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8일 목요일




    신학논쟁과 이단 단죄의 역사를 들여다볼 계기는 많았다. 어트리뷰트를 알아야 하는 까닭에 미술사를 접하는 동안 나는 화형과 책형 등 온갖 고문으로 죽어간 이들의 이름을 기억해야 했고, 한 교수에게 영화 <아고라(Ágora)>를 추천받아 사상의 악행이 눈앞에서 한동안 아른거리기도 했다. 핏빛줄기가 우기의 계곡처럼 흘러내렸다. 그런 꿈을 꾼 적도 있다. 사막에서 벌거벗긴 채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끌려 다니다가 두 발목이 잘리고는 태양 아래 내던져버린 한 남자. 나는 그 곁을 떠나지 못하는 군중의 하나였다.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단언한다. 사상은 위대하다. 수많은 칼을 지닌 한 신이 생각난다.


    보르헤스의 「신학자들(Los teólogos)」은 고발하는 자와 처형당하는 자의 이야기다. 논쟁의 주제는 신이다. 거의 확정적인 교리로 믿음을 강요당하는, 혹은 이미지로 광고되는 신앙에 흡수되는 이들은 그 시대를 상상하지 못한다. 차라리 그 역사 앞에 이지적 판단으로 일관하려는, 나와 같은 냉담자의 손에 더욱 쓸모 있는 도구가 쥐어졌다고 하겠다. 혼돈의 시대였다. 교부(敎父)가 성립됐다는 건, 그만큼 잘려나간 가지들이 많다는 뜻이다. 교부가 성립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것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죽어야 하는 시대였다. 그리하여 「신학자들」과 같은 일들이 빈번히 일어났다. 성화와 기록이 남긴 사례는 극히 일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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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도시』 제 12권이 흉노족의 침입에도 불타지 않고 후세에 전해진다. 그리하여 플라톤의 가르침이 세상을 흔든다. 그는 세월이 지나면 모든 것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감을 설파했다. 대관절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왜 그런 말을 적었을까? 그는 교부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가 남긴 플라톤의 말에 사람들이 휘말린 건 그의 잘못이 아니다. 교묘하게도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려는 말이 아닌, 플라톤이 했다고 알려진 말만 빼서 읽어버린 것이다. 보르헤스는 그걸 압축해놓았다. 잠깐 풀어보자.


    황병하 씨가 ‘신의 도시’라고 번역한 책은 ‘신국(神國)’이라는 단어로 더욱 유명하다. De Civitate Dei. 총 스물두 권으로, 전자 10권은 지상의 나라에 대한 설파를, 후자 12권은 신의 나라[天國]에 대한 설파를 담고 있다. 바야흐로 고트가 로마를 함락했다. 그녀/그들에게 세상은 뒤집어진 채로 썩어가기 시작하는 듯 보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시대를 논증하고자 글을 썼다. 당시 만연했던 윤회 숭배도 그의 겨냥을 받았다.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사상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누누이 플라톤을 위대한 철학자라고 평가하는 구절 속에서도 비판을 받는다. 번역해본다. 라틴어로 된 『De Civitate Dei』의 영어 번역본을 참고했다.


    “예컨대 ‘아카데미’라 불린 아테네의 학당에서 철학자 플라톤이 가르쳤듯이, 오랜 시간이 지나면 (하지만 분명한 간격이 있는데) 똑같은 플라톤과 학파, 그리고 똑같은 제자들이 존재하며, 그러므로 또한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들이 무수한 순환 동안 반복된다는 것처럼 주장한다. 말하건대, 나는 우리가 그러한 말을 믿게 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원죄를 위하여 돌아가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으셨다. 죽음은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며[로마서 6장 9절], 우리는 부활 이후 영원토록 주님의 곁에 있으리니[데살로니가 전서 4장 16절], 우리가 지금 말하는 그분, 성스런 시편에 나와 있듯이, 오, 주님, 저희를 보호하사 저희를 이런 생각들로부터 지켜주소서. 그리하여 나는 아래와 같은 결론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윤회의 길이 사악한 까닭은 그자들이 그 철학자들이 상상해낸 윤회를 방편 삼아 돌고 도는 생을 살기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교리가 돌고 도는 길이기 때문이다.”

[라틴 원전] sicut isto saeculo Plato philosophus in urbe Atheniensi et in ea schola, quae Academia dicta est, discipulos docuit, ita per innumerabilia retro saecula multum quidem prolixis interuallis, sed tamen.certis, et idem Plato et eadem ciuitas et eadem schola idemque discipuli repetiti et per innumerabilia deinde saecula repetendi sint. Absit, inquam, ut nos ista credamus. Semel enim Christus mortuus est pro peccatis nostris; surgens autem a mortuis iam non moritur, et mors ei ultra non dominabitur, et nos post resurrectionem semper cum Domino erimus, cui modo dicimus, quod sacer admonet psalmus: Tu, Domine, seruabis nos et custodies nos a generatione hac et in aeternum. Satis autem istis existimo conuenire quod sequitur: In circuitu impii ambulabunt; non quia per circulos, quos opinantur, eorum uita est recursura, sed quia modo talis est erroris eorum uia, id est falsa doctrina.


    보르헤스의 작품에 나오는 무변교도(환상교도)들은 여기서 “오랜 시간이 지나면 (하지만 분명한 간격이 있는데) 똑같은 플라톤과 학파, 그리고 똑같은 제자들이 존재하며, 그러므로 또한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들이 무수한 순환 동안 반복된다.”는 구절만을 차용하여 역사의 순환을 믿었다. 바퀴는 윤회의 상징이었고, 일부 과격한 이들은 뱀까지 숭배했다. 뱀은 당시 하느님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으로 여겨지는 상징이었다. 따라서 아낄레아의 보좌 주교인 소설 속 아우렐리아노는 이들의 논리에 공박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앞에 경쟁자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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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안 데 빠노니아. 이름부터 당시 있을 수 없는, 가공된 자다. 그는 아우렐리아노의 철저한 미움을 받는다. 즉 후안의 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우렐리아노는 그를 억지스런 강변이나 설파하는 정도의 인물로 생각했지만 어떻게든 그를 능가하고 싶다. 어쩌면 그에게 무변교도들의 득세는 자신의 우위를 증명해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리라. 결국 아우렐리아노는 후안 데 빠노니아보다 앞서 이교를 공박하기로 한다. 그렇게 반박문을 적기 위해 쏟아 부은 노력은 무려 9일 동안이나 계속됐다.


    그자와는 다르게 써야 한다. 놈은 뭐라고 말하더라? 그래, 그 녀석은 늘 자신이 예지자인 척 굴었지. 고결한 분위기. 민중들은 놈의 그런 분위기를 좋아했다. 속아 넘어간 것이지. 미련한 것들. 내가 바로잡아야 한다. 그것이 보좌 주교인 나의 몫이다. 그리하여 아우렐리아노는 삼단논법, 모독적 언사, 동음반복, (nego, autem, nequaquam 따위의) 부정어법, 이교도(그리스) 설화의 예시, 오리게네스와 키케로, 플타크(플루타르코스)의 인용 등으로 반박문을 채워나갔다.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그는 만족했다. 하지만 10일 째 되는 날, 후안 데 빠노니아가 보낸 반박문 사본을 읽은 아우렐리아노는 조소 속에서 또 한 번의 열등감을 느낀다. 그것은 자신과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글이었지만 훨씬 쉬웠다. 어떻게 해야 하나? 굴욕감 속에서 그는 수정하지 않은 반박문을 공의회로 보냈고, 후안 데 빠노니아가 공박의 담당자로 임명되었으며, 이 공박으로 무변교 교주라 알려진 에우포르부스가 화형을 당했다. 이 화형식은 아우렐리아노의 철저한 패배와 다름없었다.


    이후 둘은 같은 입장에 서있는 전쟁을 계속했다.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안주의를 공격할 때도 그랬고, 지구가 사각형이라고 주장하는 코스마스의 이론에 옹호할 때도 그랬다. 이윽고 아우렐리아노에게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코스마스의 지형학 이론에서 불거진 이단으로, 보르헤스는 여러 이름들을 알려주나 당시에는 대체로 아우렐리아노가 붙인 ‘어릿광대교’로 불린 집단이었다. 이 집단의 득세가 기회였다. 이번에야말로 후안 데 빠노니아를 이길 반박문을 쓰겠다.


     어릿광대교는 금욕주의를 표방한 영지주의의 일파이지만 보르헤스의 소설에 ‘영지주의’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이들은 오리게네스처럼 불구가 되는 (고환을 자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심지어 눈으로부터 느껴지는 온갖 욕정에서 해방되고자 눈을 뽑기도 했다. 보리슬라프 페키치의 『기적의 시대(Vreme čuda)』에도 ‘바르티마에우스’라는 자가 이런 말을 한다. 그는 맹인이었으나 예수의 기적으로 눈을 얻은 자다. “그런데 이렇게 눈을 얻고 나니 사랑을 잃는구나!”(보리슬라프 페키치, 이윤기 옮김,『기적의 시대』, 128쪽) 이런 금욕주의가 방종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둘은 양면의 관계인가. 살인, 남색, 근친상간, 수간 등을 일삼고 모든 신을 모독했으며, 이상한 경전을 획책했다.


    특히 후자의 경우, 앞서 처단 당한 무변교도들의 영향을 받아 성서의 구절들을 교묘하게 편집하기도 했으며, 보르헤스가 ‘프로테우스적인 사람들’이라고 한 그녀/그들은 악을 통한 정화를 추구했다. “악한 자가 되지 않는 것은 사탄적인 교만”(보르헤스의 책, 59쪽)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왜 이것이 가능한가?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실재는 천국에 있고 현실에 있는 것은 또 다른 ‘같은 사람’이라는 사상을, 즉 ‘이중적 존재’를 주장하는 사상을 추종하기 때문이다. 한쪽은 금욕주의, 다른 한쪽은 방종. 그야말로 혼란이다. “영지주의 집단들은 기독교 가르침의 일부를 이용하기는 했지만 기독교의 본질적인 가르침을 깨닫지 못했으며 따라서 기독교의 본질로부터 멀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중략) 영지주의자들의 윤리적 태도는 매우 다양했는데, 한편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금욕주의적인다가도 다른 한편에서는 완전히 방종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폴 존슨, 김주한 옮김, 『기독교의 역사』, 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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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 폭로하기로 한 아우렐리아노는 또 한 번 열성적으로 고서들을 탐독하면서 인용할 만한 문구들을 골라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똑같은 것은 두 개가 있을 수 없다’는 문제에 이르러서 무슨 이교적 문장을 보태어야 하는지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말을 적어놓고는 훌륭한 논박이 세워져 뿌듯해하고 있었는데, 그 인용된 문장이 다름 아닌 후안 데 빠노니아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그 순간 아우렐리아노는 무수한 번민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문장을 빼면 자신의 표현은 쓸모가 없어진다. 표절 시비는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킬 것이 분명하다. 결국 아우렐리아노는 “금세기의 박학한 한 신사가 과실이라기보다는 경솔함으로 인해 이미 언급”(보르헤스의 책, 61쪽)된 것이라는 문구로 무마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이는 범죄가 아닌가! 명백히 후안 데 빠노니아의 그 문장이 들어간 책 제목 자체가 『환상교의 불합리』, 즉 무변교의 교리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충고였다. 아우렐리아노, 그는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후안은 어릿광대교의 속임수에 넘어간 한 대장장이의 끔찍한 범죄로 분노에 빠진 재판관들 앞에서 자신의 명제를 철회할 수 없음을 끝까지 고집했다. 무엇이 재판의 ‘핀트’였는지를 그 박학했던 이조차 알지 못했다. 전말을 알았더라면 그는 무변교의 전염병적 이단에 빠지는 일은 죽어도 할 수 없다고 강변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걸 몰랐기에 결국 죽었다. 죽을 때까지 지킨 무엇이 있었다. 그렇게 후안 데 빠노니아의 고집은 사흘이나 꺾일 줄 몰랐다. 그는 화형 당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아우렐리아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후안 데 빠노니아의 얼굴을 본다. 하지만 “그는 그 얼굴이 다른 누군가의 얼굴인 듯한 생각이 들었다.”(보르헤스의 책, 63쪽) 하긴 그게 무슨 상관이랴. 쾌유의 감정마저 들었다. 이후의 삶은 마치 자신의 죄를 덜어내려고 하듯 국경과 외지 따위를 전전하며 수행적 삶으로 일관했지만 그럼에도 후안 데 빠노니아를 고발했던 그 범죄를 정당화시키는 것은 도무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보르헤스는 그가 루사디르에서 “시대 착오적”(64쪽) 설교를 했다고 썼는데, 그것이 바로 변론의 일환이었을까? 그러던 아우렐리아노도 불 속에서 죽었다. 히베르니아(아일랜드)의 한 오두막에서 번갯불에 탄 나무들 속에 갇혀 죽은 것이다. 후안 데 빠노니아의 화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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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르헤스는 은유로 소설을 닫을 수밖에 없었노라 고백한다. 그것은 우리가 확인할 길이 없는 화형 이후의 대화, 술회, 혹은 고해 등이 이 소설 뒤에 매달려 있는 까닭이다. ‘하느님’에 대해서는, 더군다나 ‘천국’이라는 곳에 대해서는 글로 아무리 써봤자 알 수 없는 까닭이다. 작가는 말한다. 아니, 후안 데 빠노니아와 아우렐리아노가 왜 같은 뜨거움 속에서 죽었는지, 왜 아우렐리아노가 화형 당하는 후안의 얼굴에서 ‘다른 누군가의 얼굴’을 본 것인지, 그리고 여태 언급했던 무변교도의 윤회, 그리고 어릿광대교의 한 인간을 이루고 있는 두 존재가 무슨 의미였는지 말한다.


    두 사람이 천국에 들어갔다고 가정하고, 보르헤스는 말한다. 정통교도와 이단자, 증오하는 자와 증오를 받는 자, 고발자와 희생자는 한 인간을 이루고 있다. 아우렐리아노는 죽은 후 그걸 깨달았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에서 말한 그 부활 이후의 순간, 즉 ‘주님’의 곁에 앉게 되는 순간, 모든 벽은 허물어지고 수많은 논쟁은 무의미해지며, 화형이 남긴 잿가루의 쌉싸래한 맛만이 남게 된다는 것을. 보르헤스가 보기에 세상은 여러 종파들이 들끓던 4~5세기의 그곳과 별로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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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업 사회 - 일할 수 없는 청년들의 미래
구도 게이.니시다 료스케 지음, 곽유나.오오쿠사 미노루 옮김 / 펜타그램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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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7일 수요일







[소다테아게넷(育て上げネット)에 소개된 책 무업사회(無業社會)]

출처 : http://www.sodateage.net/





    오늘 통계청의 발표가 있었다. <1월 고용동향>을 보면 1월 청년실업률이 2000년(11%) 이후 최고치인 9.5%를 기록했다. 사실 1월 실업률은 2~4월의 실업률이 얼마나 되는지 내다볼 수 있는 부정적 지표의 기준이 되곤 했다. 졸업자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지만 경기침체의 좁은 문에 머리를 들이밀지 못하는 실업자들 역시 그만큼 생기기 때문이다. 과연 그녀/그들은 ‘무능력자’일까? 취업의 문턱에서 주저하는 무기력한 이들일까? 아니면 실업자들을 구조적으로 양산하고 방치하는 사회의 문제인 것일까?


    여러 논의들이 있다. 그 중 일본에서 청년무업자들을 돕는 구도 게이(工藤 啓)와 젊은 학자 니시다 료스케(西田亮介)는 공저『무업사회(無業社會)』에서 이 대규모 문제를 시스템의 문제로 환원한다. 『무업사회』는 취업하지 않은 상태의 청년들에 대한 게으른 이미지가 투영된 사회를 비판함과 동시에 일본 사회의 시스템적 한계 역시 비판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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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업사회는 “누구나 무업 상태가 될 가능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무업 상태에 처하게 되면 그로부터 빠져나오기가 힘든 사회”(구도와 니시다의 책, 26쪽)를 일컫는 용어다. 이를 그림으로 그려보면 직업의 문은 그 안으로가 아니라 밖으로 열려 있으며, 직업의 둘레에는 여러 깊은 구렁텅이들이 있는 모습이 된다. 물론 이러한 모습은 어느 시대에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저자는 분명하게 말한다. “현재 청년 세대 앞에 놓인 상황은 과거의 어느 세대도 경험하지 못했던 상황”(180쪽)이며, 따라서 기존 세대들은 그녀/그들이 단지 게으르고 정신이 박약해서, 그리하여 도전 정신이 없어서 직업의 문을 두드리지 않는 것으로 곡해하곤 한다. 하지만 시대가 다르다. 지금은 지속적인 고도성장과 베이비붐으로 물적·인적 상승이 동반되던 옛날이 아니다.


    일본도 우리와 사정이 비슷하다. 저출산과 경기침체가 이어지고 있다. 거품이 빠지면서 일본 사회가 겪었던 충격은 대단했다. “고도경제성장기와 같이 개인과 사회의 계속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32쪽) 일본은 장기 채무 잔고가 약 1천조 엔에 육박한다. (우리나라는 이달 5일 기준으로 국가채무가 600조 원을 돌파했다.) 국가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청년 세대를 납세의 주체로 만드는 건 거의 흥망이 걸린 문제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일본과 같은 저출산 저성장 국가들은 일단 정점을 찍은 이후 한없이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재정파탄으로 인한 온갖 사회 문제들이 수면 위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밖에 없다. 성장이 국제 경기 악화로 멈췄던 적은 있었다. 하지만 저출산이 동반되어 인구 피라미드의 하체가 약해지는 상황이 덧붙여진 사례는 없었다. 국가는 무업사회를 분명한 문제로 보고 있으며,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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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업자 개인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무업상태가 지속되면 인간관계에 대한 의욕이 떨어지고, 그로 인해 고립되다 보면 동기부여도, 자극도 받기 힘들다. 지나치게 실패에만 신경 쓰게 된다. 무업기간이 길어져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고립은 심화되며, 두 저자에 따르면 무업기간이 3년 이상일수록 취업 방법을 모색하려는 무업자의 판단 능력이 떨어지는 듯도 하다. 그런 그녀/그들이 어쩔 수 없이 모이는 곳은 다름 아닌 도서관이다. 대학 도서관에는 별도로 취업준비생들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매캐한 고민의 냄새가 가득한 곳. 흡연실에서는 한숨을 연기로 뿜어대는 이들이 긍정과 부정 사이를 오간다. 그곳은 공부의 공간이자, 돈이 그다지 필요 없는 무료의 공간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대학은 잠들어도 도서관은 낮과 밤이 분명치 않다.


    아무 일이나 하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중소기업에는 일자리가 넘쳐나니 그곳에라도 들어가서 일단 일을 시작하라고 조언해주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제각각 개성에 따라 재능과 적성에 걸맞은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이”(98쪽) 있다. 일하다가 골병드는 것이 가장 무식한 일이라고 어른들에게 들어왔다. 무리한 취직이 한 사람의 삶을 망칠 수도 있다. 어른들도 어느 매체든 설문조사를 할 때면 이렇게 대답한다. 직장 우울증 때문에 살기 힘들다고. 그래도 참는 그녀/그들의 생활력은 나 같은 청년이 보면 참 존경할 만한 일이지만, 청년의 입장에서 본 문제는 그런 게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세대는 중등교육 과정부터 충분히 겁을 먹어왔다. 우리는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학원들의 대나무 숲에서 날카로운 바람을 맞아가며 함께 성장한 세대다. 무엇을 배웠으며, 무엇을 알게 되었는가.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는 너무 빠르게 성장했다.


    구도 게이와 니시다 료스케는 고도성장 정지 이후 일본에 등장한 ‘약자로서의 청년 세대’(145쪽)라는 표현을 쓴다. <취직 빙하기>라는 무시무시한 용어는 90년대 말부터 일본에 있었고, 이후 2000년대부터는 고립무원(SNEP) 세대가 증가했다. 당시 일본은 국가적 차원에서 취업지원을 해주기 위해 기관 산하 여러 단체들을 운영했는데, 10년이 넘은 지금도 그 성과가 거의 없는 모양이다. 두 저자는 회사 차원의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지만 사실 구도 게이가 운영하는 소다테아게넷(育て上げネット)과 같은 지원 단체에서 도움을 받아도 막상 취업 이후의 상황은 또 다르니 문제다. 아마 구도는 열심히 키워 떠나보낸 딸/아들 같은 청년들이 다시 튕겨져 돌아오는 사례들을 수없이 보며 사회의 장벽을 무수히 탓했을지도 모른다. “현재 청년 무업자를 대상으로 상담이 가능한 공적 기관은 거의 없다.”(116쪽) 이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충분치 않은 국가의 관심을 지적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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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일본의 상황은 그렇게 된 것일까? 이 문제를 들여다보면서 느낀 건 우리와 거의 다르지 않은 사회구조적 배경이다. 두 저자가 ‘일본형 시스템’이라 부르며 지적한 폐해들은 우리나라에도 있다. 당연할 수밖에 없다. 신규졸업자 일괄채용, 종신고용, 연공서열형 임근, 기업별 노동조합 등을 특징으로 하는 일본적 경영은 우리와 다르지 않으며, 나 역시 튕겨져 나왔다가 재진입이 어렵다고 토로하는 주변의 청년들은 여럿 만나왔다. 기업문화에 맞춰 취업준비를 하게 되기 때문에 다른 문화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며, 심지어 그런 문화에는 들어갈 가치가 없다고 무시하는 이들도 있다. 고학력자일수록 더욱 그럴 것이다. 복지도 문제다. 가입을 강요당하지만 정작 가입 후 자기 책임이 큰 연금제도는 사회경제 발전을 배경으로 설립된 것. 발전이 더뎌지는 와중에는 임기대응으로 방편을 칠 수밖에 없다. 부모님께서도 연금의 폐해에 대해 불만이 많으시다. 모든 어른들이 이 불만에 공감할 것이다. 소수의 특권을 지닌 이들이 아니라면. (오늘도 ‘갑질’ 기사 하나가 뜨거운 논란거리다.)


    국가는 복지를 위해 어떻게든 수입을 늘려야 한다. 워낙 엉뚱한 곳에, 전시행정이나 해외투자 같은 국민의 비난 대상이 되는 분야에 지출하는 양이 터무니없이 많아 일단 그런 행태들을 감시하는 국민이 되어야겠지만, 국민은 일단 국가에게 납세의 의무를 지니고 있는 구성원이다. “국가가 해주는 게 뭐가 있어!”라든지 “헬조선!”이라고 하면 딱히 반박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일단 개념 자체는 그렇다. 따라서 국가도 적극적으로 청년무업 문제에 관여해야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문제에 대한 논의는 NPO 선상에서만 활발하다. 이들은 부분적인 해결책만 내놓을 수 있을 뿐이다. 그 사례들은 『무업사회』에도 충분히 실려 있다. 긴급구제, 취직독려, 재진입시스템 구축 등의 대규모 정책은 국가가 도맡아야 한다. 아니, 적어도 NPO보다는 훨씬 규모가 큰 단체가 맡아야 한다. 실천할 의지가 있는 단체가 맡아야 한다. 두 저자는 해결 방안이 그것 “이외에는 없다.”(174쪽)고 단언한다. 더불어 청년무업자들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 인식에도 변화를 촉구한다.


    정책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한 예로 일본 아베 내각 1기 때에는 ‘재도전 담당 장관’이라는 신선한 정책이 제시된 바 있었다고 한다.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두 저자는 그와 같은 정부의 적극적인 제스처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라고 해서 우리와 크게 다르진 않은 듯하다. “칸막이 행정의 폐해를 제거”(184쪽)해달라고 부탁하는 저자들의 목소리에서 어딘가 김이 빠지는 풍선 사회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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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 모두 싣지 못하는 NPO의 현장은 구도와 마츠오 사아키 교수의 대담에서 분명히 느껴진다. 구도와 같이 “현장을 터전으로 삼고 있는”(189쪽) 이들의 노력으로 직장에 잘 정착한 이들의 사례도 이 책에 실려 있다. 하지만 왜 그러한 움직임은 국가 주도로 실천되지 못하는가. 기업에는 애당초 기대하지 않는다. 기업은 ‘국민’이라는 주체에 대한 책무를 이행하지 않고 국가 밖으로 빠져나가도 상관없는 단체다. 기업윤리와 국가윤리는 다른 차원에 있다. 반면, 국가는 국민이 탄 배다. 그러나 지금 정치권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정치가 ‘정치만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되는 것처럼 그 공간을 감싸고 있다. 『무업사회』에서 마주하게 되는 답답한 분위기는 충분히 우리들의 것일 수 있다.


    『무업사회』에는 수많은 통계들이 나온다. 0과 1로 이뤄진 데이터들. 하지만 구도 게이는 그 뒤에 숨겨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그 응축된 의미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인본(人本)의 취지인 것이다. 국가가 이런 말을 하고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시대를 바라는 건, 정치와 사회를 잘 모르는 지나친 순진한 바람일 뿐일까. 모르겠다. 무수한 비난들 속에서, 나는 되도록 이 사회를, 이 시간과 이 공간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건 결코 긍정일 수가 없다. 기대를 저버리는 정책자들의 무능과 근근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그리고 우리 시대의 정신을 떠받치고 있는 수많은 실천들 사이에서 바라볼 뿐이다.


    구도 게이는 한 사람의 청년을 취업시키는 많은 시간과 노력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한 사람을 위해 이렇게까지 많은 수고와 시간을 들여야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나의 대답은 늘 ‘그렇다’이다.”(298쪽) 그처럼 사회적 가치를 실현해고자 재야에서 노력하는 우리나라의 많은 분들의 노고에 고개를 숙이듯 이 책을 덮는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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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6일 화요일




    보르헤스의 감옥에 갇혀 나흘을 보내고, 나는 계시라도 받은 듯 재규어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계시라니… 불똥이 손등에 튀기라도 한 것처럼, 기름 위로 옮겨 붙는 불의 속도로 수십 장을 써내려가다 마침표의 끝을 잡아 휴지통으로 밀어 넣었다. (아래의 바탕체 글은 그 휴지통에서 발견된 화석 문자의 파편들을 해독한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지 않을 무수한 글들 사이로 감옥의 재규어도 목숨을 다해 사라졌다. 보르헤스의「신의 글(원제 : La escritura del dios)」은 재규어가 갇혀 있던 감옥의 다른 쪽 편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늙은 남자, ‘치나깐’이라는 이름의 피라미드 마술사가 쏟아내는 근원적 비밀에 관한 짧은 이야기다.


    나, 재규어는 감옥에 있다. 원주민들은 뻬드로 데 알바라도에게 제물을 바쳐 그의 노여움을 피할 생각으로 내게 떼거지로 덤벼들었다. 돌로 된 감옥은 깊다. 재단된 돌들로 보건대, 이건 분명 사람들이 만든 것이지만 언제 파내려가고 쌓아 올린 것인지를 내가 알 길은 없다. 그건 2등분된 이 감옥 다른 쪽에서 허약하기 짝이 없는 몸뚱이를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는 늙은 남자도 마찬가지다.


    꼬르테스의 부하인 알바라도가 사원을 파괴하고 치나깐을 잡아 감옥에 가둔다. 이 사제(마술사)는 한 마리의 재규어와 함께 거대한 반구(半球) 안에 갇혀 늙어간다. 시간을 보내야 하는 단순함과의 사투, 그것을 위해 치나깐은 수많은 것들을 기억해내다가 문득 신이 지었다고 알려진 “마술적인 문장 하나”(보르헤스, 황병하 옮김,『알렙』, 165쪽)에 집중한다. 그는 사제였으니. 그리하여 변하지 않은 것이 이 세상에 무엇이 있는가를 떠올리다가 반대편 감옥에 있는 재규어를 바라본다. 재규어의 무늬를.


    왜 치나깐은 재규어를 신의 징표라고 생각한 것일까. 과연 재규어의 무늬가, 보기에도 현기증 나는 그 경이로운 무늬가 “변천과 패망을 겪고” “노쇠해”가는 개별적인 것들보다 영원한 것인가. 그럴 순 없다. 나는 재규어의 목소리를 빌려 쓴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재규어들은 반짝이는 물건이나 예리한 날 따위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사납게 사냥감을 덮치되, 예의 신성한 대지의 일자를 향한 흠숭은 변치 않는다. 나 또한 죽을 것이고, 이 비밀의 가죽은 다른 누군가의 동맥 속을 맹렬히 흐르는 숨결이 될 것을, 나는 안다. 인간만이 모르고 있다. 치나깐은 미쳐버린 것이 아닐까. 영원을 빙자한 재규어들의 교미와 출산과 그 무한한 생산의 그물망에 신이 메시지를 새겨 넣었다니… “재규어들의 살아 있는 껍질”에 신의 문장이 있다니… 치나깐은 감옥에서 몇 해를 살았는가. 알 수 없다. 보르헤스는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이 사제는 신의 글에 사로잡혀 있다. 무엇이 그를 미궁으로 몰아넣었을까. 물론 감옥에 있는 처지가 문자 그대로 그를 사로잡고 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는 사제였다. 신의 뜻을 좇는 이. “재규어라는 구체적인 수수께끼보다 신이 쓴 문장의 본질적인 수수께끼가 나로 하여금 더욱 안달이 나도록 만들었다.”(보르헤스, 167쪽) 그 문장이 명백하고도 즉각적으로 드러날 것이라는 치나깐의 믿음에는 조바심이 가득하다. 그렇다. 이 노인은 오랜 시간 감옥에 있었고, 곧 죽을 것이다. 머지않아 사라짐, 그것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죽음일 것이다. 감옥의 비현실 속에서 무너지고, 그는 꿈을 꾼다.


    저 늙은이도 젊은 시절, 즉 생기가 돌고 피가 끓어 내게 더할 나위 없는 좋은 먹잇감이었던 시절에는 밤마다 고함을 치며 울었다. 하지만 언제나 나의 인내보다 훨씬 빨리 지쳐 쓰러졌고, 낮이 되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낮과 밤을 구별할 줄 모르는 자였다. 인간은 어둠 속에 있으면 가장 중요한 것부터 잃고, 종내에는 모든 걸 잃어버린다. 나는 저 불쌍한 동물이 허덕이며 지쳐가는 모습을 보고 아주 오래 전 저자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치나깐은 모래들에게 질식당하는, 모래들이 입을 무너뜨리는 꿈을 꾸다가 깨어난다. 그 꿈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너는 깨어나기도 전에 질식해서 죽을 것이다. “모래의 숫자처럼 꿈 또한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보르헤스의 글, 168쪽) 하지만 사제는 깬다. 치나깐은 현실에 감사한다. 처음 감옥에 들어왔을 때 저주와 분노를 퍼부었던 그 모든 것에 감사한다. 그것은 生에 대한 감사인가? 그럴 것이다. 죽음을 머금은 꿈에서 깨어남과 함께 다시 태어난, 치나깐의 새로운 삶에 대한 감사일 것이다. 지독한 악몽에서 벗어나 새 사람이 되었다. 그것은 합일이었다. 역자 황병하 씨는 보르헤스가 불교의 입을 빌려 치나깐의 꿈과 깨달음을 소설에 재현해냈다고 풀어썼다. 동감한다. 헤세의『싯다르타』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깨달음은 시공을 가리지 않고 “모든 곳에 동시에” 있는 무언가에 대한 깨달음. 그 우주의 구성 방식을 알아 느끼게 되는 기쁨이 이후 몰려온다.


    그 순간 치나깐은 그토록 들여다봤던 재규어의 무늬 속 신의 글을 읽어낸다. 그것은 무작위로 된 40음절, 14개의 단어다. 전지전능의 길로 갈 수 있는 암호다. 여태 그것을 읽어낸 이는 치나깐이 유일할지도 모른다. 그는 무시무시한 힘을 갖게 되었다. 석조 감옥을 무너뜨려 늘 어둠뿐이던 그에게 낮을 선사할 수 있는 힘, 무병장수와 불로장생의 힘, 재규어가 알바라도를 죽일 수 있는 힘, 피라미드와 제국의 재건을 가능케 하는 힘, 스페인으로부터 아스테카 제국의 영토를 되찾는 힘… 그러나 그것이 과연 신의 글이 치나깐에게 허락한 힘이 될 수 있을까? “신들의 뒤에 있는 얼굴 없는 신”(보르헤스의 글, 170쪽)을 봤다는 치나깐이, 그리하여 합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치나깐이 깨달음 뒤에 쏟아내고 있는 건 온통 복수와 해방, 그리고 되돌림에 대한 것뿐이다. 그는 아직도 감옥의 궁륭 안에 있다. 깨달음이 그를 새 사람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실패의 꿈이었다.


    그리고 끝까지 실패한다. 치나깐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감옥 안에 갇혀, 아니, 인간의 육신 안에 갇혀 진리의 말을 내뱉지 못한다. “우주의 타오르는 구조들을 보았던 사람”(보르헤스의 글, 171쪽)이라고 해도 그 말을 읊는 순간 예전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완전한 자가 된다. 그런 것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진리의 사람. 그녀/그를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무도 아닌 그런 존재”인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치나깐은 말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의미는 미련을 낳는다. 미련이 결국 더욱 커져서 의미가 그 밑에 깔린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우리의 삶을 ‘감옥’이라고 부른다면, 그 감옥에서 우리는 미련의 대기를 마시고 내뱉으며 산다. 깨달음은 원형 천장의 뚜껑을 열고 나가는 일. 우리는 나가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버릇처럼 말하고는 하지만 정말 나가고 싶어 하는 것일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은 그저 사람이고 싶은 존재일 뿐인 것은 아닐까.


    치나깐은 궁륭에 갇혀 있다. 이 감옥, 실은 언어로 되어 있는 감옥이다. 말만 뱉으면 나갈 수 있으며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물리적으로 속박하지 않으나, 우리가 탈출하려고 하지 않는 감옥이다. 그걸 ‘신의 말’이라 부른다.


    “이 최초의 언어는 지상의 모든 소리들 위에 궁륭을 만들었고, 자연 전체의 모든 목소리들이 그 안에 함께 모였다. 지상에서 솟아오르는 모든 것이 하늘의 궁륭에 수용되듯이, 지상의 모든 음성들은 언어라는 그 한 하늘에 수용되었다. 모든 음성들이 그 언어의 하늘 속으로 들어가서 그 일부가 되었고, 따라서 그 하늘 안에서는 어떠한 음성도 이해되었다.”(막스 피카르트, 최승자 시인 옮김,『침묵의 세계』, 63쪽)


    피카르트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지만, 이 말을 치나깐이 갇힌 감옥에 가져다대면 근사한 비극이 완성된다. 40음절 14개의 단어로 된 “억눌림과 광대함의 느낌”(보르헤스의 글, 163쪽)은 인간의 삶이며, 그 비극 안에서만 인간은 의미가 있다. 깨달음은 의미망을 벗어나는 일이다. 신의 글은 아무 의미도 없다. 철저하게 인간이고 싶다면 우리는 언젠가 치나깐과 같은 고민과 그 끝에서 만나는 기나긴 침묵을 끌어안게 된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사자(死者)가 된다. 하늘은 높다. 어디까지고 언어가 그 안을 채운다. 치나깐이 내뱉지 않은 말은 어디에라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쉽게 볼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은 차라리 비극 중 다행이다. 보르헤스는 그걸 알려준다. 신의 글을 아는 자는 끝내 침묵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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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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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5일 월요일




    들라크루아는 허풍쟁이였던 모양이다. 하루는 이런 말을 했다. 옥상에서 떨어뜨린 물건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까지 그걸 그려내지 못하는 이는 화가라고 부를 수 없다고. 머릿속의 물건이 아니라, 실제 낙하 중인 물건을 눈에 담아 그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는가? 눈으로 좇기에도 벅찬 그 짧은 시간, 말 그대로 ‘순간’이 아닌가 말이다. 그동안 대체 뭘 그리라는 것인가?


    사실 들라크루아는 떨어지는 것이 ‘물건’이 아니라 ‘남자’라고 했다. 그가 남긴 진짜 말은 이렇다.


    “창문에서 뛰어내린 남자가 있다. 그가 4층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데, 그 사이에 그를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영어로는 draw가 아니라 sketch로 번역됐다. 그리는 속도가 빠르다는 뜻) 숙련되어 있지 않다면, 당신은 결코 걸작을 만들어낼 수가 없을 것이다.”


    화가란 어떤 사람인가? 수많은 철학자, 평론가, 미술학자들의 정의가 있었고, 그보다 훨씬 많은 화가들이 있었다. 미술을 공부하면서 나는 ‘나에게 화가는?’이라는 질문에 답하려고 했다. 안에서 찾으려고 했다. 그것은 미술을 바라보는 나를 다듬어줄 작업이었다. 그런 와중에 들라크루아의 말을 만났고, 어렴풋이 아틀리에의 지독한 유화 냄새가 코에 스쳤다. 그림 한 점 걸려 있지 않은 방에서 수 년 간 미술을 공부하던 한 청년에게 화가는 그런 존재였다. 춤추듯 날아가는 창밖의 새 한 쌍을 우연히 본 화가. 그녀/그는 황급히 화구(畵具)들을 챙겨 들판으로 뛰어가거나 골목 굽이굽이를 하늘만 바라보며 돈다. 고백하건대, 나는 수많은 완성작들보다는 대가들의 드로잉과 스케치를 보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흑연의 매캐한 광물 냄새에서 피어오르는 눈의 세계. 내가 보는 미술은 그렇다.



*   *   *



    그림을 읽어야 하는 입장에서 늘 생각하는 건 도대체 알 수 없는, 번뜩이는 창조의 순간이다. 물론 창조의 작업을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얼마간 시도 썼었고, 지금은 글도 쓴다. 부모님 덕분에 일찍 음악을 배워 선율을 다룰 줄 알고, 따지고 보면 그림을 아주 못 그리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글을 빼면, 도무지 오랜 반복과 깊은 숙련을 해본 것이 없어서 책에 실린 모습 이면의 예술이 내게 속살을 드러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생각해보니, 글도 모르겠다. 독자의 삶으로 적잖은 걸 읽고 생각하고 썼지만 도대체 나는 무엇을 알고 그런 작업을 반복하고 있는 것인지, 그마저도 모르겠다. 요컨대, 창조가 궁금한 것이다. 그 앞에서는 흡사 관음증 환자처럼 어디 들여다볼 구멍은 없는가, 기웃거리게 된다. 모든 작업은 극도로 은밀하다. 정말 은밀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아쉬워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된 거, 그림을 ‘읽을’ 수밖에 없게 된 거,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작정했던 것이다. 대학 도서관의 도판들은 너무 작았다. 차라리 확대할 수 있는 모니터로 보는 것이 나아 그렇게 했더니 몇 주 사이에 그냥 눈이 침침해졌다. 그렇게 몇 년을 하다 보니 화가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눈 여겨 본다는 말은 쉽게 쓸 만한 것이 아니다. 작은 색점 위에, 아니 정확히 위는 아니고 그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살짝 빗겨나간 또 다른, 아랫것보다 조금 더 밝은 색점이 있다. 그것을 멀리서보면 화폭 속으로 뚫고 들어오는, 화가가 그 오랜 옛날에 봤던 빛이다. 빛줄기이자, 그 빛을 튕겨낸 한 물체의 표면이다. 미술은 내게 본다는 것의 여러 의미들 중에서 가장 묵직한 뭔가를 알려줬다. 화가는 어두운 우물 속에서도 빛을 볼 것이고, 글자에서도 그림을 찾을 것이다. 어차피 ‘쓴다’는 것은 ‘그린다’는 것 안에 포함되는 말이니까.


    미술은 이렇게 의미하는 바가 많다. 한 번 보고 아름답다고 느껴 그 감정을 여러 번 누리고자 전시관을 찾거나 도록을 사서 보는 것도 좋다. 아니, 좋은 일이다. 그런 사람은 그럴 줄 모르거나 그럴 수 없는 사람보다 더 풍성한 과일 바구니를 손에 쥔 사람이다. 다채로운 향은 삶의 사계를 만들어준다. 하지만 미술에서 감정만 느끼거나 향기만 맡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과는 또 다른 일이 있다. 바로 미술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는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닌 ‘읽는 것’을 통해 가능하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조금의 노력과 조금의 도움이 필요하다.


    조이한과 진중권의 『천천히 그림 읽기』에 이어 옛 공부를 추억하며 두 번째 책을 추천한다. 진중권의 『교수대 위의 까치』다. 그러고 보니 또 진중권이다. 추궁해도 어쩔 수 없다. 추천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나는 기존의 이야기들을 밋밋하게 재탕하는 책들은 읽지 않는다. 다행이도 미술은 오래도록 붙잡고 있었던 분야라 관련 신간이 나오면 들춰보는데, 몇몇 국내 저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근래 들어는 도판을 많이 넣어 책값만 올리고 내용은 그 값을 전혀 못하는 책들이 많다. 미국과 일본에서 번역되어 들어오는 책들의 높은 수준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가뜩이나 신간이 적다는 게 이쪽의 문제인데. 아쉬움을 달래며 서재를 돌아다녀본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어르신들의 말을 따라하고 싶은 건 아니나, 나에게도 믿고 읽는 저자들이 생긴 모양이다. 이 추천은 미술을 훑는 이들보다는 좀 더 깊어지는 눈을 추구하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   *   *



    어떤 분이 내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나는 너무나도 어려운 현대미술의 이론과 미학을 보고는 ‘그래 네가 얼마나 어려운데 그렇게나 악명이 높은지 한 번 보자.’라는 생각에 악에 받쳐 미술공부를 시작했어요.” 현대미술은 물론이고 미술 다방면의 책을 낸 분의 조언이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미술 공부를 할 적에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못했다고 해야 적당한 표현일 것이다. 그분은 미술을 ‘뚫어’보려고 공부를 시작하셨지만 나는 경우가 달랐다. 호주 어학연수 시절에 본 풍경화들의 경이로움.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해변의 수도승(Der Mönch am Meer)>을 봤을 때 느낀 감정 같은 것. 앙(仰), 숭(崇), 존(尊) 등의 오래된 신성한 느낌. 시드니의 성 메리 대성당에 들어갔을 때 나에게 달려들던 그 압도의 순간들. 요컨대 미술은 분명하게, 아주 선명하게 인상을 남기고 떠나갔다. 미술이론을 공부하게 된 건 훨씬 후의 일이다.


    하지만 내게 다가왔던, 미술을 전혀 모르던 어린 고등학생에게 쏟아졌던 어떤 감정들은 미술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공부를 하며 알게 됐다. 나의 체험은 진중권의 이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관객은 작품으로부터 정서적 감동을 받거나, 지각적 쾌감을 얻거나, 지성적 자극을 받거나, 그리 흔하지는 않지만 가끔 영성의 울림을 얻기도 한다.”(진중권의 책, 15쪽) 가장 후자의 경험은 시대가 지날수록 (전혀 특권인 것이 아닌데도) 소수의 특권처럼 회자될 것이지만 제임스 엘킨스의 『그림과 눈물(원제 :Pictures & Tears)』을 읽어보면 대단히 낯설거나 동떨어진 것은 아닌 듯도 하다. 여하튼 나의 경우는 정서적 감동에서 시작해 지각적 쾌감을 얻었고, 지금은 지성적 자극을 받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정서적 감동에 머물기를 좋아하며 원한다.


    『교수대 위의 까치』는 그런 이들이 2번 지각적 쾌감에서 3번 지성적 자극으로 넘어가도록 독려할 수 있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양서(良書)’라고 부르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일단 진중권의 미학책은 제외하자. 그의 다른 책들을 읽어본 거의 모든 독자들은 동의할 것이다. 쓸모없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간략하게 쓰는 것 같은데 잘 읽어보면 요약이 아니다. 할 말을 다 하면서도 분명한 임팩트가 매 장 있다. 전문적인 미술사/미학 원서들에는 저자 자신의 주장을 보호하기 위한 수많은 사례들과 (기존 권위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기 위한 장치인) 에두른 말들, 그리고 중언들이 많다. 그런 것들에 비하면 이 책은 군더더기가 없다. 그렇다고 인용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 책 표지에는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 읽기’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자칫 그가 아주 다른 시선으로 작품을 보는 것처럼 선전이 되어 있는데, 이는 곡해의 소지가 있다. 그가 펼치는 사유의 놀이는 다른 학자들의 이론과 기존의 시각 이곳저곳에 걸쳐 있다. 그만의 놀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림을 ‘읽는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일단 이 책을 읽기 전에 여기 실린 작품들을 눈으로 직접 보라.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린다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아니, 미술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매력이 없는 퍼즐조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장담컨대 그런 신기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도 다 단련의 일이다. 굉장히 두꺼운 고서를 판독하는 파놉스키의 사진을 언젠가 본 일이 있는데, 그 모습은 한 학자가 작품을 둘러싼 세계와 그 의미망을 알아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독과 겨루는지를 보여준다. 진중권은 그 고독의 시간이 빚은 오랜 전통 위에 서서, 자신이 지적으로 호기심을 가졌던 여러 작품들을 배열해놓고 우리를 열두 장의 놀이 무대에 초대한다. 그렇다면 그 놀이에서 그는 전적으로 우리보다 우위에 있는가? 그럴 순 없다. 누구나 이길 수 있는 무대다. 단, 그처럼 충분한 근거를 카드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 독자들은 그 놀이법을 알게 된다. 그것도 무려 열두 번에 걸쳐서. 모든 판을 옮겨놓을 수는 없으니 그 중 가장 오래 발붙여본 무대만 골라서 밑에 적어본다.



*   *   *



    화가도 사람이다. 숨기고 싶은 것이 있다. 그래서 그림에 숨긴다. 화가도 사람이다. 시대 속에 산다. 그 시대의 눈을 떠나지 못하므로 표현도 얼마간 제약을 받는다. 그래서 그렇게 그릴 수밖에 없다. 이 당연하고도 쉬운 말을 간과하지 않으면 그리다 만 것 같은 작품도 뭘 그리려고 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제 1장에 소개된 <조롱당하는 그리스도>의 해석은 우리에게 교훈을 줄 만한 훌륭한 사례다. 내게 백의(白衣)의 화가로 기억되는 프라 안젤리코는 이 그림 속에 여러 개의 ‘주인 없는 손’을 그렸다. 실수일 리는 없다. 그가 실수할 리는 없다. 실수라고 생각하는 관람자도 아마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왜 그렇게 그렸는지를 들여다봐야 한다. 답은 “다 그리지 않아도 당시 사람들은 알아봤다.”라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지만 진중권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중세인이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것을, 오늘날 우리는 스크린 위에 고해상의 동영상으로 투사한다. 이를 우리는 ‘발전’이라 부르나, 그 발전이 얼마나 바람직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영화의 해상도가 높아질수록 외려 관객의 상상력은 줄어드는 게 아닐까?”(진중권의 책, 33~34쪽) 상상은 피안(彼岸)을 바라보는 자의 것이리니……


    제 6장으로 가면 ‘역행하는 미술’이라는 희한한 현상을 볼 수 있다. 피카소는 괴상한 화가였다. 기존의 대가들과 다른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대가들과는 ‘다르게’, 어떻게든 빤하지 않게 그리려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그렸다. 그의 중심에는 ‘아프리카’라는 단어가 있었다. 아프리카 공예품들을 전시한 곳에 가서 그가 받은 쇼크는 현대미술의 중대한 사건을 예비했다. 오른손을 버리고 왼손으로도 그렸다. 자신을 화가의 반열에 올려준 첫 번째 계단인 유년의 뛰어났던 회화 실력을 완전히 잘라내려고 했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는 비단 피카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20세기 초반의 기이한 현상과 함께 화가들이 주목한 건 그야말로 괴짜였다. 정신병원의 환자들이 그린 작품에서 영감을 받거나 직접 마약을 하기도 했다. 다르게 그린다는 건 그 정도로 어렵고도 심각한 문제다.


    진중권은 카로토가 그린 한 점의 작품에서 시작해 ‘진화론적 사고’를 전복시킨 20세기 회화까지 단숨에 뛰어간다. 우리의 손에는 미술사학자인 리글의 ‘의지(wollen)’라는 단어가 쥐어진다. 기억하자. 화가에게는 능력이 아닌 의지가 중심이 된다. 만약 A와 같이 그렸다면 그건 A밖에 그릴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A처럼 그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129쪽에 나온 뒤뷔페의 작품은 현대미술을 비난하는 일부 대중들에게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될 만하다. 하지만 미술은 이제 더 이상 재현(representation)이라 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대체 언제까지 우려먹을 셈인가! 현대미술의 현상은 고전미학의 시체를 밟고 올라선 거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화가를 ‘의지를 가진 존재’로 바로 볼 수 있다면, 그리고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현대미술의 도래 이후 지금까지도 우리가 쉽게 하지 못하는 그 일을 해낼 수만 있다면, 현대미술은 우리에게 훨씬 넓은 품을 열어줄 것이다. 하지만 결단코 그것은 우리에게 다가오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낯섦을 잃으면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이 어려우니 쉽게 설명해주겠다고? 그런 어리석은 말이 또 어디 있는가.



*   *   *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광인의 배(여기서는 푸코에 대한 지식이 살짝 도움이 되지만 몰라도 상관은 없다.), 화가와 주체 사이의 표현 이야기, 풍경화가 역사화로 뒤바뀐 이상한 해석 이야기, 트롱프뢰유, 도상과 엠블럼, 해석 논쟁의 장 앞에서 현대의 새로운 장을 마련해준 고야의 <개>를 둘러싼 이야기…… ‘보는 것’을 궁금해 하는 독자들에게 미술 이외의 이야기들과 함께 잘 버무려져 있다. 엮고 풀어나가는 저자의 방식이야말로 ‘독창적’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또 하나. 이 책에서 각 장을 여는 작품들 중 서양미술을 교양 삼아 배우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건, 조르조네의 <템페스트(La Tempesta)>, 파르미자니노의 <목이 긴 성모(Madonna dal collo lungo)>, 티치아노의 <신중함의 알레고리(Allegoria della Prudenza)> 정도일 것이다. 판화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뒤러의 작품이 알려진 정도까지. 간간이 유명한 작품들이 양념처럼 나와 이해를 돕긴 한다. 이렇듯 정통 미술사에서도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던, 그리하여 대중에게 별로 알려주지 않았던 작품들을 골라 그 위에 지적 호기심의 그물을 쳐놓은 진중권의 솜씨에도 감탄할 수밖에 없다. 일개 독자가 그에게 ‘솜씨’라는 표현을 쓰니 발칙해 보이지만, 아마 미술 공부한 사람들은 동감할 것이다. 이 작품들을 이런 식으로 마름질해서 소개하는 건, ‘스투디움’ 속에 ‘푼크툼’을 씨줄과 날줄로 엮는 건 무릎을 칠 만한 능력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재단의 기술을 지닌 저자는, 국내로만 한정해놓고 보자면 거의 없다. 『천천히 그림 읽기』 추천글에서도 쓴 말을 여기서도 다시 하겠는데, “단순한 지식 나열에다가 화려한 컬러도판들, 깔끔한 도표 정리와 가독성 좋거나 특이한 폰트들로 치장한 작금의 미술 상식책들”은 우리의 폭을 넓혀줄 수 없다.


    “때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작품에 대한 표준적 해석을 넘어서는 직관을 제공해줄 때, 관객은 남이 찾아놓은 의미를 재확인하는 수준을 넘어 스스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게 된다.”(진중권의 책, 22쪽)


    내가 미술 상식책에 의존하는 공부를 오래 전에 관둔 건, 미술이 그보다 훨씬 깊은 우물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철학자도 아니면서 이런 말 쓰긴 창피하지만, 나에게도 분명한 전회(轉回)가 있었다. 그렇게 한 바퀴를 구르고 나니 한 손에는 어떤 종류의 무기가 들려 있었다. 해석의 권위에 대항하는 무기. 물론 기존의 해석들은 훌륭하다. 더할 나위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작품 하나에서 읽어낼 수 있는 세계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게 해주며,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함부로 넘보지 말라.”라고 엄중히 경고하는 듯도 하다. 세상을 깊이 알아본다는 것이 호기심만으로는 도저히 버틸 만한 작업이 아니듯이.


    하지만 진중권은 분명 푼크툼을, 우리가 작품에서 느끼게 되는 그 사적인 경험을, 작품과 나 사이의 고독한 관계 속에서 느끼는 경험을 재고해보라고 한다. 재고라니, 대체 무슨 뜻일까? 아니, 그것이 우리에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의 제목은 ‘교수대 위의 까치’. 제 5장의 놀이 무대에서 만날 수 있는 브뤼헐의 작품명이다. 진중권은 그 작품에서 뒤집어진 세상을 보는 브뤼헐의 날카로운 시선을 읽어낸다. “온갖 부조리와 불합리로 가득”(115쪽) 찬 세상이 기이한 모양을 한 교수대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브뤼헐이 그렇게 세상을 보기에 교수대가 3차원 공간에서는 불가능한 모양으로 ‘그려진 것’이라는 해석이다. 나는 진중권이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해왔다.


    작가는 세상을 보고 그림을 그린다. 우리는 그림을 보고 세상을 본다. 작가가 저마다 다르게 세상을 보는 것처럼 우리도 저마다 다르게 그림을 본다. 그리고 둘은 그림에서 만난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 과정에서 해석은 열린다.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본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교수대 위의 까치(De ekster op de galg)>의 교수대가 3차원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브뤼헐은 교수대의 왼쪽 기둥을 교묘하게 안에서 바깥으로 휘어지게 그려 우리의 눈에 약간의 착란을 일으킨다. 기둥 그 자체도 고르게 굵지 않아서 (자세히 보면 왼쪽 기둥의 배 부분이 머리 부분보다 미세하게 굵다.) 원근을 깬다. 그런데도 진중권은 교수대에서 부조리를 읽는다. 아니, 부조리를 브뤼헐이 그렸다고 읽는다. 그걸 잘못됐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그 반대다. 브뤼헐은 이미 죽었고, 작품은 해석의 눈앞에 놓여 있다. 그리고 우리의 이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부조리하지 않은가. 이 해석은 진중권의 푼크툼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스투디움에서 비롯된 것일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미술을 읽는다는 건 그런 가치를 지닌다. 이 책에서 자신의 반쪽을 찾아내길. 독자들에게 이 책을 건네는 내 마음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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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15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의 교수대위의 까치였군요. 진중권 문화평론가는 글 하나는 잘 쓰는 평론가입니다. ㅋㅋ
 

2016년 2월 13일 토요일



    나에게도 박준의 <미인>이 있었다. 그러나 <미인>이 마음에 앉으니, 언어보다 훨씬 선명한 걸 알게 됐다. 그것은 차라리 소리. 갇힌 공간에서 끊임없이 울려 돌고 도는 음성이었으며, 나는 그 감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언어의 그물은 자주 찢어졌다. 잡히는 것도 없는데 허구한 날 찢어졌다. 어부는 성질이 나서 시를 관뒀다, 라고 말하면 될까. 시는 내게서 시작하는데, 안에서 나오는데, 도무지 공간의 메아리는 나의 것일 수가 없어서, <미인>은 시가 될 수 없었다. 시도 <미인>은 될 수 없었다. 박준에게도 성긴 그물을 만지작거린 날들이 있었으리라. 만지작거렸으니 저 정도로 썼지, 그가 훌륭한 낚시꾼이었다면 세상 모든 애가(哀歌)는 종말을 고했을 것이다. 물고기 없는 바다는 비현실적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배신자가 됐다. <미인>이 떠난 후로도 쓰지 않던 시를 대학 늦깎이 시절 강의 때문에 수 십 편 썼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다. 들어줄 이가 있을 것 같아 이렇게 적는다. 차라리 이 공간의 조촐함이 좋다. 나는 당신이 볼 수 없는 어딘가에 숨어 사는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라. 그래도 읽어주니, 당신에게 깊이 고마울 따름이다.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당신이 그 소수 중 한 사람이라, 고마움은 고마움에 겹친다.



*   *   *



    메아리는 공간을 돌고 돌아 어느덧 미세한 잔향만 남기고 더 이상 마음을 울리지 않았다. 잔향을 듣는 귀의 지혜를 잃었다. 배신은 언제나 이렇듯 교묘한 술수를 부린다. 나는 짓궂게 웃고는 눈을 딱 감았다. 시를 쓰자. 혹은 시를 쓴다는 이들 곁에 앉아라도 보자. 그것은 무엇인가. 그래도 갈구한 날이 있었으니까.


    김승희 시인 앞에서 시를 썼다. ‘정신줄’이라는 걸 놓고 쓰니 칭찬도 받았다. 한 번 만 더 결석하면 F처리 되는 나를 우수한 학생이라 불러줬다. 취향이려니 했다. 자주 대화를 나누던 남학우 여학우와 도무지 모를 말들에 대해 말했다. 모두 자기 것만 발표하고, 다른 사람 것은 몰랐다. 이게 뭐지, 했다. 계속 모르니까, 결국 아는 게 생겼다.


    쓰다 보니, 나는 다시 청각이 예민해졌다. 저 소리들, 뭐라 하는 거야, 뭐라는 거야. 너는 알고 말하느냐, 나는 언제까지 들어야 알 수 있느냐, 아니, 나는 알고 썼느냐. 이 기이한 창작의 공방(工房). 내리치는 망치와 그걸 받는 모루 사이의 굉음에서 메아리의 흔적을, 감금의 추억을 기억해냈다. 그렇다. 돌연 <미인>이 그리워지고, 소리 속에 침묵하던, 오직 침묵만을 실천하던 때가 그리워졌다.


    다시 망각으로 들어가자. 무수한 시집들은 그렇게 내 서재의 무수한 책들 사이에서 얇고 비스듬하게, 아무 의미 없이 꽂혀 있다. 그에 비해 여기까지 돌아온 이 궤적의 거리는, 이 비틀비틀한 거리는 또 얼마나 긴가.



*   *   *



    쓸 때는 많이 읽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도대체 읽지 않으면 쓸 수 없으니, 읽어서 몰라도 일단 ‘읽는다는 것’을 해야 했다. 그만큼 곤욕인 게 또 어디 있는가. 젊은 시인들을 읽고, 난해한 시들을 읽고, 시의 흐름을 보려고 탁류에 고개를 처박고, 대체 숨은 제대로 쉬는지 모르겠는데 끈질기게 수중의 생을 보내다가 새벽 늦게야 이불 속에서 숨을 쉬었다. 코로 숨을 들이마시면 물이 눈에서 떨어지니, 몸 어딘가 액화 과정이 일어나는 기관이 있는 모양이었고, 그게 싫었다. 지겨웠다.


    나를 속이는 것들. 저자들은 나를 바보로 만들 속셈인가보다. 분하다. 나는 철저하게 실패하고 있다. 그런데도 뭘 쓰고 있다. 막스 피카르트가 말한 ‘그 모든 것의 원천’, 침묵이여, 나를 도와다오. 아무리 입을 다물고 있어도 침묵할 수 없는 이 박약한 정신. 밀어내려는 의지와 단절된 말. 그 와중에 일어나는 폭력. 언어 사투. 예술이란 그런 것이었는가. 이러다 미쳐버리겠지. 아주 돌아버려서 훌륭한 시인이 되어버릴 거야. 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읽을 수 없는 글을 쓰면서, 세상 모든 것을 뒤집어버리고, 그리하여 온전하게 홀로 제정신인 상태로 살아가겠지. 그렇게 되는 것이겠지.


    요컨대 나는 반 년 정도를 새벽마다 미치며 보냈다. 그런 와중에도 국문 고전 레포트를 쓰고, 종교분쟁을 연구하고,「莊子」를 읽은 것은 신기였다. 사람이 이렇게 진폭이 큰 소리로 살아도 신체가 부서지지 않다니. 아, 그러고 보니 또 ‘소리’다. 언제나 소리로 돌아온다. <미인>이 내게 가르쳐준 것. 붙어 떨어지지 않으니, 그것은 계절이 지나도 화석처럼 매달려 있는, 엇나간 나뭇잎 같다. 저 창 밖에 한 장이 빗속에 부산스럽다.



*   *   *



    미쳐도 글이 써진다는 것이 미쳐야만 글을 쓸 수 있다는 얘긴 아니겠지만, 여하튼 김승희 시인은 내가 살짝 돌기 시작할 무렵부터 습작에 관심을 가져줬다. “식도는 어둡다.”라든지, “다섯 살이 부서져요, 엄마”라든지, “잠에서 깨면 늘 나는 遠洋의 감옥 속에 있다.”라든지, 이런 구절에서 멈춰서더니 시가 죽고 사는 일에 대해 말해줬다.


    더 미쳐야 한다는 뜻으로 들었다. 그러나 한 번 미치면, 뭐를 분별하는 건 둘째 치고 어느 선까지 미쳐야 하는지 누가 판단하는가. 여기까지? 여기가 어딘데? 도대체 정신의 공간에 어디 좌표가 있던가. 마름질 할 수 없는 곳에서 자를 들고 서있는 사람만큼 우스꽝스런 광대도 없다. 그런 작자들의 글에 수도 없이 속았고, 이런 공간이든 저런 공간이든 자신을 바보라 드러내는 똑똑하고 지혜로운 이들은 삼태기에 담아 수백이나 된다. 속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단단하게, 곡식 낱알들을 고르며 살아왔다. 이런 광기가, 말하자면 그건 또 광기일 수밖에 없는데, 그 미친 정신과 뜨거움과 운동과 폭력과, 하물며 성스러움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들로 나는 함몰의 고비를 늘 상처로 지나왔다.


    그런데 더 미치라니.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갔다. 저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라고 속으로 말하면서도, 대시인 앞에서는 정중해야 하는 까닭에 더 다듬어서 제출하겠다고 했다. 다른 강의들 준비로 분주하게 마음을 추스르고, 성적을 확인하고, 나는 그 미소 뒤로는 다시는 미치지 않기로 했다. 관심 가져준 그분께는 고마운 마음이지만, 소설을 가르친 어느 교수의 말대로, 한 명의 독자로 살아가기로 했다. 충실하게. 더 충실하게.



*   *   *



    창작하는 이들은 광인이다. 그녀/그들이 뭐라 항변해도 나는 앞과 같이 확언한다. 모른다면 알려줄 생각이다.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작가의 글은 읽지 않는다. 작품을 통해 거의 미쳐서 공간을 부수고 땅으로 꺼지든 하늘로 날아가든 할 것 같은 불가능의 사람들만 만날 것이다. 그 일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미인>처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미쳐본 이들이여, 라며 그녀/그들을 어느 공간에 소환한다. 미쳐서 죽은 이들도 바람에 날려 올 것이다. 나는 그렇게 거짓으로 불러놓고, 멀찌감치 그녀/그들의 한가운데서 멀어진다. 공간에서 벗어나진 않는 거리까지. 한 눈에 보일 수 있는 정도면 좋다. 그녀/그들이 뭐라고 서로 말하고 있는지, 무슨 안부를 전하는지, 작품 잘 되냐고 묻는지, 고민은 뭔지, 대체 우리말과 다른 말은 어떻게 통하는지, 그런 건 듣지 않아도 상관없다. 다 어차피 미친 소리일 텐데.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은 소리다. 그 소리를 듣고 싶을 때면 언제든 다가간다. 모습을 보려고 할 때면 또 뒤로 물러난다. 둘 다 실패로 끝나긴 해도, 끊임없이 한다.


    눈치 챈 사람도 벌써 있겠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녀/그들도 나와 같은 공간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이 차원이라든가 물리라든가 하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정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는 나의 서재다.



*   *   *



    누군가는 비웃겠지만 그래도 서재라고 갖고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독자로 산다. ‘독자됨’이 무엇인지 쉼 없이 묻고 갈구하면서, 광기의 새벽을 떠올린다. 광인들이 극도의 고온에서 건져낸, 하지만 우리는 저 차가운 활자와 헐거운 백지로 붙들고 읽게 되는 책에서 나는 광기와 마주하는 작업은 부단히 한다.


    광기의 독자인가, 잠시 생각해본다. 저 먼 헤겔의 미학, 그걸 난 곧이곧대로 듣진 않지만 작품은 완성됨과 동시에 미완성이라는 그의 말은 옳다. 몫은 독자의 것. 하지만 ‘완성’이라는 단어는 매우 위험하다. 독자도 완성하지 못할 때가 있다. 아니, 사실 완성은 없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왔다. ‘독자가? 독자 주제에?’ 속으로는 이렇게까지 생각한다. 폄하로 들어도 상관없다. 자신의 유능함을 믿는 독자처럼 어리석은 자도 없으니까. 미완성을 세상에 내놓는 작가와 미완성을 읽고 미완인 생을 사는 독자만이 있다. 나는 미완이라 이렇게 쓰며, 이렇게 쓸 수밖에 없다. 솔직함으로 죄를 면할 수 있다. 하지만 서평이라며 자신의 얄팍한 이해의 잣대를 들이대고 이런 말과 저런 말을 분간 없이 하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아니, 별로 들여다보진 않는데, 서두부터 웃는다. ‘현실을 들먹이며 판타지를 사는 이들이여.’


    참으로 많은 책이 있으며, 많은 작가가 있고, 많은 글이 있지만, 그리하여 우리는 독서의 부족에도 이상하리만치 풍족한 ‘말’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실로 그런가? 지칠 대로 속아서 완전히 지쳐버렸는데도 내일 또 속는 이 굴레의 지겨움.



*   *   *



    당신은 미쳐본 적이 있나요?


    이렇게 물었을 때, 대답하는 이들의 글은 읽지 말라. 제정신인 사람은 이 무대에 설 수 없다. 우리를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움직이게 할 수 없으면, 아무 소용없다. 읽었더니 눈물이 나오더라, 읽었더니 힘들더라, 두 번 다시 읽고 싶지 않더라, 하지만 서재에 가만히 꽂아두고 자꾸만 눈을 주더라… 그 작가와는 죽을 때까지 작별하지 말라. 오래도록 읽지 않아도 남는 이들이 있다. <미인>이 있다. 소리가 있다. 뭐라 말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울림을 그치지 않는 음성이 돈다. 그런 독자는 행복하다. 몹시도 많은 불행 속에서, 그녀/그들에게는 적어도 분명한 것이 하나 있으니까.


    이렇게 물었을 때, 아무런 대답도 않고 묵묵히 글을 쓰는 이들에게 눈을 둬라. 미쳐서 쓰는 사람은, 질문을 듣지 않는다. 들을 수가 없다. 우릴 머쓱하게 만든다. 저기, 그래도 대답은 좀… 안타깝지만 그런 작가는 독자에게 대답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독자이다, 우리는. 무엇이 우릴 그렇게 불행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수도 없는 이야기가 있지만, 자꾸 뭘 묻는다. 광인은 그런 우리에게 그동안 미쳤던 흔적을 툭 던진다. 그리고는 그 공간에서 사라진다. 소리처럼 저기 가서 울리고, 다음에는 다른 곳으로 가서 울리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그녀/그들은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좇을 수밖에 없다. 공간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무수한 책 앞에서, 서재에서, 당신의 그 공간에서, 단 한 번이라도 확언하듯 책 한 권을 덥석 잡아들고 끝까지 만족한 적이 있었는가? 그렇게나 자신하는가?


    독서는 끝없는 실패다. 아, 이걸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녀/그들의 글을 읽어보면 ‘초장’부터 자만이다. 조금은 더 작가와 가까워진 것 같아요다시 읽어보니 이건 바로 그뜻이었겠구나 (‘바로’라고?) 싶더라고요, etc, etc, etc. 단 한 권도, 심지어 단 한 문장도 우리는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알아듣기 쉽게 말하라는 사람들은 그냥 대중문화에 섞여 지내면 된다. 여기는 애당초 그녀/그들의 공간이 아니다. 불평은 무소용이다. 해봤자 광인은 듣지 않는다. ‘미친 길’이라는 건 따로 있는가? 그런 듯도 싶다. 어떻게든 설명해보고 싶지만, 직접 본 적도 없고, 물어봐서 들은 대답도 없다. 하지만 존재한다. 이게 무슨 비과학적 언사인가 싶어도, 사실이다. 독자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가을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처럼 살아가는 그녀/그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그거요? 보이진 않는데, 있는 것 같아요. 이런 대답이 하나 둘 쌓이면 그 길은 실재가 되고, 우리는 믿게 된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우리 독자가 뭘 믿고 읽는지 생각해보면. 저요? 이렇게 처참하게 매일 떨어져 나가면서도 이상하게 나무에 붙어 있더라고요. 왜 그런 것일까, 생각해봤어요. 누군가가 저를 자꾸만 나뭇가지에 도로 데려다주는 것 같아요. 붙어 있으리라는 건지, 다시 떨어지라는 건지, 참, 도통 모르겠네요. 아, 그게 누구냐고요? 미친 사람이지 누구겠어요?


    광인 : 나무 주변에 서식하며, 시간을 거슬러 사건을 되돌리는 이를 일컫는 말. 정신 생명 유지의 근원. 그 자체로는 수많은 곡해를 받기 마련이며, 의외로 주목 받는 만큼 이해되지 않는다. 수많은 지구의 영적 존재들은 주변에 낙엽이 뒹굴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나, 광인은 손에 잡히는 낙엽이면 그 무엇이든 다시 나무에 붙인다. 따라서 고통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광인을 멀리한다고 알려져 있다. 광인의 수는 무척 적으며, 주로 숨어지내 소재를 알 방도가 없다.


*   *   *



    읽는다. 쓴다. 미친다. 자꾸 미친다, 미친다 하니 내가 미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더욱 고마울 따름이다. 그래도 서재 밖에서는 잘 살아간다. 바다 밖에서는. <미인>이 없는 곳에서는. 새삼스럽지만 인간은 원래 육지 생물이며, 그 중에서도 거의 막내라서 애당초 물에서는 살 수 없다. 물 속에서 허파로 숨쉬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추신 : 이 이야기는 당신의 공간 밖으로 새어나가면 안 됩니다. 광기의 비밀은 당신과 저만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밖에서는 가끔 재미로 ‘미친 척’을, 하지만 여기서는 제대로 한 생을 다하여 기꺼이, 그리고 한없이… 미쳐 있으면 됩니다.





    시스템 : 당신에게 잠금 장치가 배송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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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13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해한 산문시를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한가지 주제에 매달려 이렇게 장문의 글을 쓸 수 있는 필력이 부럽네요. 탕기님은 타고난 글잽이인 것 같고요. 지금은 모르겠지만 평론이든 시든 산문이든 나중에 뛰어난 작가가 될 거에요. 저랑 내기할까요. *^^

탕기 2016-02-13 23:01   좋아요 0 | URL
한 권의 독자로 사는 것도 버겁습니다. 뛰어난 작가라니요. 저는 `작가`라 부르는 사람이 몇 없습니다. 그런 제가 작가인 척 하는 불손한 사람은 될 수 없는 노릇이죠. 뭘 거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기는 저의 승리입니다. 많은 몫을 걸지 않으셨길 바랍니다. ^^ 칭찬으로만 듣겠습니다. 건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