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치열한 무력을 -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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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일



    1월의 마지막 나흘이 흐르고, 2월의 첫 날은 하나의 닫음으로 시작한다. 한 사람의 글을 이렇게 몰아서 읽어본 건 칼비노 이후 처음이었다. 사사키. 그가 무슨 말을 반복하는지 알았다. 지우지 못한 의심도 많지만 그간의 오해들도 어느 정도 풀렸고, 내 안에 딱딱하게 자리 잡고 있던 간단한 생각들도 차츰 물러졌다. 언젠가 닦아 없앨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한다. 이 기대가 동맥경화를 막아주겠지. 직설적이면서도 화려하고 겸손마저 무기로 다루는 이 일본 작가는 확실히 내 생각의 주름 하나를 접어줬다. 그도 한 장의 종이가 실은 여러 번 접혀있는 것이라는 말을 했으니까, 비유해보자면 그렇다. 종이접기.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도 좋아하시는 종이접기. 뭔가를 진리라 하여 추구하면 그건 장미 모양이나 학 모양으로 나타날 것이다. 안에 적힌 문자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속살을 내어주는 일은 없으리라. 대학 때부터 줄곧 그런 생각으로 살았다.


    이 책, 사사키 아타루의 『이 치열한 무력을(この熾烈なる無力を)』은 그의 네 번째 아날렉타로 일본에서는 2012년에 출간됐다. 『야전과 영원』의 역자 안천 씨께서 수고해주셨으니 번역을 문제 삼는 이는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국내에 번역된 건 이 둘을 포함해 세 권이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언어를 위한 선언조의 변론이라 글의 온도가 꽤 높다. 사사키를 접할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권장되는 책이라고 하더라.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단, 두꺼운 책에 거리를 두지 않는 이들에 한해서 『야전과 영원』을 먼저 읽으라 말하고 싶다. 장황한 와중에도 할 말은 다 하니까. 비약이 적은 걸 읽어야 반복해서 읽었을 때 이해하기 쉬운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 둘과 비교하자면 『이 치열한 무력을』은 정말 중구난방이다. 아날렉타이니까 당연하다. 나머지 선집들도 번역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여하튼 이 책은 그냥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대담이 글보다 더 많다. 리듬 따라가기가 용이하다. 대담의 즉흥성이야말로 우리처럼 자극될 만한 말을 듣고 싶어 하는 독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기도 하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작가들과 작품, 그리고 일본어를 잘 모르니 종종 등장하는 농담의 분위기를 잘 이해할 수 없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이 책은 높은 수준의 대담들로 이뤄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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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이 무슨 자극을 받고 싶어 했는지를 공들여 찾아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이겠다. 어렵고 쉬움은 독자마다 다르겠으나, 일단 일본 문학을 풍부하게 알고 있는 이가 읽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사사키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일본어를 못 읽기 때문에 후루이 요시키치를 모르니 불쌍할 뿐이라고 농담 반 진담을 했다. 그 흉내를 내보자면, 이 책에 나온 소설을 일본어로 읽어본 독자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생각을 한다. 그게 잘 팔리는 비평책의 함정이긴 하지만. 여하튼 이 아날렉타에서 자유롭게 펼치며 논하고 있는 여러 작품들은 그 비평을 읽는 것만으로도 한 번 쯤 읽어보고 싶어진다.


    대학에서 김애란 씨와 대담을 가져본 경험이 있다. 이 공간 어딘가에 떨리던 그 소감을 옮겨놨는데, 역시 현장의 힘은 강했다. 소설의 뒷이야기도 흥미롭지만, 그보다는 머뭇거림과 주저 없음을 반복하며 던지던 그녀의 생각, 소설 관념, 철학, 삶, 세계 등, 그런 다채로운 투망이 너무 아름답게 보였다. 한 사람이 어떤 소설을 어떻게 썼는가를 우리가 물을 때는 겉으로야 “와, 정말 팬이에요!”라는 소녀/소년의 팬심이 겉에 발라져 있지만, 내심 궁금한 거다. 당신은 세상을 어떻게 보냐고. 그래서 비평은 한편으로는 그 작품을 읽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세상 보는 일의 고뇌, 진통, 그런 것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작품은 나중에 직접 읽어보면 되는 것이고, 우리는 비평에 참가한 사람을 비평을 통해 읽게 되는 것이다. 덕분에 다카하시 겐이치로, 오에 겐자부로, 후루이 요시키치의 작품을 부랴부랴 사서 꽂아두고 만족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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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키는 『야전과 영원』에서 맘껏 발휘했던 가공할 만한 공격력으로, 그 예의 화려한 단언으로 역사와 철학, 그리고 비평을 오고 간다. [달필+달변]인가보다. 사사키의 입이 풀리기 전에 말을 자르라는 사전 경고를 받은 사회자가 있다니. 여하튼 대담을 이끄는 쪽이든 따라가는 쪽이든 재치 있는 반론과 변론, 그리고 긴 역사 이야기를 주저 없이 펼치는데, 그 하나하나가 상대방 작가가 세상을 보는 눈, 그리고 작품에 대한 변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글을 쓰는 독자라면 그녀/그들이 공유하는 고민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엇나간 고민이 더 매력적일 수도 있다. 온도차로 찬 습기가 물이 되어 흐르고, 그 물이 단비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


    분명 자극이 되는 책이고, 그만큼 자극적이다. 온통 문제적 작가들만 초대해놓은 책이다.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책을 어제 새벽부터 잠깐씩 읽고 있는데, 서두부터 ‘문제’라는 분위기가 확 풍긴다. 문학과 삶에 대한 확실한 지론이 있거나 어딘가에 오랜 시간 기대어온 독자들에게는 다소 버거운 독서가 되겠지만, 나처럼 삶의 단 하나의 확신은 부유 밖에 없다며 때론 (기분 상) 높이 떴다가 낮게 가라안기도 하는 독자들에게는 자신의 고민을 확인할 기회다. 사실 독서라는 게 그렇기도 하다. 자신에게 다 맞는 이야기인 것 같으면 읽다가 내팽개치는 것이 책이고. 늘 차이를 염두에 둔다. 그리고 그 차이에서 ‘봐라, 저들도 저렇게 다투고 싸우며 글을 쓰지 않는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사키의 말마따나 ‘닫힌 회로’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쓰는 이가 아무래도 이 책을 더 깊게 읽을 가능성이 있다. 철학과 연애에 대한 단편이 조금 있지만 그건 선집에 껴놓은 정도이고, 어떤 글은 결론에 가서 푸시시 식어버리기도 한다. 『야전과 영원』을 읽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만능인 줄 알았는데. 뭐, 이런 생각. 여하튼 글을 고민한다는 것 앞에 사사키가 단언하며 당당하게 내놓는 것은 언어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역사의 변화다. 국내에 번역된 세 권의 책에서 내내 하는 말이 그거였다. 누군가는 문학이 뭘 하는가에 회의를 갖지만 정작 그 전선에서는, 창작의 참호에서는 그녀/그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 치열한 무력을』은 그걸 들여다보는 책이다. 그래도 글을 붙잡고 놓치는 않는다는, 조야한 끈기 정도는 있는 독자로서 나 역시 자극으로 남는 글들을 꾸물꾸물 챙겨 바구니에 담아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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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글들을 길게 적어 그걸 다 쓸 수는 없고, 일단 이 책이 사사키의 무슨 주장을 담고 있는지 살짝 빼내고 싶은 이들은 「변혁을 향해, 이 치열한 무력을」을 먼저 읽고 그 뒤에 나오는 「후루이 요시키치, 재난 이후의 영원」을 읽으면 좋겠다. 전자는 무력(武力)으로 오해하던 이 책의 사납고 뜨거운 제목이 실제로는 (표지에도 떡 하니 나와 있지만) 무력(無力)이었음을 확인해주는 글이다. 3·11을 말한다. 그 앞에서 무력해진 모든 것을 말한다. 그러나 무력함이 무의미함을 뜻하지는 않는다면서 파울 첼란, 에마뉘엘 레비나스, 브루노 슐츠의 이름이 줄지어 나온다. 무력했지만 승리하게 되는 역설을 증언한다. 정의와 문학과 예술이 한 통에 담긴다. 물론 그 ‘의미’라는 걸 곧 ‘힘’으로 이해해버리는 건 나의 오래된 습관. 읽고 나서도 의심이 지워지진 않았다. 체념, 하지만 그로부터 다시 역설로 피어나는 희망. 어차피 다 그런 패턴이었으니까, 사사키 뿐만 아니라.


    그래서 「후루이 요시키치, 재난 이후의 영원」을 이어 읽으면 좋다. 그의 작품집을 하나 사긴 했는데 번역된 게 한 권 밖에 없다. 사사키의 비평에 언급된 후루이의 초기 장편 3부작과 『산조부(山躁賦)』를 어디 큰 도서관에서 대여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여하튼, 사사키는 지면을 고려한다면서도 비교적 상세하게 후루이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촌락 공동체, 도시, 광기, 재결합, 치유로 이어지는 기묘한 이야기다. 어렵지 않게 분위기를 그려볼 수 있다. 요컨대 후루이는 생(生), 성(聖), 성(性)의 자의성을 말하는 작가다. 자의성이다. ‘당연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사사키가 『야전과 영원』에서 르장드르와 푸코를 빌려가며 그렇게나 반복했었다. 우리를 도박장에 밀어 넣으려고. 아무 근거 없음. 근거율과 인과율의 분리. 하지만 후루이는 그 자의성을 알면서 희망을 갖는다. 낙천이다. 왜 그것이 가능했을까? 후루이는 왜 “낙천은 불안과 잘 어울렸다.”(258쪽)라고 한 걸까? 죽음과 삶의 무근거성 앞에서 남는 건 오직 ‘살아남는 것을 사는 것’일 뿐이라는 걸, 공습과 재난의 시대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자의성의 텅 빈 공간을 낙천으로 채워 넣는다.


    사사키가 이 비평 초두에 후루이의 초기 작품 3부작과 후기 『산조부』사이의 단절을 찾아보겠노라 벼렸던 것은 바로 저 메시지, 즉 후루이의 ‘낙천’을 재난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일본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후루이는 공습과 재난과 전쟁의 주제를 집요하게 잡고 늘어진 작가. 이어지는 사사키와 후루이의 대담도 글을 쓰는 것에서 시작해 결국에는 대지진 이후의 ‘말’을 논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사사키는 후루이에게 독자들을 낙천으로 이끌어달라고 한다. 거칠고 공격적인 사사키도 ‘낙천’이라는 말을 쓰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게 빈 공간을 채운다. 그 채움의 작업은 언어를 지녔다는 자긍심으로 아주 치열하게 불타며 진행된다. 그러나 모두 태우지는 않는 역설.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 자긍심에 대한 사사키의 증언은 이 책 맨 마지막 대담에서 읽을 수 있다. 차이를 느끼며 각자 판단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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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쓰는 이들이 공감할 부분도 있다. 자극이 되는 것과는 좀 다르다. 「말이 태어나는 곳」은 제일 처음 등장하는 대담인데, 글을 쓰지 않는 이들이나 그에 대해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읽힐 지도 모르겠다. “말이 태어난다.”라는 말은 좀처럼 일상에 등장하는 법이 없다. 언어의 안팎을 나누는 서양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일상에서 신경 쓰는 일도 별로 없고. 달리 말하면, 글 쓰는 이들은 ‘말이 태어나는 곳’으로 향하며 명확하지 않은 고독으로 들어간다. 구체적인 청사진을 다 그려놓고 레고 조립하듯 쓰는 글이나 PR의 글은 제외한다. 대체 나는 언제 ‘글’이라는 걸 쓰는가?


    이 글만 해도 그렇다. 사사키의 말을 빌리자면, 이건 순전히 뭘 읽었으니까 쓴 것이다. 문제는 최초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이런 사소한 글도 그런데, 우물을 들여다보거나 우물 속에 들어가거나 혹은 우물을 부쉈다가 다시 만들기도 하고, 없는 우물을 저기 있지 않느냐며 박박 우기기도 하는, 온갖 다양한 기벽을 지닌 작가들은 과연 어떨까? 늘 궁금했다. 부끄럽지만 그렇게나 궁금해 하면서도 나는 그 누구의 말도 들어보려고 하지 않았다. 지독한 신비주의자 정도일까? 고민의 특권? 손 오그라드는 자기 감성? 지금 생각건대, 여러 작가들과의 대담 기회를 스르르 흘려보낸 것을 후회한다. 그만큼 뭘 읽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도 여전히 안개 속에 있으려고 하는, 이 자기두둔의 지독한 생명력은 참 경이로울 정도로 질기다. 그래서 이 대담에 수줍게 반가워한 것이다.


    「말이 태어나는 곳」에서 뚫어져라 들여다본 문장은 이거였다. 되읽다보면 아직도 찌릿한 구석이 있다. 글 앞의 공간에 걸려 있는 어떤 자물쇠가 모습을 갖춰가는 것 같은 상상도 했다. 열쇠는 저마다 있을 테고. “근원적인 발생 장소에 이끼처럼 생겨나 곰팡이처럼 피어나는 신들. 구마구스의 점균과 오리쿠치의 무스비가 포개지는 장소가 제겐 ‘말이 태어나는 곳’입니다.”(33쪽) 덕분에 미나가타 구마구스(南方熊楠)가 누구인지, 오리쿠치 시노부(折口信夫)가 누군지, 무스비(生靈)는 또 뭔지, 흥미로운 정보들을 얻기도 했다. 그리고 단 하나, ‘점균’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 나흘 내내. 말과 이미지가 섞인 것. 과정인 것. 삶과 죽음이 하나인 것. 암수의 구분이 없는 것. 소설이라 시작해놓고 점점 이상해져 몇 달이고 내팽개친 여러 글들 앞에서 느끼던 감정이 ‘점균’에서 하나로 모아졌다고 하면 될까. ‘근원에서 피어난 점균이라니!’ 몇 번이고 외쳐버린 것이었다. 그 탓에 이 대담에서 사사키가 뭔 말을 했는지 다 잊어버렸다.


    하나 더. 소설의 시작과 마무리를 고민하는, 이른바 ‘문창’의 창틀에 목을 매고 있는 이들에게는 반가울 고민이 「소설을 쓰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가 되는 모험이다」라는 긴 제목의 대담에 나온다. 놀랍게도 사사키는 철저한 무계획성으로 소설을 썼고, 꽤 좋은 평을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 무계획성은 하나하나 접어가는 치열함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중층적인 소설을 낳는다. 읽을 때마다 달리 느껴진다는 독서 경험을 말하는 게 아니다. 달리 ‘읽힐 수밖에 없는’ 소설. 그런 장치들은 분명 사사키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대담을 하며 나중에야 알게 된 거라고 빼지만.) “안이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마무리”(212쪽)를 거부한다는 사사키의 주장과 [문학]을 거부한다는 다카하시의 주장이 같은 선상에 있는 것도 재밌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아, 왜냐하면 열받았거든」은 대단원의 여부로 문학과 소설을 구분하는 다카하시의 논리, 일본 AV와 일본 근대문학의 공통점, ‘사랑하는 힘을 빼앗는’ 명령과 모자이크의 대비, 소세키의 작품 「명암」을 놓고 펼쳐지는 농담 등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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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키의 다른 번역본을 읽은 이라면 이 책에서도 그의 주장을 확인할 수 있다. 무서운 글을 쓰는 사람이다. 몇 번이고 그렇게 소개할 수 있다. 일본 사회도 그래서 그런 반응이었고, 폭발적인 관심은 극과 극으로 갈라졌다. 그가 얼마나 많은 변론을 했는지는 (사사키 자신이 소설의 세 가지 기원이라며 말했던 그 변론을!)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도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고, 국내 인문학계의 최전방에 있는 이들도 그를 하나의 현상으로 보고 주시 중이다.


    그의 이름이 뜨겁게 달아오른 이유는 하나다. 무력(無力)함 앞에 ‘치열함’이라는 엇나가버린, 전혀 짝이 맞지 않는 표현을 가져다놓았기 때문이다. 비문이다. 아니, ‘비어(非語)’라고 해야 하나? 이 억지스런 작업을 위해 사사키가 발휘하는 단언의 강도는 수많은 독자들을 뒤흔들어놓기에 충분할 정도로 셌다. 문체 자체에서도 “나는 세다.”라고 대놓고 드러내는 작가를 근래 읽어본 적이 있나 싶기도 하다. 사사키라면 이렇게 말했을까? 독자들이 그 치열함의 온도를 알았으면 된 거라고 했을까? 그간 그가 샀던 오해를 풀 변이 하나 있어 옮겨놓는다. “우리 사회는 실제로 법과 ‘법이 보증하는 권리’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말을 통해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어디까지나 이를 뜻하는 것이지 “언어의 마술적인 포에지에 의해 무한하게 비상하는 상상력”과 같은, 소설을 읽고 마치 마약이라도 한 듯 세계가 다르게 보인다고 감격하는 식의 쓸데없는 얘기가 전혀 아닙니다.”(371쪽)


    사사키는 “쓸데없는”이라는 표현을 바로 철회해버리지만 여기서 그는 세상의 작동원리인 말의 힘을 거듭 강조한다. 그걸로 쓰인 작품이 세상을 바꾼다는, 우리가 감상 삼아 쉽게 하는 일시적인 착각을 두둔하는 게 아니다. 여기서 틈이 벌어진다. 그가 자꾸 우리를 도박장으로 끌고 가 어디에 걸겠냐고 묻는 것, 그리고 자신은 어디에 걸겠다고 단언하는 것은 무력함을 무의미에서 탈출시키는 한 행위다. 그는 그 틈에서 활동하는 작가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틈’을 ‘뒤’로 바꿔 이해해도 좋다. 사사키의 이 책에도 거듭 반복된다. 헤겔이 예술의 종언을 선언한다. 우리에게는 극히 일부일 뿐인 그 예술을. 바로 그 예술이 타고 난 잿더미에서, 바로 ‘헤겔의 재’에서 보란 듯 소설이 득세하더라고 그는 말한다. 희망을 본다. 언어의 긍지와 말의 힘. 우리가 쉽게 잊는 것들이다. 여기에 그가 아직도 유용하다고 말하는 실러의 예술론까지 더한다면, 아니, 더해야하는데, 그렇게 되면 이야기는 문학의 효용론을 논하는 수준에서 완전히 이탈한다. 애당초 사사키의 논의에서는 ‘효용’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도 없었다. 논외로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예술이야말로 답이라 여기는 까닭이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은 이는 안다. 그 ‘말’이라는 것의 힘을 사사키가 어떻게 증언했는지.


    그걸 사실로 받아들이는 일이 환상처럼 느껴지는 지점에서 출발하는 어떤 여정이 있다. 읽기와 쓰기. 아, 이 교과서 제목 같은 단어들. 그리고 줄곧 생각해왔다. 그는 그걸 삶에 가져다붙인다. 철학이 학문으로 변질되어 삶에서 떨어져나간다. 그렇게 잃어버린 무엇을 기린다. 같은 맥락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가 살아 돌아온다면 사사키처럼 말을 할까, 이런 생각도 해봤다. 동사가 없는 이 책 제목에 알맞은 동사를 넣으시오. 문제가 앞에 주어진다면 나는 주저 없이 쓸 것이다. ‘당신에게.’ 그러고 보니, 나는 답을 잘 쓰는 학생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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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29일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 이어 짧은 이야기 하나가 더 실려 있었다. 「직소(直訴)」라는 제목의 단편으로 ‘유다의 고백’이라 번역되기도 한다. 그렇다. 유다에 대한 이야기다. 제사장과 장로들 앞에서 예수를 팔아넘기는 유다의 독백이다. 정신 사납게 쏟아지는 발언을 듣고 있으면 그의 표정이 그려진다. 경멸한다. 화를 낸다. 운다. 분노한다. 단념한다. 자기 자신도 모르겠다는 표정. 다시 오열. 웃음. 뭐 이런 걸, 30냥 따위. 그래도 받아두며 나는 장사치라는. 그리고 하하하, 깜빡했는데 제 이름은 유다. ‘유다’라는 이름만 들어도 발작할 이들을 위해 굳이 이렇게 말하겠는데, 이건 영지주의니 ‘유다의 사랑’이니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이 나오긴 한다. 그러나 그 단어는 「직소」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기이한 형태의 집착이다. 아무도 그걸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 부르는 순간 병자로 분류되겠지. 그리하여 진실은 오직 엇나간 채 모습을 드러낼 뿐이고. 들여다볼 일이다.


    보리슬라프 페키치의 『기적의 시대(Vreme čuda)』가 떠올라 ‘힌놈의 죽음’ 부분을 다시 읽었다. 두 작품을 나란히 놓는 건 무리다. 길이도 길이겠거니와 일단 다자이의 작품은 유다의 독백만을 다루므로 별다른 사건이 없다. 고발의 현장 자체다. 보리슬라프의 작품이 훨씬 복잡하고 극적이다.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뽑아내는 자기 고뇌, 죽음을 두려워하는 예수를 닦달하면서 반드시 예언을 성취시켜야만 한다고 느끼는 자기 강박, 유다-예수-야훼의 삼위일체를 선언할 거라고까지 말하는 거대한 목적성, 하지만 결국 “성서의 말씀의 올가미”(보리슬라프 페키치, 이윤기 옮김, 『기적의 시대』, 346쪽)가 목을 죄는 두려움에 이르는. 자살로 위장된 죽음까지. 파문이 일겠지만 이걸 영화로 만든다면 관객은 유다의 고뇌에 압도당하는 착각을 느낄 수도 있으리라, 이런 생각도 가능한.


    하지만 두 작품은 비슷한 선상에 있다. 같진 않다. ‘힌놈의 죽음’은 보리슬라프가 『기적의 시대』 말미에 이르러 예수 대신 키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결국 예수의 죽음이 없으니 구원도 없다는 도발적인 해석에 이르는 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유다는 자살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예수는, 유다가 닦아놓은 예언의 길을 따라가는, 아니, 따라가는 것조차 겁을 내는 그 예언자는 이 소설 이전에 지니고 있던 모든 권위를 잃어버린다. 그래서 번역을 맡은 이윤기 씨도 말미에 보리슬라프의 작품을 옹호했다. 이단이 아니라고. 다자이도 그렇게 봐야 한다. 그가 개신교 신자였고 성경에 무척이나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 그리고 일본이라는 종교 환경을 고려해봤을 때, 물론 보리슬라프보다는 일부 독자들의 단죄에 일격을 받을 가능성은 낮겠지만.


    나름의 글로 유다의 고백을 다시 써봤다.



*   *   *



    나는 유다. 내가 아니었으면 저 무능한 제자들과 함께 어딘가에서 객사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대는 세상의 적이자, 나의 스승, 주인으로 나이는 같다. 뒷바라지를 열심히 해줬는데도 고맙다는 기색이 적다. 이해는 한다. 하지만 서운하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내가 이리저리 변통해서 꿔다가 해낸 것이 아니더냐. “마술의 조수 노릇”(다자이 오사무, 김춘미 옮김, 「직소」, 『인간실격』, 143쪽)을 그렇게나 해줬는데. 하지만 그자는 아름답고, 나는 그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따라다니는 일에 득이 없는 줄 알면서도 떠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제자들이 다 떨어져나가도 좋다. 아니, 그 편이 좋겠다. 늙은 나의 부모님이 살고 있는, 밭도 있는 나의 집에 가서 그대의 어머니 마리아와 셋이 안락하게 지내는 것이 좋다. 그걸 꿈꿔왔다. 간절하게, 그대를 사랑하는 만큼. 천국이니 하느님이니 이스라엘의 왕이니, 이런 것들은 당초 믿지도 않았다. 거짓말쟁이. 하지만 아름다우니,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하지만 베다니의 시몬 네에서 한 짓은 무엇이었느냐. 마르타의 동생년, 그 마리아가 향유를 그대의 머리에서 발까지 붓는 무례를 범했음에도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발만 적신 걸로 되어 있다.) 오히려 두둔하다니. “추태의 극치”(다자이의 책, 149쪽), 그렇다, 그대는 베다니의 마리아를 사랑하는 것이었는가! 이 분노는 무엇인가. 나도 젊고 훌륭한 청년이다. 집 없고 돈 없는 제자 나부랭이들과는 다르다. 저년이, 마리아가 나한테서 그대를 빼앗아갔다. 아니, 그대가 내 여자를 뺏었다. 이 무슨 말인가. 모르겠다. 남은 것은 분노요, 또한 그대를 향한 사랑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그대의 모습은 참으로 초라했다. 길가에 있는 늙어빠진 당나귀에 올라탄 그대를 연민하면서, 나는 아름다울 때 내 손으로 잘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꽃을 꺾어버리는 일처럼. 간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보라! 신기하게도 군중들이 꼬여들었고, 저 우둔한 제자들은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울었다. 나 역시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성전에서 노기를 부리며 불쌍한 장사치들을 쫓아낸 것은 무어냐. 허세다. 그대는 제사장들에게 잡혀 죽을 생각으로 자포자기한 것이다. 드디어 미쳤구나. 그러니 내가 한 장사꾼에게 제사장과 장로들이 그대를 죽이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를 팔아 남기는 것이야말로 나의 임무라 생각한 건 당연했다. 이 사랑의 행동을 이해해주지 못해도 상관없다. “나는 영원히 남의 미움을 사리라.”(다자이의 책, 155쪽) 그래도 상관없기에 이 사랑, 참으로 위대하지 않은가.


    아, 최후의 만찬이 없었더라면. 후대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더라. 살과 피의 성스러운 이야기와, 그런 보잘것없는 것들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칭송하더라.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그보다는 그대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불쌍한 장면이야말로 성스러운 것이었거늘. 단, 그건 모두가 깨끗하면 좋을 것이라며 나를, 정확히 이 유다를 겨냥한 한 마디 말로 내 속의 분노를 다시 끄집어내기 전까지의 일을 일컫는 것이다.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변을 쏟아내지 않아도 됐겠지. 그리고 그대는 마지막 식사를 조용히 하더니 빵 한 덩어리를 내 입에, “개나 고양이한테 던져주듯이 한 덩어리의 빵 조각을 내 입에 쑤셔 넣고”(다자이의 책, 160쪽)는 보란 듯이 제자들 앞에서 쪽팔림을 주었다.


    이자들 앞에서 굽실거리며 30냥을 받아들고는 나 자신을 장사치라고, 유다라고 뒤늦게 소개한다. 군병들이 추궁하는 대로 나는 게쎄마니로 간다. 마지막 입맞춤을 하러.



*   *   *



    아름다움을 향한 기이한 사랑. 집착이다. 꽃을 꺾듯이, 아름다운 것을 제 것으로 하지 못할 바에야 제 손으로 꺾어 죽이는 무서운 사랑이다. 유다는 애당초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다른 제자들처럼 회의와 번뇌를 오고 가는 존경 따윈 없었다. 그래서 저 단편적인 사랑이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보리슬라프의 유다가 성서와 예언에만 매달린 나머지 나중에 가서는 기어이 자신을 삼위일체의 한편에 끼어 넣는 지경에 이르는 반면, 다자이의 유다는 오로지 사랑이다. 삶의 중심에 예수를, 그 아름다움을 세워두고 속으로 혼자 찌르고 베는 칼날 같은 사랑이다. 예수가 그걸 눈치 챘을까? 그랬다면 언제? 발을 닦였을 때? 아니, 그걸 모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게 아닌가? 반대로 그걸 유다만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제 사랑에 눈이 가려진 채, 모든 걸 자신의 식으로 해석하고 내뱉는 괴상한 고집이 독백의 주를 이루고 있으니까.


    다자이는 유다의 뒤늦은 자기소개 이후를 그리지 않는다. 게쎄마니로 가는 길에는 또 얼마나 떠들어댔을까. 군병들 중 하나가 유다의 방종을 두고 “자네, 입 좀 다물지. 지저귀는 새소리가 시끄럽다고 떠들더니, 자네가 딱 그 꼴이다.”라고 말했으리라. 그렇게 도착한 예언의 순간에 유다는 마지막 입맞춤을 하고,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보리슬라프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다자이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다만 유다의 이야기를 할 뿐. 이후 어떻게 되었겠는가, 유다는. 30냥을 바닥에 내팽개치면서 뒤늦은 후회를 했겠지. 오직 사랑할 뿐인 예수가 죽었으니, 이제 그에게는 무엇이 남았겠는가. 유다는 자살한다. 악마에 씌운 것도 아니고, 보리슬라프의 이야기 속에서처럼 제자들의 손에 이끌려 힌놈에서 자살로 위장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것도 아니다. 그 스스로가 충분히, 집착의 선로에서 저 아찔한 높이의 절벽 아래로 빠르게 사라져갔으리라 추측해보는 건 무리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 독백, 주절거림은 기이하리만치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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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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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28일





    세 장의 사진으로 열린, 그리고 마담의 증언으로 닫힌 한 남자의 삶이다. 눈이 사방으로 돌아가고 수많은 회로들이 끊임없이 그의, 요조의 몸 안에서 공포의 물질들을 옮기는 기이한 장면이 보인다. 언제부터 그가 그런 아이였는지는 알 수 없다. 갖가지 추측이 있지만 상관없다. 사실 ‘언제부터’라는 말도 상관없다. 수기는 불분명하게 시작한다.


    집에서는 익살로, 학교에서는 장난꾸러기이자 그럭저럭 공부 잘 하는 아이로 인기를 얻는다. 순전히 인간의 분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타인에게 웃음을 주는 것은 곧 속이는 것. 나 역시 인간이 두렵다. 일상에서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인간군(群)을 생각할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공포에 가깝다. 아니면 무시무시한 상상 즈음이려나? 그런데 요조는 그게 자기 자신을 극도로 해치는 지경까지 나아갔다. 화학 물질의 비정상적 활성화. 정상인지 비정상인지는 요조의 여러 고백으로 판단하기 어려워지지만 그가 유독 예민한 것은 사실이다. 그 예민함이 때론 진실을 보게 한다.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량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27쪽)


    그걸 보고 정면으로 반박하지 못하는 아이다. 그런 면이 훗날 여자에게 매력적으로 보였을 거라 말하지만, 그 주장은 다소 의심스럽다. 심지어 그가 잘 생겼다는 말조차 의심스럽다. 아니, 잘 생기긴 했지만 사진 속 그는 인간처럼 생기지 않았다니까. 여하튼 인간 사이를 오고 가는 미묘한 기류와 그것의 망각과, 이런 것들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그의 병증은 수시로 드러나고, 이 사람을 신뢰해도 되는가, 하는 질문 탓에 나는 수기를 읽는 내내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   *   *




    타향에 오니 연기가 더욱 쉬워졌지만 문제는 그 연기를 눈치 채는 인간들이 있더라는 것이었다. 다케이치. “부러 그랬지?”라는 그의 말 이후로 불안과 공포가 밀려왔다. 다행이도 요조는 소심하다. 죽이진 못하고 친구가 되는 길을 택한다. 그리고 첫 목표가 생겼다. 고흐의 그림을 보더니 “나도 그릴 거야. 도깨비 그림을 그릴 거야. 지옥의 말을 그릴 거야.”(40쪽)라고 선언한다. 인간군상을 그리겠다는 어린 의지가 완성한 그림은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의미에서 어린왕자가 스쳤다. 어른은 요조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림의 인연이 술, 담배, 창녀, 전당포, 좌익 사상으로 이어졌다. 요조가 도쿄의 바다에 잠겨버렸다. 화방에서 알게 된 여섯 살 연상의 호리키가 트렌드라며 이곳저곳을 데리고 가 거들먹거리며 소개해준다. 요조는 창녀에게서 ‘여자수행’이란 걸 한 탓에 여자들이 꼬이는 남자가 되고, 공산주의 독서회에 출입하다가 농담이 진담이 된 꼴이라더니 정말 행동대 대장이 되어 학업을 소홀히 하기까지 한다. 돈에 쪼들린다. 운동권에서 도망친 그에게 호의를 가져준 여자들은 여럿 있었다. 둘에게는 적당히 비위를 맞췄지만 긴자 카페의 여급 쓰네코는 다르다.


   쓰네코. 연상으로, 남편은 형무소에 있다. “주위에서 차가운 삭풍이 불고 낙엽만이 휘날리는 듯한, 완전히 고립된 느낌의 여자였습니다.”(61쪽) 그녀는 동류다. 불안함이 사라진다. 해방의 밤이다. 하지만 이것도 사라질 것이 아닌가. 상처 입기 전에 먼저 헤어지기로 한 요조, 이 남자는 그런 남자다. 만나지 않기로 작심 이후에도 속으로 혼자 부담스러워하고 그녀가 두려워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호리키를 대동한 만남을 계기로 (호리키가 그녀를 궁상맞은 여자로 취급했으므로) 그녀를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과연 그는 어떻게 했을까? 동류끼리 죽기로 한다. 놀이 수준에 지나지 않았던 그 말이 실행으로 옮겨진 결과는 참담하다. 가마쿠라 바다에서 요조는 살고, 그녀는 죽는다. (다자이의 경험과 같다.) 그녀를 위해서는 눈물을 흘리지만 차라리 죄인으로 포박 당한 기분이 좋다. 그러나 검찰청 취조 때에 한 말끔한 검사가 “진짜야?”라고 묻는 바람에 모든 것이 다시 비참해진다. 다케이치가 떠오른다.



*   *   *



    넙치(시부타)네 2층 삼 첩 짜리 방에 칩거하면서 이제는 하찮은 무명 만화가가 됐다. 갱생하라는 넙치의 말에 호리키 네로 간다고 거짓말을 해놓고 가출을 한다. 하지만 정말 호리키 네로 갈 수밖에 없다. 갈 곳이 아무 데도 없던 것이다. 그런 요조를 호리키는 한심하게 취급한다. 마침 호리키와 관계된 잡지사의 여자가 오고, 요조는 그 여자, 시즈코의 집에서 정부 같이 산다. 다섯 살 된 딸은 그를 ‘아빠’라 불러준다.


    자립하고 싶지만 갈 곳도 없다. 이 무렵 그는 ‘세상은 곧 개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조금씩 인색해지기 시작한다. 자신이 주변 사람들과 조금은 비슷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으리라. 샤를 크로의 시 속 두꺼비처럼. 방해한다면 돌아가리라, 생각하면서 외박도 하고 야비한 술꾼이 된다. 달리는 열차에 석탄을 때려 붓는 기관사. 하지만 그렇게 열차가 1년을 달리고 봄이 되니 두 모녀를 놔줘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가 하느님께 기도한다. 그 요조가! 두 모녀를 행복하게 해주소서. 누가 그를 말종이라 말할 수 있나.


    떠난 그가 다시 정부 행세를 한 것은 이제 당연하게 느껴진다. 필요에 따라 뻔뻔해지고 구색 맞출 수도 있다. “어제까지의 저 자신이 애처로워서 웃고 싶어졌을 만큼 저도 세상이라고 하는 것의 실체를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99쪽) 하지만 이 말에는 거짓이 섞여 있다. 여전히 인간을 두려워하는 그의 궁색한 변명 정도로 들린다. 유일한 낙이 손님에게 술을 얻어 마시는 것, 그리고 술을 마셔야 나오는 달변으로 이야기하는 것 정도다. ‘조시 이키다(情死, 살았다)’라는 필명으로 아동 잡지에서 음란 잡지에 이르는 곳에 만화를 그려 보낸다. 루바이야트의 시구를 붙인 것은 당연하다. 마시자. 그는 마시지 않으면 볼 수 없으며, 마신다 해도 제대로 볼 수 없으니, 대체 그는 어떤 인간의 쓸모를 갖고 있는가. 교바시 마담의 도움으로 여급 요시코와 결혼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가진 그가 호리키와 함께 “같은 수준의 개”(108쪽)로 전락해 여기저기 쏘다니는 건, 열차의 석탄이 전혀 식을 기색이 없던 까닭이리라. 한참 붓다보면 자신이 붓는 지도 모르는 것처럼.


    하지만 요조도 목소리는 낸다. 희극명사니 비극명사니 반의어니 이야기를 하다 죄와 법, 선과 악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 관계를 논한다. “인간이 멋대로 만들어낸 도덕”(113쪽)이라는 것이다. 그 날은 이상하리만치, 그리고 최초로 노기가 분출되었다. 당연 취기 때문이다. 여기서 눈치를 챌 수 있다.


    요조, 이 남자는 세상을 ‘죄’라는 단어로 본다. 자신의 죄가 있으므로 당당할 수 없다는 의식. 그런데 그가 언제부터 죄를 지니고 있었는가? 쓰네코가 죽고 자신만 살았을 때 팔목을 옥죄고 있던 수갑의 차가운 느낌에 대한 기억 이후로? 인간을 철저하게 속여 왔다는 그 익살의 경험 때문에? 종종 하느님을 소환하는 걸 보니, 혹 자신의 그런 기벽이 원죄와 닿아 있다고까지 생각하는 건 아닐까? 모른다. 죄가 그를 가두고 있는, 감시하고 있는 뭔가라는 건 분명하다. 그래서 요시코와 한 남자(만화 관련으로 집을 찾던 30세 전후의 상인)가 방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걸 보고도 자신은 ‘텍스트 속 남편’들과는 달리 요시코를 용서하고 자시고도 없다고 말한다. 그런 자신의 눈치를 계속 살필 수밖에 없는, 무구한 신뢰심을 지닌 요시코가 불쌍하기만 하다. 그래서 수면제를 털어 넣고 자살 기도를 했을 것이다. 3일 내내 잠만 자는 미수에 그쳤고, 그때 내뱉은 횡설수설이 그를 비극으로 몰고 가긴 했지만.


    여자 없는 곳에 가서 살 거라고? 이자가 드디어 돌았군. 아주 못 쓰게 되었어.




*   *   *





    큰 눈 내리던 날 밤, 도쿄의 어딘가에서 요조는 각혈을 한다. “여기는 어디의 샛길이지?”(123쪽)이라며 우는 그에게서, 빠져 나가고 싶은 욕망이 보인다. 하지만 항의할 수 없다. 이 세상 나의 모든 불행은 나의 죄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방자한 놈인가, 아니면 마음 약한 놈인가. 그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질문을 할 뿐, 여전히 세상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몸을 망치고, 그렇게 산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연민해준 여자는 약국 부인이었다. 다섯 살 때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못 쓰는 그녀는 남편이 술로 죽었고 의대생 아들도 같은 병으로 입원해 있다며 (시아버지도 중풍인데 아마 술 때문이었을까?) 요조에게 술 대신 차라리 모르핀을 주사하라 권한다. 차라리 그게 낫다며. 그렇게 요조는 모르핀 중독에 걸리고, “키스해줄게.”라든지 우는 척을 한다든지 해서 엄청난 빚을 지면서까지 얻어다 쓴다. 그리고 부인과 관계까지 맺는다. 모든 건 뒤늦은 후회다.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도 답장이 없자, 죽자고 결심한다. 그러나 마지막의 자살 시도는 애초부터 미수에 그치고 만다. 넙치의 “악마의 육감”(129쪽)이 발동했는지 호리키와 함께 둘이 찾아와서는 묻는다. 각혈했냐고. 호리키의 다정한 미소. 소름이 돋는다. 인간. 아, 인간. 둘은 요조를 정신병원에 보낸다. 드디어 돌아버린 그가 “죄인은커녕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것.”(131쪽)이다.


    정신병원. 죄인이 아닌 미치광이가 된 것으로 그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느낌을 받았을까? 누구에게? 병동에 들어간 이후로 이어지는 짧은 문장들에는 회한이라든가 억울함이라든가 하는 분위기는 없다. 인간실격.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지도 않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것은 수기이니까.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난 후에 적은 것이니까. 큰형은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려주고는 시골에서 요양할 것을 권한다. 아버지가 죽었다. 고뇌의 항아리가 비었다. 그러므로 고뇌할 능력도 없어졌다. 요조의 삶을 어렸을 때부터 완전히 꼬아버린 그 ‘능력’이 정신병원에 들어오자 사라졌다.


    지명 없는 곳의 허름한 시골집에서 60세 전후된 못 생긴 식모 테쓰와 살면서 그는 행복도 불행도 느끼지 못한다. 나이는 27세. 겉모습은 40이 넘은 듯. 수기의 말미에 이를수록 모든 건 다 지나가더라는 늙은이의 고백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맥이 없다. 그렇게 끝나는 이야기다.



*   *   *



    얼마간 나는 요조에게 깜빡 속아버린 것은 아닌가 싶었다. 후기는 서문에서 언급된 석 장의 사진과 세 권의 공책(요조의 수기)을 입수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나’의 이야기다. 짧다. 이 이야기는 요조를 일컬어 “하느님 같이 착한 아이였어요.”(138쪽)라고 술회하는 마담의 증언으로 끝난다. 첫 사진 속 섬뜩한 아이, 두 번째 사진 속의 ‘미남이나 사람 같지 않은’, 그리하여 “하얀 종이 한 장처럼 그렇게 웃고”(10~11쪽) 있는 남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길하며 특징이 없고 기묘한,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남자. ‘나’가 보기에 그런 요조는 수기 속에서 의외로 사람들에게 연민을 받거나 동정을 얻는다. 여자들뿐만 아니라, 술집 손님들도 그에게 술을 사줬으니까. ‘나’는 수기를 있는 그대로 잡지에 실을 거라면서도 이 수기에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고 살짝 언급하는데, 이 부분을 거듭 읽다가 걸려 넘어진 것이다. 이 수기에 담긴 내용은 과연 사실일까? 이 글도 익살일까? 익살이야말로 과장이니까.


    하지만 다시 읽을까 생각하던 차에 책을 덮었다. 인심 써서 반쯤 속아준다고 하자. 그래도 진실과 허구가 그렇게 정교하게 나뉘진 않겠지만, 요조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으니. 소설이 허구고 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이 소설이 90년까지는 다자이의 유서로 여겨졌다는 이야기와도 역시 아무런 상관없다. 속이는 것과 죄와 비위와 고립과 연민과, 그런 것들이 ‘요조’라는 하나의 쇠꼬챙이에 한 줄로 꽂혀서는 벽에 가서 콱 박히는 모습이 보인 까닭이다.


    다자이는 5월 12일 이 소설을 탈고하고 한 달 후 애인 야마자키 도미에와 자살시도를 했다. 이번에는 성공적이었다. 사체는 일주일 뒤인 19일, 그의 생일에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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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01-29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실격> 영화평은 별론데, 저는 굉장히 인상적으로 봤습니다. 손에 꼽을 명장면이 많죠. 말은 이렇게 하고 보고 안 보고는 탕기님 선택~
이미지도 비슷하고(그 유명한 사진 포즈도 흡사!) 산 시기도 비슷했던 김수영과 다자이 오사무를 어설프게 추적하다가 김수영이 일본 유학 중에 동경에서 그들은 모르는 채 스쳐갔을 수도 있겠구나 했죠.
이상의 수기식 소설, 산문도 다자이 오사무와 비슷하단 생각을 많이 했고요.
일본어와 일본식 교육의 영향도 있었을까요.
무엇보다도 사람은 정말 개인이 아니라 시대를 산다고. 히트텍과 무상급식은 지금 사는 사람의 어떤 기억이 되겠죠. 따뜻한 날들 보내시길 바라며....

탕기 2016-01-29 12:47   좋아요 0 | URL
언제 한 번 봐야겠군요!
다자이의 얼굴을 계속 요조에게 덧씌우며 읽어서,굳이 영화를 봐야겠느냐는 고집이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영화는 또 다르니까요. 추천 고맙습니다 ^^
밖에 나가기 꺼려지는 하늘이지만 agalma님도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2016-02-02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2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2016년 1월 25일



    지난 닷새의 밤은 다섯 페이퍼에 옮겨놓았다. 내 생각의 대부분은 그곳에 있다. 순간을 남기고 싶어 끊어 읽었다. 순간이라는 것이 실은 책을 덮고 이렇게 쓰는 사이 증발해버리고 만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하지만 서둘러 적었다. 홀려서 글을 쓴 건 참 오랜만이다. 그래서 지난 닷새의 글은 물기가 약간 있다. 


    하루 5~60여 페이지 정도였으니 짧긴 했지만 두세 번 읽고 생각하고 참조할 것들을 들춰보느라 반 권 정도를 읽은 듯 피로가 매일 몰려왔다. 그래도 구슬을 놓지 않으려 했다. 음악은 좋은 벗이다. 주말의 예능 프로그램들은 모처럼 꿀맛이었다. 그렇게 월요일이 왔다. 폭설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이 한 주의 시작이다. 다행이도 날씨는 풀리고 있다.



[링크]

  첫째 밤 독서 : http://blog.aladin.co.kr/inkriver/8167631

  둘째 밤 독서 : http://blog.aladin.co.kr/inkriver/8170615

  셋째 밤 독서 : http://blog.aladin.co.kr/inkriver/8174409

  넷째 밤 독서 : http://blog.aladin.co.kr/inkriver/8176674

  다섯째 밤 독서 : http://blog.aladin.co.kr/inkriver/8178820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切りとれ、あの祈る手を)』은 가벼운 책이다. 어디 들고 다니며 읽기에도 좋다. 하지만 내용이 무섭다. 수 년 전, 국내 독자들에게 처음 소개되고 그 파격에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것 같은데, 과연 얼마나 팔렸을지는 모르겠다. 항간에서 인문학의 ‘한계’라 쉽게 지적하곤 하는 일상과의 괴리, 실천 가능성, 이런 문제들에서 사사키의 책 역시 자유롭지 않다. 얼핏 보면 붕 떠 있는 말을 한다. 그렇게 느껴진다. 널리 읽힐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저자 본인도 놀란 기색이다. 곳곳에 사사키에 대해 험담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요컨대 [문학]하라는 것이다. 대문자 문학. 그것은 읽고 쓰는 것을 말하며, 혁명과 직결된다. 어떻게 [문학]이 혁명으로 이어지는지, 혹은 혁명 그 자체인지는 대혁명(종교개혁)의 루터, 고아이자 문맹이었던 장사치 사도 무함마드와 『쿠란』, 성녀 테레지아와 같은 신비주의자들, 그리고 중세 해석자 혁명을 거치다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비난과 농담, 유머, 겸손 등 사사키 특유의 어조를 따라간다. 전문가, 지식인, 종말론자, 원리주의자, 그리고 그들에게 끌려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 그들이 하나 둘 이 책의 중심에서 퇴출되는 기상천외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쳐내고 나면 위대한 문인과 경전을 남긴 이들만이 남는다. ‘읽고 쓴’ 이들이다.


    고이 쥐고 있던 [읽기-씀]이라는 구슬을 다시 본다. 사사키의 모든 주장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순간 가슴이 뜨거워져 동감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단언이 많아 여과 없이 느껴지는 지적들은 시원한 곳을 긁어주기까지 했으니, 이 일본의 사상가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모양이 어떠하든 간에 나도 얼마간은 쓰는 사람으로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솔직히 그럴 자신도 없고, 의도도 없다. 언젠가 한 문학 교수가 이런 말을 해 기억한다. 옛글 어딘가에 몇 번 바른 적 있는 대학시절 추억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에게 ‘보통독자’가 되라고 했다.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한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이를 일컫는 말이다.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할까도 의문이었지만, 여하튼 그의 저 단어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분명하게 전달됐다. 교수는 이어 말했다. 독자가 차라리 쉬워. 작가의 삶보다는 말이야. 나는 저 작가에 [  ] 대괄호를 치지 않는다. 모든 작가를 우러르지는 않으니까. 그러니 사사키가 [문학]이라고 하며 그걸 혁명에 가져다대는 걸 보고, 아니, 그런 글을 읽고 어떻게 내 삶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그는 이전의 『야전과 영원』에서 누차 독자의 자질을 상기시킨 적이 있다. 그런 뜻은 아니었을까? 혁명이라니. 또 한 번 말하게 된다. 그건 내게서 멀다.


    요컨대, 그런 책이다. 닷새를 지나왔다. 지금은 서너 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서재에 꽂아뒀다. 치열했던 지난 다섯 글들도 이면지에 뽑아 어딘가에 뒀다. 그리고 내게는 무엇이 남았는가를 생각하며 여기까지 적어오면서, 그것이 언젠가는 내게 남아 있는 무언가가 되어주길 바라게 된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읽는 사람이고, 한편으로는 쓰는 사람이니. 그렇게 믿고 있다. 저 혁명이 작은 것이라도 좋을 것이다. 시선을 바꾸게 되는 것이어도 좋다. 아니, 그것이면 족하다. 한 가지 얻은 것이 있다면, 그건 책 고르는 일에 조금 더 신중해졌다는 것. 변화는 작게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벌어진 틈이 얼핏 보이는 듯도 하다. 들여다보기에는 무섭지만. 사사키는 그곳에 빛이 있다고 말했다.



*   *   *



    아직 끝내긴 이르다. 짧게 쓰지 못하는 게 버릇인 듯도 하다. 하지만 털어놓다보면 길어진다. 사사키의 책을 읽다 넘어가지 못한 부분들이 있다. 두 단어로 추려지는 것 같아 모아봤다. 혹 이 책을 읽다가 사사키의 몇 가지 지적에서 위화감을 느낄 이들이 있진 않을까, 이런 생각에 고민을 덧대어놓는다. 가볍게 생각할 것들은 아니다. 그러나 읽고 쓰고 예술을 하는 이들은 늘 대면하는 문제이다.


    사사키는 이 말을 싫어하지만 그래도 하자. 종말. 예술 종말론은 20세기 초반의 기현상을 목격한 20세기 중반 즈음의 평론가들이 내놓은 것이다. 미술사를 공부하던 무렵, 마티스와 피카소, 몬드리안은 충격이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암기된 상식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그에 앞서 세잔은 또 어떠한가. 인체를 대단히 정교하게 그리고, 풍경을 사진 수준까지 사실적으로 그리던 이들에게서 추상으로의 전환은 기계 발명 이후 급속도로 달라진 일상만큼이나 급박하게 이뤄졌다. 프랑스 미술의 고전적 성향이 파리에서 아직 드셀 무렵, 미국에서는 변기가 전시됐고 그건 아주 유명하다. 왜 일부 예술가들이 그 ‘변기’를 옹호하는 글을 언론에 투고했을까. 어디서부터 진행된 일일까. 이렇게 묻고 보면 참 복잡한 현상이다. 지금의 우리야 쉽게 생각하고 웃을 수 있다. 변기라니.


    이제 예술 앞에 ‘진짜[real]’라는 전통의 권위가 붙게 됐다. 정크아트가 나온 건 이보다 조금 뒤의 일이지만, 사람들은 ‘진짜 예술’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확연하게 드러나 있는 편견, 혹은 권위의 벽이 대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했다. 평론가들에게 이는 머리를 지끈지끈하게 만드는 문제였다.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도 문제였으리라. 그런 와중에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원제 : After The End of Art)』가 나왔다. 물론 나는 예술의 ‘진화’이니 하는 것은 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예술을 유기체에 빗대는 표현에는 다소 거부감이 있다. 예술가가 일정 부분 타문화의 선례들, 혹은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는 과정을 맥락의 소개 없이 보면 혁명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진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뿐이다. 예술 그 자체는 유기체가 아니다. 그런 비유로는 갑작스러운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아니, 제대로 빗대어 표현할 수 있는 단어도 아니고.


    그러나 이건 처음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변기를 작품으로 내놓는 것은, 그리고 마그리트나 워홀처럼 명백히 그것인 걸 앞에 두고 “그것이 아님.”이라는 제목으로 관람자들을 혼란에 빠뜨린 것은. 이런 기현상의 충격에 평론가들은 너도나도 ‘종말’이란 단어를 썼었다. 그보다 앞선 시대에는 러시아의 말레비치가 하얀 종이 위에 검은색 사각형을 하나 그리더니 “더 이상 우리 화가들은 그릴 것이 없다. 여기가 회화의 종착점이다.”라고 했다. 나는 이를 ‘회화의 영도(zero degree)’라 기억한다.


    이건 어떤가? 예술의 종말. 사사키에게 이렇게 묻고 싶었다. 예술이 없어진다는 의미의 ‘종말’이 아니라, 기존의 예술을 일컫는 단어를 /예술/이라는 표기로 일부러 가시화해본다면, 바로 그 /예술/의 종말을 그 비평가들은 의미했던 것이다. 이제 경계는 없다.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예술이 아닌가? 작품으로 승인되는 현상이 거의 무한해졌다. 권위는 남아 있겠지만. 영국 YBA 현상만 놓고 보더라도 열광하는 자들과 경멸하는 자들이 나뉘어 있는 것 자체가 예술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자기가 먹다 남긴 사과를 유리 상자 안에 두고는 <실낙원>이라 하질 않나, 네온사인 하나 만들어놓고 작품이라 내걸지 않나.’ 이런 말 안에 두 개의 표정이 모두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사키는 별 관심도 주지 않겠지만)시장이 여기에 반응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미술시장의 거품, 작품=사치품의 전락 같은 현실적 문제는 논하지 않겠다. 버거운 일이고, 거기서 거기인 일이다. 나처럼 예술을 ‘추종’하는 이들에게는 씁쓸한 기삿거리 정도일 뿐이고.


    새로운 것은 없다는 의미에서 종말을 과감히 잘라버리는 게 사사키의 작업이었다. 그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정말이지 완전히 새로울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예기치도 않게 찾아올 수 있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생각은 혹여나 도래하게 될 ‘전혀 새로운 것’에 대한 가능성을 전제하지 않는 사고는 아닐까? 혹 그런 걸 두려워하는 방어적 사고는 아닐까? 여기에 획기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바꿔놓을 수도 있는 과학의 발견을 가져다놓으면,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이 지닌 함의가 어쩌면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나아간다. 지극히 단순하고 전체주의적이며 기만적이기까지 한 종말론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나만의 생각일까. 모르겠다. 입에서 자꾸 맴돈다. ‘새로운 것은 없다’라, ‘새로운 것은 없다.’라, 그냥 내뱉고 말 생각은 아닌 것 같아 남겨본다.



*   *   *



    루시디. 이 작가는 [문학-정치]의 첨예한 관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상징이다. 여기서 가오싱젠을 한 번 더 말하고 싶었다. 언젠가 한 영화평론을 읽었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인을 주제로 한 영화가 나오지 않느냐는 글이다. 혹 그 평론을 아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어딘가 크게 게재됐던 기억이 있는데, 어쨌든.) 어떤 이가 그 밑에 댓글로 “위대한 정치인이 없으니까.”라는 단발의 역정을 적어놔서 웃었다. 생각해봤다. 그보다는 문학과 정치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려는 어떤 습성이 우리에게 들어있는 까닭이 아닐까, 그래서 ‘만들어봤자’인 영화를 만들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아도 가오싱젠의 문학론을 읽었던 차다. 『야전과 영원』에서 벤슬라마의 인용으로 지적된 [문학]과 혁명의 관계는 사사키의 이번 책에서도 여지없이 나왔다. 사사키도 이 부분을 거듭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정치와 혁명은 뗄 수가 없다. 그러니 [문학]과 정치는 적대적 관계에 있다. 그가 어느 편에 서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


    책 읽고 쓰는 글 말고 나름 창작이라 해서 붙들고 있는 글들이 몇 있다. 그건 대부분이 톨킨 때문에 적기 시작한 글로, 나는 지난 십 수 년 간 톨킨의 ‘문학론’에서 결코 멀어진 적이 없었다. 혹은 그렇게 생각한다. 일단 태도가 그렇다는 뜻이다. 『반지의 제왕』 서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번역해서 옮겨본다.


    “물론 작가가 자신의 경험에서 전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경험에서 이야기의 싹이 돋아나는 과정이라는 건 정말 복잡합니다. 그리고 기껏해야 그 과정을 정의하려는 것조차도 불명확하고 애매모호한 증거에서 추측하는 것일 뿐입니다.”(J.R.R. 톨킨, 『The Lord of The Rings』, Foreword, 11쪽)


    이건 톨킨의 세계대전 참전 경험이 그의 환상적인 세계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고 단정해버린 평론가들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다. 분명 톨킨은 그런 연관성을 영국 작가 특유의 공손한 어휘들로 살짝 밀어내면서 문학의 ‘고립되어 있는 섬’을 옹호한다. 그 자신도 그렇게 수 십 년 간 작품을 만들었다고 자부했고 말이다. 나 역시 현실에서, 그리고 내가 배운 것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진 않는다. 그건 기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창작에 있어서만큼은 그 영향 관계가 의미하는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뜻에서 멀어지려고 한다. 쉽게 말해 “이건 그런 의도로 쓴 게 아닙니다.”라고 슬쩍 발을 뺀다는 것이다. 이건 소극적인 태도라기보다는 문학적인 태도라고 알고 있었다.


    톨킨보다 훨씬, 정말 훨씬 첨예한 무대에 서있었던 가오싱젠은 그런 말을 더 적극적으로 한다. 그가 중국에서 프랑스로 망명간 작가라는 사실 때문에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중국문학의 현실은 전 세계 앞에 그 나체를 드러내야 했다. 중국 정부가 왜 그를 싫어하는지는 충분히 알 만 하다. 그런 그가 대만에 가서 강연을 하다가 문학의 위치에 대해 역설한 부분이다. 참고로 가오싱젠이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서양의 문학 풍토를 옹호하는 건 아니다. 시장마저 거부하려고 하는 사람이니까.


    “작가 스스로 자각해서 자신의 문학에 덧씌워진 정치적 라벨을 떼어낸다 해도, 곧바로 반대편의 정치적 조류 속으로 말려들기 십상입니다. 그 속에서 잃어버리는 것은 결국 작가 자신의 고유한 문학창작의 의미뿐이죠.”(가오싱젠 지음, 박주은 옮김, 『창작에 대하여(원제 : 創作論)』, 63쪽)


    혹시 글을 쓰는, 창작하는 이들 중에 ‘작가 고유의’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낄 이가 있을까? 한 명도 없지 않을까? 창작의 기본이 되는 자부심인데? 물론 글을 쓰는 사람, 그러니까 남보다 좀 더 진중하여 때때로 고리타분하다거나 재미없다거나 그런 오해를 받기도 하는 사람은 글이라는 것이, 또한 말이라는 것이 자신의 것이기도 하고 타자의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모든 걸 걷어내고 쓴다고 해도 분명 고유의 것이 아닌 게 들어오기 마련이며, 솔직히 말하자면 대부분이 타자의 것이다. 하지만 수용하고 배출하는 이 문학의 생리 과정에는 고유의 코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착각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게 작가의 지문 같은 거다.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해야만 내 안에 들어 있는 것을 글로 내뱉을 수 있다. 따라서 글 쓰는 이는 영향 관계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어느 영역에서는 결코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밀어낼 수도 있다. 자의적으로 말이다. 그렇게 ‘나’라는 창작 공간이 수호되며, 오랜 과정 끝에 작품이 나오게 된다. 밖에서 보는 사람들은 그걸 객관적 입장에서 이런저런 것과 연결된다고 말하겠지만, 반대로 작가의 입장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그것 역시 자의적인 판단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물론 양심적인 작가들은 자신에게서 이미 떠난 작품에 대한 왈가왈부에 고집스러운 태도를 지니지 않겠지만.


    사사키가 벤슬라마를 예로 든 것은 혁명적 가능성을 언급하기 위해서였다. 루시디가 망명을 떠나 아직도 서구-이슬람 구도의 ‘핫아이콘’으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문학은 그런 가능성을 얼마든지 보여준다. 이 급진적인 저자가 이보다 4년 정도 나중에 낸 책인 『이 치열한 무력을(この熾烈なる無力を)』에는 [문학]을 향한 태도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이 책의 독자가, 그러니까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독자가 문학을 말 그대로 급진적으로 받아들이길 바랐다. 급진적 문학이라, 아니, 문학의 급진적 수용이라…… 이 도발은, 모르겠다. 문제는 내가 아직도 혁명이라는 걸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말이 위안이 된다. 역설이다. 도발을 듣고 기뻐하다니, 내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 하긴 책과 함께 글을 쓰며, 나는 어떻게 된 것 같다고 쭉 생각해왔다.



*   *   *



    『이 치열한 무력을』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했으니 말인데, 사사키의 대담자인 ‘가가미’라는 사람의 대답이 있어 옮겨본다. 사사키보다는 연장자이지만 사실 누군지는 모르겠다. 사사키가 “누가 읽을까요?”라며 물었다. 가가미가 말했다.


    “아마 매우 일반적인 사람들일 거야. 지금은 사유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사유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잖아? 사유라는 것이 심심풀이도 시간 낭비도 아닌, 그 자체가 실은 생산적이라는 얘기니까 말이야. 그런 사람들한테 와 닿는 게 있어. 그런 의미에서 세상은 건전하다고 생각해. 이런 종류의 책이 팔리는 건 나쁜 현상이 아니거든.”(사사키 지음, 안천 옮김,『이 치열한 무력을』, 51쪽)


    그 후 둘의 이야기는 실천과 이론을 양분해서 생각하게 하는 행태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 책을 읽은 순간부터 혁명의 점화가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순간에 대한 지각을 열어둬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라도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결말에 이르게 된다. 뭔가를 자르는, 그리고 치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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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학에게 뭘 바라는가.
    from 공 음 미 문 2016-01-25 21:32 
    십중팔구 너희들은 고급독자가 될 뿐일거다 일갈하던 어느 교수님 생각을 종종 합니다. 그걸 비웃던 누군가는 작가가 되고, 겁을 먹었던 누군가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고 그랬지만 그건 예언은 아니었죠.문학에게 혁명이란 사명을 덧씌우는 건 참 재미난 극단이 있어요. 만병통치약이거나 혹은 마지막 수송선이거나 라는 거죠.그런데 말입니다. 또 재미난 지점은 글쓰기가 이 사회와 시장이라는 메커니즘에 속하기 때문에 그런 요구들이 치고 들어온다는 거죠. 왜 현실과 동떨어
 
 
 














사사키 아타루(佐々木 中)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切りとれ、あの祈る手を)』

  : 다섯째 밤 독서




2016년 1월 24일




    지난 글에 한 분이 덧달아준 의견이 있어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멸망을 지향하는 집단 무의식이 유전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나는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래서 매트 리들리의 『게놈(Genome)』을 다시 읽어봤다. 종말론을 하나의 문화 현상이라고 보면, 그건 아마 문화적 유전과 진화상의 유전이 교묘하게 겹쳐진 채로 정말 유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추정일 뿐이다. 하지만 본능은 학습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 있다. 충분히 가능하다. 종말을 언급하는 종교, 아니면 위기마다 불거지는 종말 같은 건, 르장드르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의 ‘의례’로 조용히 스며들어 우리의 안에 굳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걸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나쁜 형태이겠지만.


    조금만 더 말해보자면 이건 병리학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믿음은 의외로 가장 먼저 죽는다. 병에 걸리기 전에 “나는 살 수 없어.”라고 믿어버리면 면역이 떨어진다. 믿음은 하나의 화학 성분과도 같다. 물론 그걸 뛰어넘는 것이 믿음이기도 하다. 고차원적인 말 같지만 사실이다. 그래서 치병(治病)의 기적을 행한 뒤 자신 앞에 서 있는 이에게 예수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그러니 종말론에 기대는 사람은, 그 날이 언제 올지 자신도 모른다고 한 예수에게서 얼마나 많이 벗어난 불신론자란 말인가.


    또한 종말론은 모든 것의 귀결이자 공평해지는 순간을 바라는 믿음이기도 하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 세상의 모든 새로운 것의 다양한 모습과 차이를 없애버린다. 독일의 마르틴 우르반은 『사람들은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 할까?(원제 : Warum der Mensch glaubt.)』에서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를 빌려 “사람들은 단 한 번도 거짓과 기만을 알아차리지 못해”(마르틴의 책, 330쪽)라고 했다. 왜 그런 것일까? 사사키는 분명하게 답한다. 그것이 넷째 밤의 결론이기도 했다. 정보와 폭력의 바다에 우리는 오랫동안 빠져있었던 것이다. 다 끝날 거라는 믿음 역시 넓디넓은 바다였다.



*   *   *



    그래서 조소로 시작한 모양이다. 5세기 게르만 민족의 이동에서 ‘메뚜기형’ 인간에 이르는 수십 장의 내용은, 사사키가 광대의 가면을 쓰고 관객들을 조롱하는 한 편의 연극을 상상케 만든다. 유독 숫자가 많이 나온다. 지금껏 우리의 입에 회자되며 수많은 예술에게 동기를 부여해주는, 심지어는 유명한 사업가들조차도 그걸 읽고 영감을 받곤 한다며 선전하는 고대 그리스 문학은 단 0.1%만 남아 있는 상태다. 그것이 이슬람으로 이어지고, 르네상스가 발아한 뒤 근대 유럽으로, 그리고 현대의 초석이 된다. 남아 있는 글의 위력이 이러하니, 사사키는 이어 문맹 이야기를 한다. 재일한국인 할머니에 대한 리포트로 시작하여 우리 독자들에게는 남달리 들릴 수도 있겠다.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전혀 자명한 것이 아닙니다.”(사사키의 책, 262쪽) 이걸 상기시키려고 긴 역사를 돌아본다. 에두르진 않는다. 거칠게 짚어가면서 프랑스혁명의 사례로 독서와 혁명의 연관성을 언급하고, 문학의 황금시대인 19세기의 심각한 문맹률로 여정이 이어진다. 사사키는 묻는다. 그런데도 디킨스, 스탕달, 보들레르, 도스토옙스키, 고골리, 푸시킨, 톨스토이, 투르게네프가 나왔다면, 저 대가들은 살짝 돈 것이 아닌가? 세속권력은 군자가 되려 하지 않는다. 그 누가 공자의 시대처럼 읽으려고 하고, 고대 그리스에서처럼 학문으로 소양을 쌓으려고 할까? 학문은 그들에게 적이다. 게다가 글 읽을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런데도 쓰는가? 이유가 무엇인가?


    위대한 그들은, 나는 그런 상황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문학이 사는 것이 곧 인류가 사는 것이라는, 읽고 쓰는 것의 사명을 믿은 것이다. 말 그대로 그냥 쓰는 수밖에 없었다. 사사키는 이런 정신과 지금의 ‘문학 종말론’을 나란히 놓는다. 비난하지 않아도 독자가 알아서 혀를 차겠지만 구태여 조롱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90% 이상의 ‘쓰는 이’가 나가떨어질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하기야 나도 이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교수가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 문학이 일본에 1~20년 뒤쳐져 있고 노벨문학상은 소원하다는 말을 해 내게 적나라한 충격을 안겨줬던 문학 교수였다. 지난 우리 문학의 반세기 역사에서 기억될 이는 정지용 밖에 없다. 자네들은 앞으로 반세기를 더 살며 또 한 명의 작가를 만나게 될 것이다. 기억하건대 그는 단 한 번도 문학의 절멸이니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질의 문제를 언급했어도.


    이걸 나는 인문학에도 대어본다. 그것이 죽었다는 이 시대의 선언을 믿지 않는다. 대학이 취업을 위한 공간으로 전락했다고? 전락(轉落)이라고는 이해해도, 전락(全落)이라고는 이해하지 말아달라고 거듭 말하고 싶다. 근본과 더 큰 것을 고민하는 학우들은 많다. 취업을 생각하고 있어도 더 진지한 고찰을 하는 이들은 많다. 대학이 그러한 환경에서 멀어진다고 해도 우리는 그 과정을 거칠 것이다. 어설플 뿐이다. 겨우 대학생인데. 주입식 교육을 받고도 대학의 너른 공간에 들어가 자신을 알고 겸손해지고 깨치는 이들은 한 둘이 아니다.


    그런데 인문학적 정신과 그 사명이 죽는다고?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거나 안 팔려서 죽는 게 아니라? 문제를 바로 보자. 책은 너무 많이 팔린다. (주로 스페인과 견주며 지적하는) 독서율의 문제가 아니다. 사사키가 견준 시대와 비교해보자. 파는 것에만 현혹된 일부 비양심적인 저자나 학자나, 그런 걸 조종하는 이익의 항간에 간판처럼 내걸리는 게 저 종말론과 뭐가 다른가. 안 팔린다고 말하라. 죽었다고 하지 말고. 가증스러운 표현이다. 전혀 죽지 않았다. 위대한 정신은 반드시 남는다. 심지어 할리우드 맛이 가득한 영화 <투모로우>에도 이런 장면이 나온다. 한 도서관 사서는 인류가 멸망해도 가져가야 한다는 책으로 니체를 꼽는다. 남자 주인공이 그를 두고 니체의 병증을 지적하는 대목은 웃기기까지 하다. 나치 이후에도 우리는 정신이 살아남은 걸 봤다. 무려 ‘나치’ 이후에도.


    사사키의 말을 빌린다. 나머지 부분은 거의 농담 수준이다. “문학, 이것은 은총입니다. 기적입니다. 흔해빠진, 몇 번이고 반복되어온, 그러나 한없는 쇠퇴를 빠져나온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꽃, 빛나는 섬광, 한순간의 기적인 것입니다.”(282쪽)



*   *   *



    숫자의 장난이 지겨웠는지 블랑쇼를 불러온다. 그와의 조우가 다시 밀려온다. 『야전과 영원』에서 라캉의 지독한 답답함을 환기시킬 첫 번째 타자로 창문을 열어준 그다. “나는 죽을 능력을 갖고 있는가?”(사사키 씀, 안천 옮김, 『야전과 영원』, 229쪽)라고 질문한 블랑쇼는 죽음이야말로 끝까지 마무리할 수 없는, 미완료인 것이라 단언한다. 죽기는 하지만 죽지는 못하는 이상하리만치 말이 되는 역설이 종말은 없다는 선언으로 이어진다. 사사키는 일본에서 부정신학으로 절하되는 그를 변호하며 블랑쇼의 선언을 격렬하다고, 또한 근사하다고까지 표현한다.


    통계의 장난이 다시 이어진다. 400만 년이 다시 펼쳐진다. 사사키의 장난대로 379만 년을 양보해도 1만 년이 남는다. 장구하다. 그러니 우리는 의미를 잃는다. 그 장구함 앞에서. 나도 그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의미 잃음]이라고 대문자로 쓸 수 있다면, 그건 나의 문학적 영감과 자주 닿는다. 나약함을 굳이 숨기고 싶진 않다. 솔직함이 답이니까. 나는 목성 보는 걸 좋아한다. 새벽녘 방 안에 불을 끄고 책상 앞에 앉으면 창밖으로 보인다. 두 세 시간 정도 볼 수 있다. 화성이 같이 보이던 때는 한참 지났지만, 그래도 나는 저것과의 거리를 생각한다. 양보해서 1억 정도로 봐도, 1억이면 무한이라 해도 좋다. 1억을 나는 잘 모른다. 아, 나는 무엇인가. 새벽의 독서가 다 뭐냐. 그래도 결국 이렇게 쓰고 있지만. 의미는 수도 없이 회의에 부딪힌다. 신을 믿지 않는 나도 가끔은 구원받고 싶다.


    여기서 소환되는 것이 니체다. 우리는 행해질 뿐이다. 행하는 주체가 아니다. 우리는 일부고, 일부의 의미다. 말을 얻고, 자아내라. 의미를 이뤄라. 미치광이의 명령이 들린다. 밤중에 썼으면 술 냄새 나는 글이라 해도 좋으리라. 하지만, 그렇다. 나는 우주의 일부가 되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 의미를 조금은, 조금씩은 알 것도 같다. 나는 우주를 좋아하고 과학책을 즐겨 읽는다. 소위 ‘위키’질과 ‘구글링’은 심심할 때마다 한다. 전투적 과학자들의 비판서도 꾸준히 읽었다. <Edge>의 필진들이 내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못한다. 그들은 말하겠지. 헛소리라고. 실은 사사키보다 더 독한 말을 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나는 읽고 쓰고 생각하는 인간을 말하고 싶다. 지금은 그런 자리다.



*   *   *



    사사키는 지극히 현실적인 질문을 받는다. “왜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되나요?” 안 그래도 묻고 싶었던 차에 그 스스로가 술회한 것이다. 이건 이런 질문으로 변환 가능하다. “왜 쓰지 않으면 안 되나요?” 다른 예술의 방법도 있다. 왜 조각하지 않으면 안 되나요? 왜 그리지 않으면 안 되나요? 지금은 [문학]을, 그 대문자를 말하고 있으니까. 또한 이 질문에는 씁쓸한 실패의 맛이 한 가득이다. 퇴짜를 맞았다. 베케트도, 비트겐슈타인도, 베버도, 푸코도. 하나같이 출판의 거절을 맛본 이들이다. 사사키도 살짝 털어놓는다. 하지만 답은 곧 나온다. 늘 그랬던 것처럼 단언하며. 중요한 건 과정이라고 한다.


    머리가 나빠 어느 날 밤이었는지는 지금 당장 기억하지 못하지만 앞서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라는 말에 나는 공감했었다. 그리고 이건 읽었으니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로 이어진다. 사사키는 왜 글을 쓰는가? 정보와 스스로 차단된 채 숨어 있던 그가 갑자기 일본 사회로 나왔을 때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답할 수밖에 없었다. 쓸 수밖에 없었다고. 니체, 푸코, 르장드르, 들뢰즈, 라캉을 읽었으니 써야했다고. 벤슬라마를 언급하는 걸 깜빡한 모양인데, 그밖에도 더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돌아보게 된다. 나는 누가 있었기에 이렇게 쓰는가? 얘기를 들어준다면 그냥 털어놓고 싶은 말인데, 나는 비평이라며 이런 공간에 글을 쓰지만, 아마 나는 비평의 기준에 준한 글을 거의 못 쓰는 사람일 것이다. 이걸 누가 비평이라며 읽을까? 비평의 글은 나를 쓰게 하는 원동력이 전혀 되지 못한다. 마름질할 생각도 없다. 니체의 말을 다시 불러온다. 나는 일부의 의미일 뿐이다. 나는 그 과정을 찾기 위해 피카르트, 칼비노, 페키치, 헤세 등을 거쳐 온 것 같다. 누군가는 대단히 의외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그에 앞서 톨킨이 있었고 지금도 나는 그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여하튼 늘 그들에게 큰 빚을 지고 쓴다는 기분이다. 나의 것은 없다. [나의 것]이라는 대문자의 절대적인 명제가 있다면, 그런 태평함을 가지고 있다면 구태여 뭘 쓸 필요도 없지 않은가. 부재를 알고 여러 번 빌려서 쓴다. 내 글은 하나도 없다. 그저 읽고 쓴다.



*    *    *



    니체는 꿰뚫고 있었다. 미래의 문헌학. 이 부분에서 감응한다. “그 하룻밤, 그 책 한 권, 그 한 줄로 혁명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299쪽) 그것은 천사의 소명이다. 무함마드에게 찾아온 지브릴이며, 동굴에서 첫 발을 밖으로 디딘 무함마드다. 3일 째 밤에 만난 이 사도의 극적인 드라마는 여러 번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문맹이라고 호소했던 그를.


    사사키는 묻는다. 아니, 권한다. 남는 쪽에 배팅하지 않겠냐고. 도박이니까. 역사의 도박장이니까. 기억력 나쁜 나조차도 외워버렸다. 『야전과 영원』에서 처음 만난 ‘도박’이라는 단어는 실은 니체의 것이었다. 그리고 니체는 그런 우리에게 주문한다. 웃으며 도박장으로 들어가라고. 희망의 포커페이스란 말인가? 종말을 말하는 세상 앞에서 담담하게 새로운 밤을 끊임없이 받아들이라고 주문한다. 읽고 쓰고, 그리고 웃어야 한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모습은 참으로 미치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 책의 역자 송태욱 씨가 말미에 달아놓은 글에 사사키를 ‘외계인’에 비유한 구절이 있어 절로 웃었다. 다시 제목을 본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실 처음에는 손을 잘라도 기도는 남을 텐데, 하며 갸우뚱했었다. 그래서 자꾸만 속으로 ‘두고 보자.’라며 벼르고 있었다. 기대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끝이 났다. 아니, 그런 말을 하면 또 혼나겠지. 하지만 이렇게 쓰고 있으니, 내가 면할 수 있는 활로가 조금은 있으리라. 그런데 말이다, 이 손을 어떻게 자를까. 무섭다. 무서운 책이다. 이게 널리 읽힐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추호가 끝까지 남을 거라 생각한다. 아직은 손이 떨려 가다듬을 수가 없다. 다섯 개의 밤을 모아놓고 글 하나를 더 써야겠다. 일단 다섯 밤은 지나갔다. 손에 쥐고 있던 구슬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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