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오랜만에 오래도록 잠을 잤습니다. 왼쪽 눈에 다래끼가 나고, 얼굴이 부어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이런 몰골이 오랜만에 거울에 비치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겠습니다만 저만치 달려가는 마음은 조금도 아프지 않고, 조금도 울지 않고 이 길을 갈 수 있다고 여겼던 모양입니다. 앓고 난 후엔 이렇게 편지가 쓰고 싶어집니다. 건강하고 힘차던 많은 날들을 두고 이렇듯 앓고 난 뒤에야 편지를 쓰는 것은, 앓고 난 후가 주는 그 허전함 때문입니다.

이제 되었는가 싶어, 한숨을 돌리려고 하면 다시 발 아래 깨어지는 엷은 얼음에 놀라 뒤걸음질 칩니다. 봄이 되면 꽃이 피는 줄만 알았지, 발 아래 얼음이 녹는 것도 모르고 있었나 봅니다. 알 수 없는 막막함이 목구멍까지 차오릅니다. 이럴 때 누가 제게 30방을 친다면 정신을 차릴까요? 아마도 전 달아날 겁니다. 있는 힘껏 달아나 볼 겁니다. 그 몽둥이가 얼마나 매섭고 아픈데 30방을 다 맞고 앉아 있겠습니까? 30방을 다 맞고도 그 자리에 앉았다면 또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오늘은 선생님의 한 말씀이 간절합니다. 혹 그것이 몽둥이일지라도 오늘은 맞을 수 있을 듯합니다. 맞으며 고함이라도 치고픈 날입니다.

그제는 선요를 읽다 선요의 내용과 상관 없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뵈었던 선생님들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 내가 빚을 갚으리라 하는. 그렇게 하고서 바로 앓게 되니 그 결심이 어디에 갔는지 다시 찾아야 했습니다. 빚 생각은 어디 가고, 앓는 데 온통 마음이 뺏겨 겨우 화두 하나도 놓쳤다 들었다 하니...원숭이 같이 들락날락 거리며, 미친 코끼리처럼 위험천만한 마음입니다.

이제 쉼호흡을 하고 앉습니다.   

20년이 지나면 선생님이 아니라 두 손을 맞잡고 앉아 있을 수 있는 분과 이야기 나누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사이 가슴을 나누었던 선생님들이 아니라 또 그 20년 전의 당신께 편지를 쓰게 됩니다. 그간 잘못 살았던 걸까요? 한발짝도 내딛지 못한 것일까요? 그래도 돌아보지 않으렵니다. 당한 일보다 당한 일에 대한 생각이 자신을 괴롭힌다더니 잠시 앓고나서 앓은 것보다 더 조각조각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손 잡고 싶은 날입니다. 그런 날도 있는 게지요. 20년 전처럼 안부도 묻지 않습니다. 그때처럼 이 편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이곳에 매달립니다. 이 편지 한 장 부칠 곳을 몰라 여기에 걸어두니 더욱 마음이 허전해집니다. 그런 날도 있는 게지요. 쉼호흡 한번이면 이렇게 평온해지는 것을...하고픈 말도 제대로 아니하고 이렇게 문득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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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7-03-21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녁노을에 부친 편지가
괜히 저의 가슴도 물들입니다.
_()_

이누아 2007-03-22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혜덕화 2007-03-22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도 봄처럼 몸으로 꽃샘추위를 겪으셨나봐요. 저도 요즘 너무 힘들고 바빠서 '평상심이 도다'는 말을 자꾸자꾸 자신에게 되뇌이며 보냅니다. 앓고 난 후의 말간 평온, 앓는 것이 반가운 것은 아니지만 앓고 난 후의 순순한 평온이 그립긴 하네요. 바쁘고 힘든 시기 지나면, 저도 글 올릴게요. 올해 내게 온 인연 중에 일당백을 하는 아이가 있어, 더 더욱 시간 내기가 어렵네요. 집에 오면 뻗어버릴 정도이니......잘 지내세요._()_

이누아 2007-03-23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당백 하는 아이, 모른 척하지 않고 그 아이에게 시간을 내고 계시니 뭉클합니다. 선생님들은 3월에 바쁘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는 님의 서재에서 예전에 읽었던 글들을 다시 읽고 나왔습니다. 잘 지내셨습니다. 제 보기엔. 오늘도 그날들처럼 잘 지내세요. 맑은 날들입니다.
 

여기서 마침표를 찍고 다시 시작한다 해도

그런 식으로는 이 고리를 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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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이 구름처럼 일었다 사라진다. 사라졌다 일어난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서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라는 윤동주의 싯귀가 떠오른다. 구름처럼, 망상처럼 인연이 일었다 사라진다. 만났다 헤어지고, 헤어졌다 만나고, 누구가는 잊혀지고,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새로운 사람이었을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을 숱한 전생을 보지 않고도, 광활한 잠재의식을 들여다 보지 않고도 이해하는 사람들은 어떤 지혜를 지녔을까, 혹은 모진 인연을 만난 탓일까? 망상처럼 한 생(生)이 일었다 사라진다. 막망상(莫妄想)막망상막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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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7-02-28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망상처럼 한 생이 일었다 사라진다...
소리내어 읽어봅니다.

왈로 2007-03-02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하다보니 내 망상도 대단함을 느낀다. 한 글자 한글자 사이사이 파고 드는데 벌떼로 덤비네. 내 속에 있는 모든 '나'들이 합창할 때까지 쭈~욱 함 해 볼란다. 이번주는 '옴 살바 못쟈모지 사다야 사바하' 참회진언 입에 익혔다. 캬~ 김미연 대단해요~ ^^
 


해돋을 시간, 해가 구름에 가려 얼굴을 내밀지 않자 사람들이 새해 소망을 담아

노란 풍선을 날려 보낸다. 해가 놀라서 구름 위로 얼굴을 내민다.  



새해 행복! 건강과 평안을 기원합니다. 뜻하시는 일, 원만여의하게 이루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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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1-02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달팽이 2007-01-02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에는 복지을 일이 많으시길..
그리고 공부 잘 되어지기를..

혜덕화 2007-01-03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운대 해맞이 오셨나봐요.
새해엔 좋은 인연, 좋은 일 많이 생기길 바랍니다._()_

2007-01-03 2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누아 2007-01-05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건강을 빕니다. 저뿐 아니라 서재지인들의 공통소망이 아닐까 싶습니다. 님에게 즐거운 일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달팽이님, 혜덕화님, 그렇지 않아도 부산 하면 님들이 떠오릅니다. 부산에서 님들 생각을 했었어요. 기쁨이 마음 속에서 늘 넘실거리는 한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속삭이신 님,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 다른 일 겸해서 가긴 어렵고, 님 만나러 갈 수 있으면 갈께요. 3월이라야 될 듯한데 그땐 님이 바쁘시려나? 저도 뵙고 싶어요.

2007-01-10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돌바람 2007-01-11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 우리 남편한테 찍혔어요. 책 나오는 족족 보낸다고 아예 주소를 가져갔습니다. 왜 이리 웃음이 나오지요. 치유되었나? 지금 평택쌀 먹고 있는데 생일날에는 우렁이쌀 먹으면서 기운 많이 낼게요. 근데, 치유? 책 말씀하시는 거지요? 책은 없던데요. 평온이요^.............^

2007-01-15 1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구마야. 싹이 났기에 쓰지 않는 컵에 담아 두었어. 고구마 하나에 한 컵씩 줬어. 두 컵의 고구마가 자라고 있어. 왼쪽 컵의 고구마는 사진에 없어. 나는 이렇게 꽂아만 두는데 엄마는 줄기를 잘라 흙에 심었어. 그랬더니 흙에서 고구마가 달려 나오는 거야. 아주 맛나다고 엄마가 자랑하셨어. 몇 달 전 서재지인이 보내주신 고구마처럼 그렇게 달고 맛있나 봐.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 고구마가 웃고 있어. 네 방에도 고구마가 있었지. 어디 위에 올려져 있어서 줄기가 아래로 늘어져 있었던 것 같은데 어디 위에 올려져 있었는지, 어떻게 거기에 꽂혀 있게 된 것인지, 얼마나 자라다 사라졌는지 기억이 안 나. 그렇지만 이 고구마를 보고 있으니 그 고구마가 생각나. 이 고구마는 자는데 깨워서 표정이 좀 없지? 하지만 그 고구마는 웃고 있었어. 웃는 고구마. 생각하니 웃음이 나와. 혹시 너도 웃고 있니? 웃는 고구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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