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와

사랑하는 나의 외투와

사랑하는 욕망과

사랑하는 헛기침과

빈방과

칙칙대는 라디오와

가물대는 그리움과

나란히 눕는다


어디선가 기웃이

소만한 꽃이

나를 들여다본다

어디서 기울어진 꽃인가

가만히 보니 꽃 뒤로

내 발바닥이 닿아 있다

 

_ 요즈음,

  나는 우울하다.

  못다한 사랑에 대한 아픔이,

  이루지 못한 소망에 대한 아쉬움이,

  체념된 미래에 대한 기대가,

  마음을 샅고 든다

  이처럼 한 송이 피지 못한 내 안의 꽃들이

  오늘밤도 뒤척이는 건 여전하다.

  나는 오늘밤도

  "사랑하는 나와

   사랑하는 외투와

   사랑하는 욕망과

   사랑하는 헛기침과

   빈방과

   칙칙대는 라디오와

   가물대는 그리움과

   나란히",

   아주 나란히

   同庫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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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나는 지금 금욕생활 중이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이별의 그 참담함을 절절히 느끼기 위해선 적으나마

한 달이라는 기간이 필요하고,

적어도 그 시간동안에 나는,

나는 정말,

이별이 주는 그 시림을

에누리없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오늘도 나는,

방 안에 머츰히 들어앉아

그 모오든 괴롬과 쓸쓸을

감내하고 있다.

아무도 모르는 이 밤을,

누구도 상상치 못할 금욕을.

 

한 달이 머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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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나는 설명하려 한다.

나의 사이버 거처를

알라딘으로 옮긴 까닭은,,,

더 많이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노출증적 성격의 싸이를 탈하여)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함이다.

(결국은 나에게로 깊숙히 들어가기 위함이라)

나는 지금 조금은 깊숙히 들어가고

있는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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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테이션을 위해 학교에 왔고,

과감하게(?) 전공을 바꿨다.

세상을 분석하고, 세상을 변혁하자는

야심찬 구호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의, 나로부터의 변화이다.

 

'조직신학', 이게 나의 전공이다.

예수라는 '샘'을 통해서 나의 선자리를 찾고,

나를 그 '샘'에 섞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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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녀석은 소위 '밀고 당기기'에 대해서 논한다든가,

자신의 여자친구에 대해서 평가를 내리기도 하고,

어처구니 없는 시나리오로 헤어졌을 때의 파장을 상상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미안하게도 나는 약간의 구역질과 함께 욕지기가 오른다.

 

이를테면,

"헤어지긴 좀 아깝죠?"

저 쪽에서 묻는다.

사람이, 관계가, 사랑이 아깝냐니!

사람이 돈인가?

관계가 물건인가?

사랑을 아까운 것과 덜 아까운 것 따위의  기준으로 비교할 수 있을까? 사랑은 비교 가능한 것인가? 사랑을 객관화시킬 수 있는가? 정녕......

오늘 나는 그러한 질문을 받고, 우울해졌다.

방에 머츰하게 들어 앉아 슬픔에 젖는다.

혹 내가 사랑했던 이, 나를 사랑했던 이,

그들에게 나는, 나와 나눈 사랑이란 것이 어떤 것이었을까?

바라건대, 그저 '전부'였다고 한다면 좋겠다. 너무 지나친 욕심일까?

'전부'가 아니었다면 나는, 나는......장난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 것만 같아 더 우울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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