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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박성관 옮김, 와이다 준이치 사진 / 문학동네 / 2017년 1월
평점 :

유독 나는 기억에 관한 영화나 책들을 좋아한다. 여러 번 영화화되기도 했었지만 기억을 잃어버린 스파이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로버트 러들럼의 [본 아이덴티티]나 조작된 기억 속에서 진짜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는 SF 소설가인 필립 딕의 소설들을 좋아한다.
이런 소설들을 읽다 보면 과연 '나'란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를 정의할 때 어떤 재료로 나를 정의할 수 있을까? '나'라는 자아는 어떻게 형성되어서 지금의 내가 되었을까? 수많은 경험들이 기억이라는 형태로 의식의 창고 속에 저장되고, 그 의식의 창고 속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그 기억들을 해석하면서 '나'라는 존재가 되지 않았을까? 결국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은 내 의식의 창고 속에 있는 기억들이 아닐까?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라는 책을 통해 저자의 서재를 탐험하며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 고양이 빌딩이라고 불리는 저자의 거대한 서재를 저자의 안내를 받아 가며 구석구석 드려다 보면서, 마치 한 사람의 뇌 속에 존재하는 의식의 창고를 탐험하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그 수많은 책들이 다치바나 다카시라는 개인을 만든 재료가 아닐까?

다치바나 다카시는 일본의 유명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이다. 그는 고양이 빌딩이라는 건물 속에 자신이 취재하거나 책을 저술하기 위해 모아 두었던 20만 권의 책들을 구석구석 배치해 두었다. 이 책에서는 저자가 새로운 손님에게 자신의 집을 구경시켜 주듯이 고양이 빌딩 구석구석을 소개하며 서재의 책들을 소개하고 있다. 단순히 책의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들이 어떻게 자신의 손에 들어왔고 그 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이야기한다. 책을 읽는 내내 집주인인 저자를 따라다니면 책과 함께 저자의 인생을 듣는 듯한 느낌이었다.

고양이 빌딩에는 공간별로 주제에 맞게 책들이 배치되어 있기에 저자는 그 공간을 설명하면서 한 가지 주제에 대해 깊게 설명할 때가 많다.
1층에는 주로 과학 분야의 책들이 많이 배치되었는데, 저자는 이 공간을 소개하면서 과학이나 생화학 분야에 대해 설명한다. 특이 요즘 인기가 있는 인공지능에 대해서 매우 깊은 식견을 드러낸다. 작년에 알파고로 인해 로봇이 인간의 지능을 따라잡은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가졌지만, 저자는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뇌세포는 100억 단위인데, 이것은 컴퓨터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단지 컴퓨터는 빠른 계산만이 가능할 뿐이지, 인간의 사고를 따라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 과학자들도 인간의 뇌를 모방하는 연구가 불가능함을 인정한다. 대신 인간의 뇌와 기계적 장치를 연결하는 연구가 오히려 활발하다. 뇌와 연결되어 손상된 신체를 대체할 기계적 장치를 연결하는 것이다. 이런 인공지능에 대한 책들과 함께 저자는 인간의 뇌에 대한 다양한 책들을 소개하고 있다.

2층에서는 인문학 분야의 책들이 많이 소개되는데, 특히 저자는 이곳에서 가톨릭과 기독교에 대해서 깊은 식견을 가지고 설명한다. 저자는 성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서양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단순히 성경을 지식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그 성경이 유럽 문화, 더 나아가 라틴 아메리가 문화 속에서 어떻게 토착화되었는지를 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성모 마리아 숭배에 대해 이야기한다. 원래 기독교에는 마리아 숭배가 없었는데, 유럽 문화와 라틴 아메리카에 토착화되면서 그 지역에서 섬기던 여신, 또는 귀신들과 결합해서 마리아를 숭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이 들으면 기분 나쁜 이야기일 테지만, 저자의 담담히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한다.
그 예로 라틴아메리카의 성모로 숭배되고 있는 멕시코의 테페야크 언덕의 성모가 사실은 멕시코 토착 종교의 토난친 이라는 신을 숭배하는 것일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원주민들이 성모 마리아의 현현을 테페야크 언덕에서 보았던 것은, 심리의 심층에서 두신(토난친 신과 성모 마리아)이 오버랩되어 있던 것이 배경으로 작용한 게 아닐까? 그 둘이 융합되어, 말하자면 토난친이 성모마리아로 환생한 듯한 이미지의 전환이 사람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일어난 것이 아닐까? (P154)
저자는 이런 종교적인 혼합이 단지 가톨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 종교에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두 유력 종교가 충돌했을 때, 두 신이 사실은 동일한 신의 다른 모습이라고 보면서 두 종교를 합리화하는 현상을 습합(習合)이라고 하는데, 이런 현상은 종교의 역사에 자주 나타납니다. 특히 일본에 불교가 들어왔을 때 불교의 부처는 실은 신도의 신이 모습을 바꾼 것이라고 보는 본지수적설에 의해, 혹은 부처임이 신도의 신이라는 형태를 취하셔서 아주 옛날부터 일본 땅에 독특한 방식으로 현현하셨다는 식으로, 불교와 신도를 일체화시킨 것도 그와 동일한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P 155)

지하층에는 저자가 취재했던 중동과 이스라엘 관련 자료들이 많이 있다. 저자는 이곳에서 책들을 소개하며 직접 팔레스타인을 취재했던 자신의 경험 들려준다. 또한 팔레스타인의 문제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자의 입장에서 매우 균형 있고, 깊게 이야기한다.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들은 어쨌거나 악한 것은 모두 상대 쪽이라는 자세로 서로 마구잡이 선전을 해왔습니다. 그런 상태로 취재해야 할 경우에 과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느 한쪽의 주장만을 믿어서는 안 되고 쌍방의 주장을 잘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중동 문제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분쟁의 본질을 하고하기 위해서는 한쪽의 주장만이 아니라 상방의 주장을 다 아는 것이 중요하지요." (P333)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의 주장이나 논리가 매우 단순해지고 있음에 놀란다. 술자리에서 술기운에 자신의 주장이 절대 진리인 것처럼 소리를 지르는 사람의 주장과 방송 등에서 나와서 이야기하는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주장이 거의 비슷해지고 있다. 심지어는 대선 주자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 역시 너무나도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그런 주장에 열광하고 동조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이렇게 단순해졌을까? 아마 독서를 멀리하면서 부터 일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책이란 다른 세상을 열어젖히는 커튼이라고 표현을 했다. 우리는 책을 통해 내가 경험하지 않은 세상과 나와 다른 주장과 생각들을 접한다. 또한 표피적으로만 알고 있던 것들을 책을 통해 그 심층부의 지식까지 알게 된다. 이를 통해 타인을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고, 사물의 깊이를 이해하게 된다. 만약 책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세상과 사람을 이해할까? 방대한 서재만큼이나 그 책을 통해 얻은 다양하고 깊은 생각이 부러워지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