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4용지 35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기말 페이퍼를 제출하고, 말 그대로 쩔어서(?) 기분전환 겸 아름다운 책방 "뿌리와 새싹"을 찾았다. 며칠 전 찜해두었던 박범신의 <나마스떼>와 이호철의 <판문점>을 손에 들고 나섰다. 날씨는 우중충한데, 마음은 가볍다.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아 언제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오래 전부터 관심하던 책들이었던 만큼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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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노자 <도덕경>을 두고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나누었던 대화를 이현주 목사님이 정리한 책,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를 손에 들었다. 700페이지를 넘는 분량과 노자의 심원한 사유 진폭을 고려하여 비교적 오랜 시간적 여유를 두고 읽어내려갈 참이다.

 1장부터 4장까지 100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을 소화한 지난 며칠 간, 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 성찰의 원형을 노자에게서 발견한다. 앞으로 펼쳐질 道와 德이, 그야말로 내 삶의 經이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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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머튼의 평화론
토마스 머튼 지음, 조효제 옮김 / 분도출판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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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해 시월, 북한의 핵무기 실험 성공에 대한 전가(傳家)의 보도가 잇따르면서 국제사회는 심각한 고민에 처하게 되었다. 국제사회의 이단아라고 할 수 있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일단의 조처들이 지속적으로 이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급기야 핵무기 실험에 성공한 북한의 행보는 이미 위협의 수순을 넘어선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부랴부랴 이에 대한 대책이 강구되었고, 이어서 대북 제재를 필두로 한 일단의 조처들이 발표되기에 이른다. 한편 국내의 정치적 공방 속에서는 대북 압박론과 지속적 협상론이라는 두 정치적 입장들이 충돌하면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정치적 논의들이 복잡한 형국을 띠고 있었다. 물론 흡수통일론을 주장하는 일각의 수구주의자들은 전쟁 불사론을 주장하는 등의 극단적 대응책들을 내놓았고, 이처럼 각기 다른 입장들로 인해 남한 내의 정치적 갈등 또한 고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들이 ‘평화’를 지향해야한다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궁극적인 관심을 근본으로 한 것이라 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단지 북한의 핵실험 성공에 대한 우려 속에서 파생된 한정적이고 국소적인 고육지책이었을 뿐 ‘평화’ 자체에 대한 근본 담론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물론 한반도 내에서의 생존 문제라는 급박한 현실인식과 관련하여서는 ‘평화’에 대한 근본 담론 운운하는 것이 한가한 얘기로 들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 문제에 대한 관심이 결여된 여하한의 현실적 해결책들은 단지 미봉책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예컨대 어찌어찌 북핵 위기를 타계해 나간다고 해서 미국을 위시한 강대국들의 핵무기와 대량살상무기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리 없으며, 점령과 지배, 착취의 오만한 전쟁이 만무할 리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핵 위기를 극복한다고 해서 한반도에 평화가 올 수 있다는 식의 피상적인 사고는 오히려 더 한가롭다. 그것은 단지 눈에 찬 현실의 난관을 극복하고자 하는 정치적 수순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서의 ‘평화’는 모든 인류를 위해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다만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형태의 비평화의 상태를 연기하는 선에서만 유효할 뿐이다. 

 이처럼 참된 평화의 성취와 또 이를 위한 정치적 노력들이 답보된 상황 속에서 평화에 관한 토마스 머튼의 글을 만나게 된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그는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20세기 최고의 그리스도교 영성가이다. 이러한 그가 쓴 이 책은 그가 추구하였던 ‘참여영성’, 즉 ‘명상과 활동의 통일’이라는 대명제가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이 책의 전편에서 펼쳐지는 그의 사상은 세상을 초월하는 식의 종교적 나르시시즘을 뛰어넘어 세상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참 종교 영성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현세와 현세의 문제와는 완전히 담을 쌓고 인간 사회에 대해서는 관심을 저버린 채 하느님과 관계된 일에만 온전히 자신을 바치겠다고 하는 사이비 관상적 영성은 오늘날 분명 필요치 않”(236쪽)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1960년대 미국의 현실 속에서 집필되었다. 토마스 머튼은 이 책의 탈고 당시(1962년)가 ‘포스트 그리스도교’적 세상, 즉 현대 세계에서 그리스도교적 이상과 태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황임을 직시하면서 국내외적으로 고조되고 있는 핵무기 개발 등의 무기증강과 전쟁 준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이는 구체적으로 핵무기의 사용, 즉 전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어느 지점에 정위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 머튼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단연코 전쟁에 대해 찬성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평화의 군왕’으로 오셨던 예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평화를 가꾸는 사람’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미국사회 속에서 많은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은 ‘정당한 전쟁론’을 통해 미국의 전쟁 준비를 공공연히 옹호하고 있던 터였고, 대다수의 인민들은 ‘정당한 전쟁’이 필요불가결하다는 주장에 이론을 달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정당한 전쟁론에서 제안하는 원칙들은 머릿속에서나 가능할 뿐 실제의 전쟁 에서는 적용될 수 없는 이론이었다. 특히 현대전의 맥락에 있어서는 정교하고 제한적인 방어 전쟁이 성립될 수 없을 정도로 무차별적인 공격이 벌어지고 있다고 판단되는바 정당한 전쟁론이란 결국 허위적 수사에 불과하다고 머튼은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정당한 전쟁론의 원칙들마저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들이 잘 지켜질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적극적인, 비폭력 평화주의에 투신해야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평화를 구체적인 삶 속에서 성취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머튼의 주장이 자신의 종교적 이상과 그 가르침으로부터 나온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오직’ 자신이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에서만 부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평화가 모든 종교(인)의 책임임을 분명히 한다.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한 대목-“모든 사회의 핵심은 인류 공통의 목표를 위해 보편적 사랑 속에서 일치하는 것”(91쪽)-에서 보여 지듯이 모든 사회를 이루는 개별적 인간 하나 하나는 ‘평화’를 지향해야하는 윤리적, 도덕적 책임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 인류는 핵무기와 대량살상무기들이 끊임없이 개발되고 생산되는 현실에 대해 무관심할 수가 없다. 다만 전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이 자살행위에 반대하고, 지금 당장 자신의 행동 방향을 오직 양심의 법대로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야만 모든 인간이 보편적 사랑 속에서 일치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오늘날, 이러한 ‘평화주의자’들이 도처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큰 위안거리가 아닐 수 없다. 반면에 그 보다 더 많은 이들이 ‘평화’보다는-폭력과 전쟁이라는-‘죽임’의 문화에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우울하다. 이 책의 발간 당시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왔지만 전쟁은 그치지 않았고, 현실은 더욱 더 깊은 수렁 속에 빠져들었다. 때문에 이미 40여 년 전에 쓰여진 이 책의 중요성은 그만큼 부각된다. 대니얼 엘스버그의 평처럼 말 그대로 “내일 신문 헤드라인보다 더 시의적절하다!”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리고 모든 인류의 구원을 갈망하는 한 명의 종교인으로서 머튼의 빛나는 예지에 경의를 표한다. 더불어 진작에 ‘평화’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바로 “오래된 미래”이며, 모든 인류가 걸어가야 할 거의 유일한 길임을 보여준 이 책에 이 못난 글을 헌사로 바친다.

(추기: 최근 핵무기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북한의 입장 표명은 그나마 큰 위안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이 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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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8일

어느 날 밤, 한 순경이 잔뜩 취해서 담벼락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았다.  순경이 그에게 물었다. "여보, 당신 무얼 마셨소?"

취객이 대답했다. "저 단지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느냐고?"

"내가 마신 것이 그 안에 있었소."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것이 당신 뱃속으로 들어가 버렸단 말이군."

순경은 자기 구역 안에 이토록 지저분하고 역겨운 물건이 있다는 사실로 짜증이 났다. 그래서 진흙탕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쓰는 당나귀 심정이 되어 그에게 말했다.

"어디, 뭐가 당신 뱃속에 있는지  알아봅시다. 입을 벌리고 '아아-'하시오."

그러자 취객이 갑자기 웃어댔다.

"하! 하! 하!"

순경이 눈을 부라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아'-하고 입을 벌리라는데 '하'가 뭐야, '하'가?"

취객이 설명하기를,

"'아!'(Ah)는 괴롭고 슬퍼서 내는 소리요, '하!'(Ha)는 기쁨에 취하여 내는 소리지요."

"지금 뭐하자는 수작인가? 괜히 엉뚱한 농담이나 말장난 따위로 성가시게 흥정하지 말고, 어서 꺼져버리라고!"

"당신아 가시오! 난 아무것도 팔지 않소. 내가 만일 인간의 허망한 존재에 대한 몇 가지 깨달음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면 지금쯤 직업 사제들 무리에 섞여 강단에서 상투적인 설교 따위를 팔고 있겠지만."

"바로 그거야! 당신 지금 술에 취했어. 나와 함께 감옥으로 가야 해."

그러자 취객이 얼버무리듯이 중얼거렸다.

"순경나리! 이 벌거숭이 몸에서 넝마를 벗겨주시겠소?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면 벌써 돌아갔을 게요. 그러나 그랬더라면, 시방 우리가 나눈 재미있는 대화는 세상에 없었겠지."

 

6월 29일

술집에서 나온 취객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데

아이들이 손가락질하며 깔깔댄다.

그러다가 그가 갑자기 진흙탕에 뛰어들어

춤을 추자, 철없는 아이들은

그의 술맛과 크게  취함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웃고 있다.

내 말을 잘 들어라.

하나님에게 돌을 던지는 한, 너는 아직 어린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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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7-04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맛과 취함'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철없는 아이들은 하나님에게 돌을 던진다.
 

6월 27일

값비싼 디자이너의 의상으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저 사기꾼들을 보아라.

이른바 명품으로 몸을 감싼다고 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저들의 이해가 깊어질 것인가?

저들의 가슴을 점령하고 있는

고뇌와 쓰라림의 전갈을 잠재울 것인가?

저들의 겉치장은 사람을 죽여주지만

속으로는 스스로 죽어가고 있다.

 

자, 이제 눈을 들어 저쪽

넝마를 걸친 늙은 부랑자를 보아라.

그의 생각은 아르마니 갑옷보다 정교하고

그의 언어는 최신 유행복보다 섬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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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6-27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날 교회에는 얼마나 많은 화려한 치장들이 넘쳐나는가! 십자가에서부터 가죽 양장본의 성경책에 이르기까지, 성도에서부터 목사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화려하게 치장하고들 있는가. 그러나 그 화려함의 뒤 안에는 죽어가고 있는 자신의 영혼만이 초라하게 남는다. '넝마를 걸친 늙은 부랑자'의 가난함이 오히려 하나님께 이르는 참된 길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