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잃고


너를 잃고 나는 걸었다


휴지조각처럼 구겨진 가랑잎들만 발에 채이고

살아있는 싱싱한 풀잎 한장 내 마음 받아주지 않네

바람 한자락 시린 내 뺨 비껴가지 않네


다정했던 그 밤들을 어디에 파묻어야 하나

어긋났던 그 낮들을 마음의 어느 골짜기에 숨겨야 하나


아무도 위로해줄 수 없는 저녁,

너를 잃고 나는 썼다

 

 

_지난 주말 이천을 오가며 최영미 시인의 시를 품었다. '바람 한자락 시린 내 뺨 비껴가지 않'는 요즘 근황. 매일이면 찾아오는 '아무도 위로해줄 수 없는 저녁'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야말로 걷는 것 뿐이었다. 조근조근 그녀의 위로 하나 싸근한 오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막으로 들어간 궁극적인 이유는 사랑이었지만, 보다 실천적인 이유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먼저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의 방법은 자신을 훈련 시키는 일이었다. 자신의 욕심을 억제하지 못하면서 이웃에게 자기의 것을 나누어 주기 어려웠다. 자신의 영광을 구하면서 이웃의 잘됨을 보기 어려웠다. 아바 마가의 경우 네모의 삶에서 원의 삶으로의 전환은 자신을 훈련하여 모난 부분을 다 잘라내는 일이었다. 바로 이 모난 부분에 탐식과 욕심과 욕망이 붙어 있는 것이다." <모래와 함께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 89쪽, 방성규>

_영성수련이라는 필수코스를 이수하기 위해서 이번 학기에 읽어야 할 몇 권의 책들 중 하나인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참말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사막 수도사들의 삶의 기록을 곱씹으며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생각하고, 인생을 주님 앞에 조율해가는 도정 속에 도도히 흐르는 영성을 감미해보는 시간이었다. 특히 '사랑은 훈련이 필요하다'라는 제목의 장에서 기술된 위의 구절은 나를 가슴뛰게 하기 충분하였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자신에게 깊이 들어가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삶, 모가 난 네모의 삶이 아니라 둥근 원의 삶으로 전환하는 일은 지금 나의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이었다. 관옥 선생은 원융무애圓融無碍라고 하여 둥글둥글 두루 화합하여 막히는 게 없다는 이야기를 하였었는데('지금도 쓸쓸하냐' 중에서) 나도 새삼 그러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도 해보게 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성숙은 밝음에서가 아니라 어둠에서 온다는 관옥의 글을 읽고는,

다시 한 번 제 삶의 풍경을 달아놓습니다.

시련이 올 적마다 풍경은 제 몸을 흔들고, 흔들려

맑은 소리를 낼텝니다.

때로는 가냘픈 울음으로, 때로는 구성진 가락으로,

그리하여 언젠가는 더 이상 '소리없는 소리'가 되어 세상 속

맑고, 깊은 울림이 되길 염원합니다.

지금은, 소리 테스트중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최근에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읽었다.

모든 내용에 만족할 순 없었지만,

나의 마음을 건드리는 구절들 또한 있었다.

요즘 나의 상태는 그야말로 '자기연민'에 도취된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들 또한 내가 내려놓아야할 짐임을,

책을 통해 확인하였다.

하물며 한 사람과의 만남과 이별 또한,

그리고 그 지나간 것들에 대한 회한과 분노,

집착 또한 내가 모두 내려놓아야 할 것들임을 자각하는 시간이었다.

내려놓음, 그것만이 주 앞에 선 '단독자'의 인격이고,

겸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_로마서 12장 17-18절

 다시 한 번 곱씹으라,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거꾸로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이란, 곧 악을 선으로 대하는 전복된 응대의 방식이리라. 그런데 이러한 일의 어려움을 짐작했는지 바울은 단서를 하나 달아놓는다.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는 명령은 먼저 그 실천적 조건을 요구하는데 그게 바로 할 수 있거든, 곧 가능한대로라는 말이다. 예수의 모본을 상기하자. '예수는 평화주의자였으나 뼈 없이 흐물거리는 무작정한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예수는 어떤 극악한 상대도 끝내 용서했지만, 그 극악함에 분노하는 데 폭력적일만치 분명했다."<김규항, 나는 왜 불온한가, 39쪽> 예수의 분명함, 그 분노의 방식은 '할 수 있거든'의 전제가 무산된 자리에서 행한 예수의 행동방식이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한다는 것은 흐물흐물거리는 평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할 수 있을만한 상대에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명심해야될 것은 할 수 있거든 앞에 '최선을 다해서'라는 정도의 여구를 붙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일단은 변화의 조짐을 파악하고, 평화의 징조를 가늠해보자. 그래도 늦지 않다. 나는 오늘밤 '할 수 있거든'의 진위를 묵상하며, 그 누군가에게 평화하길 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