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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희야, 오랜만이야. 네게 마지막으로 편지를 쓴 것이 4월이었지?

오늘 네가 우는 걸 봤어. 아주 오랜만에 터져나오는 울음을 우는 너를 봤어. 기도로 평안을 얻었다고 하더니 기도를 하다 우는구나.

잠시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기도란 바램이 아니고 참회와 감사뿐이라는 것을. 잊었던 전생의 업처럼  묻혀있던 기억들이 쏟아져 나오고, 거기에는 잊고 싶던 옛 너의 모습도 서 있었지.

지금와서 누구에게 잘못을 빌 수 있겠니? 연락이 닿지 않는 얼굴들,  너만 기억하고 아무도 기억도 못할 사소한 잘못들, 혹은 네 마음만이 지은 얼룩들...그때 내 마음이 이래서 지금 미안하다고? 잘못은 고사하고 너를 기억이나 할까? 너의 기억들이, 너의 기억 속의 사람들이...

그러나 네 마음의 티끌이 자꾸만 커져 보이고 이제 눈물로 씻을 때가 되었나 보다. 

네가 매일 새벽 기도하는 걸 알고 있어. 그 기도에 이제 참회의 기도가 좀더 길어질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어.

성경에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그 말씀이 오늘도 떠오른다. 쉬임없는 기도 속에서 슬픈 기억조차도 참회의 대상이 되어 너를 맑히리라 생각하니 또한 감사한 마음이 인다.

항상 너를 바라본다. 쉬임없이 기도하기를, 부질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기를, 네 평안이 언젠가 차고 넘쳐서 누군가를 젖힐 수 있기를.

네가 너를 맑혀 맑고, 깊고, 넓은 평안 가운데에 있는 모습을 그려 본다.

언제나 너를 사랑한다. 선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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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법을 어겼다고 해서 시작된 일이었다. 선거중앙위원회에서는 위반하지는 않았다고 공문을 보냈다. 실정법 위반은 없었다. 그리고 사과하면 탄핵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사과하면 끝날 정도의 사안으로 대통령을 탄핵한다는 말이다.

경제파탄의 책임을 묻고 있다. 최고 책임자이니 당연히 책임이 있다. 그러나 돌발적으로, 잘못된 경제 계획에 의해 경제가 이런 상태에 처한 것이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다.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한다. 정치적 혼란은 대통령보다 국회가 더 앞장서고 있지 않은가...

대선자금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조사된 적이 있는가? 대통령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통령은 검찰을 "장악"하지 못했다. 국회가 실정법을 위반한 것도 아닌데 대통령을 탄핵했다. 대통령은 국회를 "장악"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본래 그것은 장악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련의 사태들이 대통령이 이전의 대통령과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 허물이 이렇게 짧은 시간에, 환히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전의 대통령들이 이런 허물이 없었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에 의해서 앞으로의 대통령이 이전의 대통령과 다를 수 있음을 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대통령의 공과를 따진다면 과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의 공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는 국회의원들과 언론들에 둘러싸여 그의 잘못은 낱낱이 드러난다. 그것이 사석에서의 농담일지라도.

그렇게 정치적 왕따를 당하더니 드디어 193명의 국회의원에 의해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질서유지권이라는 물리력이 동원되었다. 예전에 여당일 때 그랬듯이 거대 야당이 되어서도 힘이 여전함을 보여준다. 날치기다. 아, 질서유지권이라니... 

정말로 객관적이고 냉철하고 싶다. 나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듯 그렇게 헤아려 보고 싶다. 그러나 오늘 나는 처음으로 정치적 사건을 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탄핵의 안도 불합리하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탄핵의 방법도 물리적인 힘이 가해진 불합리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합법이다.

합법적 절차에 의해 헌법재판소에 최종 결정을 할 것이다.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법관들이 법을 잘 알고 있으므로.

193명을 기억하고 싶다. 반대하는 국민이 두 배나 많은 데도 탄핵이라는 국가의 중대한 사안을 가결시켰다. 내가 찍은 대통령을 끌어내렸다. 나에게 묻지 않았다. 아니 물었는데 두 배나 많은 내가 아니다 라고 했는데 나를 무시했다. 다음 달이 되면 무시하던 내게 표를 달라고 할 것이다. 하는수없이 나도 그들을 탄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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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 2004-03-13 0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묻지도 않고 왜 나를 들먹이냐고요!
 

대구 보현선원 선방. 팔십 넘은 노보살이 칠십 먹은 보살에게 젊다고 한다. 일어나 앉을 때도 끙 소리가 나야 할 분들이 하루에 다섯 시간 단정히 앉아 있다. 내게 젊은 사람이 어떻게 일찍 이런 데 관심이 있었냐고 부럽다고 하신다.

선방치고는 비교적 자유롭게 수행할 수 있는 곳이라 나는 주로 오후에 가서 앉아 있다. 1시간이 채 못되어 다리가 아프다. 다리를 바꾸어 앉는다. 바꾸어 앉을 때는 소리가 난다. 이상한 일이다. 다들 다리가 아플텐데 다른 이들이 다리 바꿔 앉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다른 요령이 있는 것일까? 노보살들은 이렇게 앉아 있지 않아도 다리가 아플텐데 어떻게 앉아 있을까? 이런 망상이 문득 일어난다.

꺼꾸러지면서도 "아이고, 화두 놓칠뻔 했네"라고 한 어떤 스님이 떠오른다. 가만히 앉아서도 화두를 놓치고 있으니...

선방에 오면 망상이 더 이는 듯하다. 아직 사흘밖에 선방에 앉지 않아도 그런가? [천로역정]에서 본 구절이 생각난다. 청소를 하려면 쌓인 먼지를 떨어야 하고, 그러면 청소하지 않을 때보다 먼지가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고. 그렇다고 청소해서 먼지가 더 나니 청소하지 말아야 한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도 먼지가 뽀얗게 이는 그런 청소 초기였으면 한다. 또 망상이다.

생각은 구름처럼 바람에 몰려 다니다 화두를 들면 순식간에 흩어진다. 악한 생각도 생각이며, 선한 생각도 생각이며, 부처에 대한 생각도 생각이니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은 선가에서 절실한 말이다.

선방을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보살 한 분이 걸어가신다. 곧은 자세다. 나도 저렇게 늙어갈 수 있을까? 내가 젊은 나이에 선방에 왔다고 부러워하시는 그분들이 나도 부럽다. 늙어서도 열정을 잃지 않고 쉬임없이 정진하기를! ---------이뭐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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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 2004-03-13 0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현선원이라... 어디있는 곳인가요?

이누아 2004-03-13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구를 좀 아시는 분이신가요? 팔공산 동화사 말사 중 하나인 보현사라는 절에 있는 선방입니다. 대구 중심가인 반월당에 있구요. 다른 선방과 달리 시간이 자유롭고, 집에서 다닐 수 있을 뿐더러 교통도 편리합니다. 동안거와 하안거를 제외하고 그 사이에 산철결제가 있습니다. 지금은 그 기간입니다.

비발~* 2004-03-21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대구쪽 보현선원이군요 -- 헉 그렇다고 아는 건 아니고요. 혹시 가까운 데 있음 가볼까... 하고 검색해봤드니 전국 곳곳에 무척 많더라고요.ㅜㅜ 여긴 서울입니다.

이누아 2004-03-22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달 이상을 마음대로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라면 인천 용화선원엘 가보세요. 거기에는 송담 스님이라는 선지식이 계십니다. 선지식이 있는 곳에서 지도를 받으며 공부하는 건 하늘이 내린 복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비발~* 2004-03-23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고맙습니다. 인천이라면 언제라도 갈 수 있겠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로 유명한 탈주범 지강헌. 88년, 나도 텔레비전 뉴스에서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오늘 이야기는 꼭 그 인물 자체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빈부격차, 그 격차에 따른  불평등과 그에 대한 분노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80년대 이야기가 아닌 오늘의 이야기였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혹시 나는 너무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기웃거리고 있지는 않은가...얼마큼이 필요한 만큼일까? 서민들이 장만하려고 하는 집이 한 채 있으면 필요한 만큼일까? 아이를 낳아 대학을 졸업시키고도 노년을 여유롭게 보낼 수 있는 것이 필요한 만큼일까?

필요한 만큼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필요한 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확실히 눈에 띈다. 그들은 집이 없고, 집을 빌릴 돈이 없으며, 대학은 고사하고 초등학교에 가는 아이에게 도시락을 싸줄 수도 없다. 그리고도 빚이 있다.

문득 어떻게 해야 바르게 사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이 칭찬이 될 수는 없다. 부자가 곧 비난이 될 수도 없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누군가를 끝없이 밀어내면서 그들의 자리를 차지해서 부자가 되고 있는 것이라면? 모든 행위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어떤 흐름에 합류하게 된다. 장애자 시설이 마을에 들어온다고 반대하는 흐름이나 갈곳없는 사람들을 몰아낸 재개발지역에 투자하는 흐름에 내가 흘러들지 않기를!! 그러나 어이하랴..내가 하는 행위조차 어디에 속해 있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할 때가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드는 것을. 왜 이런 우려가 생기는 것일까?

물론 나는 정경환처럼 70억을 탈세한 사람이 아니다. 혹은 지금 너무 가난해서 곤란한 지경에 이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텔레비전을 보면서 몇 십억이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면 편한 것에 쉽게 물들 듯 그렇게 물들까 두렵고, 너무 가난해서 정치인이나 부자를 원수처럼 생각해 증오가 커질까 두렵고, 바둥바둥 앞만 보고 살아가다 내 이웃을 등질까 두렵다. 바르게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걸까?

[주역]건괘 괘사에 "군자종일근근"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사회에서 내가 아무 흐름에나 휩쓸리지 않으려면 참으로 종일근근해야 할 듯하다. 안으로나 밖으로나 깨어있지 않으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내가 무엇을 하는지 나도 모를 일이 되고 말 것 같은 두려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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