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키 아타루(佐々木 中)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切りとれ、あの祈る手を)』
: 첫째 밤 독서
2016년 1월 20일
읽고 쓰는 것을 대문자 [문학]이라 정의한다면, 저 괄호 속에 아주 미미한 수준이나마 지분을 차지하고 있을 내가 주시해야 하는 건 그것과 정반대편일 것이다. 이렇게 타이핑하는 와중에도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머뭇거림, 침묵.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원제 : Die Welt Des Schweigens)』를 읽다가 돌연 침묵을 쓸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해버린 순간이 있었다. 새삼스런 일이었고, 그걸 복기하는 지금도 새삼스레 이런 글을 쓴다. 다시 말해 나는 지금 비애 속에 있다.
막스 피카르트는 그 까닭을 알려준 이다. “침묵은 인간의 마음속에 비애를 불러일으킨다. 침묵은 인간에게 말에 의한 죄로의 전락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상태를 회상시키기 때문이다.”(위의 책, 51쪽) 결국 이를 부정할 수 없는 존재다, 나는. 그래서 [문학]에 매달리려고 물리적 투쟁을 불사하는 것이리라. 요즘 뒷목이 너무 아프다. 몇 시간을 한꺼번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면 고체가 되어버렸던 피가 물렁해지면서 혈관 이곳저곳을 찌르는 것도 같다. 그래도 신음을 동반해야 할 [문학]과의 사투는 피할 수 없다. 조금도 보탬 없이 다시 말해 나는 지금 비애 속에 있다.
사사키 아타루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원제 : 切りとれ、あの祈る手を)』을 닷새 밤의 기록이라 했으니, 나는 그걸 닷새 동안 읽고 쓰려고 한다. 책 앞에만 서면 항상 긴장하고 약간은 경직된 감도 없지 않은 내가 하나의 운동을 시작할 참이다. 가로지르거나 되읽거나 뛰어넘었다가 그 방해받은 지점을 뒷면에서부터 앞면의 방향으로 격파하거나. 깨부수면서 읽는다는 점에서 나는 백지의 편을 든 반(反)문자주의 운동의 선동가인 셈이다. 선동할 이가 나뿐이라는 게 함정이지만, 그렇지 않은가, 독서는. 그러니 손을 자르라는 이 제목 앞에 서서 내가 파멸의 운동을 향해, 그 형태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만 같아 겁에 질려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사족은 구태여 자리를 빌려 쓰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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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족으로 시작하는 글을 난 참으로 좋아한다. 놀랍게도 타인의 경험은 공유될 수 있다. 완전히 포개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건 사사키의 말마따나 ‘미쳐버리는’ 일이 될 것이고, 나 역시 그런 신화적 일은 보통 도래하지 않는다 생각한다) 우리는 타인과의 공유, 그녀/그의 어깨 위에 손을 걸치는 행위를 통해 하나의 사유 전체상에 접근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발견한다. 사사키는 잡담을 하듯 시작하여 나를 끌어당겼다. 많은 이들이 나와 비슷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부득이한 고백이라며 쏟아놓은 경험담이 놀랍도록 우스꽝스럽기 때문이다. 정보를 차단하는 무모한 일로 그는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까.
반대로 생각해보면 부끄러울 일일 수밖에 없다. 그는 전문가와 지식인을 비판하는데, 그 두 부류 모두에 나는 들어갈 수가 없다. 대신 그런 행세를 하려고 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오늘은 이걸 읽고, 내일은 저걸 보고, 그 다음 날에는 뭘 하고. 이런 계획은 분명 강박적 설계자가 주변 눈치를 보며 빠르게 적고 수정하길 반복한 것이었다. 이 말이 지금 박혀 있다. “이런 환경에서 무엇이 단련되겠습니까?”(21쪽) 아, 단련이었던 것이다! 정보(명령)를 향하는 전문가와 지식인이 부러워 그들처럼 행세하려다 내가 놓쳐버린 것은 다름 아닌 단련이었던 것이다. 군대에서 꼴사나운 상급자의 명령을 듣는 건 그렇게나 싫어했던 수 년 전의 내가 그토록 많은 정보들을 배워오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정보가 명령이라는 걸 눈치 채지 못한 꼴이라니! 아니, 변론을 위해 약간의 정확성을 기해보자면 눈치를 챈 적은 있었다. 문제는 그 순간이 별로 대단치 않았다는 것. 난 정보의 부하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불안하고, 잘 모르겠고, 늘 두렵긴 했어도. 그럭저럭 잘 지내오지 않았던가. 라캉을 소환하는 사사키의 말을 이제는 이해한다. 팔루스적 향락. ‘이런, 맙소사.’ 나는 영락없는 페티시즘 환자였다. 사사키는 그런 변태적 기질에서 탈출하려고 몸부림쳤던 자고. 이 팔루스적 사회에서, 그런 까닭에 그는 무시당하는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한때 무엇이었는가? 니체가 말한 ‘철학자’였는가? 아니, 난 그런 어려운 말을 소화하려고 하지는 않겠다. ‘철학’이라는 단어보다는, 그래, ‘잉태’와 ‘임신’과 ‘수태’와 이런 은유적인 말이 오히려 실제적이다. 그러고 보니 사사키가 『야전과 영원(夜戦と永遠)』에서 펼쳐놓은 라캉의 ‘여성의 향락’과 ‘신비주의자’와 그들의 ‘씀’이 바로 내 앞으로 소환된다. 하나의 모습으로, 그러나 여럿이 뒤죽박죽 된 모습으로. 하지만 그것은 분명한 하나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나는 사사키가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형태가, 공간이, 아니 그보다는 시공이 잠깐이나마 눈에 보였다. 그는 무서운 사람이다. 세계를 다시 낳는다니. 대체 어쩌다 그 지경이 된 것일까?
“읽었다기보다 읽고 말았습니다.”(35~36쪽) 미에 도달하게 되는 순간을 그는 우연으로 묘사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실재계와의 조우는 그야말로 우연이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외상의 상흔을 남기니까. 어려운 라캉 속에서도 이것만큼은 건져왔다. 내가 장하다. 그러나 그게 어쨌다는 건가? 사사키는 그걸 행하려고 했고, 그 자신이 라캉을 용기 있는 사람으로 일부 칭찬하는 순간 스스로를 칭찬하고 있었음을 지금 나는 알겠으나, 정작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처럼 정보에 관한 걸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그처럼 해본 일이 하나도 없다는 뜻에서, 또 하나의 자책은 불가피하다.
읽는다는 것이, 혹은 읽게 되어버린 그 상황부터 시작되는 모습이 광기에 가깝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다행이도 내게는 그런 책들이 있었다. 읽고 나니 미쳐버릴 것 같아서 잠을 설치고 새벽의 기묘한 도래를 몇 번이고 경험했었다. 매번 느낌이 다르니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을 뿐이다. 예를 굳이 들어볼까. 보리슬라프 페키치의 『기적의 시대(원제 : Vreme čuda)』, 막스 피카르트의 위의 책,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원제 : Le città invisibili)』,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원제 : Siddhartha)』, 이런 것들 뒤에서 나는 늘 읽는 것의 위험을, 독서의 공포를 느꼈다. 두말할 것 없이 다시 읽고 싶은 책이다. 하지만 섣불리 재독할 정도로 용감하지는 않다.
나의 비겁함은 당당하다. 원래 그랬던 건 아니고, 겨우 이제 와서야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나A는 나 자신이 비겁하다는 걸 언제나 숨겨야 한다며 남에게 보여줄 글을 쓰고 그렇게 조련된 글을 읽는다. 나B는 그런 나를 질책하며 솔직해지라고 말한다. 이렇게 둘만 살고 있는 나에게, 고립된 섬에게, 사사키가 버지니아 울프를 경유해 『로빈슨 크루소』를 말하며 상기시킨 그 무주공산에, 나는 이 책을 제 3자로 들여놓은 것이다. 그래도 됐던 것일까? 잘 모르겠다. 이제 와서 무슨 새삼스레. 여하튼 그러자 이 책이 선언한다. 읽기는 원래 무서운 일이니 겁내는 건 비정상이 아니다. 그러면서 한 문장 더 뻗어나간다. 그러나 그 선언은 이해하면 미쳐버릴 것 같은 두려움과 기껏 정보로 환원된 걸 읽는 것 사이에서, 즉 도망가기와 명령 수용하기 사이에서 무슨 쓸데없는 고민을 했느냐고, 질문을 던진다. 물론 나는 유구무언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 비겁함을 입간판처럼 가지고 다닐 것인가? 제 3자의 선언에도, 내게는 법과 같은 말로 들린 그 망치 소리의 분절들에도, 그럼에도 나는 저항한다. 프로이트가 그랬던 것처럼, 제임스 조이스가 그랬던 것처럼, 버지니아 울프가 그랬던 것처럼. [문학]하는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읽고 쓴다. 시도는 간헐적일지 몰라도 범접하고자 하는 마음은 부단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서재에는 책이 한 가득이다. 책 위에 소복이 쌓인 먼지를 보면서 나는 그 먼지를 털어낼 날을 고대한다. 다소 머뭇거리며. 그렇다. 제 3자의 선언은, 이 책의 위안은, 그래서 읽지 말라는 게 아니다. 어떻게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감히 종료를 선언하는 말이라 오독할 수 있는가? 성급한 한 마디. 이 책은 [문학]하라는 말을 담고 있는 또 하나의 [문학]이다.
대체 [문학]은 뭔가? 읽고 쓰는 모든 것이다. 그 의미가 literary로 좁아지는 일련의 과정을 사사키가 축약해서 쉽게 설명하고 있는데, 그 단어의 틀을 부술 필요가 있다. 또 하나 부숴야 할 틀은 [읽음-씀]의 한정된, 아주 단순한 언어지시적 의미일 것이다. 당연한 말이라 내가 부연할 입장은 아니라 생각한다. 쓰는 것이란 세계를 바꾸는 것이라고 누누이 지적하지 않았던가. 긴 책 『야전과 영원』은 에둘러 그 말을 한 책이고, 이 지점에서 보건대 『잘라라, 그 기도하는 손을』은 바로 사사키의 그 체험을 담은 책이리라. 그러면 궁금해진다. 그는 [문학]한 자이며, [문학]을 지향하는 자다. 변혁하는 자이며, ‘변혁된’ 자다. 완성체이니 뭐니 하는 유치한 지적은 삼간다. 이미 하루가 저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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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는 2010년 6월의 어느 날이 저물어 조용해졌다는데, 지금 여기는 맹추위로 동파 방지와 외출 자제를 권하는 보도가 연이어지는 한복판이다. 오늘은 외출을 안 했다. 착한 주민이고, 하루를 성실한 독자로 살았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읽고 쓰는 것에 대해 비춰볼 일련의 체험들이 적은 것도 아니고, 생각도 해본 바도 있는데. 변혁이라는 것은 내가 접해보지 못한, 현전할 거라 기대하지 않는, 혹은 상상 속의 개념이라 묵살하는 무실체의 대상이었다. 그랬었다. 그런데 그것을 과연 언젠가 ‘존재’라 부를 수 있을까. 마무리하자고 하니 나도 덩달아 접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밑으로 깔린, 얄팍한 지층들보다 더 깊은 지하로 꿈틀대며 들어가는 그 뜨거운 모든 것들에 대하여는, 도무지 생각을 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