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상처가 있다. 상처가 없는 사람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상처는 낡은 사진처럼 간혹 튀어 나오기도 하고, 그 상처가 삶의 주인처럼 행세하기도 한다. 사진들이 쏟아진다. 하나하나의 사진들은 하나하나의 상처다. 그 사진들이 화산 속으로 들어간다. 열기에 사진들이 금방 녹아버린다. 녹아버리는 사진들...나도 상처가 있다 라고 말하려는 순간, 네게 상처 받았다 라고 말하려는 순간...나는 여지껏 보지 못한 네 상처를 보았다. 그랬구나. 그런데도 나는 줄곧 내가 상처받았다고 여겼구나. 알지 못했구나. 그 사진들이 화산 속으로 들어가자 이제서야 보이는구나. 손을 잡고 네게 미안하다, 고 말했다. 나는 몰랐노라고, 나는 정말 몰랐노라고...내 마음이 네게 전해지고 있을까? 나는 점점 커지고, 나는 점점 커지고 화산은 조그만해진다. 조그만해지는 화산 안에 녹아버린 사진은 이제 보이지도 않는다. 덕지덕지 붙이고 살았던 그 사진들의 누추함이 녹아진다. 사라진다. 눈을 뜨니 너도 없고, 사진도 없고, 화산도 없다. 늦잠을 잔 게다. 밖이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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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 - 동안거 나흘 전, 선방 청소. 청소만 하고, 집에서 안거를 보내려고 했으나 입승보살님의 단호한 말씀-"좌복이라도 깔아라, 하루를 오더라도!"-에 좌복에 이름표 붙이고 결제를 나기로 했다.

찻집 - 아는 언니가 하는 보이차 전문 찻집. 우연히 외국인 스님을 만나 이야기 나누다. 스님과 덜컥 약속을 해 버렸다. 오늘, 그 약속을 지켰다. 내일도 지킬 수 있을까? 지키고 싶어.

영남일보 웰빙센터- 빙의치료과정을 직접 보다. 

영남일보 맞은 편 막창집 - 술을 마시지 않고 막창을 먹다.  

 

긴 하루. 일상적이지 않은 만남과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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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6-12-06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빙의 치료 과정을 직접 보다니, 무섭지 않았나요?
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저는 감기에 걸려 동안거 결재일에 함께 기도하겠다던 말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어요. 금강경만 한 번 읽고 결재 들어간 모든 분들 정진 잘 하길 빌었습니다. 일상적이지 않은 만남이 있는 날, 좋네요.

이누아 2006-12-09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엔 무서웠고 나중엔 좀 슬펐어요. 사연 없는 사람이 없다고, 사람도 빙의령도 모든 버거운 인생을 살아가는 것만 같아...여러번 볼 기회가 있었어요. 기회가 되면 이야기 나눠요. 그나저나 아프신 건 좀 어떠세요? 몸이 불편한 가운데에서도 수행하는 맘 잃지 않으시니 보기 좋아요. 쾌차하시길.
 

아침, 횡단보도에 선다. 빨간불. 횡단보도 끝에 서 있는 사람. 어..어, 작은 언니...언니는 거기에 서 있지 못한다, 고 얼른 생각한다. 파란불로 바뀌고 내 옆을 지난다, 하나도 안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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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6-11-02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운사에서 -김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이누아 2006-11-02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_()_
 

너는 말하지 못하고, 말해도 나는 니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 나는 말할 줄 알지만, 말해도 너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 나는 많이 말하고, 너는 조금 말하고, 나는 많이 듣고, 너는 조금 듣는다. 니 장난과 웃음 소리, 궁금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얼굴이 떠오른다. 마음으로 전하라고 하지만 우리는 말하자. 서로 못 알아들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우리는 말하자. 내일도 만나 말하자. 너와 내가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때까지.

니가 그저 돌아봤을 뿐인데 나는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지하철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잠시 서 있는 순간, 니가 돌아봤다. 나는 헛살았다, 도 아니다. 선사들을 만난 것보다 더 진한 느낌..., 도 아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낯설고 강렬한 느낌이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 니가 표현하려고 했으나 표현하지 못한 심정을 내게 옮긴 것이냐. 니가 돌아봤을 때의 그 이상하고 낯설고 강렬한 느낌이 아직 그득하다. 흘려 보내지 않고 그 느낌을 기억한다. 언젠가 이 느낌을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혹은 이 느낌이 무엇인지 네게 말할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니가 그 말을 죄다 알아들을 수 있을지도.

삶은 모를 일로 가득차 있고, 더욱이 지금 우리는 서로 모르는 눈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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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좌선을 거른 지 좀 되었다 싶어 좌복을 깔고 앉았더니 기침이 좀 난다. 따뜻한 걸 마실 생각으로 거실로 나왔더니 하늘, 구름이 보인다. 마실 것은 잊고 거실에 앉는다. 가만히 본다, 구름. 천천히 움직이는 구름들. 저기 저렇게 있는데, 저기 가면 안개처럼 느껴지겠지. 헤세...구름을 사랑했던 사람. "구름을 나보다 잘 알고, 나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알려다오"라고 했던 페터가 떠오른다. 헤세의 [페터 카멘치트]...지금 내겐 그 책이 없군. 페터의 구름 예찬이 듣고 싶어진다. 아니, 이렇게 구름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해.

가만히 본다. 가만히 보는 것은 얼마나 미세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냐. 구름이 움직인다. 그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움직인다. 흰 빛이었다가 검은 빛으로, 위는 희고 아래는 검게...조금도 가만 있지 않고 조금씩 움직인다. 숨쉬는 것만 같아. 햇살 때문에 조금 윗쪽의 구름들이 빛을 내기 시작한다. 저 구름들이 사라질 때까지 이렇게 앉아 하루를 보낼 수도 있겠다.

안녕, 구름들. 그러나 구름은 날 쳐다 보지 않는다. 그런 무심함이 좋아. 무심해도 구름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것 같아. 가만히 가만히 보는 구름에게서 신성을 느껴. 모든 것들에게 그것이 있다더니 가만히 보지 않아서 보지 못했던 걸까? 구름. 구름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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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6-09-24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아침에 왔다가 다시 들렀어요. 님의 글이 참 좋네요.
모든 것에 신성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아요. 님처럼 마음의 눈으로 구름을 볼 수 시간이 내게도 올 수 있을른지..

불쑥 댓글 달고 가옵니다.

이누아 2006-09-25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신성이 어떤 건지는 몰라요. 그런데 신성이란 게 있다면 저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은 구름이었어요. 어제는 정말 내내 구름을 봤어요.

파란여우 2006-09-27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세하면 낙엽과 구름의 시인이죠.
이누아님은 구름 보고 이리 멋진 글을 써 주시니
저는 헤세처럼 낙엽을 모아 낙엽타는 냄새를 맡고 싶어집니다.

이누아 2006-09-28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양이 부족한가 봐요. 헤세는 낯익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헤세와 낙엽에 대해 떠오르는 게 없네요. 아마 전 파란여우와 낙엽을 떠올리게 될 것 같아요. 님의 댓글이 아주 반가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