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을 좋아하기에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반 시기에 지어진 소설들을 많이 읽는다. 그런데 이런 소설들을 읽으면서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한다. 이 소설들에게 니체의 '초인'들을 발견한다. 도스트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나폴레옹같'이 세상의 선을 위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라스콜리노코프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이반 표도로비치, 밀란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영원회귀를 고민하는 토마시, 그리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까지... 많은 인물들이 니체의 초인을 향한 몸부림을 담고 있다. 이렇게 보면 20세기의 문화는 니체에 대한 해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니체를 읽다] 3부에서는 막스셸러로부터 시작해서 질 들뢰즈까지 이름 난 철학자들이 니체를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이야기 하고 있다. 모두들 이름은 한 번씩 들어 본 철학자이지만 그들의 저서를 직접 읽어 본 철학자는 '하이데거'와 들뢰즈'가 전부이다. 둘 다 자신의 사상을 어렵게 표현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하는 사람들이기에 읽어도 대부분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러기에 이 부분을 깊이 있게 읽는 것은 내게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부분을 통해 니체의 철학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고, 이에 대한 해석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깨닫게 된다.


 


 

첫 번째 주자는 '막스 셸러'이다. 막스 셸러는 예전에 현상학에 관심을 가지고 읽던 책에서 잠시 스처간 기억밖에는 없다. 셸러는 주로 니체의 비판자에 해당된다. 특히 그의 그리스도교 해석에 대해 비판한다. 니체에게 초인이란 강자이다. 그리고 니체의 초인은 약자를 향한 연민을 증오한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는 약자의 표상이다. 그는 강자가 될 수 없고, 그러기에 본받아야 할 인물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을 펼친다는 것은 위선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셸러는 약자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강자의 특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셸러에게 이러한 용서와 사랑은 니체가 말하는 것처럼 복수를 행할 수 없는 무능력을 기만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타인의 행동에 따라 반응하는 것을 거부하는 심오한 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의 행위가 적에 대한 단순한 반작용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우리를 적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심오한 정신은 모든 반작용적 행동, 즉 세간적인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따르는 것을 거부한다. (P160)


두 번째 주자는 '지오르그 짐멜'이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보면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틀과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토론을 한다. 그 때 트라시마코스라는 소피스트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즉 강자는 스스로 정의를 만들고, 그것이 곧 모든 사람의 정의가 된다는 것이다. 니체는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을 이야기 하며 초인은 남이 만든 도덕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도덕을 만들어 가는 존재임을 이야기 한다. 이 때문에 니체가 주관적 도덕론자인 소피스트와 비슷하다는 오해를 받는다. 이에 대해 짐멜은 니체의 도덕이나 이를 통해 나타나는 인간상을 주관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니체의 초인이 진화과정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객관적이고 이상적인 인간으로 본다. 즉 니체는 인간이 고귀해지려는 감정을 인간의 객관적 가치로 보았던 것이다.


니체는 플라톤과 스피노자, 칸트, 쇼펜하우어와 달리, 이른바 초월적인 차원에서 도덕의 근거를 찾지 않고 자연의 진화과엊에서 도덕의 근거를 찾으려 한다. 니체가 표방하는 고귀함의 이상은 진화과정을 은밀하게 추동하는 동인임과 동시에 그것이 도달하게 되는 최종점이다. 따라서 고귀함의 이상은 생물학적 특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귀한 인간은 실제로 역사상 나타내려는 육성의 산물이다. 도덕의 토대를 초감각적인 초월적 차원에서 찾으려는 전통 형이상학에 반해서 니체는 도덕의 토대를 생물학적 진화과정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고귀함의 이상은 생의 자연적,역사적 과정에서 단지 진화와 선별 그리고 인위적인 육성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P173)



이 부분을 읽으며 오래 전에 읽었던 은희경 작가의 [아내의 상자]라나 소설이 생각났다. 그 소설에서 아내는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고통 당한다. 자신이 연약함이 주변 사람과 자신에게 피해만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옆집의 병든 강아지를 본다. 그리고 남편에게 그 강아지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분노를 표현한다.


"그게 아니구요, 나 같은 사람은 선택 이론에 의해서 도태되게 되어 있어요, 책에서 본 적이 있어요, 우성만 유전되고 열성음 도태되는 게 진화잖아요. -중략- 옆집 개 말이예요, 그 더러운 개새끼는 곧 굶어죽을 거예요. 죽는 날까지 토실토실한 개한테 가까이 달라붙겠죠. 뻔뻔스럽게도 그 개가 크는 것까지 가로막으면서 말이죠. 빨리 죽어 주면 좀 좋아. 개들은 왜 자살 같은 걸 안 하나 몰라." - [아내의 상자] 중에서 -


어쩌면 이 소설 속의 아내는 병든 개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보았기에 그 연약함을 증오했을 것이다. 니체는 왜 연약함을 증오하고, 강함은 숭배하는 것일까? 그 역시 자신 안의 역약함을 보았고, 그것을 경멸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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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6-03-03 1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요즘 니체의 책에 푹 빠져 읽고 있어서 말이지요. 그런데, 가을남자 님께서도 지적하셨듯이, 니체의 약자에 대한 증오는 좀 유별난 데가 있는 듯합니다. 어떤 대목에서는 심지어 `웃음`을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기도 하더군요. 그렇다고 제가 그 대목을 읽고 니체를 비웃었다는 얘기는 아니고요. 어쨌든 너무 심하다는 생각은 좀 들더라구요.
* * *
의사들을 위한 도덕. ㅡ 병자는 사회의 기생충이다.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꼴사나운 일이다. 삶의 의미와 살 권리가 상실되어버린 후에 의사들과 의사들의 처방에 비겁하게 의존하여 계속 근근이 살아가는 것은 사회에서는 심한 경멸을 받아 마땅하다. 의사들은 그들 나름대로 그런 경멸을 전달하는 자여야만 한다 ㅡ 처방전이 아니라, 매일매일 새로운 구역질을 한 움큼씩 자기들의 환자에게 전달해야 한다 ······
- 니체, 『우상의 황혼』,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중에서

가을벚꽃 2016-03-03 1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공감이 가네요. 그래서 저는 니체의 책들을 읽다보면 가끔 니체의 삶이 궁금해져요. 니체의 몸부림이 느껴져서 안타깝기도 하구요. 이런 시각때문에 젊은 날엔 니체의 추종자 중인 친구와 심한 논쟁을 하기도 했죠. 요즘 드는 생각은 세상엔 상처 없는 인간은 없고, 그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만의 방법으로 몸부림 친다는 생각이... 어쩌면 니체도 상처입은 한 인간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위대한 사상가를 너무 심리적으로 접근했다는 생각도 들고요... 니체에 대한 좋은 답글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