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달라이 라마

당신에게도 용서할 수 없는 게 있지

용서에도 연습이 필요하다고

내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한 가지 용서하면

신은 나의 잘못을 두 가지나 용서한다고

살면서 얼마나 많이 남을 용서했느냐에 따라

신이 나를 용서한다고

불쌍한 내 귀에 아무리 속삭여도

 

달라이 라마

당신에게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슬픔이 있지

용서만이 인간의 최선의 아름다움이 아닐 때가 있지

내가 내 상처의 뒷골목을 휘청거리며 걸어갈 때

내가 내 분노의 산을 헉헉거리며 올라가

기어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 때

아버지처럼 다정히 내 어깨를 감싸안고

용서하는 일보다 용서를 청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용서할 수 없으면 차라리 잊기라도 하라고

거듭거듭 말씀하셔도

 

달라이 라마

당신에게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분노가 있지

히말라야의 새벽보다 먼저 일어나

설산에 홀로 뜬 초승달을 바라보며

문득 외로움에 젖을 때가 있지

야윈 부처님의 어깨에 기대어

용서보다 먼저 눈물에 젖을 때가 있지

 

............................

 

시몬 비젠탈의 <해바라기>였던가?

달라이 라마는 "나는 어느 누군가에게, 그리고 인류 전체에게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우리가 기꺼이 용서해야 한다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시인은 불유쾌한 심기를 드러낸다.

용서라는 문제는, 그렇게 한가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용서는 실제로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 듯 싶다. 오히려 '용서'보다, '먼저 눈물 젖을 때가 있'다는 그의 말이 절절한 건 너무나도 쉽게 용서를 말하는 우리네 종교의 습속 때문이리라.

외로움에 잦아드는 눈물이 의지에 선행한다는 분명한 사실을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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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7일

죽어 땅에 묻힌 자는

귀머거리를 부르느라고 팔을 치켜든

나무가 된다.

그 긴 손가락들과

푸른 혓바닥으로

대지의 가슴속 비밀을

나무는 들추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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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산책

 

마음은 저만치 흘러나가 돌아다닌다

또 저녁을 놓치고 멍하니 앉아 있다

텅 빈 몸 속으로 밤이 들어찬다

이 항아리 안은 춥다

결국 내가 견뎌내질 못하는 것이다

신발끈 느슨하게 풀고

저녁 어귀를 푸르게 돌아오던 그날들

노을빛으로 흘러내리던 기쁜 눈물들

그리움으로 힘차하던 그 여름 들길들

그때 나에게는 천천히 걸어가 녹아들

저녁의 풍경이 몇 장씩 있었으나

산책을 잃으면 마음을 잃는 것

저녁을 빼앗기면 몸까지 빼앗긴 것

몸 바깥, 창궐하는 도시 밖으로 나간

마음은 돌아오지 않는다

텅 빈 항아리에 금이 간다

어둠이 더 큰 어둠 속으로 터져 나간다

 

.......................

 

밖은 환해 대낮인데, 마음은 저물어 시방 나는 저녁을 살고 있다.
그런데 자꾸만 산책을 잃으니, 마음 샅샅히 돌볼 겨를 없어
내 '텅 빈 항아리'에 자꾸만 '금이 간다'

'어둠이 더 큰 어둠 속으로 터져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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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10-16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결님, 어둠이 더 큰 어둠속으로 터져나가는 것,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보내주신 책 잘 받았어요. 너무 기쁘고 복된 선물입니다.
그분의 서체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네요. 조근조근 만나겠습니다.
날마다 옳고 좋은 나날!(맞나요?^^) 님에게도 저에게도 그렇기만 하길요..
감사합니다.^^

바람결 2007-10-17 03:28   좋아요 0 | URL
잘 받으셨다니 다행입니다.
부디 복되고, 기쁜 선물이 되었으면 싶은,
욕심같은 바램도 있습니다. 만,
무엇보다 무위당 선생님의 일화와 서화를 마주하며
높고, 깊은 길을 함께 누려보았으면 싶습니다.

이른 새벽, 오늘 하루도 님께 좋은 날 되시길
마음 모아 빕니다.^^
 

10월 15일

아니 있음(non-existence)을 겁내지 말라.

더함과 덜함이 있는 이 세상에서는

끊임없이 쌓이는 게 청구서들이다.

있음(existence)은 값을 내야 한다.

아니 있음은, 거기서 우리가 값을 받는 곳이다.

 

10월 16일

아니 있게 될까봐 두려워서 떨고 있는 자신을 보아라.

네 눈에는,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이

저를 있게 할까봐

두려워서 떨고 있는 아니 있음이 보이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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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10-16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가에서는 오체투지나 꿇어앉기와 같은 '절 수행'을 종교 수행의 한 방편으로 삼는다고 한다. '절'이라는 말의 어원을 따져보니, '절한다'라는 말이 '절인다'라는 말에서 왔다고들 한다. 무릇 '절인다'라는 말이 지니고 있는 속뜻은 마치 새우를 소금에 절일 때 새우의 부피와 크기가 줄어드는 것과 같이 '줄인다'라는 말이란다. 그러니까 '절한다'는 절이는 것이고, 절이는 것은 줄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종교의 가르침은 본디 그와 같다. 그 분께 절하는 것, 곧 그 분 앞에서 자기를 줄이라는 말씀이다. 절하고 절해서, 절이고 절여서, 줄이고 줄여서 비로소 내가 아니 있게 될 때, 길을 걷던 사람은 이미 길이 되어있을 것이다.
 

10월 13일

죽음에 대한 너의 두려움이란, 진실을 알고 보면

너의 참 자아를 만나는 데 대한 두려움이다.

 

10월 14일

"죽음으로 끝나지만 않는다면 인생은 훨씬 좋을 텐데."

이 무슨 난센스?

죽음이 없으면 삶은 무의미하다.

거두어들인 곡식을 썩혀 내버리는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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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10-17 0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말은 필요없다.
본디 生과 死가 한몸이란 걸 잊지 말아라.
너의 인생이 죽음을 향하고 있다는 순리를
너의 한갖 자아로 역리하지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