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_집으로 향하는 작은 마을버스의 비좁은 의자에 몸을 맡긴 채 무심히 창밖을 본다. 그리고 문득 걸음과 걸음 사이, 말과 말 사이, 간격의 작은 틈 속에서 나는 바닥을 본다. 어쩌면 그 바닥이란 세상의 도처에서 발견될 수는 없을 법 했다. 오직 나의 마음에만 있을 법 했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았으나 그들의 눈 위에는, 머리 위에는, 그 허공의 대기 속에는 바닥이 있었다. 오로지 내가 보고 싶은. 나는 읖조리고, 창문에는 성에가 꼈다. 닦으려다가 눈으로 시 한 구절 남기고, 그대로, 가만히 둔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