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_로마서 12장 17-18절
다시 한 번 곱씹으라,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거꾸로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이란, 곧 악을 선으로 대하는 전복된 응대의 방식이리라. 그런데 이러한 일의 어려움을 짐작했는지 바울은 단서를 하나 달아놓는다.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는 명령은 먼저 그 실천적 조건을 요구하는데 그게 바로 할 수 있거든, 곧 가능한대로라는 말이다. 예수의 모본을 상기하자. '예수는 평화주의자였으나 뼈 없이 흐물거리는 무작정한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예수는 어떤 극악한 상대도 끝내 용서했지만, 그 극악함에 분노하는 데 폭력적일만치 분명했다."<김규항, 나는 왜 불온한가, 39쪽> 예수의 분명함, 그 분노의 방식은 '할 수 있거든'의 전제가 무산된 자리에서 행한 예수의 행동방식이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한다는 것은 흐물흐물거리는 평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할 수 있을만한 상대에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명심해야될 것은 할 수 있거든 앞에 '최선을 다해서'라는 정도의 여구를 붙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일단은 변화의 조짐을 파악하고, 평화의 징조를 가늠해보자. 그래도 늦지 않다. 나는 오늘밤 '할 수 있거든'의 진위를 묵상하며, 그 누군가에게 평화하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