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 당신을 안고 내가 물든다
문태준 엮음 / 해토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 _김훈 

 해마다 가을이 올 제면 얼마나도 많이 이 구절을 되뇌었던가.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은, 비록 중년은 아닐지라도 상실한 청춘의 가슴에겐 증발된 마음의 허기와도 같았으리라. 허허로운 제 가슴의 공간은 ‘여름의 무자비한 증발작용’이 남긴 염분의 흔적처럼 짜고, 썼다. 그 쓴맛의 뒤끝은 마치 사랑의 흔적처럼 몸서리치도록 안달난 마음과도 같았지만, 이내 엄습하는 후회와 상실은 내일을 곧잘 ‘기대 없음’의 시간으로 연소시키곤 하였다. 여름 같던 사랑이 덧나기 시작할 때 가을은 왔고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던 청춘은, 그래서 내일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예감이랄 것도 없이, 그저 난감할 뿐이었다. 

 사실 그녀와의 오랜 연애에도 매년 가을이 올 때마다 쉼표를 찍곤 하였다. 폭폭거리던 날들 속에서도 무진무진 초록의 생기를 품어내던 나무들이 흐드러질 즈음이면, 사랑도 그와 같아서 탈수증처럼 허덕이고 있었다. 땀 냄새 나도록 뒹굴었던 사랑의 자취는 염전처럼 마르고 말라 겨우 한 자락씩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고, 마음은 계절의 경계만큼이나 멀찌감치 배회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마음이 계절과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어서 자꾸만 경계를 넘나들며 시절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래서 시인 이성복은 ‘그 여름의 끝’에 ‘남해금산’에 올라 “당신을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라고 고백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허지만 가을은 못내 저버린 사랑의 기억을 어느덧 추억으로 편집하고 있었다. 그리고 잊어야 될 것들이 더 이상 남지 않게 되었을 때, 무채색의 추억만이 빈자의 가슴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이토록 난감한 청춘의 계절에 시는 오랜 벗과도 같아서 한숨 찧는 인생들을 슬며시 포옹한다. 한 줌의 시어들이 마음결에 스밀 때, 시는 번지고 무너진 마음자리는 서서히 물든다. 시가 나를 감싸듯, 나도 시를 안는다. 그리하여 무너진 가슴에도 볕이 들고, 절망의 채도는 비움의 자리에서 탁함의 비늘을 벗는다. 어느 틈에 시는 번져 마음이 되고, 마음은 ‘체념할 것들을 체념하여’ 맑다.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마음 없이’라던 황동규 시인의 노래처럼, 어쩌면 체념한 마음자리는 비로소 마음이랄 것도 없어 뵌다. 그렇게 시가 번진 ‘수묵의 정원’(장석남), 즉 무심(無心)의 공간은 느슨하고, 서러운 포옹으로 조금씩 ‘홀로와’지고 있었다.(‘홀로 있는 즐거움’을 황동규는 ‘홀로움’이라고 명한 바가 있다.) 

 그 ‘홀로움’의 여정에서 나는 또 한권의 시집을 손에 들었다. 특별히 추석 연휴를 목전에 두고 귀향의 장도(長途)에 오를 예정이었던 나는, 오랫동안 보관함에 묵혀두었던 시모음집 <포옹>을 길손삼기로 작정하였다. 예의 시모음집들의 조악함 탓에 이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난 몇 편의 시집들을 통해서 보여준 문태준 시인의 깊고, 맑은 서정은 나에게 주저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를 포옹하였던 시들이 나에게도 깊고, 넓게 물들길 바랐다. 그 기대를 안고 고향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한 줄 한 줄 읽고, 느끼며, 어느덧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수런거리는 뒤란’을 ‘맨발’로 거닐다, 한 쪽 눈마저 다른 한 쪽 눈으로 옮아간 ‘가재미’를 들여다보던 시인은 이제 득달같던 청춘의 시절을 물들인 보물 같은 시들을 노래한다. 여기에 묶은 시들은 시인의 고백처럼, ‘때로는 슬픔 쪽으로 때로는 미소에 가깝게 데려가 준 시들’이지만, 또한 한결같이 ‘매혹적인 끌림’을 지닌 것들이다. 그 매혹적인 끌림을, 시인은 ‘목단무늬 꽃살문’이라고도 하고, ‘싸락눈 내리는 소리’라고도 부른다. 그 속에서 기어이 시의 품에 안기어 물들었던 그는 이제 자신을 포옹했던 그 시들을 한데 펼쳐놓고 읽는 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꽃을 기르는 마음으로 이 시들을 보아주셨으면 합니다...... 붉은 꽃잎이 당신의 마음을 물들게 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시인의 당부처럼, 이 시집은 꽃을 기르는 마음처럼, 조심스럽고 다소곳하게 읽어 내려가야 옳다. 왜냐하면 시인이 엮어놓은 시들이란 하나같이 낮고, 여리며, 가녀린 존재들을 향한 애가(愛歌)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낮고, 여리며, 가녀린 존재들이란 사랑의 상실에 처한 청춘들이기도 하고, ‘시대의 변죽’(배한봉)으로 밀려난 어느 쪽방촌의 빈민이기도 하다. 하여 그네들의 가슴을 넉넉하고도 따뜻하게, ‘낮은 목소리’(장석남)로 물들이는 이 시들을 허투루 읽어내려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어語와 절節을 조심스럽게 마주하며 곱씹을 때, 그리하여 시와 내가 오롯이 포옹하게 될 때, 시나브로 나는 시로 하여 물들고, 시는 나로 인해 번진다. 그렇게 시의 너른 품에 이드거니 안길 때, 고작 명도(明度)뿐인 마음자리에 색이 물들고, 무늬가 깃든다. 

 그러한 향연에 젖어들게 하는 것은 비단 시 때문만은 아니다. 이 시들과 더불어 가슴깊이 포옹한 시인의 덧글이 또한 각별하다. 시인이 전작(前作) 시집들에서 노래했던 바와 같이 생의 변방, 바깥, 뒤편은 여전히 관심의 주파에 포착되고 있다. 예컨대 천양희 시인의 <뒤편>이라는 시를 읽고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뒤편을 볼 줄 아는 사람은 넉넉한 사람이다. 넉넉한 사람은 고통을 몸소 참고 견딘 사람이다. 자신의 뒤란으로 돌아가본 사람이다. 뒤란에서 쪼그리고 앉아 무릎을 모으고 울어본 사람이다. 뒤편에는 숭고도 있고 남루도 있다.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는 일은 뒤편을 감싸 안는 일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마치 비 오기 전 마당을 쓸 듯 그의 뒤로 돌아가 뒷마당을 정갈하게 쓸어주는 일이다.”(31쪽) 

   한편 배한봉의 <이 시대의 변죽>이라는 시에서는,

“가장자리를, 언저리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언제부터 우리에게 생겨났을까. 고약하다. 위와 아래가, 속과 겉이, 처음과 나중이, 다수와 소수가, 저택과 쪽방촌이, 어쩌다 이처럼 아니 볼 듯 갈라서게 되었을까. 양극에 달하게 되었을까.”(86쪽) 라며 성토하기도 한다.

 이렇듯 시인은 복판, 곧 중심에 가닿지 못한 존재들을 애정의 눈길로 응시한다. 그것은 단지 연민의 감정이 아니라 진정 소중한 것이 그 작고 가녀린 존재들에 있음을 깨우치는 과정이자, 진정한 사랑을 깨치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오지랖은 넓어졌지만 품은 좁아진 오늘날의 각박한 세상을 극복하는 일이자, ‘아름다운 후미後尾’로 들어가 ‘넉넉한 시간’을 몸소 살아내고픈 바램이다. 그 속에서 어우러지며 비로소 당신과 내가 ‘무릇 동근同根’임을 발견할 때, 사랑에 너와 내가, 변죽과 복판이 물들고, 번진다.

 가을의 하늘은 여전히 높푸르다. 허나 그 하늘 아래의 많은 인생들은 가늘게 떨고 있다. 마치 더 이상 내일은 새로운 일이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힌 것처럼. 어떤 이는 품을 잃어버린 이 세상에서 밀려남으로 하여, 또 어떤 이는 저문 사랑이 남긴 상처와 남루로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의 고백처럼, “꽃이 필 땐 꽃 지는 내일을 생각 말자. 오늘 흰 매화 피는 것만 보아라. 그 꽃그늘 아래서 춤추는 게 사랑”(69쪽)이라면, 그래, ‘오직 이 순간’을 받아들고 살아볼 일이다. 시가 주는 매혹적인 끌림도 느껴볼 일이고, 그로 하여 지친 영혼의 허기를 달래기도 해봐야 한다. 그러다가 문득 시가 번지고, 내가 물들 때, 무채의 인생에도 결 고운 빛살이 ‘따뜻하고, 넉넉하고, 느슨하게’ 비추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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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10-04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결님 한편의 시문 같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꽃잎 진 사랑이라면 다시 피어날 날도 있을 것입니다.^^ 시인의 덧글들도 마음에 들고
님의 절절한 글도 마음에 닿습니다. 꽃그늘 아래서 춤추는 사랑.. 통속적이고도
어려운 게 사랑이라지만 그런 사랑을 초월한 '사랑'이 되어야 할 텐데요,
제겐 너무나 먼 바람입니다.

바람결 2007-10-04 21:46   좋아요 0 | URL
잘 읽어주셔서 다행이고, 참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봄이 저물어 이내 겨울오고, 그리고 다시 봄 오듯,
진정 '사랑'이라면 다시 올날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흐득흐득 가는 세월 속에서 한 그루 나무처럼
서있을 일이겠지요. 루미가 말한대로,
제 가슴을 잃어버리고 말입니다.

모쪼록 혜경님도, 그리고 저도 더 깊고 높은 사랑에
이를 수 있기를...그 길 바라며 아름답고, 순한 존재로 살아내기를 기도합니다.^^
 

10월 4일

너는 자꾸 '너'와 '나'를 일치시키려고 한다만,

그 둘이 '하나'를 어둡게 하는 것이 보이잖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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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10-04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와 내가 따로 있다는 그 그릇된 논리부터 집어치우라는 말씀이지요?
예, 알겠습니다. 오롯이 '하나'라는 사실부터 깨우쳐야겠습니다.
 

10월 3일

말벌에게 쏘였으면 그 침을 뽑아낼 수 있겠지만

이 보이지 않는 침은 너 스스로 찌른 것이다.

너에게 더 이상 자아가 없게 되기까지는

지독한 아픔이 가시지 않으리라.

이 사실을 너에게 알려주고 싶은데

네가 미리 낙심할까, 그것이 염려되는 구나.

 

네가 부를 때면 언제나 달려오시는 그분께 도움을 청하라.

"용서하기를 좋아하시는 이여,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만이 저의 썩어가는 '나'(Me)를 치료하실 수 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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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미러브 2007-10-03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멘~~ ㅜㅜ 오늘도 이곳에서 위로 받네요~

바람결 2007-10-03 23:44   좋아요 0 | URL
정말 아멘이 절로 나옵니다.
위로받으셨다니 다행이지 싶으면서도
위로가 필요한 생(生)의 문제들이 걱정됩니다.

모쪼록 늘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되시길 빕니다.
 

 120주년이라하여 짐짓 거창한 현수막이 내걸렸습니다. 등굣길에 바라 본 그 대형 현수막을 보는 마음은 왠지모르게 씁쓸했습니다. 저 현수막의 휘황처럼 사실 학내의 분위기가 좋지는 않은 탓이었나봅니다. 그저 착잡한 마음을 안고, 강의실로 향했습니다.

 수업을 파하고 강의실을 나서고 보니 정말이지 번쩍 번쩍한 고가의 중형차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토끼눈을 하고 유심히 살펴보니 다들 우리 감리교 유수의 교회들을 담임하고 있는, 그야말로 지체높으신 분들의 것인 듯 싶습니다. 뭐 <개교 120주년 기념예배>가 있다던가요. 그런데 한 두대도 아니고 학교를 가득 메운 차들이 무슨 재벌이 아니라 목사들의 것이라고 하니 정말 부아가 오르면서도 서글퍼졌습니다.

 속수무책으로 오늘은 애당초 글렀구나 싶어서 예배를 포기하고, 하릴없이 가까운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무슨 특별한 목적으로 간 것도 아니고, 사실 갈 데가 없어서 그리로 향했다고 해두지요. 독립문 근처의 한 헌책방을 뒤적거리다가 시장통(영천시장이라고 하는 제법 큰 시장이 있어요.)에 들어섰습니다. 들어서자마자, 저는 문득 중세 신비주의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일언을 떠올렸습니다.

"시장통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한 사람은, 어느 곳에서도 하느님을 뵐 수 없다."

 그랬습니다. 하느님은 저 가난하지만, 치열한, 괴로우나 여전히 희망 넘치는 삶의 구체적 현장 속에 계셨습니다. 부침개를 부치시느라 얼굴이 벌겆게 달아오른 중년의 아주머니의 얼굴 속에, 순대를 수걱수걱 자르시는 어느 할머니의 그 고단한 손길 속에, 주님은, 주님의 숨결은 너무나도 생생히 살아있었습니다. 한편, 120주년을 기념하며 예배한다고 들썩이던 학교와 목사들의 풍경이 오버랩되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듯 하였습니다.

"네가 딛고 있는 그곳이 바로 네가 내게 예배할 곳이니라!"

 그 음성을 마음에 담아 나는 속으로, 속으로 시장통에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찬양하고, 예배하였습니다. 이 놀라운 생의 현장 속에서 펄펄히 살아계시는 그 분을 대면하지 않고서 어찌 그 분께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사람 속에 계시는 그 분을 모시기 위하여 철저히 낮아지지 않고서야 어찌 그 분을 뵐 수 있겠는가. 하느님은 값비싼 승용차에 계시지 않고, 휘황찬란한 교회당과 예배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땀내나는 시장통에 계심을 나는 비로소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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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물론, 보는 관점에 따라서,

전체에 연결되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예언자들이 실직을 하게 될 테니까!

 

10월 2일

부러진 팔 들고서 기도하라.

제 결함을 스스로 아는 자에게

알라의 온전하신 친절이 쏟아지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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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10-02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님, 부러진 팔을 들고서 당신 앞에 마주하겠사옵나이다.
나의 결함을 정직하게 내려놓을 때, 그 겸손 가운데
당신이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당신의 친절이 함께 하심을 기대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