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키 아타루(佐々木 中)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切りとれ、あの祈る手を)』

  : 넷째 밤 독서




2016년 1월 23일




    여러 남자를 만나 다섯 아이를 난 한 여자가 있었다. 아이들을 모두 출생신고하지 않았던 것 같다. 1987년의 가을. 새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겠다며 집을 나갈 준비를 한 그녀는 당시 14살이던 장남에게 5만 엔을 쥐어주고 홀연 사라졌다. 이후 참극이 벌어졌다. 막내인 아이 E는 장남과 두 친구에게 죽도록 맞아 사망했다. 건물주에게 도움을 받은 경찰이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다. 14살인 장남(아이 A), 7살 난 아이 B, 그리고 3살 된 넷째 아이 D가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다. 아이 C의 시신도 집에서 발견됐다. 하지만 아이 E의 시신은 취조 과정에서 얻은 단서를 바탕으로 한 숲에서 뒤늦게 찾았다. 뉴스가 연이어졌고, 이를 본 아이 엄마가 집으로 돌아왔다. 9개월 만이었다.


    1980년대 말에 일본을 광분케 했던 스가모 어린이 방치 사건(巣鴨子供置き去り事件)이다. 2010년에는 오사카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아이 엄마는 실형을 선고받았다가 복역을 마친 뒤 두 딸의 양육권을 인정받았고, 장남인 아이 A는 보호소에 들어갔다. 이 아이들은 법 밖에 있었다. 출생신고가 없었으니 사회에서는 그들을 뭐라 부를 수도 없었다. A에서 E까지 번호 같은 호칭만 있었다. 우린 법 위에 군림하려는 자들에게 분노를 금치 않는다. 굳이 땅콩사건을 떠올리며 몸을 떨 필요는 없다. 하지만 법의 밖에 있는 자들은, 그들은 우리가 알 수가 없다. 우린 태어나고 살아가지만 모두가 그렇게 되는 건 아니다.



*   *   *



    그렇다. 일본인인 사사키는 이 이야기를 꺼내 태어난 아이에게 법적인 인격을 부여하는 법과 국가의 역할, 그 기능에 대해 역설한다. 물론 시작에서는 앞서 예고했던 것처럼 중세 해석자 혁명, 모든 유럽 혁명의 어머니인 그 혁명을 들여다보지만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재생산, 번식, reproduction을 보증하는 국가의 기능이다.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보려고 중세 해석자 혁명을 들렀던 것이다. 그러나 그 혁명은, 11세기 말 피사에서 발견된 <로마법 대전>의 해석을 필두로 시작된 교회법의 재해석, 집성, 증식 과정은, 그리하여 교회가 성립하고, 모든 근대국가의 원형이 출현하게 된 그 혁명은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의 어느 이야기에 지나는 것이 아니다.


    사실 reproduction의 보증에 대한 국가의 기능을 강하게 역설하는 사사키의 심정을 우리는 헤아려봐야 한다. 간과되기 쉬운 문제니까. 그는 옴진리교 사건의 충격을 공유한 일본 사회의 일원 중 한 명이다. 저 사이비 종파가 어린이들을 어떻게 학대했었는가. 이를 떠올리던 그는 “혁명은 아이의 삶을 ‘수호하는’ 것이어야 합니다.”(202쪽)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이어지는 논조는 더 거칠다. 인권강화에 대한 권고를 무시하는 일본 정부를 두고는 “참 대단한 선진국 나오셨네. 그렇죠?”(204쪽)라고 비아냥거린다. UN이 부유하는 단체라고 지적한 르장드르의 『텍스트의 아이들』이 언급된 걸 보니, 반동에 대한 선입견은 일본이나 프랑스나 우리나 매한가지인 듯하다. 읽는 이들을 두려워하는 공포. UN의 실패와 대비되는 것이 바로 국가가 지닌 계보의 원리다. 『야전과 영원』을 읽고 보니, 지금은 그 역할은 국가의 상징으로 떠넘겨지고 나머지 모든 건 매니지먼트가 하고 있는 듯하나.


    교회법이 내규가 아닌 민법과 관련된 것이었다는 말에서 여기로 넘어온 것이다. 그것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를 들여다보면 근대국가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로. 나는 유아세례를 받은 자다. 아마 아주 오래 전 유럽에서 태어났다면 그걸로 족했을 것이다. 공적인 존재로 입증 받는 것 말이다. 지금은 그보다 다소 복잡한 절차를 거치긴 하나, 둘의 기능은 똑같다. 그건 나를 죽이면 살인자가 되어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처벌받지 않으려면 전쟁 상황에서 대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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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키는 겉으로만 보면 중세 해석자 혁명이라는 걸 무척이나 변호하려고 혈안이 된 사람도 같다. 반복은 그의 특기고, 에두르지 않겠다고 했다가 독자를 더 빙글 돌아가게 하는 건 그의 습관이다. 제 4장에서 저 이야기가 얼마나 자주 언급되는지는 직접 읽어보면 안다. 내용도 딱딱하다. 아니, 문체는 예전과 다르지 않아 적정 온도를 유지하는 방 안에 있는 기분이지만 다루는 게 법이다 보니. 그런데 들어보면 왜 변호하게 되는지 알 것도 같다. 근대의 모든 것이 저 보이지 않는 혁명에서, 지루하고 수수하고, 정말 지난 4일 간 읽은 것 중 (심지어 다른 책을 포함해서도!)가장 재미없는 저 혁명에서 나왔다. 주권도, 세속국가로 이행된 영토주권의 개념도, 관료제도, 의회제도, 실증주의도, 과학도, 법인도, 경제 기반도, 그리고 재판도. 명백히 영국을 겨냥한 것 같은 비난으로 법 내셔널리즘이 포위된다. 사사키는 국가마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고유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를 드러내준다. 모든 건 중세 해석자 혁명에서 나온 것이라며.


    그러나 그것이 유럽 혁명의 어머니라고 해서 중요한 건 아니다. 어차피 그건 지나간 역사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래서 난 뭐의 어머니이니, 뭐의 아버지이니 하는 칭호를 보면 거부감이 든다. 식상한 역사 이야기. 그냥 검색하면 아는 것. 나는 사사키가 그걸 들려주려고 여름의 밤중에 치열한 글을 썼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교과서적인 이야기가 자꾸 나오기에 살짝 긴장도 됐지만 그래도 믿었다. 3일 밤까지 그가 들려준 공포의 여운이 이 대낮에도 가시지 않는데, 고작 200쪽 정도에 와서 이 노력을, 마주하라는 그의 명령을 끝까지 실천하겠노라 붙잡고 있던 이 노력을 허무하게 지워버릴 순 없었다. 그래서 뒷이야기가 반갑기까지 했다. 정보=폭력에의 반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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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해석자 혁명에서 그는 정보기술 혁명을 본다. 그렇다 해서 그게 어떤 첨단의, ‘테크닉’한, 뭐 ‘하이브리드’한 그런 걸 말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아주 느린 갱신. <팔만대장경>판 작업을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이 있다. 각고(刻苦)다. 번역하고, 편찬하고, 제본하고, 수정하고, 색인 넣는 기술은 대단한 각고다. 지금이야 누구나 책을 낸다. 쉽게 책 내게 해준다며 돈 받고 가르쳐주는 이들도 있다. 나도 미술책 하나 써볼까 하는 욕심에 신청했다가 이야깃거리를 더 만들어야겠다는 더 큰 욕심이 생겨 보류한 적이 있었다. 검색은 우리 시대의 본능이고.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갖춰져 있지 않았던 12세기에 이뤄진 저 작업이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해보는 건, 우리로서는 가당치도 않다. 사사키는 그 위대함을 반복 강조한다. 그러나 그 위대함으로 우리는 뭔가 잃었다.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르장드르가 ‘춤=텍스트’라고 했던, 『야전과 영원』에서 잠깐 스쳐지나갔던 텍스트의 ‘모든 것’이라는 특징은 구름 같은 이야기다. 사고하기, 읽기, 쓰기, 그리고 춤이 어우러진 모습을 상상해볼 수가 없다. 다큐멘터리를 자주 보기에, 그리고 피카소 공부할 때 부득이하게 아프리카 미술을 들여다봐야했기에 아프리카의 춤을 아주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런데 그 ‘바운스’와 ‘스핀’들이 텍스트라니? 여기서 문학이 [문학]으로 넓어지는 이 책 첫머리가 소환된다. 조금은 이해해보도록 하자. 아니면 르장드르의 저 공식을 암기하자. 위험한데, 어쩔 수 없다. 요컨대 그건 모든 것으로 퍼져나간다. 거의 무한히. [텍스트]. 웃긴 구식이 없지 않은 르장드르의 이 단어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고 믿어보자. “우리의 법은 춤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225쪽) 아직 어렵다.


    하지만 저것만 받아들이려고 하면 생기는 문제일 뿐이다. 적응의 문제가 아니라. 사사키는 바로 이어나간다. 중세 해석자 혁명이 저것을, 즉 [텍스트]라는 걸 단절시켰다고. 우리의 시대가 왔다. 효율적 데이터베이스의 시대가. 그걸 지적한 르장드르 본인도 도서관에 틀어박혀 고서들을 연구할 수 있었던 그 시대. [텍스트]는 텍스트에 한정되고, 다양한 모습을 잃어버렸다. 춤이 어떻게 법인가? 법더러 춤을 추라고? 법정에서? 하나의 사건이 결말을 맺고, 그마저도 피해자 가족의 찢어지는 마음을 달래지 못하는, 차갑게 식은 열정의 공간에서? 그럴 수는 없다. 텍스트, 자네는 정보에 국한되어야겠다. 그 옷을 벗어던질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정보는 낙인이다.


    여기서 우린 춤을 잃어버린 것이다. 상실에 대해 더 열거할 수 있다. 흘린 피도. [문학]도. 왜 그런가? 텍스트가 정보를 의미하는 것으로 좁아지면서 우리는 이후 시대에 출현한 국가를, 신체 구속을, 감시를, 폭력을 봤다. 이후의 모든 혁명은, 심지어 루터를 포함해서까지도 폭력과 귀결됐다. 그렇다. 내가 느낀 폭력의 혁명적 근본성은, 쉽게 말해 모든 혁명에는 폭력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은 이 때문이었다. 다른 것이 아니었다. [텍스트]의 소멸과 그로 인한 상실이 먼 후손인 내게도 어떤 낙인을 찍어버린 것이다.



*   *   *



    그래서? 우린 늘 물어야 한다. 제시하겠다는 책들 앞에서는 엄중해져야 한다. 철저하게 읽고 곱씹어야 한다. 그것이 독자가 지닌 유일한 무기다. 사사키에게 그 칼날을 겨눠본다. 바른 길은 무엇인가? 그는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한다. 정보냐 폭력이냐의 이분법에서, 택일(擇一)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거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또 물어야 한다. 그런 우리에게 사사키는 다시 한 번 교황을 불러온다. 그 단체를. 교황은 주권의 유래라고 했다. 이 위대한 혁명 이후 교황은 주권=국가로 자리를 물려주게 되고, 여기에 혁명이 초래한 정보와, [텍스트]를 상실해버린 세상의 폭력적 습성이 더해진다. 쉽게 말해 주권=국가, 정보, 그리고 폭력의 삼위일체, 삼각형 구도가 나온다. 유치한 비유이지만 이것이 바로 근대의 버뮤다 지대다. 여기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여기서 빚어진다. 우린 또 묻는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사사키가 답한다. 이건 유럽의 버전일 뿐이다.


    ‘~일 뿐이다.’라는 귀결은 더 큰 것을 겨냥하고 있을수록 충격 역시 커진다. 반동이 된다. 위험한 말이니까. 근대 국가가 한낱 유럽의 버전이었을 뿐이라니. 아니,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다. 그건 유럽의 역사니까. 그러나 세속화의 연막작전을 통해 전 세계를 지배하려고 했던 그들의 야욕과 그로 인한 지금 세계를 들여다보면 그 당연한 말은 충격적인 말이 된다. 과학이니 객관이니 보편이니 하는 말과 신앙과 불신의 이분법으로 서양은 지구 전체를 장악하려고 했었다. 그들끼리 나눠갖다보니 불협화음이 생겨 애당초 예견됐던 대재앙이 두 차례의 전쟁으로, 아무 의미 없는 소모전으로, 대참사로 귀결됐다. 세속화는 트릭이다. 결코 종교에서 떠날 수 없다. 지극한 유럽의 버전이다. 정보와 폭력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장치다. 개발된 것이다.


    세속화의 트릭을 논했으니, 이제 신앙의 ‘정체’가 까발려진다. 믿음과 불신의 이분법은 다 무엇인가? ‘믿는다’는 말이 아프리카로 건너갔을 때 “저 백인이 뭔 말을 하고 있는 건가?”라는 반응을 보인 한 일화를 소개하며 사사키가 비판하는 건 명확하다. 신앙은 없다. 그것도 유럽의 버전일 뿐이다. 그러니 이 세상이 끝났다고 하는 건 다 종말론적이고, 컬트적이며, 심지어 나치적이다. 이런 무시무시한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버리는 것도 문제이겠지만 이걸 그냥 내쳐버리는 게 더 큰 문제다. 두려워 피한다는 뜻이니까.



*   *   *



   이렇게 보면 예술도 마찬가지다. 『야전과 영원』의 벤슬라마가 다시 떠오른다. 살만 루시디 사건. 그렇다. 그건 사건이었다. 예술은 어떠해야 한다는 논의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유럽에서는 답이 금방 떨어졌다. 예술은 정치와 떨어져 있어야 한다. 밀란 쿤데라와 움베르토 에코가 대표적인 논객으로 나와 수많은 옹호를 받았다. 예술은 저 먼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벤슬라마는 반대로 말했다. 그건 이슬람의 상황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왜곡하지 말라. 그렇다고 그가 이슬람을, 문학을 탄압하는 정치 집단들을 옹호했을까? 오히려 그 반대다. 억압되는 예술과 그 자유의 문제는 생각보다 첨예하지 않다. 그 현상을 둘러싼 이들의 논조가 워낙 격양되어 있을 뿐, 그 자체는 단순하다. 사사키와 벤슬라마를 읽어보면, 예술은 정치와 뗄 수가 없다. 그걸 [문학]이라 바꿔 불러보자. 혁명하는 것이다. 정치가 두려워하는, 혁명을.


    생각해보니 몇 해 전이었다. 통학하는 지하철에서 가오싱젠의 문학론을 며칠 정도 붙잡고 있었다. 공감할 부분이 많았다. 문학은 정치와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고 가오싱젠은 말하고 있었다. 그가 프랑스로 망명간 작가라는 배경은 고려해보자. 그도 노력한 이고, 탄압을 받았던 이다. 실천하는 이였다. 사실 난 그를 변호해주고 싶다. 그래서 그랬던 거다. 사사키와 벤슬라마를 읽으면 가오싱젠 역시 유럽적 사고에 빠져 있는 한 작가에, 노벨문학상 수상자에 지나지 않는다. 탄압을 피한다는 것의 절박함을 나는 미술사에서도 여럿 봐서 조금은 생각해볼 수 있다. 나치와 스탈린을 피해 달아난 화가들이 어디 한 둘이었는가. 작품 수백 점을 빼앗겨 자살 충동을 느낀 화가, 스위스로 도망간 뒤에는 독일을 향해 쌍욕을 날린 화가. 이렇게 정치가 쇠사슬을 채우려고 할 때마다 예술이 어떻게 반응했는가는 고려해보자. 그들을 매도할 생각은 한 치도 없다. 그러나 나는 사사키가 주장하는 바가 옳다고 생각한다. [문학]에 대한 것이니. 혁명.


    끝나는 일은 없다. 또 반복되는 밤이다. 강조되는 말이다. 종말론을 향한 조소가 신랄하다. “가소롭기 짝이 없습니다.”(246쪽) 이쯤 되면 별로 심한 비난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어느덧 그와 닮아간다는 뜻은 아니다. 종말론을 향하는 그들의 두려움과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나는 무심한 사람은 못 된다. 때때로 종말을 생각한다. 그보다는 차라리 앨런 와이즈먼의 『인간 없는 세상』처럼 세상이, 아니, 우리의 세계가 끝났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달은 지구 공전 궤도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더 이상 밀물과 썰물이 없는 날이 언젠가는 온다. 기후는 가혹해지며, 우리가 시와 노래로 사랑했던 모습은 사라질 것이다. 언젠가 한 화학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자연을 시로 노래하죠. 하지만 자연은 애당초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비인격’이라는 말의 무서움은, 아니다, 그걸 표현해보진 않겠다. 쓸모없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종말은 무섭다. 아직 오지 않은 그곳에 기대어 생애의 힘겨움을 토로해보는 것이다. 광적인 수준까지는 아니라도, 그게 버거운 상대를 앞에 둔 우리의 생리이지 않은가.



*   *   *



    그러나 사사키는 손을 잡아끈다. 행동에 앞선 사고의 무장을 촉구한다. 끝나지 않습니다. 읽고 쓰는 혁명은 끝나지 않습니다. 이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 얼마 전부터 살짝 펴보고 있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에서 이런 구절을 읽은 까닭이다.


    “체르노빌에서는 ‘모든 것 후’의 삶이 더 기억에 남는다. 사람 없는 물건, 사람 없는 풍경……. 목적지 없는 길, 목적지 없는 전선……. 또 생각해보면, 이것은 과거일까? 미래일까? 가끔 내가 미래를 쓰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스베틀라나의 책, 21쪽)


    저 거대한 사건도, 내가 태어난 해에 일어난 저 대참사도 지금은 공포 영화의 소재로 전락했고, 적극적으로 기억해내려는 자는 별로 없다. 그래서 그녀가 노벨문학상은 받은 것이다. 읽고 쓰기를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가려고 한 그녀가. 그런 그녀는 다른 구절에서 말한다. 체르노빌 이후 변한 게 없다고. 그러니 사사키가 주장하는 미결말의 세계, 제임스 조이스와 사무엘 베케트를 빌려오며 쏟아놓은 이 세계의 비밀을 어떻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은 수많은 슬픔이 들어 있는 저 우크라이나 작가의 책에서 막을 하나 빌려다가 [읽기-씀]의 구슬에 발라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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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01-24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차피 죽는 운명인데, 종말론을 끌여들여 광란으로 치닫는 인간심리는 어찌 헤아려야 할까 싶을 때 있어요.
유전과 관습 속에 전해진 집단 무의식과 사회적 세뇌?
이렇게는/저렇게는 죽기 싫다는 정체성의 발악?
의미를 만들어내고 합리화하는 인간의 몹쓸 습성?
우리가 보고 배운 죽음의 많은 모습들에서 각기 추출해내 살인이든, 자살이든, 희생이든, 죽을 때까지 끌고감이든, 한정된 시간 안에서 그리 사는 군요...

탕기 2016-01-24 14:12   좋아요 0 | URL
저도 동의합니다. 전적으로요. 그래서 연민을 느끼기도 하죠.
제가 그걸 보고 두려움을 갖는 건 이겁니다.
`인류 멸망의 판타지`라는 게 실은 그걸 보고 싶어 하는 이상한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전체주의적 가학`이라고 표현하면 될까요? 매력적인 습성.
agalma님처럼 그런 걸 보면 참 답답해집니다.
 















사사키 아타루(佐々木 中)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切りとれ、あの祈る手を)』

  : 셋째 밤 독서




2016년 1월 22일




    의도적으로 아포리즘을 멀리 하던 내가 얼마 전 시몬 베유의 『중력과 은총(원제 : La Pesanteur et la grâce)』을 샀다. 부끄러운 일이다. 아포리즘인 줄 모르고 성급히 산 까닭이다. 지름신을 경계했어야 했다. 제목만 보고 덜컥 사버리는 책들이 간혹 있다. 꽂아뒀다가 ‘중고로 되팔까?’ 생각을 했다. 이 검은 책은 그렇게 며칠을 서재에 있었는데, 어느 날 그걸 집어 읽었다. 무슨 기분 탓에 그랬는지는 모른다. 지금 와서 기억날 리도 없다.


    중력에 대한 이야기였다. 과학 서적을 적잖게 읽었다. 철학자의 중력 이야기? 그래, 여기서 중력은 어떻게 ‘철학적으로 왜곡’되는가, 두고 보자, 하는 치졸한 마음으로 독서가의 가면을 조금만 더 써보기로 했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읽었다. 아니,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지나가는 중이니 사사키의 말을 빌리자. 읽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면을 벗어버렸다. 중력 없이 하강하게 하는 힘, 은총, 가장 낮은 곳까지 향한다는 힘. 그 어려운 일에 대한 책이었다. 언젠가 이 책을 감히 다시 써보겠지만, 마음이 떨렸다. 잠언 모음이다. 그래서 여백이 다른 책보단 많다. 쉴 곳이 많다는 뜻이다. 그만큼 멈춰 설 기회가 많고, 속으로 울다 책을 덮게 되는 때도 많다는 것이다. 두 번 읽기를 기다리며 나는 이 책을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옆에 꽂아뒀다.


    오늘 시몬의 책이 갑자기 생각났다. [읽기-씀]은 3일 째 내가 두 손으로 고이 들고 있는 구슬이다. 깨지기 쉬울 것 같아 여기저기서 다른 책을 빌려다 막을 쳐놓는 중이다. 시몬의 책에서 빌린 막은 “읽기. 어느 정도의 주의력이 개입하기는 하지만 읽기는 중력에 따른다. 우리는 중력이 제시하는 의견을 그대로 읽는 것이다 …… 보다 높은 주의력을 기울이면 중력 그 자체를, 그리고 사용 가능한 여러 가지 균형 체계를 읽을 수 있다.”(시몬 베유, 윤진 옮김,『중력과 은총』, 225쪽)라는 구절이다. 그녀에게 최고의 읽기는, 그리고 쓰기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것은 그 과정을 통해 신을 읽어내는 것이다. 책이 사람을 잡아당긴다는 가벼운 통찰 정도의 얘기가 아니다. 아, 뭐라고 표현할까. 안타깝지만 시몬은 그에 대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   *   *



    내가 뭘 놓쳤던 것일까? 나는 그 구절을, 그 구절의 맥락을, 앞뒤를, 수십 장에 걸친 이야기들을 다시 읽어봤다. “지성은 진정한 겸손에 가장 가까이 있다.”(위의 책, 215쪽)는 말일까? 육체와 세계의 관계를 바꾸는 일에 관한 말이었던 걸까? 유대인인 그녀가 말한 인도의 아트만? 더 앞장으로 가서 읽어보니 ‘사랑하기’가 나온다. 아니면 낮은 곳으로 내려가기에 대해 이야기였던 걸까? 모르겠다. 실패다. 첫 번째 독서가 철저한 실패로 끝났다.


   나는 읽는 사람이다. 때때로 가증스럽게 보이기는 하나, 그래도 쓰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니 나와 비슷한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다. 이 굴욕감을. 돌파구가 다른 곳에서 우연히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릴 만큼의 굴욕감. 그리고 오랜 시간 후에 그 굴욕감이 다시 새벽의 강 안개처럼 찾아오면 저 건너편에서 뱃사공이 나를 태우러 노를 저어 온다.


    사사키의 [읽기-씀]에는 부동의 무언가가 있다. 그건 이 책의 독자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가 읽기와 쓰기와 혁명의 역설에 힘을 주는 구절마다 경전이 언급된다는 것. 뱃사공이 내게 경전을 건네줬다. 경전은 하나의 텍스트가 아니다. 그것을 쓴 사람, 읽은 사람 모두를 자신의 품에 품는다. 대충 읽고 그것을 정치 도구로 사용하는 이들에게는 경멸의 시선을, 그러나 그 안에서 ‘중력’이 된 이들에게는 존경을.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과의 셋째 밤 여정은 그렇게 요약된다.




*   *   *




    읽고 쓰는 자와 사기꾼을 나란히 세워놓고 후자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밤이다. 둘을 열거만 해줘도 독자들이 알아서 비판하겠지만 사사키는 굳이 목소리를 높인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글을 통해 독자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좌천되는지는 헤아릴 수조차 없을 지경이다.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사사키는 안다. 우리보다 더 잘 안다. 옴진리교 사건은 현해탄을 건넌 저 섬나라에서 일어났었으니까. 그게 일본 사회에 얼마나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는지를, 대학 시절 잠깐 들어본 적이 있어 새삼 떠올려봤다.


    전 날 밤에는 반종교개혁으로 끝냈으니 일단 사사키도 첫 막은 그 무렵으로 끌고 가서 열어주지만 여기서 또 다시 루터를 소환하진 않는다. 루터는 셋째 밤 마지막 즈음에 가서 아주 잠깐 나올 뿐이다. 이 밤은 신비하다. 이 단어를 둘러싼 부정적인 것들을 다 씻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성의 사회다. 신비를 추종하며 사랑하는 우리에게 진짜 그런 일들이 닥치면 과연 그 단어를 좋아할 수 있을까. 섣불리 답할 수 없다. 그래서 신비주의는 어딜 가든 편견을 뛰어넘기 힘들다.


    일본의 사정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서양도 다를 바 없다. 카렌 암스트롱의 『신을 위한 변론』에도 신비주의의 올바른 정의를 위한 저자의 노력이 곳곳에 발라져 있다. 사사키는 신비주의를 ‘구하기’ 위해 엘리엇, 발레리, 릴케, 파운드, 첼란을 빌리며, 라캉을 구해준 극적인 전회 이야기도 잠깐 언급한다. 신비주의자의 대표 사례로는 아빌라의 성녀 테레지아가 실려 있다. 그녀의 소원대로 말라리아에 걸렸다가 요양하던 중 종교적 황홀감을 반복 경험해서 엄격한 수녀원 규칙을 만든, 가톨릭의 상징적인 성녀. 베르니니가 조각한, 그 엑스타시 속의 성녀다. 읽고 씀이 광기와 연결됨이 다시 확인된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함마드가 나온다. 사족인데, 대학에서 잠깐이나마 이슬람을 공부했었다는 사실이 지금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큰 재산이 됐다. 이번 IS 사태 이후 인터넷 공간에 오고 가던 무분별한 비판과 욕설들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나는 구원받았다.” 오늘날 이슬람은 남성적 이미지가 강하다. 비교종교학 교수도 그렇게 표현했다. 젊고 강력하며 전투적인 이슬람. 물론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게 된 경위를 그는 전부 알고 있었고, 나는 그 과정을 배웠다. 그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큰 벽이 허물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장자와 더불어 그 수업만은 대학에서 건져온 보석이라 말할 수 있다.


    사사키가 무함마드를 언급하는 순간부터 이슬람을 모르던 독자들은 아마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첫 무슬림의 대부분이 여성이었고, 무함마드 앞에 ‘어머니’라는 호칭이 달려 있으니. 독자의 자질 문제이긴 하나, 나는 제발 이 책을 (이 글도 마찬가지고) 읽는 이들에게 이슬람 혐오증이 없길 바란다. 그리고 사사키는 분명히 밝힌다. 종교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혁명 이야기를 하는 중이라고. 하지만 이건 거짓말이다. 올바른 거짓말이다. 철저히 종교 이야기를 되풀이 하며 그릇된 세태들에 대해서는 일보의 물러섬도 없는 비난을 쏟아낸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혁명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혁명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   *   *



    아팀(고아)이자 문맹이었던 장사치 무함마드가 대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이 갖고 있었다던 ‘책의 어머니’로 향하는 과정. 소격과 조우의 관계에서 한 인간이, 아니, 사도가 읽고 쓰며 혁명하는 과정은 이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으리라. “읽은 것은 굽힐 수 없습니다.” (사사키의 책, 151쪽) 동굴에서 얼마나 두들겨 맞았던가. 혹은 목이 졸렸던가. 아내에게 가서 미쳐버리겠다고 고백하면서 그는 아마 울었을지도 모른다. “여보, 하디자, 저자가, 아니, 그러니까 자신을 천사라 주장하는 저 미치광이가 내게 자꾸 읽으라고 협박하는 거요. 문맹이라고, 바보일 뿐이라고 아무리 머리를 조아리며 울부짖어도 목을 조르고 뺨을 때린단 말이오!”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지혜로운 하디자는 그런 어린 남편에게 다시 동굴로 가라고 하고, 그 순간 사사키의 말처럼 한 세상이 태어났다. 아, 세상은 정말이지 여자가 빚는다.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라캉이 ‘여성의 향락’을 말한 극적인 구절이, 그 전회가 다시 떠오른다. 남편은 동굴로 가서 『쿠란』이 되었다.


    나도 반론은 할 수 있다. 얼마간 읽다가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니까. 그래도 이슬람은 칼로 세워진 것이다. 전 날 밤에도 그랬다. 선행하는 것이든 후행하는 것이든, 본질은 폭력이 아니겠냐고. 혁명은 집단을 상대하는 일일 수밖에 없고, 집단은 원래 갈라져 있는, 분절되어 있는 것들의 이질적 집합일 수밖에 없다. 그 집단을 가르는 것들은 수도 없이 많은데, 우린 그 중 정치와 사상의 연결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갈라선 채 아직도 아물어지지 않은 상처 주위에 긴 철책을 두른 민족이 아니던가. 그런데 무슨 혁명인가? 솔직히 지금도 그 생각이 가시지 않는다. 목까지 나왔다가 들어가니, 움찔거리는 혀가 갈필을 잡지 못한다. 갈증이 난다.


    그래도 사사키는 단언한다. 여기까지 오니 그 단언이 이제는 익숙해진 듯도 싶다. 무엇보다도 선행하는 것은 읽고 쓰는 혁명이라고. 텍스트라고. 폭력은 그 뒤에 있는 것이라고. 단, 프로이트가 제시한 원부 신화는 예외라 하겠다. 원부가 일삼는 폭력에 대항한 아들들이 아비를 죽이고 법과 텍스트를 출현시켰다는 이 기상천외한 판타지는, 즉 지극히 서양적인 생각에서는 법의 기원이 폭력의 폭력적 중단 이후라고 거의 못 박혀 있다. 법의 기원 문제는 빅뱅만큼이나 해명하기 어려운 과제이리라. 누가 알까.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프로이트 원부 신화의 가타부타가 아니다. 판타지를 두고 그걸 논하는 것도 우스운 모습이긴 하다. 사사키는 여기에 무함마드를 대입시킨다. 원부 신화 공식에 무함마드를 넣으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즉, 무함마드는 원부가 아니다. 이건 이슬람 형성 과정에 있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로, 오늘날의 정치적 무슬림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그들이 무함마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문맹. 고아. 아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던 남편. 천사에게 뺨 맞고 목 졸린 이. 아들은 둘이 있었지만 일찍 죽고, 딸만 넷이었던 딸 바보 아빠. 무함마드는 딱 그쯤 됐다. 다른 기존 종파들에서 무수한 비난을 받았고, 죽을 뻔 했던 적도 수 차례다. 그런 그가 최후의 사도이자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됐다. 원부라니 가당치도 않다. 그는 그저 읽고 쓰기를 했을 뿐이다. 정신분석이니 민족학이니 오리엔탈리즘이니 하는 것들로는 절대 이해할 수가 없다. 법은 어디서 왔는가? 읽고 쓰는 자에게서 왔다. 지브릴은 무함마드의 목구멍을 찢고 심장을 꺼내 깨끗이 씻은 다음 다시 넣어줬다. 이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분명하다. 폭력은 선행하지 않는다. 사사키는 이 대목에서 루터를 잠깐 상기시킨다. 농민전쟁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둔 그가 다시 한 번 강조했던 ‘폭력≠텍스트’를.



*   *   *



    그러니 원리주의는 얼마나 나쁜 것인가. 나와 텍스트를 구별하지도 못해 멋대로 읽고 쓰는, 텍스트 앞에서의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는 나약한 자들이 펼치는 논리, 그 논리를 따르는 자들의 우스꽝스러운 춤을 보라. IS는 지하드를 말한다. 그러나 그자들이, 정치 앞에서는 눈에서 피를 쏟을 수도 있는 저 파렴치한 자들이 과연 빛나는 책 『쿠란』을 읽기라도 했을까? 이런 식으로 비판하면 피해갈 수 있는 종교는 하나도 없다. 사이비 종교는 물론이고, 제도권 종교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분명히 말했다. 언제 올지 모르니까 깨어 있어주시오.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던 자도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그저께 집 앞에서 강아지 산책을 시키던 동생이 (강아지 발 닦일 양으로) 받아들고 온 물티슈 봉지 뒤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심판의 날이 ‘곧’ 온다고. 천국의 문 앞에서 무척이나 초조해하는 목사와 신도들이 다니는 교회인 모양이었다.


    종말과 죽음을 팔아서 품을 넓히는 행태들은 무수히 많다. 다시 언급할까? 히에로니뮈스 보스의 <건초수레 삼단화>를? 종말과 죽음, 라캉 식으로 말하자면 만민이 그 앞에서 평등할 수밖에 없다는 ‘절대적 향락’을 상품으로 판다. 무한의 죽음. 아, 그것은 나치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절멸의 국가. 그러니 그들을 ‘절멸의 종교’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는 하등 없다. 끝을 말하는, 시작을 말하는 현대인들은 이에 너무나도 손쉽게 동조하는 것이리라. 비판이 여기까지 나가니 몸을 떨 수밖에. 아감벤을 경멸조에 가깝게 비판(솔직히 비난)하는 구절에서는 이 책을 더 이상 읽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한 번 말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은 무서운 책이다. 우선 제목부터가. 손을, 아니, 기도를 자르라니.



*   *   *



    나는 전 날 밤 예상하길 셋째 밤 정도 되면 중세 해석자 혁명이 나오겠거니 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무함마드로 이야기가 엇나가면서 다시 모아지는 이 내용들이 슬슬 버거워졌고, “이건 대체 무엇인가!”라는 탄식이 속마음에서 불현듯 튀어나오기에 이르렀다. 『야전과 영원』 이후 늘 불편했던 마음이 어디서도 위안을 받지 못하더니, 이제는 아예 위안 받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는 충고가 제 3자의 선언처럼 판결봉을 휘둘러버린 모습이다. 딱 그렇다.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에서 항적(航跡), wake, track, furrow의 그것을 논하면서 나는 또 한 번 어디론가 끌려간다. ‘끝없음’으로. “그리고 다시 싸우기 시작했어.”라고 말하는 블라디미르와 “그리고 또 새로운 밤이 찾아오지.”라는 포조의 ‘기약 없음’의 세계로. 하나도 결정적이지 않다. 그러니 여기저기 올이 풀려버린다. 기억이 깨지고, 나는 허허벌판에 있다. 큰일이다. 공포를 버티는 일은. 읽고 쓰는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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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아타루(佐々木 中)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切りとれ、あの祈る手を)』

  : 둘째 밤 독서



2016년 1월 21일




    붉은 단어. 혁명. “붉다.”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 크게 변질되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멀리서 보니 그렇게 보였다. 그 단어와 함께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운동권 학우들 곁에서 봉기와 투쟁과, 그런 말들로 이뤄진 뜨거운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낀 교수들의 경험담 듣는 걸 좋아했다. 교문이 걸려 있어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거나 교실 창문으로 최루탄이 날아 들어와 신촌 오거리까지 냅다 뛰었다거나, 그런 재밌는 이야기들. 모르니 재밌던 것이다. 메케한 CS탄의 냄새가 갑자기 떠오르기도 했다. 콧물과 눈물도. 그런 무용담은 나른한 봄날의 수업에 없어서는 안 될 쉼터였다. 창가에 지정석 갖는 걸 좋아하던 내게 그런 날들의 봄바람은 잊히지 않는다. 혁명. 그건 아주 먼 것이었다.


    그것이 붉었던 까닭은 유혈과 닿아 있는 역사를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오후 가족과 함께 K사의 다큐멘터리를 봤다. 나폴레옹과 러시아의 대결. 사실적 묘사를 위해 배우들이 열연을 했고 그래픽도 상당했던 프랑스의 수작 다큐멘터리였다. 그걸 보다 말을 던졌다. 얼마나 미칠 수 있으면 참호에서 날아오는 총탄을 맨몸으로 맞을 생각에 뛰어갔을까. 전쟁 없는 시대에 살아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평화를 가장한 기만적인 말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사실인 걸, 이런 변명도 불가능한 건 아니다. 여기서 불현듯 그 다큐가 생각났던 건 전쟁과 혁명의 유사, 낭자한 피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다. 모든 혁명은, 아니, 조금 양보해서 ‘대체로’ 혁명은 “폭력이고 유혈이며 참극”(73쪽)으로 기억된다. 그런 관점의 역사책은 얼마든지 찾아 읽을 수 있다.


    사사키가 우리를 두고 혁명의 후손이라 일컬은 건 역사적 사실을 소행해서 내린 결론이다. 그럼 물어볼 수 있다. 우리는 전쟁의 후손이다, 우리는 향신료 무역의 후손이다, 등등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주체의 형성에 대한 모든 걸 가져다 붙여놓을 수 있고, 얼마 후 개성이 출현하는 장면까지 목격하리라. 물론 이런 오류를 범하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유치함이야말로 본질로 가는 길이라고 믿어본 적이 없던 게 아니라 그냥 해본 질문이었지만, 사사키는 그 모든 걸 뛰어넘고 결론짓는다. 우리는 혁명의 후손이다. 그 무엇보다도. 그렇다. 둘째 밤 독서에서 중요한 단어는 혁명이다.



*   *   *



    역사 이야기가 나온다. 좋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루터를 아주 모르는 바는 아니다. 루터 전집을 다 읽어야 그를 이야기해볼 수 있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술회하는, 그럼에도 기꺼이 대혁명을 들여다보는 사사키처럼 나는 겸손한 사람은 못 된다. 루터는 미술사를 공부하는 내게 중요한 이였다. 이쪽에서, 그러니까 미술사 입장에서 보면 그는 하나의 필터다. 그의 개혁은, 대혁명은, 로마 가톨릭을 저 꼭대기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거대한 일을 오로지 문자만으로 격파한 그는 미술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그에게 반격하려는 가톨릭 측의 반종교개혁만 보더라도 그렇다. 미술은 오로지 신에게 봉사해야 된다는 중세적 관념이 르네상스 이후 느닷없이 강화됐다. 아니, “느닷없다.”는 표현은 단락을 무시하는 것도 같다. 그러나 그만큼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르네상스 정신의 일면은 몸을 움찔했고, 대신 기이할 정도의 화려함이 강조됐다. 그래서 바로크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직전이었다. 여하튼 눈살 찌푸리게 하는 검열의 칼날이 거장들을 법정으로 줄지어 소환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베로네세를 들여다본 적이 있다. <레위의 집에서 열린 축제(Cena a casa di Levi)>라는 대형 유화 때문에 그는 1573년 종교재판에 회부됐고 혼쭐이 났다. 난잡한 군중들의 묘사가 성화를 왜곡한다는 게 공식적인 소환 이유다. “저희 화가들은 시인과 광인들과 같은 파격을 사용합니다.”라고 말했다가 재판 말미에 결국 재판관들 앞에 몸을 숙여 황급히 절을 하며 반항의 뜻이 없음을 드러내야 했다. (여기서 말하는 파격, 즉 license는 예술적 파격이다.)


    이게 바로 루터 반대편에 있던 가톨릭의 모습이었다. 사사키는 르장드르를 빌리더니 이미 사목 권력이 그 운을 다한 당시 모습을 여러 부패와 연관하여 그린다. 다 사실이다. 나는 냉담자라 성당에 나가진 않는다. 하지만 성경을 읽고, 종교 비판 저서들을 탐독하며, 여러 종교의 경전들을 곁에 두고, ‘영성’이라는 단어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다. 그 사이에서, 아니, 그 차이에서 조화와 궁극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나의 기대는 영성의 추종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오히려 이런 태도 덕분에 나는 모든 종교의 왜곡에 집중한다.


    보리슬라프 페키치의 『기적의 시대』를 여기서 다시 한 번 언급하게 되는데, 그 책이 내게 그 무엇보다도 충격을 줬던 이유는 어쩌면 그런 일이, 그러니까 예수를 대신해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이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소설에서는 ‘키레네 사람 시몬’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구원 받지 못한 채 타락과 피폐의 구렁텅이를, 히에로니뮈스 보스의 <건초수레 삼단화>에 나오는 것 같은 무지몽매한 수레 위의 중생들로 남아 있을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 죽지 않았다. 이 말을 하는 구 유고의 도발적인 작가가 그 누구보다도 성경을 탐독하고 그 안에서 진리를 찾아내려고 했던 자라는 데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다.



*   *   *



    귀족의 사교장으로 굴러 떨어진 수도원은 물론이고 면죄부(대사부, 속유장)도 언급된다. 루터가 그리고 나타났다. 단언해두는데 루터는 가톨릭으로부터 이단을 선언 받았을 뿐, 그가 정말 ‘이단(異端)’이라는 범주에 들어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나는 조르다노 브루노의 우주관을 얼마든지 변호할 것이다. 기득권 종교는 ‘전통’이라는 기관(器官)에 목을 매고 있었다. 그 전통 속의 신이 반격의 대상이 되며, 그렇게 이단은 정의의 편에 서서 새로운 신을 갈구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단이 된다. 신이 양분되어버린 상황이다. 한쪽의 신과 다른 쪽의 신. 그 같은 이름. 루터는 문제를 제기한다. 우릴 억압하는 전통의 신을 섬길 것인가, 아니면 다른 신에게로 회귀할 것인가. 그렇다. ‘회귀’라는 표현이 딱 맞다. 그건 성경으로 돌아가는 작업이었으니까. 그래서 루터는 사사키의 말마따나 [읽기-씀]의 철저한 작업을 거쳤다. 자신이 미친 것인지, 세상이 미친 것인지를 묻는 지점에서는 용기도 발휘했고.


    이걸 문자주의라 부르며, 혹은 일부 몰상식한 견해로 ‘복음주의’라고까지 부르며 매도하는 이들이 있을까 모르겠다. 루터가 글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을까? 그래서 그걸 “종교적 언어도 과학적 진술처럼 의미가 분명하고 알기 쉬워야”(카렌 암스트롱,『신을 위한 변론』, 370쪽)한다며 과학을 이기려고 한 전략적 복음주의자들의 어리석음에 닿아놓겠다는 건가? 아니다. 후세의 과오를 그에게 바르진 말자. 루터는 읽고 쓰는 고독한 싸움 끝에 현실의 문제를 타파할 새로운 준거로 성경을 선택한 이다. 농민전쟁의 야기는 비판할 점으로 회자되겠으나, 여기서는 혁명을 본다. 사사키는 분명하게 말한다. “그는 언어의 사람입니다. 그는 읽고 썼습니다.”(사사키의 책, 88쪽) 그리고 보름스 국회에서 교황을, 공의회를 겨냥해 신의 도움을 청한다. 오늘날 신이 갈라져 있다고 말하지 못할 바는 하등 없다. 그러니 그 역사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가.


    사사키가 루터의 설교 능력(카리스마)과 음악 사랑을 곁가지로 언급한 건 읽고 쓰는 것의 정적인 격렬함 외에 그가 가지고 있던 또 다른 면을, 하지만 결코 떨어뜨려 생각해볼 수 없는 면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리라. 그를 따르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정확히 말하자면 ‘농민’들이. 요한 하위징아가 『중세의 가을(Herfsttij der Middeleeuwen)』에서 묘사한 그 인산인해의 풍경이 16세기라고 해서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글을 모르는 이들은 책을 사서 읽어달라고 했다니. 이런 면도 혁명의 한 축이었다. 하지만 사사키가 내내 집중하는 건 그보다는 [읽고-씀]이다. 그것이 『야전과 영원』에서 뭐라고 언급되었던가. 역사의 도박장에 들어가는 방법이었다. 준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법이 여기서 빠질 수가 없다. “대혁명은 법의 혁명이기도 했습니다.”(98쪽)


    그런데 법은 그 준거를 거듭 소행해서 끝까지 추궁하다보면 난제에 봉착한다. 우리에게 행동의, 더불어 생각의 울타리를 치는 강력한 법은 실은 사례와 근거를 들며 우리를 설득하지만 그 근본의 근거가 없다. 이 근거율과 인과율의 분리는 사사키의 앞선 책에서 독자를 괴롭힌 문제였다. 칸트도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법의 법은 없다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법 해석의 법은 없다고. 누구나 쉽게 생각해볼 수 있다. 법은 힘이다. 법의 해석이 곧 힘의 존재를 입증한다. 그래서 데리다가 『법의 힘(Force de loi)』에서 칸트를 빌려 “힘이 없이는 법도 없다”(데리다 책, 15쪽)는 말로 그 강제성을 우선 환기시킨 것이다. 그러면 물어볼 수 있다. 루터는 어떻게 법의 변혁을 이뤘는가? 다시 말해 그는 ‘법의 힘’을 어디서 끌어다놓았는가?


    양심. 미묘한 단어다. 양심이라는 건. 사사키는 『야전과 영원』의 미완으로 양심을 논하지 않은 걸 꼽았는데, 혹 그와 관련된 책이 있다면 (물론 번역서가 나와야겠지만) 읽어보고 싶다. 저 단어만큼 복잡한 게 있을까 싶을 정도이니, 루터파 법학의 양심은, 그러니까 재판관에게 “양심대로 판결하라.”고 넘겨버리는 저 개념은 다소 불안해하다. 무너져버릴 것 같다. 그러나 영미법과 일본의 현행법도 양심에 기초한다고 한다. 이걸 알면 법의 딱딱한 이미지가, 그 입자들의 결합이 풀려 흐물흐물해지는 장면이 상상된다. 이 양심을 통해 신의 법이 민중 사이로 들어와 법의 종교화가 달성됐다.



*   *  *



    사사키는 농민전쟁을 돌아가지 못한다. 루터를 추앙할 생각이었다면, 그런 초보적 글을 쓸 생각이었다면 애당초 읽고 쓰는 고독한 작업을 향한 용기와 그 후 이룩된 법의 혁명만 논하면 됐다. 자크 바전의 『새벽에서 황혼까지(From Dawn To Decadence)』에 실린 루터의 인간미와 맹렬한 투사의 이미지를 교차시키며 혁명의 시초이자 영웅으로 짜내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농민전쟁의 폭력은 루터의 해석을 가로막고 있다. 다시 말해 여기서 갈라진다는 뜻이다. 사사키는 어디로 갔을까? 어느 방향으로 이해하려고 했을까?


    이미 일어난 그 폭력이 수많은 희생을 담보로 해야 하는 상황을 연출했지만 실패한 건 아니라고 우선 말한다. 과도한 징세 폐지, 농노제 폐지, 토지 반환 등 농민의 정당성이 권력의 방패를 뚫고 승인됐기 때문이다. 그러니 피를 흘리는 게 불가피하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이런 의미일까? [읽기-씀]을 이야기하던 그가 그런 결론으로 갈 수 있을까? 가당치 않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루터는 언어의 사람이었다고 했으니, 그 혁명의 모든 과정에서 폭력은 [읽기-씀]의 밑으로 들어간다. 피해를 거듭 상기시키는 와중에도 그는 분명히 견지한다.


    “텍스트는 폭력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111쪽) 그것은 법을 다시 쓰는 것. 도박에서 이기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단, 의구심은 남는다. 확실한 사례들을 통해 고정관념을 쌓아버린 까닭이다. 역사의 도박장에서 목도한 ‘피의 힘의 대결’이, 그것이 텍스트에 선행하는 것이든 후행하는 것이든 더 본질적인 것만 같은 의구심.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직 사사키가 ‘혁명의 본질’이라 말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계가 있다. 나에게는. 폭력과 주권 탈취, 그리하여 얻게 되는 자유의 패턴이 우리 사회에서, 내가 일부 교수들에게서 직접 들은 생생한 증언으로 있었다. 그렇게 얻은 자유의 설렘을 뒤로 한 불안함이 만연한 시대에서 나는 태어났고 이렇게 산다. 근원을 따질 때냐고 묻는 이들도 이해되고, 그렇게 겉만 훑다가 텍스트가 아닌 폭력을 지향하는 이들의 초조함도 이해된다.


    다만 나는 조금 멈춰보는 것이다. 그래서 혁명이 멀다고 한 것이고. 사사키가 [읽기-씀]이라고 요약되는, 즉 넓은 ‘문학’으로 요약되는 과정이 그 무엇보다도 본질이라고 말했을 때, 그래서 나는 주춤했다. 이것이? 텍스트를 앞에 둔 공포를 공유하고, 읽고 씀의 어려움을 거의 매일 체감하는 나의 이것이? 혁명이라고? 그러니 나도 덩달아 초조해진다. 시쳇말로 농담해보자면, 겨드랑이에 땀이 찬다. 주먹을 쥐고 뛰어나가려는 이의 격정적인 순간이 이상하리만치 가까이에 있는 듯 상상이 된다.


   그런데 그게 죄란다. 카프카의 말을 빌려, 사사키는 그것이 죄라며 우리의 행동을 잠시 저지한다. 조금 더 들어가 보려는 그가 다음으로 향할 곳을 미리 내다본 건 다행이었을까. 모르겠다. 중세 해석자 혁명으로 갈 참이다. 그건 무엇보다도 [읽기-씀]의 위력을 설명하는 진수. 그렇게 나는 배워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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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아타루(佐々木 中)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切りとれ、あの祈る手を)

  : 첫째 밤 독서



2016년 1월 20일



    읽고 쓰는 것을 대문자 [문학]이라 정의한다면, 저 괄호 속에 아주 미미한 수준이나마 지분을 차지하고 있을 내가 주시해야 하는 건 그것과 정반대편일 것이다. 이렇게 타이핑하는 와중에도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머뭇거림, 침묵.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원제 : Die Welt Des Schweigens)』를 읽다가 돌연 침묵을 쓸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해버린 순간이 있었다. 새삼스런 일이었고, 그걸 복기하는 지금도 새삼스레 이런 글을 쓴다. 다시 말해 나는 지금 비애 속에 있다.


    막스 피카르트는 그 까닭을 알려준 이다. “침묵은 인간의 마음속에 비애를 불러일으킨다. 침묵은 인간에게 말에 의한 죄로의 전락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상태를 회상시키기 때문이다.”(위의 책, 51쪽) 결국 이를 부정할 수 없는 존재다, 나는. 그래서 [문학]에 매달리려고 물리적 투쟁을 불사하는 것이리라. 요즘 뒷목이 너무 아프다. 몇 시간을 한꺼번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면 고체가 되어버렸던 피가 물렁해지면서 혈관 이곳저곳을 찌르는 것도 같다. 그래도 신음을 동반해야 할 [문학]과의 사투는 피할 수 없다. 조금도 보탬 없이 다시 말해 나는 지금 비애 속에 있다.


    사사키 아타루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원제 : 切りとれ、あの祈る手を)』을 닷새 밤의 기록이라 했으니, 나는 그걸 닷새 동안 읽고 쓰려고 한다. 책 앞에만 서면 항상 긴장하고 약간은 경직된 감도 없지 않은 내가 하나의 운동을 시작할 참이다. 가로지르거나 되읽거나 뛰어넘었다가 그 방해받은 지점을 뒷면에서부터 앞면의 방향으로 격파하거나. 깨부수면서 읽는다는 점에서 나는 백지의 편을 든 반(反)문자주의 운동의 선동가인 셈이다. 선동할 이가 나뿐이라는 게 함정이지만, 그렇지 않은가, 독서는. 그러니 손을 자르라는 이 제목 앞에 서서 내가 파멸의 운동을 향해, 그 형태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만 같아 겁에 질려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사족은 구태여 자리를 빌려 쓰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   *   *




    그러나 사족으로 시작하는 글을 난 참으로 좋아한다. 놀랍게도 타인의 경험은 공유될 수 있다. 완전히 포개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건 사사키의 말마따나 ‘미쳐버리는’ 일이 될 것이고, 나 역시 그런 신화적 일은 보통 도래하지 않는다 생각한다) 우리는 타인과의 공유, 그녀/그의 어깨 위에 손을 걸치는 행위를 통해 하나의 사유 전체상에 접근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발견한다. 사사키는 잡담을 하듯 시작하여 나를 끌어당겼다. 많은 이들이 나와 비슷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부득이한 고백이라며 쏟아놓은 경험담이 놀랍도록 우스꽝스럽기 때문이다. 정보를 차단하는 무모한 일로 그는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까.


    반대로 생각해보면 부끄러울 일일 수밖에 없다. 그는 전문가와 지식인을 비판하는데, 그 두 부류 모두에 나는 들어갈 수가 없다. 대신 그런 행세를 하려고 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오늘은 이걸 읽고, 내일은 저걸 보고, 그 다음 날에는 뭘 하고. 이런 계획은 분명 강박적 설계자가 주변 눈치를 보며 빠르게 적고 수정하길 반복한 것이었다. 이 말이 지금 박혀 있다. “이런 환경에서 무엇이 단련되겠습니까?”(21쪽) 아, 단련이었던 것이다! 정보(명령)를 향하는 전문가와 지식인이 부러워 그들처럼 행세하려다 내가 놓쳐버린 것은 다름 아닌 단련이었던 것이다. 군대에서 꼴사나운 상급자의 명령을 듣는 건 그렇게나 싫어했던 수 년 전의 내가 그토록 많은 정보들을 배워오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정보가 명령이라는 걸 눈치 채지 못한 꼴이라니! 아니, 변론을 위해 약간의 정확성을 기해보자면 눈치를 챈 적은 있었다. 문제는 그 순간이 별로 대단치 않았다는 것. 난 정보의 부하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불안하고, 잘 모르겠고, 늘 두렵긴 했어도. 그럭저럭 잘 지내오지 않았던가. 라캉을 소환하는 사사키의 말을 이제는 이해한다. 팔루스적 향락. ‘이런, 맙소사.’ 나는 영락없는 페티시즘 환자였다. 사사키는 그런 변태적 기질에서 탈출하려고 몸부림쳤던 자고. 이 팔루스적 사회에서, 그런 까닭에 그는 무시당하는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한때 무엇이었는가? 니체가 말한 ‘철학자’였는가? 아니, 난 그런 어려운 말을 소화하려고 하지는 않겠다. ‘철학’이라는 단어보다는, 그래, ‘잉태’와 ‘임신’과 ‘수태’와 이런 은유적인 말이 오히려 실제적이다. 그러고 보니 사사키가 『야전과 영원(夜戦と永遠)』에서 펼쳐놓은 라캉의 ‘여성의 향락’과 ‘신비주의자’와 그들의 ‘씀’이 바로 내 앞으로 소환된다. 하나의 모습으로, 그러나 여럿이 뒤죽박죽 된 모습으로. 하지만 그것은 분명한 하나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나는 사사키가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형태가, 공간이, 아니 그보다는 시공이 잠깐이나마 눈에 보였다. 그는 무서운 사람이다. 세계를 다시 낳는다니. 대체 어쩌다 그 지경이 된 것일까?


    “읽었다기보다 읽고 말았습니다.”(35~36쪽) 미에 도달하게 되는 순간을 그는 우연으로 묘사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실재계와의 조우는 그야말로 우연이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외상의 상흔을 남기니까. 어려운 라캉 속에서도 이것만큼은 건져왔다. 내가 장하다. 그러나 그게 어쨌다는 건가? 사사키는 그걸 행하려고 했고, 그 자신이 라캉을 용기 있는 사람으로 일부 칭찬하는 순간 스스로를 칭찬하고 있었음을 지금 나는 알겠으나, 정작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처럼 정보에 관한 걸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그처럼 해본 일이 하나도 없다는 뜻에서, 또 하나의 자책은 불가피하다.


    읽는다는 것이, 혹은 읽게 되어버린 그 상황부터 시작되는 모습이 광기에 가깝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다행이도 내게는 그런 책들이 있었다. 읽고 나니 미쳐버릴 것 같아서 잠을 설치고 새벽의 기묘한 도래를 몇 번이고 경험했었다. 매번 느낌이 다르니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을 뿐이다. 예를 굳이 들어볼까. 보리슬라프 페키치의 『기적의 시대(원제 : Vreme čuda)』, 막스 피카르트의 위의 책,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원제 : Le città invisibili)』,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원제 : Siddhartha)』, 이런 것들 뒤에서 나는 늘 읽는 것의 위험을, 독서의 공포를 느꼈다. 두말할 것 없이 다시 읽고 싶은 책이다. 하지만 섣불리 재독할 정도로 용감하지는 않다.


    나의 비겁함은 당당하다. 원래 그랬던 건 아니고, 겨우 이제 와서야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나A는 나 자신이 비겁하다는 걸 언제나 숨겨야 한다며 남에게 보여줄 글을 쓰고 그렇게 조련된 글을 읽는다. 나B는 그런 나를 질책하며 솔직해지라고 말한다. 이렇게 둘만 살고 있는 나에게, 고립된 섬에게, 사사키가 버지니아 울프를 경유해 『로빈슨 크루소』를 말하며 상기시킨 그 무주공산에, 나는 이 책을 제 3자로 들여놓은 것이다. 그래도 됐던 것일까? 잘 모르겠다. 이제 와서 무슨 새삼스레. 여하튼 그러자 이 책이 선언한다. 읽기는 원래 무서운 일이니 겁내는 건 비정상이 아니다. 그러면서 한 문장 더 뻗어나간다. 그러나 그 선언은 이해하면 미쳐버릴 것 같은 두려움과 기껏 정보로 환원된 걸 읽는 것 사이에서, 즉 도망가기와 명령 수용하기 사이에서 무슨 쓸데없는 고민을 했느냐고, 질문을 던진다. 물론 나는 유구무언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 비겁함을 입간판처럼 가지고 다닐 것인가? 제 3자의 선언에도, 내게는 법과 같은 말로 들린 그 망치 소리의 분절들에도, 그럼에도 나는 저항한다. 프로이트가 그랬던 것처럼, 제임스 조이스가 그랬던 것처럼, 버지니아 울프가 그랬던 것처럼. [문학]하는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읽고 쓴다. 시도는 간헐적일지 몰라도 범접하고자 하는 마음은 부단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서재에는 책이 한 가득이다. 책 위에 소복이 쌓인 먼지를 보면서 나는 그 먼지를 털어낼 날을 고대한다. 다소 머뭇거리며. 그렇다. 제 3자의 선언은, 이 책의 위안은, 그래서 읽지 말라는 게 아니다. 어떻게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감히 종료를 선언하는 말이라 오독할 수 있는가? 성급한 한 마디. 이 책은 [문학]하라는 말을 담고 있는 또 하나의 [문학]이다.


    대체 [문학]은 뭔가? 읽고 쓰는 모든 것이다. 그 의미가 literary로 좁아지는 일련의 과정을 사사키가 축약해서 쉽게 설명하고 있는데, 그 단어의 틀을 부술 필요가 있다. 또 하나 부숴야 할 틀은 [읽음-씀]의 한정된, 아주 단순한 언어지시적 의미일 것이다. 당연한 말이라 내가 부연할 입장은 아니라 생각한다. 쓰는 것이란 세계를 바꾸는 것이라고 누누이 지적하지 않았던가. 긴 책 『야전과 영원』은 에둘러 그 말을 한 책이고, 이 지점에서 보건대 『잘라라, 그 기도하는 손을』은 바로 사사키의 그 체험을 담은 책이리라. 그러면 궁금해진다. 그는 [문학]한 자이며, [문학]을 지향하는 자다. 변혁하는 자이며, ‘변혁된’ 자다. 완성체이니 뭐니 하는 유치한 지적은 삼간다. 이미 하루가 저문 까닭이다.




*   *   *




    사사키는 2010년 6월의 어느 날이 저물어 조용해졌다는데, 지금 여기는 맹추위로 동파 방지와 외출 자제를 권하는 보도가 연이어지는 한복판이다. 오늘은 외출을 안 했다. 착한 주민이고, 하루를 성실한 독자로 살았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읽고 쓰는 것에 대해 비춰볼 일련의 체험들이 적은 것도 아니고, 생각도 해본 바도 있는데. 변혁이라는 것은 내가 접해보지 못한, 현전할 거라 기대하지 않는, 혹은 상상 속의 개념이라 묵살하는 무실체의 대상이었다. 그랬었다. 그런데 그것을 과연 언젠가 ‘존재’라 부를 수 있을까. 마무리하자고 하니 나도 덩달아 접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밑으로 깔린, 얄팍한 지층들보다 더 깊은 지하로 꿈틀대며 들어가는 그 뜨거운 모든 것들에 대하여는, 도무지 생각을 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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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불감증 - 유동적 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너무나도 소중한 감수성에 관하여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2016년 1월 19일



    작년 내게 최고의 영화는 <시카리오(원제 : Sicario)>였다. ‘최고’는 연출기법과 배우의 연기와, 그런 것들이 준 의미가 아니었다. 통제하고자 하는 측이 허용한 어마어마한 폭력과 그를 둘러싼 비리, 상부의 결정, ‘늑대들의 땅’에 비유된 현실의 얽히고설킨 배경 역시 오랜 뒷맛으로 남지 못했다. 오히려 감독이 의도한 마지막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총격이 오가는 시내의 소음을 뒤로 하고 아이들은 다시 축구 경기를 시작하며, 이를 학부모들은 무심히 지켜본다. 폭력은 자신에게만 찾아오지 않으면 된다. 타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렇게 총알은 유령이 되어 도시를 날아다닌다. 우리의 불감증을 조작하는, 이미 인간 안에 심어져 있는 화약통에 불을 붙이는 모든 것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든 저항해봐야 한다. 방법을 잘 모르겠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그 기대로 이 책을 읽었다.


    지그문트 바우만과는 2년 여 만에 다시 만났다. 유동과 액체는 그의 상징이다. 이 단어를 둘러싼 멀미날 것 같은 일상의 ‘뭉글뭉글함’만 기억한다면 어느 독자든 그를 쉽게 소환할 수 있다. 그런 일상을 못 느낀다면 얘기는 다르고. 아, 한 가지 기억해낸 것이 있다. 그의 긴 문장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적응을 하지 못했다면 『모두스 비벤디』는 물론이고, 이제부터 말할 책 『도덕적 불감증(원제 : Moral Blindness)』은 덤비지 못할 복잡한 미로일 것이다. 중문들로 뒤덮인 원문을 고생하며 상대하는 역자의 모습이 얼핏 그려지기도 한다. 여기에다 노학자를 상대하는 혈기왕성한 레오니다스 돈스키스의 담화마저 중문을 쏟아낸다.


    감안해야 할 점이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독자들에게는 적응이 문제가 되는 책이긴 하다. 하지만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사실 그 가치를 허투루 말하는 건 잘못이다. 결국 ‘그 이야기’를 하는 인문학과 사회비판에 싫증을 내는 이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럽겠지만 이렇게 말해야겠는데, 이 책 역시 그런 결말을 내린다. 하지만 중간의 담화를 뛰어넘는(무시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시카리오>의 불감증이 시각적인 것이라면, 방금 언급한 우는 도덕적 불감증에 사로잡혀 거울을 보지 않는, 내적인 불화, 혹은 소비주의적 환멸에 지나지 않을 테니.





*   *   *




    다행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하다. 악마는 없다. 특히 <콘스탄틴>, <애나벨>, <인시디어스>처럼 수도 없이 소비된 악마, 종교적 이름의 세속적 악마들은 없다. 강력한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일부의 경험으로 제한되는 ‘악의 체험’은 이 시대에 부단히 가공되고 있다. 재미있긴 하다. 대체로 실화를 바탕으로 하기에 이런 중세적인 악마는 최첨단 과학의 도움을 받아 밝혀지는 구조를 가져야만 하고, 그래서 재밌다. 다행이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는 건, 그런 ‘보이는 악마’는 허구임이 밝혀졌고 그 대신 ‘민영화된 악마’, ‘허약한 악마’가 우리 주위에 있다는 것은 사실로 밝혀진 까닭이다.


    아이히만에서 조우한 돈스키스와 바우만이 역사(기억)의 조작과 탈도덕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그 중간을 건너뛰고 보면 다소 비약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저 둘은 분명한 관련이 있다. 아이히만. 그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일 악마와 같은 사람이 원래 아니었다. 그는 건강한 사람에게도 도덕적 광기가 불어 닥칠 수 있는 기이한 현상을 환기시킨 수많은 사례 중 하나다. 두 학자는 묻는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서 제시되는 게 바로 ‘기억 조작’이다. 우리가 온전치 못한 기억을 추억하며 사는 건 당연하다. 망각은 축복이기도 하고. 문제는 이런 차원의 기억이 아니라, 역사와 정체성에 관한 기억이 조작되어 바우만이 우려한 것처럼 논리와 우선순위가 떨어져 나간 ‘그릇’ 정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그릇이란 무엇인가? 바로 정체성의 오락화. 호모폴리티쿠스의 ‘호모루덴스’화다. 이 표현은 무섭다. “악마가 사는 복마전의 현관에 도달”(61쪽)했다는 바우만의 진단. 그 조작의 사례로 그는 팔레스타인을 상대하는 이스라엘의 폭력을 든다. 잊지 말자. 그는 유대인이다. 유대인인 그가 “먼저 공격하는 자가 정상에 선다는, 그리고 그런 자가 계속 정상에 있으면 처벌받지 않는다는”(66쪽) 것마저 배워버린 이스라엘의 통치자들과 그에 동조하는 세력을 비판한다. 홀로코스트에서 ‘복수’를 배운 그들을.


    이렇게 연쇄 작용이 일어난다. 누구에겐가 들었다. 정치는 누가 먼저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가의 문제라고. 어차피 자신도 꼬리를 물릴 것이고 그렇게 물고 물린 둘은 빙글빙글 돌며 역사의 춤을 출 것이다. 여기에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유치한 논쟁은 춤사위를 북돋는 훌륭한 장단이 된다. 돈스키스는 그 관계를 해체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무대에서 우리가 보는 건 지속적인 자극이다. 정치적 추문이다. Yellow한 문구들이다. 사회적이고 정치적 감각의 후퇴다. 추문을 생산하는 건 스타를 만드는 것과 같다. 둘은 베를루스코니를 말했지만 우리는 트럼프를 보고 있지 않은가. 정치적 스타와 영웅이 TV에 나와 상대를 언어로 가격하고 선동하면, 그럴수록 우린 ‘탈도덕화’된다. 그들이 겨냥하는 상대는 창조된 허구인 타자들이고, 남는 건 그 타자들이 교묘하게 타격을 받는 가학적인 말이다. 토론, 그런 건 없다. 우린 그런 장면을 싫어한다. 너무 박박 긁어 생채기가 생긴다. 그리고 학자들의 지혜로운 말을 그 위에 바른다.


    우리가 탈도덕화되는 또 다른 이유는 속도사회다. 이 용어는 이제 별로 낯설지 않다. 생각할 겨를이 없는 시대다. 그러니 도덕적 판단에 따른 오명을 두려워해 자신에게서 그 짐을 덜어버린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결론을 내리긴 어려울 것 같군요.”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슬쩍 벗어나려고 한다. 대신 오명의 고통이 없는 어딘가가 가상으로 마련된다. 탈도덕의 공간. 이건 우리의 양심 문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많은 정보가 한 개인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밀려오는 쓰나미 현상이,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소득불평등 현상이 우리에게 탈도덕화의 유혹을 쏟아 붓는다.


    빠르다. 기억이 사라져버린다. 조작되기 쉽다. 돈스키스는 대학을 바로 그런 시대에야말로 유지해야 할 공간으로 본다. 근대적 감수성을 수호할 장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의 조국 리투아니아도 우리의 사정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이 문제는 제 1장과 제 4장에서 수시로 교차된다. 한편 속도사회에서 바우만은 언어를 보호하려고 시도한다. “황급한 삶과 순간의 폭정의 첫 번째 피해자는 언어”(85쪽)라고 확실히 말한다. 한 번에 140개 이상의 문자는 허용하지 않는 특정 공간에 한해서만 생각해볼 문제가 아니다.


    나 역시 바우만의 궤에 포개놓을 의견이 많다. 영화 100자평, 책 100자평, 나는 이런 짧은 문장들로 오가는 ‘인스턴트적’인 담론 현상을 결코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짧고 간결해서 시크한 멋까지 풍기는, 흡사 아포리즘을 추종하는 낭만적 문화와도 겹친다 할 수 있는 이런 현상 속에서, 단편적이고 순간적인 것의 전문가 행세는 두 학자가 말한 기억조작의 위험에서 단 하나도 자유롭지 않다. 이는 수많은 말들 속에서 홀로 떨어져 있으며 정치적인 연루와 극소량의 자유를 유지하는 ‘유랑하는 학자’, 아니 ‘애호가(딜레탕트)’들을 옹호하는 바우만의 다소 비관적이고 소극적인 발언과 닿는다. 사견이나 나는 이 대목에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가 떠올랐다. 물론 어느 정도의 비관은 불가피하다고 봐야 할까. 바우만은 이런 표현을 몇 군데에서 썼다. “강의 다리 밑으로 많은 물이 흘렀다.”(125쪽) 무색하다는 말이리라.




*   *   *




    정치에 대한 맹비난은 돈스키스 쪽에서, 그리고 저항에 대한 비판은 바우만 쪽에서 나온다. 두 논조가 제 2장의 씨줄과 날줄이다. 기술이 정치를 앞질렀다는 돈스키스의 말에 동의한다. 바우만처럼. 이 말은 기술에 의존하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다는 뜻이고, 굳이 트위터로 온갖 공방을 일삼는 정치인들의 “나 여기 있어.” 발언들을 예로 들 필요도 없다. 여기에다 소비되는 정치까지 붙여놓으면 우리 시대는 두 학자의 말마따나 진정 소비와 온라인의 시대다. 그래도 희망은 찾아봐야 하니 (소비에서는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으므로) 바우만은 인터넷 공간의 혁명성, 우리가 아랍의 봄 사태로 새삼 주목했었던 푸르른 희망의 이름을 들여다본다. 아쉽지만 그는 줄곧 비관적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바우만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대상이 비단 인터넷에 한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저항을, 점거를, 타파를 겨냥한다. 독재자를 몰아낼 수 있다고 하자. 그리고 실제 달성된 바가 있다. 20세기의 유명했던 독재자들 중 상징적으로 축출된 이들. 사살된 자도 있었다. 그렇게 보면 시리아는 참극의 미완이다. 여하튼 이렇게 ‘독재자 없는 정권’을 향한 점거가 성공한다고 해도 그 이후의 건설에 대해서 점거와 저항과 타파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여기에 문제가 하나 더 붙는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정말 무섭고도 완벽에 가까운 이유는 분명하다. 아무리 많은 반대도 대체로 흡수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속도사회에 산다. 빨리 잊힌다. 감정이 먼저 소멸한다. 콘래드의 ‘바다’와 카네티의 ‘바다’, 그 군중의 매력과 힘이 사람들을 똘똘 뭉친다고 하더라도 다음 장면은 영화 <미스트>와도 같다. 안개가 걷혀야 보이는 바로 옆이 군중들에게 현전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정권은 바로 그 점을 간파하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반드시 저항하고 상대해야 하는 정치적 현상과 특정 정치인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념과 사상에 따라 다르긴 할 것이지만, 정치는 늘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둔다. 그렇다면 정치인들의 저 “비생산적인 충돌”(163쪽)에, 좌우 진영의 화해 불가능한 싸움에 우리가 브레이크를 걸 순 없는가? 돈스키스가 묻는다. 과연 누가 우릴 대변해주는가? 권력 대행자의 미래는 무엇인가? 하지만 자답으로 돌아가면서 사회운동의 가능성을 언급할 뿐, 즉 대의제의 의미를 확고히 하라고 조언할 뿐 딱히 내려지는 답은 없다. 나는 그 사이에서 잠깐의 머뭇거림을 본 것 같다. 민주주의는 무섭다. 소비주의와 결합되어 이제 누가 나를 대변하는지 물을 수 없는, 그래서 투표권 거부의 충동마저 느끼는.




*   *   *




    사실 챕터 제목별로 딱 분간되는 책이 아니다. 공포, 정치, 감수성 등의 이름이 여기저기 매듭지어 있다. 정확히 나뉘어져 있으리라 기대해서도 안 되는 책이긴 하다. 나이 지긋한 바우만과 열혈학자 돈스키스가 논하는 건 그 모든 것. 둥실둥실 떠다니는 보이지 않는 유령 같은 유동하는 세계니까. 그러나 그 유동성에는 우리의 무지와 무기력과 그 둘로 인한 굴욕감의 쓰라림이 짙게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그게 비단 우리만의 문제인가? 우리가 대표라고 뽑아놓은 정치인들은 문제해결법도 모르며(무지), 그걸 해결하려고 하지도 않고(무기력), 그로 인해 우리에게 실망감(굴욕)을 안겨준다. 그러니 우리는 불안해하지 않으려고 그 무한이동의 자유, 이리저리 흔들림의 자유를 포기한다. 공포를 무시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우리가 기대하던 정치는 상업과 손을 잡고 그 공포를 밭에다 뿌려버린다. 우린 열매를 소비하며 풍작을 말한다. 이상한 풍작이다. 먹을 것은 참 많은데 소통이 위축되어 자기 자신을 지갑 속에 넣고 꺼내지 않는다. 이러니 상실된 균형이라는 과제를 누가 바로 잡을 수 있을까? 문제는 더 있다. 국가는 씨를 뿌려놓고 시장에게 맡기며 알아서 하라고 한다. 우리에게 붙어버린 공포의 그림자는 우리가 알아서 씻어내야 한다. 바우만의 말을 빌려놓는다. “사회적 지위의 심각한 허약성은 오늘날 사적인 문제로,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자원을 이용해 처리하고 극복할 문제로 재정의 되고 있다.”(189쪽)


    한편 국가가 이러한 방기 탓에 스스로 폐점하게 된다는 건 별로 놀라운 귀결도 아니다. 우린 국가의 무능을 묻는다. 그렇게나 기업과 시장에 목을 매면서도, 그 사이에 정작 ‘우리’에게는 별다른 관심도 보이지 않으면서, 기업인의 사면과 낙수 현상을 가증스레 말하면서도, 정작 그들은 상황을 호전시킬 수가 없다. 나는 투표하지 않겠다고 하루를 집에서 쉬는, 그냥 직장에서 일하는, 거리를 산책하는 이들에게 무책임을 되물을 정도로 정당과 부당의 확단을 내릴 수 없다. 이런 유보 상태가 겨냥하는 대상은 분명하지만.


    여기서 다시 돈스키스는 기억의 조작과 상실을 불러온다. 페이스북 현상을 말하면서 말이다. 참여 욕구가 늘어 그만큼 언어는 남발되고, 바우만의 우려처럼 언어는 피를 보면서까지 “설득력 있는 피해자”(217쪽)를 양산한다. 그런 말이 시청률의 우위를 점하며 ‘좋아요♡’를 얻는다. 여기에 들지 못하면 그건 허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남발되는 언어는 신중하게 배치되고 마름질된 언어만큼이나 왜곡된다. ‘좀비의 언어’라고 하면 될까. 자기가 살아 있는, 피가 도는 말이라 주장하는 창백한 얼굴의. 바우만은 인터넷의 혁명 가능성을 논하면서 현장의 한계까지 나아갔고, 이 지점에서 돈스키스는 순식간에 생겼다가 해체되는 시뮬라시옹의 공간, 그 깨져버린, 점묘적인, 어지러운 공간의 폐해마저 비판한다. 왜곡되는 기억과 상실되는 감정을. 그리하여 그토록 열광하며 반긴 아랍의 봄 앞에서 서양은 왜 그렇게나 무감각했는지를 비판할 수 있다. 어디에 우리의 실체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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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어가는 대학을 논하는 제 4장은 동떨어진 듯 시작하지만 실은 소비주의 사회, 그리고 매체만능주의 사회와 닿아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돈스키스는 영국의 예로 대처 이후 변화된, 죽어가는 대학을 말한다. 바우만은 그걸 ‘대처 시대 이후’로 정정하고자 한다. 긍정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민영화로 국회 쓰레기 대란까지 겪은 대처는 그에 관해서는 거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은 오늘날을 하나 예로 들어도 된다. 2008년 금융 위기 때에 영국 대학들이 입은 타격은 엄청났고, 현지에서는 합병 이야기가 오가면서 대학이 더 기능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무시무시한 수준의 압박을 받았다. 이는 두 학자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둘은 우리가 그 사태의 피해자인 것처럼만 생각하는 기만적 자세를 비판하며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건 우리가 초래한 사태였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학이 소비의 예외 대상인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그래야만 한다고 떳떳하게 말하고 다니는 건 위선이 아닌가? 우리가 화약통을 끌어다놓고 시기적절한 때에 터졌다고 봐야 옳다.


    나는 인문학을 공부하고 국문학을 전공한 까닭에 사회 나가기 직전인 지금 이런 말을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듣는다. 그거 해서 뭐 먹고 살 거냐고. 동기들 중에는 경영 전공으로 활로를 찾은 이들이 많다. 그들은 포기해야 할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한, 적어도 大學의 의미를 갈구해본 적이 있는 이들이었다. 많은 대학생들이 맹목적으로 그 추세를 따라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건 큰 무지에서 비롯된다. 아직 대학은 대학이 해야 할 일을 두고 아예 손을 놓아버리진 않았다. 아슬아슬한 줄타기 중인 건 맞지만. 그래서 수호해야 할 의미의 기치를 내건 동문, 교수진, 학우들의 저항이 있었고, 필자 동생의 모교인 한국예술종합학교 같은 특수한 기관에서는 기능주의화에 반대하는 운동이 있었다. 돈스키스를 보면 그게 리투아니아에서도 분명한 문제로 제시되는 듯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든 생각 중 하나는 저 두 학자가 한국 사회를 분석하면 동구의 문제이니 리투아니아의 문제이니 하는 지역적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세계적인 문제 중 하나로 확장해서 해석하진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런 진단을 내릴 것이다. 개그맨 유세윤 씨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선택을 머뭇거리는 패널에게 던진 말처럼 여기는 ‘최강’ 자유주의 국가. 진중권, 홍세화, 강준만, 박노자, 그리고 최근으로 보면 다니엘 튜더와 같은 비판적 필진들은 『도덕적 불감증』과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지 않고, 나는 그것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정치적 세태를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나라에게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초보적 생각도 바우만의 말처럼 환멸과 냉담에 젖은 채 사회에 들어갈 유동적 한 세대, 젊은 세대의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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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원제 : Der Untergang des Abendlandes)』을 둘러싼 두 학자의 담화에 앞서 생각난 건 브렉시트(Brexit)였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놓고 영국민의 53% 정도가 탈퇴 입장을 표명했다는 한 여론조사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유럽에서 가속화되는 문제다. 유럽연합에서 탈퇴를 하든, 아니면 한 국가에서 한 민족이 영토를 가진 주권국가로 분리·독립을 선언하려고 하든, 유럽은 분명 통합의 기치를 내걸며 지난 반세기의 얼룩을 함께 치유하고자 했던 움직임과는 정반대의 동향 속에 있다. 우린 경제가 어려우면 나라는 쪼개지고 극우인종주의가 득세한다는 걸 안다. 게다가 지금 상황은, 즉 바우만이 말한 ‘포스트-베스트팔렌 시대’의 민족국가 유령이 계속 떠도는 상황은 국가의 무능과 소멸이 이야기되는 추세에 있다. 종말과 멸망은 없다고 이야기하는 측의 논지도, 즉 형태론에 반하는 논지도 분명 이해가 되지만 저 두 단어가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슈펭글러가 다시 언급된 것이다. 돈스키스가 지금 상황에다 포개어놓은 서구의 몰락은 교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도 같다.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하는 건, ‘문명 유기체론’ 정도로 요약될 슈펭글러의 저 단어는 WWⅠ 이후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문화는 서로 교착이 불가능하다는, 일종의 인종주의와 맞닿는 단어라는 거다. 그 상황이 지금 유럽에 도래했다는 것이 바로 돈스키스의 논점이다. 왜 그가 디스토피아 소설의 대표작들을 이 책에서 내내 언급하며 그 망조(亡兆)의 분위기를 구태의연하게 반복적으로 상기시킨 것인지는 사실 ‘서구의 몰락’에 와서야 온전히 이해될 수 있으리라. 그가 “반자유주의적인 새벽”(304쪽)이라 부른, 하지만 이미 한 번 겪었던 참상의 새벽이 다시 왔다. 유럽은 지금 극우주의가 득세하고 있다. 서서히 나온 것이 아니라, 때를 그들이 마침내 만난 것이다. 그렇다면 바우만은?


    다행이도 이 노학자는 희망을 보자고 한다. 디스토피아의 제기 이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유토피아를 찾는 게 아니다. 그건 허황됨이고, 가식이며, 무엇보다도 기만이다! 바우만처럼 비관을 유지하되 역사의 사례에서 얻어낸 긍정적 교훈의 사례를 다시 한 번 우리가 실현할 수 있다는 positive의 분위기가, 그 마력에 휩싸인 상태가 필요하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그가 말하는 건 “민족·종교적으로 다양한 집단이 오랫동안 평화롭게 공존하면서도 생존을 위해 비슷하게 혼합된 환경”(333쪽)의 구축이다. 민족국가의 연합은 군사의 힘으로도, 경제의 힘으로도 달성된 바가 없다. 경제에 매달리면서 유럽연합이 실패를 거듭하는 이유다. 유럽이 수많은 민족의 장으로 그 역사를 반복해오며 배운 중요한 교훈은 바로 타자와의 공존법이다. 바우만은 그것이 유럽의 유산이라 말한다. 서구의 몰락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시종일관 비관의 뉘앙스를 풍기던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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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학자인 입장에서 명확히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현실의 원리주의 탓이라, 나는 생각한다. 대학에서 종교비교를 배우며 여러 분쟁들을 조사한 적이 있다. 장문의 과제는 체첸의 것을 고민해서 썼는데, 결국에는 평화로의 길을 제시해야 한다는 선에서 마무리되었지만 현실의 원리주의 문제는 일부 맹목적인 사람들에게 워낙 유착된 것이라 그걸 제거한 상태를 상상해보는 것조차 어렵다. 그리고 생각해본다. 원리주의는 선택하는 것일까? 선택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주체화의 과정이라 감히 말한다. 돈스키스는 어니스트 겔너의 용어 ‘모듈형 인간’을, 쉽게 말해 레고처럼 이것저것 갖다가 낄 수 있는 부품형 인간을 제시한다. 선택적 인간, 상호 교체의 가능성, 유혹과 쾌락과, 신뢰의 조작과, 무엇보다도 배반을. 그가 “작은 돈 후안들”(371쪽)이라 부른 유형의 인간들. 그리고 그들이 되지 말라는 충고가 이어진다.


    우리가 이상적인 무언가를 달성하지 못하게 되는 까닭은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품을 가져다가 끼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원리주의란 없다. 성경에 대한 원리주의는 간결한 진리를 추구하려는 일부 미국인들에게서 시작된, 독일의 비판적 성경 해석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하나의 선택이었다. 종교에 대한 원리주의는 서구-이슬람의 분명한 대립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이들이 권력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제조되었으며, 그들의 서구화와 경제적 고립 사이의 연관성에 강박적으로 집중한, 일부 사람들이 선택한 관념이었다. 그리고 이런 선택이야말로 무지와 무기력, 굴욕감이라는 ‘공포의 3요소’에서 뒤따른다.


    돈스키스는 분명하게 말한다. 모듈형 인간의 인간관계는 그른 것이며, 그것은 사랑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아는 태도와 타자의 모든 것을 다 알려고 하지 않는 태도에서 극복될 수 있다. 타인을 거치지 않는 ‘자기에의 앎’은 왜곡된다. 게다가 우린 첩보기관이 아니다. 사생활의 절멸과 소비주의로 촉발된 우리의 문제 해결은 돈스키스가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축약해버린 삶에의 태도로 해결된다. 진부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일부는. 그들 중 대부분은 사회와 세계에 대한, 무엇보다 삶에 대한 관심으로 이 책을 펼쳤을 것이므로 ‘작은 돈 후안’이라 부를 수는 없다. 나도 진부하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이 책에서 두 학자가 서로에게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했던 그 열렬함과 진지함으로. 하지만 그 비관에서 우린 이 책이 비판하는 세계로부터 거리를 둔다. 사랑? 진부해. 그러나 여기서 그치진 않으리라. 그 감수성이 한 번 움직이게 됐으니,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비관 속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우리에게 찾아올 또 한 번의 맥동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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