 못한 현실에서의 사랑은 꿈 속에서도 예의 그 소심함 때문에 성취되지 못한다. 스테판은 그녀가 자신을 구원해주길 열렬히 기대하고 있지만 스테파니 또한 그 기대에 완전히 부응할 수 없는, 인간일 뿐이다. 외톨이같은 자신의 인생에 한 줄기 빛인 그녀이지만 그녀는 스테판의 세계 속으로 완전히 들어올 수도, 나설 수도 없는 여자일 뿐이다.

 사랑은 어쩌면 다 그런 것이다. 나에게 만큼은 정말이지 특별하고,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 사랑이란 다 그런 것이다. 게다가 사랑의 특징이란 것이 '좀처럼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것'이기에 사람은 그 와중을 헤메다가 절망하기도 한다. 어쩌면 스테판은 몽환적 현실을 살면서 절망한 것이 아닐까? 현실이 꿈처럼 되지 않는 것처럼 사랑도 꿈처럼 성취되지 않으며, 현실이 비루한 것처럼 사랑도 비루하다는 것을 깨달은 건 아닐까? 꿈과 현실, 사랑과 체념된 소망, 난파선, 등대를 잃어버린. 가엾은-사랑스러운 스테판, 스테파니.

 

"날 구해준다면
평생 당신의 친구가 될게요
당신의 침대에 넣어주세요
겨울에 따뜻하게 해줄게요
즐겁게 장난치는 새끼 고양이들처럼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요
당신이 날 구해주면
난 다시 외톨이가 될 필요 없겠죠

차들은 빨리 지나다니고 사람들은 못살게 굴고
가끔은 먹을 걸 구하기 힘들어요
당신의 세계에 넣어주세요
당신을 따뜻하고 즐겁게 해줄게요
비가 올 때 우린 뭘하고 놀까요

당신이 날 구해주면
평생 친구가 될게요
침대에 넣어주면
겨울에 따뜻하게 해줄게요
언젠가 누군가 내 눈을 보며
안녕 넌 나의 정말 특별한 고양이야라고 할 거라는 거 알아요

그러니 당신이 날 구해주면
난 다시 외로워질 필요 없어요
난 다시 외로워질 필요 없어요
난 다시 외로워질 필요 없어요"



<수면의 과학>에서 스테판(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 부르는 노래 “If you rescue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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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도 말을 빼앗긴 시대

좌경 낙인과 사퇴 압력, 정진권 목사 사태를 보는 동료목사의 탄식…강한 자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개신교회는 매도의 대상으로 전락하나

‘좌경 목사’로 몰려 사퇴 압력을 받고 있는 정진권 염창교회 목사 사건 등 한국 교회 안에 부는 매카시즘 바람을 다룬 <한겨레21> 643호는 묵묵히 복음을 전하고 있는 목사들의 탄식을 자아냈다. 정 목사의 동료인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가 매카시즘 공세를 중단하고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가라고 촉구하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 김기석 서울 청파교회 목사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나는 지금 우울하다. 지천명의 나이에 이른 목사가 웬 우울 타령이냐고 욕할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은 분명 잿빛이다. 햇빛이 부족한 겨울이어서가 아니다. 내가 일생을 걸고 붙잡으려던 진실이 가뭇없이 멀어져가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아니, 진실은 그곳에 그냥 있다. 다만 우리가 부평초처럼 세파에 떠밀리고 있을 뿐이다. 예수가 좋아서 예수를 따르기로 했고, 정말로 예수를 닮고 싶었다. 마음 씀씀이와 말과 궁행이 오롯이 그분과 일치하기를 원했다. 지금도 그 꿈은 여전하지만 절실함은 적어졌다. 삶이 편안해지면서 예수 정신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자각하지만 선뜻 돌이켜지지 않는다.

나는 우울하다. 버림받은 이들의 품이 되어주어야 할 교회가 쉴 곳을 찾아 날아온 새에게 상처를 주는 현실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예수는 모두의 품이 되어주셨다. 그러나 부유하게 된 많은 교회들은 오히려 품을 잃어버렸다. 돈으로 하는 구제사업이나 세련된 행사가 품은 아니지 않은가? “목이 마르다. 서울이 잠들기 전에 인간의 꿈이 먼저 잠들어 목이 마르다. 등불을 들고 걷는 자는 어디 있느냐” 탄식하는 정호승의 ‘서울의 예수’에 대답할 말이 없다. 사립학교법 개정에 반대한다면서 서울 시청 앞에 모여 시위를 한 뒤에 바퀴 달린 십자가를 끌고 거리를 행진하는 성직자들의 철면피가 부끄럽고, 성탄절을 앞두고 사학법 재개정을 요구하며 삭발을 단행한 교단장들의 몰상식이 부끄럽다.


△ 편집장을 맡은 책의 ‘친북반미’시비로 사퇴 압력을 받고 있는 정진권 목사는 알록달록하게 채색된 새가 되었다.

사학법 반대하는 성직자들의 철면피

어느 때부터인가 개신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타매의 대상이 된 듯하다. 전래 이후 계몽의 주체였던 개신교회가 이제는 계몽의 객체로 전락한 듯하다. 한국 사회에서 신뢰 지수가 가장 낮은 집단으로 인식되는 정치인들조차 선거법을 위반하면 옷을 벗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교계에서는 교단장을 뽑는 선거에 금품이 오가는 관행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부도덕한 교역자들의 이런저런 일탈 행위가 발각되어도 그들은 끄떡없다. 왜? 그들은 힘이 있기 때문이다. 자금 동원력이 있고, 사람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플라톤의 <국가 정체>에 나오는 트라시마코스의 제자가 되고 있다. 그는 “정의란 더 강한 자들의 이익”이라고 말했다.

근 30여 년 세월을 목회에 전념해온 한 목회자가 ‘친북반미’ 혐의(?)로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다. 그가 만든 책 한 권이 빌미가 됐다. 그는 세계감리교대회를 위해 기도하다가 분단 조국의 현실을 참석자들에게 알리고 한반도의 통일과 화해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뜻에서 <사진으로 본 분단 60년>이라는 책자를 만들었다. 그 책에 담긴 내용이 보수적인 목회자들과 장로들의 검열에 걸려들었다. 그들은 즉시 그 책의 배포를 중지시켰고, 책의 편집자인 정진권 목사에게 ‘친북반미’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친북반미’라는 말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되어 사람들의 의식을 불구로 만들고 있다. 그 말은 어떠한 합리적인 대화도 토론도 허용하지 않는다. 대화는 성찰을 위한 거리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그 말은 사람들의 견해가 자기 기준에 부합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물을 뿐 자신을 반성적으로 돌아보지 않는 자폐적인 말이다.

색칠한 뒤 죽게 만든다

미국 작가 저지 코진스키의 책이 떠오른다. <무지갯빛 까마귀>로 번역된 그의 작품의 원제는 <색칠해진 새>(The Painted Bird)이다. 그 소설은 전쟁의 참혹한 상황 속에 버려진 한 아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 이야기이다. 사람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겁하고 맹목적인지 책은 보여준다. 그중의 한 인물인 새 장수 레흐는 매우 상징적이다. 그는 욕구불만이 생길 때마다 자기가 팔러 다니는 새 중에서 가장 크고 힘이 센 놈을 골라내 온몸에 야생화보다 더 알록달록하게 색을 칠한다. 그러고는 새를 숲으로 데려가 목을 가볍게 비튼다. 새가 고통스러워서 삑삑거리는 소리를 내면 같은 종류의 새들이 날아와 초조하게 날아다닌다. 새들이 충분히 모였다 싶으면 레흐는 그 새를 놓아준다. 자유를 누리게 된 새는 기쁨에 겨워 한 점의 무지개처럼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그 새를 맞은 잿빛 새들은 잠시 혼란을 느낀다. 알록달록하게 칠해진 새는 자기가 그들의 동료임을 알리려고 더 가까이 다가가지만, 새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다가 일시에 그 새를 공격해서 죽이고 만다.


△ 예수정신을 몸으로 살아내기 위해 고투하는 수많은 목회자들의 목소리는 주류 담론에 가려 들리지 않는다. 지난 12월28일 열린 정진권 목사를 위한 기도회 모습.

레흐는 어디에나 있다. 피부색이나 인종, 사상이나 종교의 차이를 빌미로 한 개인 혹은 집단을 악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불관용을 통해 다른 사람의 양심을 구속함으로써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정진권 목사는 지금 색칠해진 새가 되어 우리 앞에 있다. 그를 받아줄 품은 어디인가? “인간이라 불리는 티끌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 모든 사소한 차이들이 증오와 박해의 구실이 되지 않도록 해주소서”라고 간구했던 볼테르의 기도를 지금 이 땅에서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이 곤혹스럽다.

어찌하여 오늘날 교회의 언어가 바벨탑의 언어를 닮아가는가? 획일화된 말, 계율적인 말, 일사불란한 말이 횡행하는가? 예수를 침묵시켰기 때문이다. 예수는 경계선을 가로지르며 사셨다. 유대인과 이방인, 의인과 죄인, 여성과 남성을 가르는 인습적인 경계선을 그분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넘나드셨다. 불통의 세상을 소통의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그분은 자기 삶을 바쳤다. 하지만 지금 한국 교회의 권력 구조는 다양한 소리들을 침묵시키고 있다. 겨울 공화국인가? 심지어는 예수조차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에서처럼 금관에 씌워진 채 말을 박탈당하고 있다. 물론 모든 교회가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예수정신을 몸으로 살아내기 위해 고투하고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주류 담론을 장악하고 있는 이들의 소리만 도드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의한 자들에게는 몰아쳐 그들의 위선을 드러내고 그들의 거짓된 생각을 깨뜨리던 태풍 같은 예수의 말이 그립다. 가난하고 병들고 지친 이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온전케 하고, 넘어진 이들을 일으켜 세우던 미풍 같은 그의 말이 그립다.

교회여,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가자

조롱과 냉소와 저주의 언어가 신의 이름으로 선포되고 있는 이 현실을 어찌해야 할까?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가 부인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음을 받는 이 현실을 어찌해야 할까? 암담하다. 하지만 이제 우울을 떨쳐버려야 할 때이다. 믿음의 반대말은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게 되었다’고 말하는 숙명론이니 말이다.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희망의 불이 꺼지지 않는 한 희망은 있다. 교회여, 편협한 신앙을 누구보다도 미워했던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가자! 교인들이여, 이마누엘 칸트의 충고대로“너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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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에서 춘천으로 향하는 버스 안,

나는 문득 할아버지의 부재不在를 실감한다.

마음이 먹먹해져온다.

눈 앞이 흐려진다.

할아버지 '없이' 처음으로 맞이한 명절,

흔적은 더욱 더 도드라지고,

추억은 되살아난다.

한적한 마음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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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_집으로 향하는 작은 마을버스의 비좁은 의자에 몸을 맡긴 채 무심히 창밖을 본다. 그리고 문득 걸음과 걸음 사이, 말과 말 사이, 간격의 작은 틈 속에서 나는 바닥을 본다. 어쩌면 그 바닥이란 세상의 도처에서 발견될 수는 없을 법 했다. 오직 나의 마음에만 있을 법 했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았으나 그들의 눈 위에는, 머리 위에는, 그 허공의 대기 속에는 바닥이 있었다. 오로지 내가 보고 싶은. 나는 읖조리고, 창문에는 성에가 꼈다. 닦으려다가 눈으로 시 한 구절 남기고, 그대로, 가만히 둔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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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끝은 없었다

끝이라는 다짐일 뿐, 이젠 더 이상 어쩔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 그 '끝'의 언저리에서 '끝'을 예감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그래 나는,

'끝'의 중심을 향한다, 혹은 향할고야 말 것이다.

 

스물 일곱, '하나'의 사랑에게 종지부를 찍게된 나는 그저, 난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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