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야방 : 권력의 기록 1 랑야방
하이옌 지음, 전정은 옮김 / 마시멜로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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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소설은 내가 좋아하는 소설의 장르 중 하나이다. 어려서부터 삼국지를 좋아해서 집에 있던 삼국지 전집만 열 번 정도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덕분에 삼국지의 인물과 스토리를 거의 외우다싶이 했었다. 조금 크면서 한참 김용의 무협소설들이 재미있게 읽었었다당시 김용의 소설은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었고, [의천도룡기]기나 [소호강호]등은 베스트셀러였다. 특히 [소호강호]를 읽으며 인간이 권력욕으로 인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를 새삼 느끼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중국에서는 그의 소설들을 연구하는 학문을 김학(金學)으로까지 부르며, 김학 과목이 개설된 대학들까지 있다고 한다. 그것은 그의 소설이 단순히 무협소설을 한계를 뛰어넘어 역사와 인간의 내면을 그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는 이런 대작 중국소설을 거의 접하지 못하고 있다가, 드디어 김용의 작품에 필적하는 작품을 만났다하이옌의 [량야방]이란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하자, 마치 김용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순식간에 소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교한 세계관과 권력싸움의 구도, 치밀한 복선과 허를 찌르는 반전, 그리고 주인공 매장소와 예황군주의 러브라인까지... 마치 독자를 흡입하는 것 같은 강력한 소설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서구의 판타지 소설과 중국의 무협소설의 공통점은 소설 속에 현실과 다른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 소설 속의 세계관이 얼마나 정교하냐에 따라서 그 소설의 완성도가 결정된다. 톨킨스의 [반지의 제왕]이나 조지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들은 그 정교하고 치밀한 세계관으로 유명하다.  김용의 소설에서도 소림과 무당으로 대표되는 정파의 8문파와 이에 대항하여 마교나 사파로 언급되는 반대세력의 대결이 김용 소설의 세계관의 뼈대이다. 량아방의 무협소설보다는 역사소설에 가깝지만 앞의 소설들 못지 않은 정교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소설 속에서 중국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나라는 '대량'이라는 가상의 나라이다. 대량의 주변에는 이민족들이 있고, 특히 '북연''대유'라는 나라가 위협적인 나라이다. 대량의 수도는 금릉이다. 대량에는 황제가 있고 그 황제 밑에 여러 명의 왕자들이 있지만현재의 권력을 양분하고 있는 사람은 공식적인 후계자인 태자와 비록 태자는 아니지만 황제와 자식이 없는 황후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예왕이다. 둘은 후계자이 자리를 놓고 보이지 않는 암투를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소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한 남자가 금릉에 도착한다. 소철은 단지 가명일 뿐이고, 그의 실제 이름은 매장소이다. 강좌맹이라는 중국 최대 방파의 수장인 강좌매랑으로도 불리는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친구 소경예의 집에 휴식차 머물게 된다.

 

소설은 태자와 예왕이 매장소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접근하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이들이 매장소에게 접근하는 이유는 '랑야방' 때문이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랑야방은 대량 최고의 정보 집단이다. 그들은 매 번 자신들의 정보를 최대한 수집해 무예의 등급이 고수 순위와 지략의 등급인 공자 순위, 그 외에도 방파의 순위나 부자 순위, 미인순위를 정한다. 대량의 방파 순위 1위는 항상 강좌맹이었고, 공자 순위 1위는 이런 강좌맹의 수장인 매장소였다. 정작 매장소 자신은 무술은 전혀하지 못하고, 항상 지독한 기침에 시달리며, 조금의 추위에도 한기를 느끼는 병약한 인물이다그런데 태자가 누구를 얻으면 차기 대권을 얻을 수 있는지를 량야방에게 묻는다. 정보의 값어치만 치르면 세상의 모든 질문에 답을 한다는 랑야방은 이런 대답을 내놓는다.

 

"강좌매랑, 기린기재, 그를 얻으면 천하를 얻는다!"

 

매장소를 전설의 동물 기린에 비유하고, 그를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고 말을 한 것이다. 이 때부터 매장소를 얻기 위한 태자와 예왕의 실력싸움이 벌어진다. 그런데 정작 매장소는 둘의 사이를 저울지하며 둘 모두를 싸움에 붙이고 서로 피해만 입게 할 뿐이다. 매장소의 의중은 왕자 중에서도 황제의 미움을 받아 한직에 있는 정왕에게 있기 때문이다. 매장소는 정왕을 황제로 만들려고 계략을 꾸민다. 왜 정왕일까? 그것은 매량소의 과거와 연관이 되어 있다. 매장소의 원래 이름은 임수이고, 한 때 7만의 정염군을 이끌다가 반란군으로 몰려, 7만의 병사와 함께 죽임을 당한 황족이었다. 그런 그를 끝까지 친구로 대해 준 사람이 바로 정왕이었다. 매장소는 동료의 복수와 함께, 정왕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 한다그로인해 매장소의 지략을 통해 태자, 예왕, 정왕이 황권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정치싸움이 벌어진다.

 

 

이 소설의 큰 줄거리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황권을 향한 정치와 암투이지만, 매장소와 예황군주의 사랑이야기도 빼 놓을 수 없는 재미거리이다. 예황군주는 남부를 다스리는 운남왕의 딸로서 아버지 목심이 죽자 아버지의 군사 10만을 이끌고 남부를 지키는 여장부이다. 미모와 권력을 가지고 있으니 황제의 사랑을 받고,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신붓감으로 가지려 한다. 그러나 그녀는 원래 임수와 약혼한 사이이다. 임수가 죽자, 자신을 도와준 임수의 부하인 섭탁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섭탁이 사라지자 매장소를 통해 섭탁과 만남을 기대하지만, 정작 매장소가 임수인 것은 알지 못한다. 매장소는 예황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녀를 도와준다. 그럼에도 예황이나 주변 사람들은 매장소가 단지 정치적 이득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1권에서 끝내 예황이 매장소가 임수인 것을 모르고 끝나면 어떻게 하나 안타까웠는데, 다행스럽게도 1권 말미에서 예황이 임수인 것을 알게 된다. 둘의 애틋한 사랑이 이어질지 너무 궁금해 2권이 너무 기대가 되는 이유이다.

 

 

소설은 마치 잘 짜인 퍼즐처럼 매장소의 계략이 펼쳐진다. 그럼에도 황제와 태자, 그리고 예왕의 견제는 만만치가 않다. 이와 함께 매장소를 따르는 량야방 2위의 고수인 몽지와 매장소의 호위무사인 비류와 함께 매장소를 제거하려는 암살집단의 혈투가 매우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오랜만에 만난 장대한 스토리를 가진 멋진 중국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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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4대 비극 - 레어 에디션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형욱 옮김 / 문예춘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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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몇 편의 고전들은 생애의 중요한 시기마다 반복적으로 읽게 된다. 몇 번 읽은 고전들은 이미 스토리를 알고 있지만, 읽을 때마다 그 시기에 느끼고 있었던 아픔이나 고민, 감동 등과 결합되어 매 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번에는 문예춘추사에서 새로 발간한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4개의 비극인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를 한 권으로 묶은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을 읽게 되었다. 셰익스피어의 책들은 어렸을 때 문고판으로 읽고, 청년의 시기에 온전한 번역본으로 읽었다. 그리고 이제 중년의 입구에 이르러서 다시금 읽게 되었다. 예전에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읽으면서는 주인공들의 어리석은 선택들이 안타깝기도 하고, 악당들의 술수가 얄밉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기에 읽는 셰익스피어의 비극들은 내게 씁쓸함을 남겨준다. 이 나이에 들어서 비극들을 읽다 보니, 이것이 단지 책 안의 이야기만이 아님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비극들이 우리 삶에서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깨닫는 아니가 되었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대사로 유명한 [햄릿]을 읽으면서는 여전히 햄릿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답답함을 느꼈다. [햄릿]의 죽은 햄릿의 아버지이자, 덴마크 왕의 유령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된다. 햄릿의 아버지의 유령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어머니와 숙부가 공모해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미친척하면서 시기를 엿보지만 계속해서 고민만 하다가 오히려 모든 문제가 더 복잡해지게 된다. 그리고 그 자신 역시 그 복잡한 문제 속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


역사소설이나 드라마를 보면 결국엔 과감하고 잔인한 사람이 권력을 차지한다. 우리 역사에서도 정도전이나 이방원, 김종서와 수양대군의 대결에서도 먼저 과감하고 잔인하게 상대를 죽인 이방원이나 수양대군과 같은 사람이 권력을 차지하는 것을 보게 된다. 현대 정치사나 재벌가의 싸움 등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먼저 자기편을 모으고, 주저 없이 상대편을 빠르게 짓밟는 사람이 결국엔 권력을 차지한다. 문제는 이것을 알면서도 햄릿처럼 빠르고 과감하게 상대를 짓밟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정의인지, 어떤 것이 옳은 선택인지를 고민하다가 때를 놓치고, 결국엔 빠르게 행동하는 악인들의 술수에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경우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무언가를 결단할 때 점점 더 고민하고 망설이게 된다. 과연 이 선택이 옳은 건지, 이 선택으로 오는 그 무거운 책임을 내가 다 짊어질 수 있을는지, 이 선택으로 인해 희생 당하는 사람들의 아픔은 어떻게 할 건지를 고민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시기를 놓치고 있음을 깨닫는다. 젊은 시절 그렇게 싫어하던 우유부단한 햄릿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내가 가장 읽기 고통스러워하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인 [오셀로]는 다시 읽어도 마찬가지였다. 유능한 베니스의 무어인 장군인 오셀로는 군대의 지휘권과 아름다운 아내인 데스데모나를 얻게 된다. 그러나 오셀로를 시기한 아이고의 계략으로 자신의 충직한 부하인 카시오와 데스모나의 관계를 의심하게 되고, 결국엔 자신의 아내 데스모나를 죽이고, 자신도 자결한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괴로운 이유는 눈에 뻔히 보이는 아이고의 계략에 넘어가는 오셀로와 주변 사람들을 보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괴로움을 현실에서도 경험한다는 것이다. 아이고와 같은 사람들은 항상 상관에게 동료를 위하는 척하면서 은근히 상관의 질투심이나 권력욕을 자극한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처럼 교묘히 뒤로 빠진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이런 아이고와 같은 술수에 넘어가고, 현실에서 아이고는 비극의 결말을 교묘히도 피해 간다.




노년에 아랫사람의 아부에 눈이 먼 권력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리어왕] 역시 비극의 정수를 보여준다. 영국의 리어왕은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세 딸에게 자신의 영지를 물려주려 한다. 그리고 세 딸들에게 자신에 대한 사랑을 고백해 보라고 한다. 큰 딸 거너릴과 둘째 딸 리건은 번지르르한 말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셋째 딸 코넬리라는 아버지의 대한 진실한 사랑을 차마 말로 고백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결과 아버지의 증오를 얻게 된다. 결국 두 딸이 아버지의 영지를 나누어 가지고, 막내딸은 무일푼으로 프랑스 왕과 결혼한다. 나중에서야 두 딸의 홀대 속에 속았음을 깨달은 리어 왕은 미처가고, 아버지를 구하러 영국으로 돌아온 코넬리아는 전쟁에서 패전하고 죽는다.


다시 읽어도 자신에게 가장 멋진 아부를 하는 딸에게 영지를 물려주는 리어 왕의 선택은 너무나도 어리석어 보인다. 당연히 그런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는 것은 뻔한 세상 이치인데... 그럼에도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자신에게 좋은 말만 받아들이고, 조금의 비판이나 서운한 말에도 순식간에 분노하는 것이 나이 든 권력자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권력으로 인해 미쳐하는 한 인간의 내면을 너무나도 잘 표현한 [맥베스]는 다시 읽어도 명작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세 마녀에 코더의 영주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된다는 예언을 받은 맥베스는 자신이 코더의 영주가 되자, 왕이 된다는 예언까지도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아내의 부추김에 결국 왕을 살해하고, 자신이 왕이 된다. 그 후 마녀의 다른 예언들을 두려워하여 경쟁자들을 죽이고, 권력에 미쳐 스스로 파멸해 간다.


맥베스에 나오는 마녀의 예언은 어쩌면 인생의 미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은 우리에게 '저기까지만 가면 된다!' '저것만 얻으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곳에 가면 또 다른 목표가 생기고, 또다시 쟁취해야 할 것이 생긴다. 결국 많은 사람은 인생이 만들어 놓은 허상을 잡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것은 아닐까? 결국 맥베스는 인생에게 속았음을 깨닫고 이렇게 절규한다.


"내게 그렇게 말하는 혓바닥에 저주 있으라.
그 함마디가 나의 용기를 꺾는구나.
그 요망한 악마들을 절대로 믿을 수 없구나.
이중의 뜻으로 우리를 속여
귀에는 약속의 말을 늘어놓고,
막상 소원하면 그것을 깨뜨린다."
- 셰익스피어의 [멕베스] 중에서 -



앞으로 또 얼마 후에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게 될까? 그리고 그때에는 이 작품들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그때도 이런 비극들을 읽으며 인생의 씁쓸한 맛을 느낄까? 아니면 이제는 다 지나간 이야기라고 관조하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게 될까? 조금 긴 내용이지만 구차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햄릿의 명대사로 이 서평을 마치려 한다.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이 가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참고 견디는 것이 고상한 일인가?
아니면, 밀려오는 고난의 바다에 대항해
무기를 들어 싸우다가 끝장을
내는 것이 더 고상한 일인가?
죽는다는 건 잠든다는 것 - 그것뿐이다.-
잠들어 버림으로 육신이 물려받는 가슴앓이와
수천 가지 타고난 갈등이 끝난다 말하면,
그런 우리가 간절히 바라야 할 결말이다.
죽는다는 건, 잠든다는 것.
잠든다면, 아마 꿈을 꾸겠지. 아, 그게 문제로구나.
우리가 이 삶의 굴레를 벗어났을 때,
죽음이란 잠 속에서 어떤 꿈을 꾸게 될 건지가
우리를 망설이게 하는구나.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을 그리 오랜 불행으로 이끄는 이유로다.
그렇지 않다면 어느 누가 이 세상의 채찍과 비웃음,
폭군이 횡포 건방진 자의 무례함,
버림받은 사람의 고통, 재판의 지연과
관리들의 거만함, 참을성 있는 대인배들이
소인배들에게 당하는 수모를 참을 수 있겠는가?
한 자루의 단검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끝장낼 수 있는데,
어느 누가 이 지루한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땀을 뻘뻘 흘리고 투덜대며 살겠는가?
하지만 죽음 뒤에 올 그 무엇에 대한 두려움과
한번 가면 돌아올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우리의 의지를 혼란스럽게 하고,
알지도 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날아가느니
차라리 현세에서 당하는 저런 고통들을
참고 견디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양심은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들고,
그에 따라 결심의 자연스러운 색조도
생각의 창백한 색조로 그늘져,
심오하고 중요한 계획들이 이런 식으로 길을 잃어버리고,
마침내 행동이라는 이름을 상실해버리고 만다.
- 셰익스피어의 [햄릿]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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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을 꿰뚫는 세계사 독해 - 복잡한 현대를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역사
사토 마사루 지음, 신정원 옮김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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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역사를 알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과거의 일에 대한 지적 호기심 때문일까? 아니면 과거의 역사를 통해 조금 더 나은 현재를 만들기 위해서일까? 과거 실패를 통해 다시 그런 어리석은 결정을 반복하지 않고, 반대로 과거의 성공을 통해 조금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지만 역사를 통해 그런 시각과 판단력을 기르기는 결코 쉽지 않다. 마치 조각 퍼즐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역사적 사실들 속에서 우리는 어떤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진리를 어떻게 현대의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가지고 나온 책이 있다. 일본인 저자 '사토 마사루'의 [흐름을 꿰뚫는 세계사 독해]이다.
 
이 책의 저자가 역사를 기술하는 가장 큰 목적은 '아날로지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서이다. 아날로지란 비슷한 사물을 연관해 내는 사고방식이다. 이것을 역사에 적용하면, 현재의 어떤 사건을 통해 과거의 사건을 연상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사건이 과거의 사건과 닮아 있다면, 과거의 사건의 경험을 통해 현재의 사건을 조금 더 현명하게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책은 '지금'을 독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역사적인 사건들을 정리해 해설하고자 한다. 통사적인 접근으로 세계사를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계사를 통해 아날로지적인 관점을 기르기 위한 책이다. 아날로지란, 비슷한 사물을 연관해 사고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아날로지적인 사고가 중요한 이유는, 이 사고 방법을 체득하고 있다면 미지의 사건과 맞닥뜨렸을 때도 '이 상황은 과거에 경험했던 그때 그 상황과 흡사하다'라는 판단과 함께 대상을 냉정하게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14-5


 

저자가 현대를 독해하기 위해 제시하는 역사의 큰 주제는 세 가지이다. 첫 번째는 '제국주의'이다. 저자는 현대를 과거의 제국주의에서 이어진 신제국주의 시대로 본다. 결국 과거의 제국주의와 신제국주의는 닮아 있다는 것이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에서 발전했다. 자기 국가의 자본을 지키고 팽창시키기 위해 다른 나라를 무력을 정복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2차례의 세계대전이 발생했다. 신제국주의 역시 다르지 않다. 소련의 붕괴 이후, 이제는 이념보다 자본이 세계를 지배한다. 그리고 자기 나라의 자본을 보호하기 위해 무력도 서슴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저자는 과거 제국주의의 전쟁 위험이 현대의 신제국주의 안에서도 존재한다고 본다. 이것이 제국주의라는 키워드로 세계를 읽는 작가의 아날로지적인 사고이다.
 
두 번째는 '민족주의'이다. 저자는 제국주의를 통해 국가 간의 경쟁이 치열해 지면, 자신의 국가를 강하게 하기 위해 민족주의, 내셔널리즘이 강조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내셔널리즘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통일된 언어나 문화, 종교 등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결국 제국주의하에서는 국가 주도의 통일성을 강조하게 되고, 타민족을 압박하게 된다. 이것을 관주도 내셔널러즘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관주도 내셔널리즘은 양날의 검이다. 이를 통해 통일국가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타민족의 반발을 일으켜 나라가 분열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상황이 근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프로이센의 전쟁에 대응하기 위해 헝가리와 체코 등 다른 민족들에게 독일어와 오스트리아의 민족성을 주입시켰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로 오히려 헝가리와 체코가 독립하게 된다.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구소련과 중국, 심지어는 일본 내에서도 이런 적용이 가능하다고 본다.
 
세 번째는 '종교'이다. 저자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이 두 종교의 공통점을 민족성보다 세계종교에서 찾는다. 기독교나 이슬람은 민족성보다는 자기 종교를 통해 세계 통일을 꿈꾼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유럽의 EU와 이슬람의 IS이다. 이들은 민족국가보다는 하나의 통일된 종교적 연맹을 꿈꾼다. 결국 종교와 민족주의는 적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통치자들은 이것을 교묘히 이용해 제국 내의 종교성을 억압하거나, 민족성을 억압하는데 사용했다. 현대의 종교분쟁은 민족주의에 대한 반발로 생겼다. 반대로 저자는 현대의 민족적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또한 종교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책을 읽으며 지금까지의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열리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수많은 역사의 전쟁과 사건 속에서 저자는 그것들을 관통하고 있는 커다란 줄기를 찾아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과거의 제국주의, 민족주의, 종교가 지금 현대 역사까지 이어지고,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살고 있다고 본다. 결국 이 세 가지를 통해 역사의 흐름을 이해한다면, 현대에 조금 더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인 역사학자가 이처럼 넓고 객관적인 역사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놀랐고, 아베 정권의 편협한 역사관을 비판하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세계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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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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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과 [28]에 이은 정유정의 3년만의 신간이어서 더욱 더 기대됩니다. 악에 대한 처절한 분노와 응징이 이번 작품에도 있을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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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로 유명한 E.H.카는 '사실의 기록하는 역사'보다 '해석의 역사'를 중요시한다. 그는 역사란 과거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라는 기존의 생각이 사실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과거의 수많은 사건이 모두 역사가 될 수 없기에, 역사가는 그중 현시대에 의미 있는 몇 가지 사실을 끄집어 내어 역사에 기록한다. 이 과정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역사가의 시각이나 관점이 배제될 수 없다. 그렇다면 역사란 역사가의 주관적인 생각을 담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역사가는 현재의 필요에 따라 과거의 사건들을 기록하는 것이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과거의 역사의 해석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거는 현재에 비추어질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또 현재도 과거에 비추어질 때에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이 과거의 사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리고 현재의 사회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대시키는 것, 이것이 역사의 이중적인 기능이다." - [역사란 무엇인가], 까지, P 79


 


 

이런 E.H.카의 주장을 더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역사에 관련된 서적이 최근 출간된 일본인 학자 사토 마사루의 [흐름을 꿰뚫는 세계사 독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아날로지적 사고'를 강조한다. 아날로지적 사고란 현재 상황과 비슷한 과거의 역사를 통해 조금 더 지혜로운 판단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결국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실패를 통해서는 현재에 그런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이고, 과거의 성공을 통해서는 그런 성공을 이어가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500년도 더 넘은 사건인 '임진왜란'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이 전쟁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현재에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사실 [징비록]이 위대한 이유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런 사실을 바탕으로 앞으로 이와 같은 재난이 발생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기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징비록은 단순히 임진왜란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에 뛰어넘어 그 전쟁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해석하고 있다.

사실 임진왜란이라는 개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바라보는 중국과 일본과 한국의 시각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아카넷에서 출간한 [교감 해설 징비록]은 기존에 출간된 다른 징비록들과 차이가 있다. 책 제목에서 보듯이 징비록을 단순히 번역하는 것에서 넘어 그 징비록의 내용을 해석하고 다른 문헌과 비교하고 있다. 저자인 김시덕 교수는 여러 자료, 특히 중국과 일본의 자료들과 징비록의 자료들을 대조하며 같은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서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삼국의 시각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는 임진왜란에서 자신들의 승전 부분만을 강조한다. 그러기에 백제 관전 투나 칠천량 해전, 울산성 전투 등을 강조한다. 백제관 전투는 평양성을 함락한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퇴각하는 일본군을 쫓다가 백제관에서 패한 전투이다. 칠천량 해전은 이순신 대신 삼군 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패한 전투이다. 임진왜란 해전 중 우리나라가 유일하게 패한 전투이기도 하다. 울산성 전투는 이여송의 뒤를 이은 명나라 제독 양호가 울산에 쌓은 일본 왜성을 공격한 전투이다. 명나라 군대가 거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어리석은 판단으로 후에 일본군이 기사회생한 전투이다. 일본이 이런 전투들을 강조하는 것은 이 전투가 일본이 크게 승리한 전투이기도 하지만, 칠천량해전 외의 두 전투에서는 모두 명나라 군대와 맞붙어 승리했다는 것에 이유가 있다. 그러기에 일본은 백제관전투를 1000년 만에 중군과 싸운 전투로 본다.

"임진왜란 당시 일어난 수많은 전투 가운데 어떤 것이 중요한 전투였는지에 대해 조선, 명나라, 일본은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인다. 일본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전투는 백제관 전투, 울산성 전투, 사천 전투 등 자신이 명군에 승리한 전투였다. 그중에서도 백제관전투에 대해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의 국면을 결정한 중요한 전투임과 동시에, 고대 일본의 백제 구원군이 당군과 백촌강에서 맞붙은 이래 거의 천 년 만에 다시 중국군과 일본군이 정면으로 충돌한 전투라고 이해했다." [교감 해설 징비록], 아카넷, P 392-3

반면 일본이 크게 대패한 행주산성 전투 같은 경우는 단순히 권율 장군이나 조선군에게 패한 것으로 보지 않고, 행주성에 명나라 군대가 있었다는 왜곡된 기록을 한다. 자신들이 얕보는 조선에 대패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식의 기록은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은 임진왜란에서 중요한 시기인 1592년의 기록은 거의 없고, 다음 해 자신들이 참여해 평양성을 함락시킨 전투부터 전쟁을 기록하고 있다. 자신들이 전쟁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전쟁의 승리 역시 자신들의 역할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방대한 징비록에 나와 있는 사관을 모두 분석하기 힘들지만, 류성룡이 전쟁을 바라보고 있는 시각은 조선의 수군, 특히 이순신이 전쟁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임진왜란 발발과 함께 일본군이 평양까지 파죽지세로 점령한 후에 일본군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를 못 했다. 그들이 이렇게 파죽지세로 진군한 이유는 선조를 잡기 위해서인데 선조가 있는 의주를 놔두고 평양에 머문 것이다. 징비록에서는 그 이유를 이순신의 옥포해전과 한산도해전의 승리로 본다. 육지와 바다에서 진군하던 일본군이, 바다에서 길이 막혀 버린 것이다. 특히 일본 수군들은 식량을 비롯한 보급품을 수송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평양까지 진군한 일본군에게 보급품이 끊겨 버린 것이다. 그들은 지원군도 보급품도 없이 평양에서 고립된 것이다. 이를 통해 전쟁의 승기가 잡히고, 의병들과 관군들의 반군으로 전쟁이 승리한 것으로 보는 것이 [징비록]의 시각이다.

징비록에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잘못된 판단들과 정책들이 적나라하게 기록돼어 있다.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동시에 임진왜란에서의 승리가 명군의 도움이 아닌 이순신을 비롯한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목숨을 버리고 싸워서 얻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자주적인 역사관으로 전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임진왜란을 모두 류성룡과 같은 시각으로 본 것은 아니다. 의주까지 도망간 선조는 전쟁의 승리가 이순신과 같은 장군들이나 백성들이 협력해서 얻는 것이 되면 자신의 입지가 말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기에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 전쟁의 승리를 자신이 명군을 데려와서 승리한 것으로 해석한다. 결국 승리의 주역이 명나라 군대였고, 그 명나라 군대를 데려온 자신이 전쟁 승리의 일등공신이었다는 것이다.

이번 왜란에 적을 평정한 것은 오직 명나라 군대의 힘이었다. 우리나라 장수들은 명나라 군대의 뒤를 따르거나 혹은 요행히 패잔병의 머리를 얻었을 뿐 일찍이 제 힘으론 한 명의 적병을 베거나 하나의 적진도 함락하지 못 했다. - [역사 저널 그날 4], 민음사, P309

만약 징비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지금도 임진왜란을 명나라와 일본의 전쟁으로, 명나라의 도움으로 우리가 승리한 전쟁으로 알고 있지 않을까? 징비록이 기록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선조와 같은 몇 명의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치부를 덮기 위해 왜곡한 잘못된 역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징비록을 읽으며 역사를 단순히 사실로 기록하는 것보다 그 역사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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