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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인문/과학/사회 신간 추천














제 1책 : 『아픈 몸, 더 아픈 차별』

            김민아 지음 / 뜨인돌



    염운옥의 『생명에도 계급이 있는가』에 이은 독서로 어떤 책을 읽을까 하다가, 마침 신간추천을 해야 하는 과제와 맞물린 책 한 권을 찾았다. 김민아의 『아픈 몸, 더 아픈 차별』이다. 염운옥은 20세기 초반 영국 우생학 운동의 한 축을 여성 페미니스트들이 도맡게 된 아이러니한 경위를 설명한다. 페미니즘과 우생학의 제휴는, 사실 맥락 없이 듣게 되면 우리에게 대단히 이상한 조합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 배경이 바로 장애에 대한 차별 의식이었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여성의 권리'가 전면에 배치됐고, 우생학에서 이미 가장 퇴화된 '인종'으로 취급된 장애우들에 대한 권리 주장은 당시에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어 질문할 수 있었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에게는 장애에 대한 어떤 감정이 있는가? 마음 약한 내게는 장애우를 돕는 사람들의 용감한 이야기를 잘 보지 못하는 도덕적 비겁함이 있다. (이건 동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비겁함을 쫓아내지 못한다면, 앞날은 뻔하다. 더 이상 아무런 글도 쓸 권리가 없는, 하찮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근래 약자, 혐오, 차별 등을 주제로 한, 인문의 의무를 다하는 좋은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김민아의 책 역시 그 중 하나이다.


    지난 달, 나는 마사 누스바움 이야기를 했는데, 신간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책도 오지 않았다. 적잖이 실망했음을 밝히고 싶었지만, 나는 성실한 독자이고 싶기에 보내준 두 권의 책에 대한 의무를 최선을 다해서 끝냈다. 보내주시는 분의 사정도 있을 테지,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약자, 혐오, 차별 등의 무거운 주제를 담은 책을 한 권씩 보내줬으면 한다. 구색이 신간'평가'단이지, 나는 우리가 신간'광고'단임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독자다. 책을 읽고 그 주제에 접근할 수 있었음을 감사해야 하는 위치에서 무슨 '평가'를... (나는 '서평'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책에 대한 나의 모든 글에는 '복기'라는 부제가 붙는다.) 그러니 이왕 10개가 넘는 리뷰들을 붙여 '광고'해줄 의도라면, 적어도 인문을 다루는 우리들에게는 인간의 시대적 주제들과 도덕을 '광고'할 의무가 있으므로, 그런 책들을 보내 인문의 취지를 도드라지게 하는 편이 좋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제 2책 :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

            가와타 후미코 지음 / 안해룡, 김해경 옮김 / 바다출판사



    이 책을 '추천'한다는 말을 굳이 해야 할까 싶다. 저미는 마음으로 들여다봐야만 할 책인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그 책을 읽으면서 잊지 않게 된다. 저자 가와타 후미코는 21세의 어린 나이에 배봉기 할머니와 인터뷰를 했고, 책을 냈다. 일본 여성이 바라본 위안부 문제라는 점에서, 이 책은 근래의 화두에 가장 닿아 있는 책이다. 언론에서 양심적 일본 지식인들을 여럿 보도해오고 있는 까닭에 가와타 같은 이들의 행보가 놀랍진 않지만, 사실 자세히 보면 놀라울 수밖에 없다. '용기'라는 미덕에 있어서. 일본 사회는 지금 갈필을 잡지 못하고 있다. 후쿠시마 사태 이후 정부를 향한 불신에 장작더미들이 날아들면서 과거사 문제에 대한 양심적 판단이 화두가 됐다. 그럼에도 일본 주류는 여전히 보수이고, 그녀/그들의 어린 자녀들은 그릇된 역사를 강제적으로 주입받는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역사의 정(正)을 수호하려면, 그 반대편에서 희생된 세대를 알아야 한다. 국가는 양심을 만족시키지 않는다. 우리도, 일본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철저하게 정치적 기업이다. 따라서 국민은 그에 저항하며, 기억해야 한다. "몇 번을 지더라도" 녹슬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기에, 인간 정신의 매듭은 풀리지 않는다. 놓지 말자고 다짐하자. 우리의 '정신줄'을. 사정이 있어 이 책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꼭 사서 읽어야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벌써 저미는 마음에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목소리를 듣는다는 건, 참 무서운 일이다. 그래서 스베틀라나 읽기도 도무지 진전이 없다.)



















제 3책 : 『하리하라의 눈 이야기』

            이은희 / 한겨레출판



    위에서 무겁고 뜨거운 이야기만 했으니, 마지막에는 분위기를 밝게 바꿔본다. 잠깐 미술 이야기를 해보자. (그럴 때마다 나는 언제나 신이 날 수밖에 없다.) 서양의 전통에 따르자면 '르네상스의 아버지'라 불리는 최종 후보는 좁히고 좁혀 세 명으로 압축시켜볼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전통에 따르자면, 그 셋 중 한 명이 거의 몰표를 받는다. 이견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아버지'라는 사람의 이름을 기억한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이 이름이 낯선 이들을 위해, 우리는 그를 또 다른 명사로도 부른다. 원근법. 원래 판화를 배웠지만 건축가로 전향한 필리포는 피렌체 세례당 거리에서 자신이 발견한 선원근법 측정을 시연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뜻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피렌체 사람들 중에는 (다소 이탈리아적 과장이 섞여 전하는 바대로) 동시대의 화가 마사초가 원근법 구도로 그린 <성삼위일체>라는 벽화를 보다가 깜짝 놀라 뒤로 자빠진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원근법은 서양회화를 획기적으로 바꿨고, 당대 화가들 중 영민한 이들은 반드시 그 개념을 익혀야 한다고 직감했다. '파올로 우첼로'라는 화가는 얼마나 그걸 뼈저리게 느꼈는지, 식음을 전폐한 채 원근법 공부와 드로잉 실습을 하는 바람에 아내의 걱정을 샀다고 전해진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러나 우리의 눈은 서양회화의 '위대한 눈'처럼 풍경을 보지 않는다. 예상 외로 우리는 원근을 거의 구별하지 못할 때가 있으며, 정확히 사물을 식별할 수 있는 각도도 매우 제한되어 있어 초점을 무수히 조정한다. 또한 욕망하는 것만 집요하게 쳐다보는 변태적(?) 습성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너무나도 익숙한 '본다'라는 것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일상을 낯설게 만드는 전회는, 우리처럼 생각하고 읽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전환인 것이다. 그래 봤자 어차피 일상으로 돌아가므로, 전회의 횟수와 강도가 중요하다.


    필명이 '하리하라'인 이은희의 『하리하라의 눈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우리의 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나는 안경을 쓴다. 안경이 없으면 세상을 거의 보지 못한다. 그러니 나에게 '보는 것'이란 무엇일까? 또한 미술을 공부한 나에게 '본다'라는 행위는 어떤 의미일까? 이런 식으로 저마다의 의미를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과학 정보들 역시 있을 것이니, 여럿이 함께 모여 '볼 만한' 책이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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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28일 일요일, 창밖의 폭설







    2011년.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에 마음을 뒀으나 아무 것도 모르는 채, 혹은 잘 모르는 채 글이라는 걸 쓴 건 그보다 더 옛날의 일이지만. 책을 읽었으니,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기에 쓰기 시작했다고 말해야 할까. 기억은 흐리다. 꿈과 비슷하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우주의 탄생과 같다고 하면, 아니, 그건 너무 거창하여 나에게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옷이다. 뭐라도 기억을 해내야 할 것 같은데, 도무지 할 수가 없다. “그냥 읽기 시작했어요.” 이런 대답을 하더라도, 성의 없다고 느껴지진 않았으면 하고 바라본다.


    글을 모아봤다. A4 300여 장씩 묶어서 세 권이 나왔다. 조만간 보르헤스의 한 단편으로 올릴 글이 있는데, 그걸 쓰고 나면 제 4권으로 넘어갈 참이다. 미술도 그렇고, 나에게는 세상에 내지 못할 책들이 있다. 제목은 <서해(書海)>라고 지었다. 어딘가에서 밝힌 것처럼, 보르헤스 이후 도무지 나는 ‘바다’라는 단어에서 탈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미술 글로 모아놓은 책도 <서해>처럼 편집하면 다섯 권에서 약간 넘친다. 그 중 어느 한 권의 (아무도 읽지 못할) 서문에 “나는 미술이라는 바다에서 유영하고 있다.”라는 문장을 끼워 넣었다. 보르헤스 이후의 일이었으리라. 그 단어가 아니면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드러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말이지 나는 수영을 못한다. 그런데도 지금껏 헤엄을 치고 있는 건, 순전히 대가들의 덕이다.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   *   *



    갈수록 나는 “모르겠다.”는 말을 버릇처럼 내뱉곤 하지만, 예전의 글들을 읽어보니 어디서 배우지도 않은 수술 실력으로, 그 가짜 기술로 책을 이리저리 찌르고 다닌 흔적들이 태반이었다. 니체가 경멸했던 그 예의 외과적 글들로. 하지만 그런 글들을 잊거나 버리진 않는다. 아니, 못한다. 대가들의 틈에서 어깨를 움츠리며 본능적으로 겸손을 배운다 하더라도, 사람은 참으로 교활하므로 어느 날 갑자기 옛날로 돌아가는 관성을 따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강산이 세 번 변한, 그래도 점점 추억할 거리들이 늘어나는 내 삶에서,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 성질머리가 죽지 않는다면 노년의 내 모습은 뻔하다. 젊음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경멸할 테다. 나는 최후를 내다본다. 결국은 마지막에 가서 그동안 그려온 길을 보고, 이 세상의 정신과 가족과, 그리고 대가들에게 고개 숙여야 한다. 그런 감사의 마음에는 나 자신에 대한 비난이 한 톨도 하나도 없어야 한다. 금욕주의라 불러도 괜찮다. 썩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지만, 적어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를 독서와 정신과 글에 있어 꽤나 보수적인 청년이라 불러도 반박할 뜻은 없다.


    <서해> 3권의 한글 파일을 쭉 편집하다가, 서재에는 어떤 흔적이 남아 있을까, 의자를 한 바퀴 천천히 돌려봤다. 비집고 나온 책들, 비스듬한 책들, 고꾸라진 책들, 구겨진 책들. 저마다 제목의 모습으로 나를 향한 채 그 속에 무궁한 세상을 품고 있었다. 이따금 아우성치는 환청을 듣기도 한다. 나도 마르셀 프루스트처럼 사물과 정신의 이상한 혼합을, 마치 광인의 환상으로 경험할 때가 있다. 그 날은 책을 전혀 못 읽는다.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만화를 읽는다. 자전거 타는 게 가장 속 편하다. 어쨌든 수행자가 되기에는 급하고 변덕스런 성격이라, 도무지 책과 종일 붙어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하루도 책을 읽지 않은 날은 없다. 정 못 읽겠으면 제목이라도 돌려 읽는다. 머리가 좋지 않아 제목과 저자명도 까먹기 일쑤고, 그래서 책 읽을 때마다 이면지와 모○○ 펜을 옆에 끼고 있어야 하지만. 안창호 선생의 말씀이 백 번 맞다. 가시가 돋는다.



*   *   *



    죽기 전까지 달성하고자 하는 하나의 커다란 목표는 ‘보통독자’가 되는 것이다. 이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거듭 찾아오는 막연함과, 사막의 자유와, 그리하여 새벽의 모습으로 내리는 무시무시한 감정들은 ‘독(讀)’이라는 단어와 ‘독(獨)’이라는 단어와, 차라리 그보다는 ‘독(毒)’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책 안 읽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많이 이런 질문을 한다. “읽어서 뭐하게?” 이 질문을 하는 나는 무수한 나 중에서도 유독 성질이 더럽고 사나운 녀석이므로, 조용히 앉아 펜을 물며 책 읽는 나 같은 서생의 용기로는 되받아칠 수 없다. 누구에게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들이란 다 시원찮았다. 결국은 조금 뜨거운 마음을 가진 나를 골라 이렇게 답한다. 저 질문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상태에서 허언을 하는 것이다. “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읽는 거야.” 명쾌하진 않지만, 아직 이 답변을 방패삼아 지루한 삶의 공방에서 지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나라는 이상한 독자에게도 기억에 남는 책들은 있었다. 까먹고 잊고 귀찮아하는 못된 버릇이 있어도 글을 쓰다보면, 특히 뱉어내고 곧장 휴지통으로 끌고 가는 수십 여 장의 장문을 쓰다보면 그 책들이 문단 문단마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것은 분명 나를 구성하고 있는 책이다. 정신의 혈관을 돌아 정신의 장기들을 꿈틀거리게 하고, 정신의 신진대사를 통해 정신의 말과 글을 생산해내는, 명백한 나의 구성체다. 생물이란 워낙 복잡하기에 (그리하여 정신은 또한 어떠한가) 그 경로를 내가 알 방도는 전혀 없다. 그런 건 대가와 학자들에게 물어보면 되지만, 내가 과연 그녀/그들의 실험체가 될 자격은 있을까. 소심하여 부탁도 못 한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 복기할 수밖에 없고, 이런 졸문의 벼랑에 매달려 기억을 떠올려보곤 한다.


    하지만 이런 글은 처음이라, 어떤 책에서 영양분을 섭취하려고 했었고 그러다가 탈이 난 적은 또 몇 번이었는지를 아래와 같이 되돌아보다가, 실수로 약간의 위선과 허황(虛荒)과 오만을 내 얼굴에 묻혀버리는 결례를 이 글의 독자들에게 범할 수도 있겠다. 다시 말해, 어쩌면 이건 전혀 읽을 가치가 없는 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도 바구니가 있고 나누고 싶은 바가, 돌아보니 있었다. 또한 이렇게 글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가급적이면 이 졸문을 ‘독자’라는 사람들이 읽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독자란 홀로 된 자이지만 저 추상의 단어로 서로 연결되며, 그렇게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특이한 집단이므로. 이건 그 집단에게 보여주는 나의 바구니다. 짚으로 엮어 초라하며, 풀냄새가 나더라도 이해해주기를.











    <서해>의 1권과 2권이다. (이렇게 보니 어느 게 1권인지 모르겠다.) 읽을 때마다 얼굴 붉어지고, 여기는 이렇게 저기는 저렇게 뜯어고치고 싶은 기록이다. 결국 언젠가 나는 저 기록 속의 책들을 다시 읽어야 할 것이다. 이탈로 칼비노와 보르헤스를 빼면 도무지 ‘제 2독’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으므로, 이런 나태함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1권과 2권의 수정 작업은 그저 요원하기만 하다. 책이 되지 않는다는 다행스러움이 나의 유예를 끌고 끌어 저 먼 내일로 계속 잡아당기는 중이다.


   그래도 남겨서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글은 사진이 아니기에, 무수히 다른 모습으로 지금의 내 거울에 반사된다. 그 반사된 풍경을 추적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나는 잊지 말아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일만 보더라도, 우리 모두가 안다. 잊는 것이 얼마나 아찔한 일인지.














    예술을 공부하며 나는 천재를 부러워했었다. 후대가 기억해야 할 예술의 대가들, 그녀/그들이 지닌 천재성을 어쩔 수 없이 들여다봐야 했다. 시샘하던 어린 마음은, 지금은 없다. 나는 범인(凡人)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산다. 김연수가 그런 말을 했다. 결국 맞닥뜨리게 되는 건 ‘천재성’이라는 벽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벽을 앞에 두고 견디는 일. 벽을 뛰어넘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건, 어쩌면 독서가 준 교훈일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이, 나에게 독서는 고난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좋지 않은 나는 저렇게 이면지와 펜을 곁에 두고 씨름할 수밖에 없다. 여러 종이봉투에 이면지들이 나눠 담겨 있다. 기분 좋은 날에는 가지런하게 쓰다가도, 도무지 읽고 싶은 기분이 아니면 엉망으로 낙서한다. 마침표보다는 화살표와 선이 많다. 대가들은 보통 서로 이어지는 문단을 되도록 멀리 떨어뜨려놓는, 나 같은 독자들을 곤란케 하는 훌륭한 기술을 우아하게 구사하므로.


    인용할 만한 구절을 적기보단 파란색 펜으로 내 생각을 적는다. 대학 시절 낙서 습관이 이제 와서는 좋은 동료가 된 셈이다. 다른 책과 닿아 있는 부분이라 별도로 빼놔야 하는 구절이나 내용은 빨간색 펜으로 적는다. 종교 관련 서적들, 그것이 비교종교학이 됐든 경전이 됐든 도킨스 류의 비판이 됐든 간에 그 분야의 책을 읽으면 유독 빨간색 문장들을 많이 적게 된다. 이런 식으로 적으면서 읽을 수밖에 없는 모자람 때문에,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소설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나는 소설에서 가장 많은 걸 얻는다. 내게 소설은 보르헤스의 단편 「죽지 않는 사람들(El inmortal)」에 묘사된 <죽지 않는 자들의 도시>와 같다. 내가 기대한 진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들쑥날쑥한 모습으로 언제나 나를 실망시켜 서재 밖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하지만 결국 그 모습을 기억할 수밖에 없다. 진리가 인공적인 형태로 나타날 거라고, 나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사진이 흐리다. 제목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귀찮아 다시 찍지 않았으니, 그 괘씸한 마음을 용서받으려면 이 글의 꼬리에 책 목록을 붙여 넣어야겠다. (하지만 독자들은 이 사진을 한 눈에 알아보리라.) 트림은 우리가 무엇을 먹었는지 속이지 못하도록, 아주 노골적인 냄새로 과거를 고발한다. 지금은 (올해 2월 초순부터) 한창 보르헤스에 빠져 있기 때문에 뭔가를 뱉어내듯 써내려 가면 어쩔 수 없이 ‘보르헤스적 글쓰기’라는 괴상한 걸 할 수밖에 없다. 생각의 방식과 문체가 스며들어 그 중 아주 조금이나마 어떤 문학의 분자들을 내 혈관 속에 흐르게 한다. 이 작은 사진 속에는 그런 식으로 내게 들어와 언제까지고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책이 있다.


    이탈로 칼비노, 보리슬라프 페키치, 루쉰, 쿳시, 보후밀 흐라발, 파트리크 쥐스킨트, 나이폴, 조지 오웰, 솔제니친, 포, 보르헤스, 카프카, 골딩, 카뮈, 도리스 레싱, 다자이 오사무, 위화 … 이들의 이름은 이렇게 글로 쓰고 읽기만 해도 가슴 뛰게 한다. 정신의 맥동을 분명히 느끼게 하는 고유명사다.


   이따금 나는 문학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논하는 논객들, 심지어는 아주 저명한 문학 인사들의 글을 들여다본다. 그 중 진지한 글들은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아니, 읽어봐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 독자에게는 말이다. 굳이 의견을 밝히라면, 나는 문학의 혁명과 문학의 ‘문학[닫힘]’ 사이에 서있다고 해야겠다. 즉, 나는 문학의 가능성을 믿는다. 도무지 뭘 얻어낸 것도 없는데 잘 읽었다며 텅 빈 독후감을 쓰는 사람들도 있고, 그에 비해 (이런 모습이 훨씬 바람직한데) 도무지 쓰지 못하겠다며 짤막하게 자신의 독서 실패를 밝히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문학 중에서도 우리가 여러 세대에 걸쳐 회자해야 하는 명작들에 한해 생각해보자면, 그 작품들에 아무런 힘도 들어있지 않다고는 그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무시해버린다면 모를까. 그리고 그냥 읽으며 즐기면 되는 대부분의 하류들은 논외다. 그건 어쩌면 단어나 문장, 혹은 감동에 목이 마르거나 어떤 보상심리 탓에 독자들이 훑고 넘겨버리는 작품으로, (인기를 끌더라도 종국에는) 별로 기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반면 우리를 힘들게 하는, 불가능한 도형의 형태로 세상의 다면을 드러내는 무시무시한 작품들은 현명의 영토로 가는 길을 보여준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작가도 그걸 고스란히 “여기 길이 있소.”라고 구체적으로 제시하진 않는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을 우리는 사기꾼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문학의 특수성은 이 난해함 속에 있다. 시대의 독자들은 그걸 해석해야 하며, 실패할 수밖에 없는 필연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빈약한 삶을 충족시킬 용기를 얻거나 현생의 비극을 타개할 수 있는 무기, 혹은 도구를 얻는다. 저마다 다르기에, 나는 그것을 ‘가능성’이라는 단어 외에는 도저히 표현하지 못하겠다.


    헤럴드 블룸은 마르셀 프루스트를 읽지 않으면 도대체 독자들이 어느 작가에게서 지혜를 얻을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상징적인 역설이다. 평생 문학에 빠져 살아온 노학자의 노망에서 나온 말이 결코 아니다. 그렇게는 전혀 생각할 수가 없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간단하고도 쉬워져서, 그것이 아무래도 인간에게 최고의 매력일 수밖에 없으므로, 문학을 곡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학에서 뭔가를 보려는 이들의 글과 논리를 상대로 비교해보면, 그 반대의 것은 그다지 호소력도 없고, 이따금 개개인의 툴툴거림 수준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을 때도 있다. 저 책들은 그냥 문학일 뿐인 문학이 아니다. 조금 거칠게 표현해보건대, 분명 내게 무슨 짓을 해버린 책들이다. 독자들의 이런 신고를 통계로 내보면, 우리는 우리의 딸과 아들이 무슨 책을 건네받게 될 것인지 알게 된다.














    예술을 공부했기에, 서재에 이런 책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전공은 국문이지만 가장 많이 들여다본 건 미술이라, 시각예술에서 문학에 걸쳐 있는 이론들에서 ‘내 눈으로 보는 예술’을 도출하려는 욕심이 인 건, 아무래도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분야의 추천 도서를 구하는 이들에게 여러 권을 골라줄 수 있겠으나, 전공으로 다룰 이들이 아니라면 가장 먼저 통사의 책들을 접해보라고 권할 수밖에 없다. 예술은 세부 내용이 대단히 어렵다. ‘대단히’라는 부사로도 부족하다. 보는 것, 듣는 것, 읽는 것 자체가 어렵고, 이 분야에서 다루는 작품들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세부 비평을 접하는 건 더할 나위 없는 시간 낭비다.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으므로 때때로 아주 위험천만한 일이 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통사라 해도 저자가 예술이론 진영의 어느 편에 서있느냐에 따라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기에, 이왕 접할 거면 두 세 권 정도를 빗겨 읽는 걸 추천한다.


    사실 국내에 발간되는 예술 분야 책 중에는 읽지 않아도 될 책들이 많다. 내용이 부실해서가 아니라, 사전 찾아보거나 인터넷을 뒤지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을 짜깁기해서 뽑아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책들 중에 베스트셀러도 있다. 명저여서가 아니라, 교양분야의 특성을 잘 노린 저자들의 전략이 보기 좋게 먹힌 것이다. 게다가 미술 관련 책들만 보더라도, 그 값은 컬러 도판의 여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미학’이라는 분야에도 조금 쉽게 풀어주겠다고 서로 겹치는 책들이 많으니, 평점이나 ‘좋아요’ 등 널리고 널린 평판에 휘둘리면 골치 아파지는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쉽게 나오는 예술책들은, 한 번 맛볼 통사 형식의 책이 아니라면 굳이 사서 읽을 필요가 없다. 아쉬운 술회이지만, 영양가 있는 예술 책들은 통사를 몇 번 읽고 나서 접할 수 있는, 난이도로 굳이 표현하자면 몇 계단 더 어려운 책들이다. 깊다는 뜻이다. 하지만 일련의 예술과 독자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 들여다보려면 얼마든지 깊어지는 세계다. 관심에 따라 읽으면 되는 것이다. 교양이라 멋지다거나 하는 인상은 정보 수준에서만 통한다.













    거듭 말했던 것 같은데, 나는 목성 보는 걸 좋아한다. 화성과 함께 1시에서 2시 방향의 새벽하늘을 가로지르는 때에는 한참 멍하니 두 점을 바라보곤 한다. 망원경을 사면 아주 본격적인 마니아가 될까봐 섣불리 접근하진 않지만, 우주의 무궁한 궁륭은 언제나 내게 과학적이고, 그와 동시에 종교적이며, 어쩔 수 없이 예술적이다. 과학은 주로 다큐멘터리를 보고 알게 됐다. 가족에게 보여주려고 번역한 다큐멘터리들도 꽤 있고, 얼마간은 칼 세이건과 미치오 카쿠에 푹 빠져 인문학 책을 몇 달 동안이나 전혀 읽지 않은 적도 있었다. 결정타는 아무래도 리처드 도킨스였다. 지금은 아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그러니까 대학 생활 말미에는 그의 뜨거운 정신에 온몸을 데였었다. 정신 못 차린 적도 있다. 성향으로 치자면 나는 이제 온화한 카렌 암스트롱 쪽으로 돌아섰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리처드와 <엣지> 필진들의 종교 비판은 유효하다. 여기저기 보면 데인 상처들이 있다. 언젠가 다시 그녀/그들에게 빠질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종교가 우리에게 아주 못된 일을 자행하는 날에는.


    이렇듯 어쩔 수 없이 과학과 종교를 빗겨 읽게 되지만, 과학자들이 모두 날카로운 비난조의 필자들과 같은 건 당연 아니다. 하지만 나는 어떤 성향 탓인지 이상하게도 과학이 인간을 비판하는 책들을 쏙쏙 골라 읽었고, 그런 것들을 오래 기억하고 있다. 사진에 넣으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서재에 없었던 (아직도 의문이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라든지, 제인 구달, 혹은 우리에게 가까운 최재천 같은 저자들의 책은 객관의 옷을 입은 과학 외에 독자들에게 선명한 메시지를 전하는 또 다른 목소리를 담고 있다. (레이첼은 시인이니 '과학자'라고 할 순 없어도, 예리한 비판의 근거가 되는 과학 정보들의 수준은 굉장히 높다.)


    어쩌면 나는 과학이 뭔가를 제시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서 빨리 SETI 프로젝트의 결과가 나왔으면 한다거나, 유로파에서 (지적 생명체가 아닌) 갑각류 외계생명체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공식 발표했으면 한다거나 하는 그런 과학적 관심 말고, 과학의 손톱으로 인간 세계의 병폐를, 그 부스럼을 긁어 떼어버리는 모습을 그토록 보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뜻에서 말이다.













    이 사진 속의 책들은 나를 힘들게 했었다. 읽기 힘든 건 둘째 치겠다. 어쨌든 시간과 낙서는 독자를 그다지 배신하진 않으므로. 이 책들의 문제는, 마음을 굉장히 아프게 한다는 것이다. 뭐라고 표현할 문장이 딱히 떠오르지도 않는다. 능력 밖이다. 대단히 오래 됐거나, 무서운 내용을 담고 있다거나, 함부로 읽을 내용이 아니라거나, 더 많은 삶을 겪고 다시 돌아와 읽으며 숙고하고 속을 긁어야만 한다거나, 이런 한계의 표지판을 면전에 대단히 노골적으로 들이댄 책들이다. 나는 “결국 독자의 몫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아는데, 그래도 들어갈 수 없는 텍스트 앞에서 뭔가 내가 해볼 수 있는 일이 있진 않을까, 내심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힘든 것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어쩌면 위의 책들에 대해 이 공간에서든 아니면 휴지통 버린 글에서든 너무 많은 말을 ‘지껄였거나’, 혹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성경>과 <꾸란>과 <우파니샤드>와 (이 사진에는 없지만 여타 경전들과), 그리고 니체는 나의 과제다. “왜 그걸 과제로 삼았느냐?”고 묻는 성질 급한 나에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이 침묵으로 일단의 실천을 감행하고 본다. 자전거가 정직한 건, 페달을 밟아야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심장과 근육이 버텨주는 한, 자전거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몸의 그런 습관으로, 정신도 그렇게 해볼 수 있지 않겠냐는 심산에,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종교와 니체를 선택했다. 그것들이 나에게 왔고, 나는 어쩔 수 없는 과제를 받아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답을 쓸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안 한다. 중등 교육과정에서였든 대학 과정에서였든, 난이도나 진도 따윈 전혀 상관하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시험이라고는 좀처럼 극복해본 적이 없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독자의 삶으로, 그런 나도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다시 물어봐도 딱히 대답하진 않겠지만, 왜 나는 그걸 읽기로 했을까. 읽어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모르겠다. 재밌는 건, 나는 종교와 니체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앞으로도 도무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한 권의 시집은 참 초라하다. 그 왜소한 모습으로, 하지만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시집 앞에서는 그보다 훨씬 얇은 종이 한 장이 되어버린다. 나는 참으로 아무 말이나 내뱉는 불량한 독자로 살고 있으나, 놀랍게도 시집의 복기는 단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 시는 이제 전혀 읽지 않는다. 여기서 ‘읽는다’는 동사는 내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제한한 것인데, 시를 쓰겠다는 일념으로 누군가를 읽고 문장의 습관으로 익히거나, 혹은 기억하려고 읽는다는 뜻의 동사다. 그런 뜻으로는 이제 전혀 읽지 않는다.


    지금 읽는 시는 이미지의 잔영으로 남는다. 시를 안 읽는다고? 졸업 이후 더 이상 쓰지는 않지만 시를 한 번도 안 읽어본 날이 없었다. 눈으로 콕 찌르면 압축된 공기가 펑 소리를 내며 터져 나오고, 시인마다 서로 다른 향기를 퍼뜨린다. 나는 꿀벌이고. 그런데 안 읽는다는 건, ‘나’라는 독자의 성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인문학, 과학, 종교, 예술, 신화, 소설, 그리고 온도 높은 철학은 아무리 읽어도 울어본 적이 없다. 시만이 내가 눈물을 흘리는 독자라는 걸 알려줬다. 시는 내게 가자미이기도 했고, 어머니가 입으시는 꽃무늬 팬티이기도 했으며, 내가 언젠가 도착할 해변의 보물이기도 했고, 소리 내면서 우는 나무이기도 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얼마든지 문장을 만들고, 고이 접어 휴지통에 버릴 수 있다.


    대학 다닐 때는 옆으로 빗겨 메는 가방 안에 한 권의 시집을 번갈아가며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렇게나 넣어서) 가지고 다녔다. 생각나면 읽고, 아니면 말았다. 로욜라의 이름을 딴 대학 도서관에서, 내가 뭐 그 이름의 聖人처럼 어느 동굴에 들어가서 영신 수련을 할 만한 정신 상태의 위인은 아니지만, 얇은 시집 한 권에 매달려 거미줄처럼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린 적이 많았다. 나는 거미줄이었기에 많은 걸 놓쳤고, 의미는 저 언덕 아래로 흐름 따라 그렇게 흘러가곤 했다.


    그래서 내게 남은 것은 잔영이다. 덕분에 나는 문장과 단어로 승부하려는 초보적인, 졸렬한 시인들을 걸러낼 수 있다. 나의 거미줄에 남은 시인들은 누구누구일까, 손가락으로 셈해보려다가, 귀찮으면 참지 못하는 성격 탓에 두 움큼 잡아든 시집만 사진으로 찍어봤다. 옆에 피사의 사탑처럼 버티고 있는 황현산 선생의 책은 도무지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기에, 시집이 아닌데도 염치없이 세워 놨다. 내게는 큰 나무 같은 비평이다.












    톨킨을 모르는 독자에게 위의 사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환상이 아닌 것들과 환상의 사이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 내게 보르헤스가 어떤 의미일지를 말하는 건 입만 아픈 일이 될 테다.) 맨 위에 있는 『The Lord of the Rings - The Fellowship of the Ring』은 나를 가장 잘 아는 은인의 선물이고, 나머지는 조금씩 저축한 돈을 부숴가며 주문 후 3~4주를 초조하게 기다려야만 하는 고역 속에 모은 원서들이다.


    우리말로 읽을 이들에게는 ‘씨앗판’ 소설을 권한다. 그 이유는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을 복기한 글에서 충분히 밝혔기에 이 자리에 거듭 싣진 않겠다.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원서로 읽는 걸 권하진 않는다. 스스로를 톨킨 ‘덕후’라 부르는 걸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톨킨은 정말 옛날 사람이다. 지금 쓰지 않는 말들도 많고, 만들어낸 말들도 많다. 또한 소설보다는 사실 피터 잭슨의 영화가 훨씬 재밌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소설 이외에 톨킨의 세계를 풀이한, 그의 아들 크리스토퍼가 엮은 시리즈들은 소설 원서를 읽지 않았다면 가지고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비싸기도 하고, 그 시리즈는 국내에 번역된 적이 없기 때문에 비교하면서 읽을 역서들을 구할 수도 없다. 수집이 취미인 경우를 뺀다면, '비추'다.


    언젠가 톨킨을 이야기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익히 알려진 소설에 대한, 예컨대 『반지의 제왕』이나 『호빗』이 아닌, 그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실마릴리온』과 『후린의 아이들』을 이야기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크리스토퍼는 물론이고 톨킨을 연구한 여러 저자들의 글을 언급하면서 끊임없는 애정을 글에다 덧바르는 실수를 범하고 말 것이다. 요컨대 대단히 지루하고 이 글보다 훨씬 긴 글이 될 것이다. 이러다 바보 같이 책을 써버리는 건 아닐까? 또한 톨킨은 내가 장편의 번역을 실천하는 이유이기도 하므로, 번역 이야기 하는 걸 빼놓지도 않을 테다.


    너무 길어질 것이 당연해 섣불리 시도하지 않는 이 마음을 저 사진에서 느껴줬다면, 나는 여기까지 동행의 걸음을 이끈 인내심 많고 사려 깊은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꼬이지 않은 발음으로 어찌어찌 잘 말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담이지만, 이렇게 사진을 찍고 보니 책을 너무 험하게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구비하지 못한 다섯 권의 소장본은 부디 잘 다룰 수 있기를. 앞서 독서의 실천으로 종교와 니체를 과제로 삼은 가역(苛役)을 말했었는데, 번역의 실천은 톨킨이다. 백발의 할아버지가 된다면 지금보다는 더 능수능란하게 ‘우리말 톨킨’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무도 그 글을 읽을 순 없다.












    이 긴 글도 이제 막바지다. 그리고 이건 마지막 사진이다. 네 권 밖에 없다. 내가 머리맡에 두고 자는 책은 딱 네 권이다. ‘머리맡’이라 함은 책상 위 컴퓨터 모니터의 왼편을 말한다. 머리맡과는 전혀 관련없는 공간이지만 (나는 고등학생 이후 한 번도 책상에서 자본 적이 없다!) 어쨌든 나는 그곳을 ‘머리맡’이라 부르기로 했다. 글을 쓰며 모니터를 쳐다보다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으면 나는 습관적으로 왼쪽을 쳐다본다. 그곳에는 저 네 권의 책과 <성경>이 있다. (다른 경전을 꽂지 않은 건 순전히 책의 크기 때문이다.) 머리맡에는 저 네 권이 아니면 아무 것도 두지 않는다. 막다른 길에 있을 때, 그것이 삶의 순간이든 독서든 작(作)이든 그건 아무 상관없는데, 그런 궁지에서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한 장 한 장 다시 넘겨보는 책은 저 네 권이 전부다.


    어쩌다 저 책들을 읽게 되었는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며, 그저 질문의 질문만 될 뿐인, 돌고 도는 메타 질문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그래도 그런 질문을 한다. 따져보자면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어쩌다 접한 이탈로의 소설 중 가장 마지막에 읽게 된 것이고, 『침묵의 세계』는 최승자 시인의 번역이라고 해서 (그리고 덧붙이자면 릴케의 추천 문구에 완전히 홀렸으므로) 읽은 것이며, 언젠가 말했지만『중력과 은총』은 이상하리만치 ‘지름신’이 강림한 겨울의 어느 날 일고여덟 권이나 되는 책을 한꺼번에 사버리는 통에 두꺼운 책들 사이에 껴서 온 책이고, 『공부하는 삶』은 (순전히 말장난 같으나) 한창 대학에서 공부하는 삶을 살았을 때 쥐어본 책이었다. 그러나 분명 그 시작에는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운명을 믿지 않는 나는 대체 무슨 문장으로 그런 현상을 내 식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따금 다시 운명을 믿기 시작해야 할 것만 같은 두려움에 빠지곤 한다. 도저히 밝혀낼 수가 없다.


    누군가가 나에게 귀 기울인다면, 그런 세심한 배려를 기꺼이 베풀어준다면, 나는 저 네 권 말고는 그녀/그에게 아무 것도 건네줄 수가 없다. 이 책들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눈을 감게 된다. 몸이 반응하는 책이다. 감히 어딘가에 네 권의 복기를 적어 내려갔었으나, 그건 전혀 나의 글이 아니다. 수많은 나 중 한 명이 괘씸하게도 글을 뱉어버렸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또 다른 내가 그걸 공간에 올려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나는 아무 것도 쓰지 말라고 항상 말했다. 그 나에게는 참으로 미안하다. 읽었으니 써야한다는 초라한 강박증으로는 아무래도 끝없이 실패할 것이다. 그 실패에 앞선 네 차례의 첫 만남을 생각한다. 여러 번 다시 읽기도 하고, 어느 때는 한동안 손에 쥐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항상 같은 공간에 있다. 컴퓨터 모니터의 왼편, 내가 ‘머리맡’이라 부르는 곳에.


    모니터를 오른쪽으로 살짝 밀어 책 한 권 더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날이, 내가 “다섯 권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는 건, 모든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나의 마음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진심을 구하는 독자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너덧 권이 넘는 책을 절대 추천하지 않는다는, 이 세계의 확고부동한 비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삶은 하나의 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며, 그 손에는 보통 다섯 개의 손가락만이 있으니. 부디 나는 그 손가락 모두를 한 번 쯤은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독자’가 되기를. 그 무엇보다도 바란다.





*   *   *



    내가 부지런하다면 5년 뒤에는 이런 글 하나를 더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10년의 실패'를 술회하게 될 것이다. 딱히 5년이라는 시간이 뭔가 의미가 있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대체로 엉성한 나의 독서를 회상하기에는 그 정도가 알맞을 것도 같고, 1~4년이면 맛 좋은 음식 하나를 먹어도 먹다가 남길 것 같은 짧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그런 것도 같다. 그렇게 별 의미 없는 5년이 두 번 쌓이면, 의미 있는 10년이 된다. 내일도 모르겠는데 5년 뒤를 내다 보진 못한다. 지금보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여전히 답보일지도 알지 못한다. 책의 다음 문장이 뭐가 될지 전혀 모르겠는 답답함과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발휘하게 되는 인내는, 삶의 그것과 비교해도 전혀 다르지 않다.


    책 안 읽어도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방법을 모르겠다. 솔직히, 읽어도 훌륭해질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훌륭해지는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이 내 정신 어딘가에 분명 있을 테니. 그리하여 나는 그저 길가의 돌멩이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독서를 통해 보석이 되려는 마음에서, 나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그 마음이 나를 책으로 이끈다. 역설인 것도 같고, 누가 들으면 거짓말처럼 들리긴 하겠지만 사실이다. 서두에서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여기까지 써내려온 글에는 단 하나의 위선도 없었다. 그리고 끝까지 솔직할 수밖에 없다. 책에게 다가가 그 암호들 앞에서, 나는 부디 돌멩이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저 옆에서 비바람에 쓸려 내려가는 모래의 바삭바삭 구르는 비명 소리가 들리는 까닭이다. 돌멩이, 그것은 나의 저항의 형태일 수밖에 없다. 언젠가 누군가의 손끝에서 힘 좋게 날아가 이 세상 어딘가를 부수는, 나는 하나의 무기이자 수단이 되었으면 한다. 지금껏 그런 글들을 읽었고, 그런 대가들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으므로. 불가역의 독서가 앞으로 5년은 더 실패하며 굴러갔으면 한다. 결국 나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별첨 : 책 링크를 아래에 덧붙여놨다.





① 소설


































































































② 예술과 문학






















































































































③ 과학
















































































④ 고역의 책












































































⑤ 머리맡에 두는 책























우울과몽상, 에드거앨런포, 이탈로칼비노, 반쪼가리자작, 존재하지않는기사, 나무위의남작, 보이지않는도시들, 우주만화, 파리대왕, 윌리엄골딩, 다섯째아이, 도리스레싱, 이방인, 카뮈, 싯다르타, 헤르만헤세, 이반데니소비치, 솔제니친, 동물농장, 조지오웰, 인간실격, 다자이오사무, 미겔스트리트, 나이폴, 알렙, 보르헤스, 좀머씨이야기, 파트리크쥐스킨트, 허삼관매혈기, 살아간다는것, 위화, 영국왕을모셨지, 보후밀흐라발, 마이클K, 존쿳시, 기적의시대, 보리슬라프페키치, 루쉰,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진중권, 조이한, 발터벤야민, 춤추는죽음, 카라바조, 임영방, 르네상스, 도상해석학, 파노프스키, 문학과예술의사회사, 아르놀트하우저, 백낙청, 루카치, 신이내린광기, 여성미술사회, 추의역사, 움베르토에코, 그림과눈물, 현대미술, 한국문학통사, 조동일, 유종호, 마가레테브룬스, 미학오디세이, 예술철학, 박이문, 오타베다네히사, 부르크하르트, 허버트리트, 톨킨, 반지의제왕, 호빗, 실마릴리온, 후린의아이들, 크리스토퍼톨킨, 인간없는세상, 이기적유전자, 이타적유전자, 매트리들리, 리처드도킨스, 샘해리스, 게놈, 광대한여행, 제인구달, 빌브라이슨, 재레드다이아몬드, 총균쇠, 미치오카쿠, 핀치의부리, 최재천, 레이첼카슨, 침묵의봄, 칼세이건, 악마의사도, 만들어진신, 카렌암스트롱, 신을위한변론, 불안의서, 영혼의산, 우파니샤트, 코란, 미셸푸코, 광기의역사, 니체, 쇼펜하우어, 사사키아타루, 야전과영원, 성경, 르네지라르, 폭력과성스러움, 블랑쇼, 켄윌버, 무경계, 체르노빌의목소리, 스베틀라나알렉시예비치, 라마나마하르쉬, 함석한, 간디, 리처드파인만, 미메시스, 아리스토텔레스, 번역의탄생, 이희재, 황현산, 시몬베유, 중력과은총, 침묵의세계, 피카르트, 공부하는삶, 세르티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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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는 법, 생각하는 법, 말하고 쓰는 법
    from Value Investing 2016-02-29 15:47 
    탕기 님의 기나긴 글을 읽고 나서 공감을 표시하는 따뜻한(?) 댓글 한 줄이라도 쓰고 싶었는데, 정말이지 마땅한 표현을 찾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네요. 그나마 님의 글 끄트머리에서 간신히 발견한 '다섯 개의 손가락'이 하나의 미약한 연결 고리를 만들어 내지 않았더라면, 이런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식의 뜬금없는 먼댓글을 쓸 수도 없었겠지요.(니체가 마침『우상의 황혼』이라는 책에서 말했던 '다섯 손가락을 모두 보여주는 것은 점잖치 못한 일이다. 스스로
 
 
 
생명에도 계급이 있는가 - 유전자 정치와 영국의 우생학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23
염운옥 지음 / 책세상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016년 2월 26일 금요일





    “기나긴 평화가 이어지고 있으며, 질병이 창궐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허나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게을러빠진 자들이 수천이나 되는데, 이 나라는 손쓸 길을 못 찾는다. 난국을 막지도 못하고, 대안을 찾지도 못한다. 어쨌든 우리 국민에게는 참으로 짐스러울 따름이다.”(Throughe our longe peace and seldome sickness... wee are growen more populous than ever heretofore;... many thousandes of idle persons are within this realme, which, havinge no way to be sett on worke, be either mutinous and seeke alteration in the state, or at leaste very burdensome to the commonwealthe.)


    영국 지리학의 상징인 리처드 해클루트가 남긴 글이다. 검색하다가 알게 된 것을 번역해 이곳에 옮겨봤다. 원문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는 16세기였다. 거리가 대체 얼마나 군중들로 인산인해였기에 이 노학자는 경멸조의 글을 썼던 것일까. 심지어 잉여(surplus) 인구를 다른 곳으로 보내버려야 한다고까지 말한 사람이다. 리처드는 인구가 줄어들길 바랐을 것이다.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난 2년 후인 1618년, 영국은 스웨덴, 프랑스, 덴마크 등과 함께 프로테스탄트 제후동맹 편에 서서 신성 로마 제국과 싸웠다. 종교전쟁의 명목으로 시작해 패권전쟁으로 비화되며 무려 30년 동안 벌어진, 그래서 이름도 ‘30년’인 이 전쟁으로 영국 인구는 급격히 줄었다. 아니, 유럽 인구 자체가 현저히 줄었다. 리처드의 유령은 웃었을까? 알 수 없다. 다만 유럽은 또다시 인구 급감의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다.


    하지만 권력이 인구를 조절해야 한다는 생각은 리처드만의 것은 아니다. 연원을 따지려면 우리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설교까지 들어야만 한다. 맬서스 이후 드디어 ‘인구’라는 거대한 집단을 직시하게 된 사람들은, 기계문명의 발전과는 상관없이 (아니, 오히려 역으로) 갈수록 피폐해지는 사회 속에서 국가가 타개의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이 우생학(優生學)이다. ‘우생’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 사회에는 이미 ‘루저’, ‘금수저’, ‘우월’ 등의 단어가 매체를 거쳐 급속도로 퍼져 있다. 들여다봐야 할 학문이라 생각했다. 우생학 비판의 첫 걸음을 위해 나는 한 주 간 염운옥의『생명에도 계급이 있는가』를 곱씹었다.




*   *   *




    부제는 ‘유전자 정치와 영국의 우생학’이다. 그렇다. 우생학, Eugenics는 영국에서 태어났다. 진화론을 생산해낸 나라가 영국이었기 때문이다. 갈라파고스 제도를 다녀온 후 (그 전에도 그랬지만) 불안증 탓에 외출하는 일이 거의 없었던 찰스 다윈 대신 진화론을 설파한 사람이 토머스 헉슬리였다. 토머스의 ‘과학적 자연주의’는 우생학 개념을 도입한 프랜시스 골턴의 주장과도 상통한다. 과학이 신앙을 대신하고 국가의 복지에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 여기서 프랜시스의 우생학이 시작됐다. 1883년 출간된 『Inquiries into Human Faculty and Its Development』에는 “정신과 육체의 양면에 있어 차세대 인류의 질을 높이거나 낮추는 작용 요인에 대해 연구하고 이를 사회 통제 아래 두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과학”이라는 우생학의 정의가 실려 있다.


    바야흐로 19세기 말. 저물어가는 대영제국은 Pax Britanica의 명성을 잃어가는 중이라며 우울한 망상에 빠져 있었다. 언론에서는 연일 ‘인종퇴화’를 떠들어댔고, 이러다가 제국에 하층 계급들만 넘쳐날 수도 있겠다는 걱정스런 분위기가 이 골목 저 골목으로 퍼져나갔다. 프랜시스는 ‘부적격자’라 명명된 이들이 늘어나는 건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이 아닌 문명화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윈도 이러한 ‘역선택’의 문제를 알고 있긴 했다. 이를 Survival of the Unfit이라 한다.) 이어지는 주장은 안 봐도 뻔하다. 인간의 형질을 개량하여 ‘천재의 세상’을 만들자. 찰스는 이런 유토피아적 망상을 비판했지만, 인간 유전자 조작과 우월, 천재 생산 등을 꿈꾸는 자들은 오늘날에도 많다. 최근 중국에서는 과학계의 두뇌들이 모여 천재 유전자를 찾고 있다.


    영국이 당시 개방적 신분사회였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각 사회 계층의 유전적 소질을 향상시킨다. 그 중 능력을 지닌 타고난 형질의 사람들이 전문가 엘리트 집단으로, 즉 상위 계층으로 진입한다. 다분히 매력적인 생각이다. 우생학에 심취한 이들은 실제로 “전문가 엘리트 집단에 의한 과두제 지배”(염운옥, 『생명에도 계급이 있는가』, 42쪽)를 꿈꿨다. 반면 라마르크주의, 즉 용불용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환경개혁을 통해 형질개선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사회개혁운동가들이 그 선상에 있었다. 사회진화론자로 명성을 떨친 허버트 스펜서가 공리주의 편에서 도덕을 외친 건 당연했다. 넓게 보자면, 우생학의 맞은편에는 환경론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개념의 창시자인 프랜시스 본인은 환경론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우생학을 ‘부정적 우생학(negative eugenics)’의 방향으로 끌고 간 것은 프랜시스의 개념을 이어받은 개혁적 후발 주자들이었다.



*   *   *



    염운옥은 우생학의 세 갈래를 살펴본다. 그 첫 번째가 긍정적 우생학이다. 지원과 장려를 통해 인구의 질적 개선을 이룩한다는 취지에서 ‘긍정적’이라는 단어가 붙었다. 당시 영국은 인구퇴화론(반멜서스주의)의 영향으로 인종쇠퇴를 “인종의 자살”이라는 선정적인 문구로 표현했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인구를 무기로 활용했다. 대영제국도 국력의 감소를 두려워했다. 실제 통계에서도 출산율 감소가 나타났다. 각계 인사들이 사회의 개혁을 주장하며 다양한 논리들을 설파했다. 점진적 사회주의의 초석으로 평가받는 페이비언주의 진영에는 조지 버나드 쇼, H.G. 웰스, 버트런드 러셀, 존 케인즈 등 후대가 기억하는 명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모성수당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출산과 육아로 여성이 노동을 할 수 없으면 국가가 원조해줘야 한다. ‘헨리 하벤’이라는 사람은 독일이 출산 후 6주 간 75%의 임금을 지불하니 영국은 8주 간 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영국 독립노동당은 자녀의 생활비까지도 지급해야 한다고 했다.


    여성참정권 운동으로 유명한 엘리노어 래스본, 메리 스톡스 등 페미니즘의 선구적 여성들은 가족수당협회를 설립해 여성의 특수성을 주장했다. 여성의 출산과 육아는 “사회와 국가에 대한 서비스”(염운옥의 책, 73쪽)라는 것이었다. 훗날 이들은 모자(母子)를 포함한 가족수당을 제안했다. 당시 정부는 ‘평균가족’이라는 개념을 적용해 최저생활임금을 지급하고 있었는데, 가족수당협회가 보기에 이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제도였다. 이 선구적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한 가족수당은 가족을 부양하는 남성의 임금을 보조하는 가족임금과는 다르다. 아내와 자녀에게 직접 수당을 지급하면 남성에게서 ‘부양’이라는 책무를 제거할 수 있고, 그로 인해 남성과 여성의 임금이 같아질 수 있다. 상당히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엘리노어의 노력으로 영국 우생협회는 가족수당협회와 손을 잡았다.


    시대의 화두는 두 개였다. 양육과 본성. 우생협회는 당연 후자였다. 하지만 우생협회의 여성 인사들이 우생학의 취지와 모자 복지를 함께 가져가려고 노력한 덕분에 양육과 본성의 조화를 역설하는 이들이 하나 둘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양육과 관련된 영국 최대의 행사는 National Baby Week였다. 포스터를 찾아봤다. 아테나를 연상케 하는 어머니가 낫을 든 해골을 오른팔로 막고 있고, 그 앞에는 두 아이가 몸을 움츠린 채 겁에 질려 있다. 포스터의 문구는 Save The Babies다. 또 다른 삽화에는 유아의 사망 원인들이 열거되어 있다. 위에서 아래로 보자면, 가난(Poverty), 무관심(Ignorance), 알코올 중독(Drink), 불결(Dirt), 그리고 질병(Disease) 순이다. 우생학 관련자들이 모자 복지 확충에 왜 손을 들어줬는지 이제 이해가 된다. National Baby Week와 같은 전시회나 무료 교육, 검진 등에 참여하는, 즉 복지 서비스를 이용하려는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들보다 상대적으로 우수하며, 따라서 그 자녀도 우수 개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우생학자들은 하층 계급에서도 우수한 자를 찾을 수 있다고 봤다.


    물론 강경파들은 달랐다. 찰스 다윈의 넷째 아들인 래너드 다윈은 우생협회장을 18년 간 지낸 거물이었는데, 중간 계급의 돈으로 하층 계급의 출산율을 올리는 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는다는 유전의 법칙을 명심해야 한다.”(염운옥의 책, 87쪽)는 것이 래너드의 입장이었다. 우생교육협회도 신여성들의 출산과 양육을 장려하려는 모성기금을 운영했었지만, 이는 다분히 차별적 접근이어서 설득력은 점점 떨어졌다. 연이은 인구 감소도 강경파의 위축에 한 몫 거들었다. 어떻게 해서든 인구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개혁적 인물들이 가입했다. UNESCO의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 줄리언 헉슬리는 강경론자들과는 달리 일단 모든 인간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고 유전 여부를 판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균등한 기회를 가족수당이 마련해줄 수 있을 거란 뜻이다.


    1930년대 말이 되자, 정부는 가족수당 정책으로 빈곤을 해결하고 저임금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앞서 페미니스트들이 높이 들었던 남녀평등의 깃발은 정부의 손에 없었다. 대신 열등처우에만 집중했다. 처우제한 원칙, 즉 빈민 구제를 받은 이들이 일반노동자보다 나아지면 안 된다는 1834년 영국 구빈법의 입장을 고수한 것이다. 긍정적 우생학의 개혁적 주장은 정부 정책에 고스란히 스며들 수가 없었다. 사실상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우생학은 “이런 방식으로 오늘날 복지 서비스의 근간이 되는 모성 보호와 모자 복지, 출산 장려 정책을 지탱하는 담론 속에 얽혀 들어갔다.”(염운옥의 책, 91쪽)



*   *   *



    ‘우생학’이라는 단어를 들여다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부정적 우생학’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단종법(斷種法), 즉 장애를 지닌 이의 생식 능력을 박탈하는 법은, 듣는 순간 소름이 돋는다. 결과부터 말하겠는데, 영국 우생협회의 단종법 제정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는 참으로 다행인 일이다. 이 개념이 대륙으로 건너가 나치즘과 만나 부정적 우생학의 ‘꽃’이 폈다. 나치는 신체장애, 동성애자, 정신질환자, 공산주의자, 로만/집시,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유대인 등을 ‘육신이 나약한 자’로 규정, 혹독한 노동과 인체 실험, 고문의 늪에 빠뜨렸다. 나치가 세운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이들의 신체 한계를 측정하는 비인간적인 실험이 연일 계속됐다.


    영국 국민들은 섹슈얼리티와 결혼 등 사적인 문제를 공론화하는 걸 꺼렸다. 다소 보수적이라 할 수 있는 개인주의적 성향 덕분에 대중은 우생학의 주장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우생협회의 선전 능력은 탁월했고, 10명 중 4명이나 되는 많은 여성 회원들이 박람회, 강연회, 영화 제작 등에 앞장섰다. 아이러니다. 여성의 인권을 주장하는 페미니즘과 우월한 인류를 탄생시키려는 우생학이 제휴했다. 따라서 염운옥은 이렇게 말한다. “우생학의 역사를 인신에 해를 가하는 ‘악’으로, 여성의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획득하려는 산아 제한 운동을 ‘선’으로 그리는 이분법적 역사 서술은 가능하지 않다.”(염운옥의 책, 96쪽)


    우생협회의 단종법이 여성들의 지지를 받은 이유는 장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영국 사회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는 여성협동조합 길드에서도 피임 보급을 주장했다. 지금 이를 논해보자면, 첨예한 윤리의 칼날을 피해갈 길은 없을 것이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여성의 심리. 우리는 개인의 선택(피임)에 대해 비난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여성들은 단종법을 지지함으로써 자신의 ‘낳지 않을 권리’를 남녀 장애인의 ‘낳을 권리’를 부정하면서 주장한 셈이었다.”(염운옥의 책, 125쪽) 장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지금도 여전하다. 하지만 당시의 영국보다는 대중의 편견이 여러 방향으로 교정되고 있다는 걸 쓰라린 마음으로 복기해봐야 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단종법은 실패했다. 허버트 스펜서를 위시한 환경론의 영향이 컸다. 유전만으로는 모든 걸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있었다. 의사들의 직업윤리도 향상됐다. 강제 단종의 실시를 두고 비난 여론이 있었다. 그런 말을 한 인물은 의회에서 난타를 당했다. 노동당과 운동 진영에서는 계급 차별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자발성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계층에게 단종은 강제와 같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영국은 특이하게도 계급 사회이지만 의회 민주주의가 전체를 지탱하고 있었다. 우생협회는 자발적 단종으로 선회했다. 그러나 영국 국민들은 단종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 영국은 단종을 통한 전체주의 노선을 걷지 않을 수 있었다. 대신 온건윤리에 우생학 운동이 흡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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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우생학은 ‘예방적 우생학’이다. ‘예방’이라는 단어에서 이미 눈치 챘겠지만, 이 우생학은 질병, 특히 성병과 싸운다. 그녀/그들은 성병을 “인종의 독”이라 불렀다. 『생명에도 계급이 있는가』에는 당시 런던 인구의 10%가 매독에 걸렸을 거라는 주장이 담겨 있다. 그만큼 심각한 문제였다는 뜻이다. 그러자 우생학자들은 성병의 위험성을 부각시키면서 섹슈얼리티의 국가 차원 통제를 강력히 주장했다. 반면 페미니스트들은 성병의 전염을 남성의 부도덕을 규탄할 기회로 삼아 과장된 전략을 사용했다. “Vote for Women and Chastity for Men!” 당시 페미니스트들의 문구였다. 1890년대 이후 급감하던 출산율을 상쇄시키려면 어떻게든 국가가 성병을 관리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앞서 든 성병의 예로 매독을 언급했었는데, 그 위력은 상당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에 이런 구절이 있어 번역해봤다. “유럽이 처음으로 매독을 명확하게 기록한 1495년, 매독 환자들은 머리에서 무릎까지 온통 고름으로 뒤덮였고, 얼굴에서는 살점이 떨어졌으며, 수개월 안에 목숨을 잃었다.”(제레드 다이아몬드, 필자 번역, 『Guns, Germs, and Steel』, 210쪽)


    예방적 우생학은 부모의 책임의식을 강조했다. 강경파들이야 자연선택의 법칙이라며 “죽을 만한 사람들은 죽어도 된다.”는 입장이었지만 칼렙 살리비로 대변되는 예방적 우생학 진영은 국가의 개입을 촉구했다. 여론도 그쪽 편이었던 모양이다. 정부는 여론에 밀려 국가 차원의 조사를 했고, 무료 진료소과 특효약 개발이 효과를 보면서 매독 감염자 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시빌 네빌 롤프’라는 우생주의자는 혼외아 중에도 적격인 경우가 있을 수 있으니 법의 보호를 받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생학에서 새로운 도덕이 탄생했던 것이다.


    예방적 우생학은 엄밀히 말해 정통 우생학이 아니었다. 비과학적이라는 비난을 쏟아낸 측도 우생협회였으니. 하지만 오히려 이런 온건한 분위기 덕분에 가톨릭교회의 공감을 살 수 있었으며, 유전과 환경 양쪽 모두를 고려하는 태도로 여성들의 지지로 받았다. 앞서 말한 칼렙 살리비는 여성 참정을 지지하고 (아서 코난 도일, 버트런드 러셀 등과 함께) 이혼 허용 사유 확대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예방적 우생학의 최대 목표는 이렇다. “태아에게 있어서 외부 환경을 구성하는 모체를 매독 감염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환경 요인을 배제하지 않는 ‘예방적 우생학’이 대처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되는 것이다.”(염운옥의 책, 156~156쪽)


    성병 관리와 함께 우생주의가 목표로 삼은 것은 바로 성교육과 결혼 전 건강진단 계획 의무화다. 우생협회는 가정에서보다는 학교에서 성교육을, 그것도 전문가들의 통제 하에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소년에게 우생학 원리를 교육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협회 측에서 보면 대단히 답답했겠지만 영국 정부의 입장 표명은 늘 소극적이었다. 결혼 전 건강진단 계획 의무화도 실패로 돌아갔다. 염운옥은 이 제도를 부정적 우생학이 아닌 건전한 일부일처제 문화 정착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우생협회의 법 제정에 냉담하게 반응했다. 협회도 목소리를 많이 낮춘 편이었다. 원래 강제적으로 하자고 했다가 반박을 받자 자발적 검사를 권장한다고 입장을 바꿨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론은 우생협회가 사회 불안을 조성할 뿐이라고 되받아쳤다. 물론 이는 우생학에 대한 촌철살인이었다. “우생학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의 표현이었다.”(염운옥의 책, 164쪽)



*   *   *



    영국 우생학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우생학 운동은 여성들의 활약으로 모성주의 페미니즘과 결합했다. 양육환경을 중요하게 생각한 그녀들은 우생학 쪽에 서있었지만 프랜시스 골턴처럼 환경론 역시 무시할 수 없다고 느꼈다. 이 점이 오히려 우생학 논리를 무너뜨리는 모양새가 됐으나, 여성들의 적극적인 대외 활동으로 우생학은 대중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다. 모성수당, 가족수당 등의 긍정적 우생학 개혁 논의들은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로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사회복지제도 논의의 한 축이 되었고, 열등을 강제로 지워버리려는 부정적 우생학의 단종법은 영국 특유의 개인주의와 환경론, 노동당 진영의 반발에 밀려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우생학 운동은 그치지 않았다. 이후 교육과 결혼제도에 개입한 우생학은 우생(優生)의 논리를 후대에게 그대로 전해줬다. 1970년대에는 ‘자유방임주의’ 우생학이 등장해 개인이 선택적으로 중절할 수 있다는 시대 분위기가 조성됐고, 1990년대에는 맞춤아기의 등장이 예견됐다. 이제 우생은 개인적 자발로 옮겨왔다. 여기서 질문해본다. 이 윤리적 난제는 개인의 선택에 맡겨야 하는 것일까? 염운옥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인류에게 주어진 가치를 상기시킨다. 생명 평등의 수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쪽의 편에 설 것이다. 가장 본질에 가까운 도덕과 윤리의 가치는 쉽게 훼손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 기술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기술자들에게 끊임없이 되묻는다. 다행이다. 하지만 개인의 형편과 행복추구권 등을 고려하면 장애아를 낳았거나 출산을 두려워하는 부모에게, 특히 “키우기 싫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양육을 강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비난은 받겠지만, 우생이 이미 개인적 자발의 단계로 옮겨온 오늘날 윤리적 난제에 대한 확답은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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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6-02-27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프랜시스 골턴의 이름을 들어보는군요. 저는 그 사람을 스티븐 제이굴드가 쓴『인간에 대한 오해』라는 책을 통해 만났는데, 그가 `우생학`에 대해 그토록 확고부동한 신념과 놀라운 추진력을 갖고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려고 애썼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더군요. 그의 주장대로라면 `인종 사이의 차이` 뿐만 아니라 `인류와 다른 생물종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도 완전히 생각을 달리해야 되지 싶고,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오만` 그 자체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탕기 2016-02-27 21:1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저 역시 오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유전`이라는 개념이 인간평등의 가치가 지금보다 덜 했던 시기와 맞물려 그런 주장이 널리 퍼질 수 있었던 환경을 고려해봐야겠지만 말이죠. 그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때보다는 지금 우생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맹목을 저지르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 프랜시스가 우생 개념에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당대 핫이슈인 진화론의 엄청난 위력 때문이었겠죠. 환경적 요인을 무시하진 않았으니, 프랜시스보다는 후대의 강경파 우생주의자들이 비난 받을 여지가 더 큰 것도 같습니다.

Oren님께서 말씀하신 스티븐 제이굴드의 책을 구해서 읽어봐야겠군요. 근래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원서와 번역본으로 비교해서 읽어볼 생각이었는데, 그 사이 스티븐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 비가 온다고 하지만 마음은 풍족한 주말 보내십시오. 좋은 말씀 늘 고맙습니다.
 

2016년 2월 26일 금요일




    스카보로 장터에 가는 길이세요?     Are you going to Scarborough Fair?

    파슬리, 세이지, 로즈마리와 타임     Parsley, sage, rosemary and thyme;

    거기 사는 이에게 소식 전해줘요      Remember me to one who lives there,

    그이는 나의 참된 사랑이었습니다    For once was a true love of mine.


    <Scarborough Fair>, 이하 번역 필자


    세상은 사랑을 노래한다. 내가 시를 관둔 것은 사랑 때문이었지만, 세상은 정말로 사랑을 노래한다. 어쩌면, 노래하는 법을 몰라 작시(作詩)를 접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온갖 음식 내음 맡고 다니는 장터의 객처럼 산다. 이 마을 저 마을 부단히 옮겨 다닌다. 어려운 시를 읽는 날이 있고, 수 백 년 전의, 아니, 수 천 년 전의 글귀를 읊는 날도 있다. 무명의 누군가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 남겨 지금까지 이어지는 노래도 있고, 마음 깊은 대가들의 펜촉 끝에서 항간에 한 방울의 잉크로 떨어진 노래도 있다. 아, 그 모든 것은 아프다. 곧 봄이 온다. 산에 올라 진달래 향을 맡겠지만, 꽃은 슬프다. 나는 왜 피어나는 것들을 두고, 봄의 노을을 먼저 생각하는가. 왜 별자리를 바라보며 무궁한 영원을 꿈꾸는가. 왜 대가들은 시를 쓰는가, 왜 사람들은 노래하는가. 사랑은 무엇인가.


    Parsley, sage, rosemary and thyme. 입술 언저리에서 맴도는, 장터의 채소들. 고등학생 때였다. 한창 눈 가리고 글 쓰던 무렵, <Scarborough Fair>를 처음 들었다. 부모님과 사이먼&가펑클을 이야기했고, 새벽에는 새러 브라이트만의 (여성의 시점으로 된) 개사를 들었다. (영국 배우 에이미 너틀의 2005년 앨범 버전을 가장 좋아한다.) 17세기 무렵, 잉글랜드의 민중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던 노래. 이룰 수 없는 사랑, 불가능한 일. 어린 마음에는 선율만이 남아있을 수밖에. 그리고 10년이 지나 다시 듣는다. 나는 그 사이 사랑을 했었고, 사랑을 노래할 수 없음을 알았고, 그럼에도 세상은 무수한 사랑을 무수히 읊조리며 기억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여전히 무수한 것들을, 나는 모른다. 그런 까닭에 사랑과 시와 노래를 모아 모래의 성을 쌓고, 최후의 파도를 기다리며, 끝내 나의 모든 것이 부서져 사라지길 기다리며, 석양 속에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자가 노래한다. “그이에게 삼베옷 한 벌을 만들어달라고 해줘요. 바느질로 실땀 하나 남기지 않는다면 그이는 나의 참된 사랑일 테니.”(Tell her to make me a cambric shirt, / Parsley, sage, rosemary, and thyme; / Without any seam or needlework, / Then she shall be a true love of mine.) 이어지는 노래에서는 그 옷을 ‘물 한 번 솟지 않았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우물(Where never sprung water or rain ever fell)’에서 빨 수 있다면, 그이는 자신의 참된 사랑이 될 거라고 한다. 이렇게 여자는 세 개의 불가능한 과제를 받는다. 이에 여자는 “그이가 내게 일감 셋을 줬군요. 나의 참된 사랑이 되려면, 그이도 나만큼 많은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할 텐데.”(Now he has asked me questions three, / Parsley, sage, rosemary, and thyme; /I hope he'll answer as many for me, / Before he shall be a true lover of mine.) 하며 바란다. 남자도 과제를 받는다. 불가능함의 사이에서 여자와 남자가 하나같이 말하는 것은 a true love of mine, 참된 사랑이다.


    우리나라의 고려 시대에 한 남자는 이런 노래를 남겼다. <Scarborough Fair>와는 달리 어떤 선율이 붙어있는지 알 수 없지만, 시공간을 넘은 인간은 사랑을 불가능에 빗대며 실로 그 ‘참됨’을 갈구한다.




    <악장가사(樂章歌詞)>에 수록된 정석가(鄭石歌)다.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대가들은 물론이고 재야의 원로들 사이에서도 이 노래를 둔 논쟁이 여전하나, 이 자리를 빌려 나의 전공 세부를 열거하고 싶진 않다. 정체를 몰라도, 사랑하는 마음은 이렇게 고스란히 느껴지니까. 바삭바삭한 잔모래가 있는 땅에, 그것도 그 땅의 벼랑에 밤을 심습니다. 모두 다섯 되가 되는 구운 밤입니다. 그 밤이 움 돋아 싹이 난다면 (명사어간 움[芽]은 뒤이어지는 ‘싹 나다’와 의미가 다르다. 앞의 것이 조짐이라면, 뒤의 것은 발아된 상태다.) 덕이 많으신 당신을 여읠 수 있겠습니다. 어찌 여읠 수 있을까. 이어지는 노래에도 가련한 아름다움이 있다. 옥으로 새긴 연꽃이 무려 삼백 송이가 피어야 하고, 철실로 주름 박은 융복(고관대작 의복)이 다 헐어야 하며, 무쇠 황소가 쇠나무 산의 모든 쇠풀을 먹어치워야 한다. 당신을 여읠 수 없다는 마음, 하지만 여읠 수밖에 없는 진실. 진실은 늘 마음을 배신하며, 마음은 늘 진실을 능가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당신을 여의고, 저는 천년을 삽니다. 이 마음이 못 살 것도 없지요. 하지만 그 믿음이라는 것이 끊어지겠습니까? 당신을 향한 마음은 옥으로 새긴 삼백 송이의 연꽃이요, 기필코 헐지 않을 철실로 된 융복이며, 이 세상에는 피지 않는 쇠풀과 이 세상에 없는 무쇠 황소, 그리고 쇠나무 산입니다.


    그이가 일감을 모두 끝냈다면              When he has done and finished his work.

    파슬리, 세이지, 로즈메리와 타임          Parsley, sage, rosemary, and thyme:

    오, 내게 와서 삼베옷 받으라 전해줘요    Oh, tell him to come and he'll have his shirt,

    그이는 나의 참된 사랑일 겁니다.          And he shall be a true lover of mine.


    여자는 삼베옷을 만들었다. 바느질로 실땀 하나 남기지 않았다. 세상에 없는 옷을 한 벌 지었다. 그리고 남자를 기다린다. 우리는 이 노래의 결말을 모른다. 400여 년이 지났어도 그 누구도 끝을 맺지 못한 노래다. 수많은 개사가 있었으나, 이는 노래를 옆으로만 살찌울 뿐이었다. 하지만 노래를 부르는 누구나 결말을 안다. 남자는 장터의 여자를 찾아갔을 것이다. 삼베옷을 받아든 그는 여자의 부탁으로 마련해둔, 바다의 소금물과 모래사장 사이 1 에이커의 땅으로 함께 갔을 것이다. 물과 뭍 사이, 틈이라고는 한 치도 없는 경계에 봐뒀다는 천 평이 넘는 땅으로. 그이는 나의 참된 사랑이니, 믿음이야 끊어지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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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탄생 - 한국어가 바로 서는 살아 있는 번역 강의
이희재 지음 / 교양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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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24일 수요일





    작가의 삶을 사는 사람은 번역을 해야 한다. 좋은 작가는 우리의 문장을 바다 건너의 수많은 문장들과 비교하여 정신을 살찌운다. 외국어에 능통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말에 능통해야 한다. 우리말에 능통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번역이다. 사려 깊은 번역을 하는 이들은 외국의 문장을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바꿀 수 있는지 깊이 고민한다. 그 고민이 우리의 말을 풍부하게 만든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이는 없을 것이다. 작가는 이렇듯 언어를 수호하는 자여야 한다.


    유럽과 아메리카, 그리고 일본의 문학이 항상 정상의 고도에서 회자되는 까닭은 그 세계의 작가들이 번역으로 거대한 세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열매가 아무리 저항해본들 비옥한 토양은 늘 풍작일 수밖에 없다. 충실한 보통독자가 되라는 어려운 과제를 내준 한 교수는 우리 문학의 한계가 번역의 부족에서 왔다고 했다. 번역하는 자와 문학하는 자의 분리, 직업화, 저들 사이에서 돌고 도는 (교수의 신랄함을 빌리자면) 보잘 것 없는 문학상들, 권위와 인기에의 천착, 어쨌든 극한 신자유주의인 우리의 빈약해진 풍토, 외면하는 독자들…… 그 외에도 계속 꼽을 수 있다. 인용할 책들은 서재에 많고도 겹겹이 쌓여 있다. 하지만 우선은 문학의 무궁한 영감이자 정신의 자궁인 번역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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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한 나는 어떤가? 발을 빼는 모양새이긴 하나, 다행이도 나는 작가가 아니다. 독자다. 그런 경지를 탐내는 건, 필사와 되새김질의 실천으로 내게 큰 공명을 일으켜주신 한 충실한 독자의 표현처럼 “북한산 인수봉도 올라가 보지 못한 주제에 감히 히말라야의 눈 덮인 고봉들을 쳐다보는” 것일 뿐이다. (이 표현은 원래 Oren 님의 것으로, 이 공간에 버무려놓은 것에 양해를 구한다.) 하지만 독자이고자 노력하는 나에게도 번역은 하나의 보람된 실천일 수밖에 없으며, 함량미달인 작가들을 골라 문학의 숲에서 베어내는 척도가 될 수밖에 없다. 독자의 단련도 쉬운 일은 못 된다.


    미술과 철학 공부를 위한 단순한 번역이 내게 장편의 실천이 된 건 순전히 톨킨 때문이다. 나에게 그는 ‘절대적인’ 작가다. (내가 absolute, アブソリュート란 표현은 거의 쓰지 않는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나만의 번역으로 그의 세계를 들여다보기 위해 수년째 원서에 빌붙어 살고 있다. 톨킨을 둘러싼 여러 작가와 추종자들의 2차 창작물도 ‘번역 바구니’에 들어 있다. 그동안 매진했던 기억을 되살리며 더욱 채찍질하는 것은 나의 일상이다. 언젠가 톨킨을 이 자리에 복기할 기회가 있으면 그 번역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여하튼 원서와 2차 창작물 번역 덕분에 영문을 우리 문장으로 자연스럽게 바꾸는 고민이 몸에 뱄다.


    한창 번역하던 무렵 알게 된 책이지만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은 지금도 수시로 펼쳐본다. 물론 번역에 통달한 이들에게 별로 새로울 내용은 없고, 독자들 중에는 원서를 능히 소화할 수 있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영어를 배웠으면서도 번역의 내공은 충분하지 않은, 그래도 좋아하는 원서를 꼭 한 번 날것으로 읽고자 하는 나 같은 일반 독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도움을 주는 책이다. ‘저자 본인의 실전 감각과 내공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는 책’이라는 심심한 문장만으로는 이 책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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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번역의 탄생』에서 타원의 궤도를 보여준다. 직역에서 출발하여 그 맞은편에 있는 ‘우리말에 친숙한 번역’을 거친다. 두 지점을 돌고 돌면서 번역은 성장한다. 어느 한 쪽만을 고집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희재는 책의 말미에 이를수록 ‘우리말에 친숙한 번역’을 옹호하지만 직역이 한국어를 살찌운 비료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지나치진 않는다. 영화와 시, 소설 번역 경험이 있는 이들, 그리고 외국어에 능한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이런 신선한 표현은 직역해서 사람들한테 알려주고 싶어.” 각주를 달고 싶은 욕심을 참지 못한 적이 어디 한 두 번이던가. 하지만 직역을 자주하면 할수록 원문을 지나치게 우러러보는 버릇에 복종할 수도 있다.


    국영의 방송아카데미를 다니면서 내가 몇 가지 실망스럽다고 느낀 것 중 하나가 일본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문화였다. 차음어의 권위가 굉장히 높았다. 바꾸려고 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 말하는 습관인데, 그녀/그들은 선배들이 무분별하게 들여와 여과 없이 사용했던 용어들을 자랑스럽게 후배들에게 가르쳤다. 현장이 워낙 빨리 돌아가는 분야이고 그만큼 소통이 중요한 곳이라, 한편으로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말을 다루는 사람들인 만큼, 나는 그녀/그들에게 ‘뭔가 다르겠지.’라는 기대를 했던 것일지도. 그녀/그들만의 은어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요즘은 그 용어들이 개그의 콘셉트로 주요 방송에 여과 없이 나온다. 문제는 그게 재미있다는 것이다. 나는 쓸데없는 말을 항간에 심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에 비해 정적인 공간에서는 번역의 대가들이 우리말을 수호하고 시대정신을 ‘낫우어’준다. (‘고치다’의 잘못된 표현으로 ‘낫우다’가 있다. 내가 이 말을 굳이 쓰는 건, 순전히 이윤기 선생 때문이다. 발음이 따뜻하여 혀에도 익었다.) 원문을 우리에게 친숙한 말, 혹은 우리가 기억하면 좋은 우리말로 풀이하는 번역은 수많은 고비를 넘어야 하는 산행의 가역(苛役)이리라. 번역에 신경 쓰는 나에게 ‘전설의 레전드’로 기억되는 두 번역 사례가 있다. 하나는 톨킨의 방대한 『The Lord of the Rings』를 번역한 김번, 김보원, 이미애의 번역이며, 다른 하나는 거듭 읽어도 원래 우리말로 된 소설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드는 이윤기 선생의 번역이다.


    전자의 사례는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특히 국내의 톨킨 팬들은 지금까지도 고유명사 번역을 놓고 싸운다. 예컨대 주인공의 가문인 Baggins를 ‘배긴스’라 음역할 건지, 아니면 세 역자의 선례대로 ‘골목쟁이’라 받아들일 건지 하는 논란이 있다. 나는 후자의 편인데, 이 경우도 한계는 있다. 우리말로 도무지 풀이하지 못하는 The Water는 어떤가? 정관사가 붙어 있으니 이미 눈치 챘겠지만, 이건 강 이름이다. 호빗들의 고향인 샤이어를 동서방향으로 흐른다. 저걸 그냥 ‘물’이라 번역하는 역자는 평생 독자들의 비난에 시달려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말로 풀자니 마땅한 단어가 없다. ‘물 강’이라고 하는 것은 ‘강물’이라는 단어를 배신하는 일이며, 그런 식의 번역은 쓸모없다. 그 때문에 세 역자는 ‘워터 강’이라 음역했다. 이것이 우리말 풀이의 어려움이다. 대체 어디까지는 우리말로 풀 수 있는가? 이 질문에서 출발한 사려 깊은 역자들의 도움으로 우리말 풀이는 점점 그 경계를 넓힌다. 그렇게 보면 이윤기 선생의 훌륭한 번역들은 우리말 풀이의 확장에서 더 나아가 외국 소설을 우리네 정서에 녹인 경지에 이르렀다. 부끄러운 고백인데, 나는 선생께서 번역하셨던 예의 소설들을 두 번 이상 읽어야만 했다. 번역에 감탄하며 읽다보니 나중에 가서는 그 작품을 도무지 회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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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이희재가 제시하는 ‘우리말에 친숙한 번역’은 무엇일까? 번역을 하며 바라봐야 할 사각지대들이 400여 쪽에 걸쳐 소개되어 있으니, ‘번역’이라는 운전을 하는 사람이 사고 한 번 내지 않을 방법이란 애당초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한 ‘운전 안내서’가 아니다. 언어와 문화를 향한 깊은 혜안이 들어 있어 “번역은 이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예의 책들과는 경중을 달리 한다. 그렇지만 실용적인 걸 좋아하는 사람들도 만족할 수 있다. 수많은 예시들이 나와 있으며, 사전에는 없는 저자만의 단어풀이들도 나중의 번역에 쏠쏠한 도움을 줄 수 있으니.


    원문을 너무 우러러보지 말라는 충고로 시작하는 『번역의 탄생』은 한국어를 가운데에 둔 ‘우리말 중심’의 책이 아니다. 오히려 일본어,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등 세계 각지의 언어들이 한국어와 병치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한국어는 이러저러하나 다른 말은 이렇고 저렇다는 비교가 계속 이어지고 사례들이 덧붙여져 있지만, 그 사이 한국어는 중심이 아닌 주변으로 밀려나기도 한다. 그렇게 움직이면서 논지의 중심에 서있는 것이다. 번역은 바로 그런 행위이다. ‘외국어→한국어’의 방향이 아닌, ‘한국어→외국어’의 방향도 함께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반쪽짜리 번역에만 매달리던 나 같은 부족한 독자에게 다른 눈의 근육을 길러준다고 할 수 있다.


    주로 한국어와 영어가 엇갈린다. 저자는 ‘영어→한국어’ 번역인 경우, 목적어 자리에 있는 행동을 품은 명사는 동사로 풀어주고, 형용사는 부사로 풀어주는 번역 전략을 활용한다. 주어 자리에 “삼라만상이 다 올 수”(이희재의 책, 72쪽) 있는 영어를 우리말로 풀 때는 능동적 표현을 고려해야 하며, 과잉수동문도 지양해야 한다고 권유한다. 부사의 활용 부분에서는 고유어 공부를 부단히 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준다. 예컨대 completely를 ‘완전히’라고 기계적으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감쪽같이’, ‘새카맣게’, ‘홀딱’, ‘쫄딱’, ‘흠뻑’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이는 번역이 아닌 보통의 글쓰기에서도 실천으로 단련해야 한다.


    “딱딱하고 어려운 내용을 담은 명사에 접미사 ‘-적’이 많이 붙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합니다.”(이희재의 책, 137쪽) 하지만 그가 권하는 건 지양이다. 的. 부끄럽지만 아직까지도 내가 글쓰기에서 고집하는 번역투다. 최후의 보루라고 본다. 남발하는지만 경계할 뿐이다. 인문학의 손길에 이렇게 저렇게 접힌 색종이 같은 삶을 내가 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 알면서도 일부러 나는 的을 붙이기도 하고 그 반대로 떼어버리기도 한다. 제 8장에 이르면 나처럼 가슴 뜨끔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희재는 제 9~11장에 걸쳐 ‘간결한 번역’이라는 걸 제시한다. 물론 그도 지적했듯이 문체의 형식을 고집하는 일부 파격적 작가들의 글이 있긴 하나, 대부분은 내용 중심인 글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후자는 간결하게 번역할수록 좋다.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다 보면 영어 원문에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는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뻔히 아는 내용인데도 일일이 밝힌다는 것이 일종의 논리 강박증처럼 느껴져서 답답해집니다.”(이희재의 책, 186쪽) 번역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이 더부룩함을 안다. 이희재는 문장의 군살을 빼기 위해 the와 a/an을 번역하지 않는 방법을 여러 사례에 걸쳐 알려준다. 기지의 정보든 미지의 정보든, ‘그’, ‘어떤’, 혹은 ‘한’이라 굳이 번역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우리말만의 장점이다.


    다른 한편으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섬세한 의미 표현을 살리는 번역이다. 친족어 번역은 물론이고 감정 표현의 결을 살리는 번역에까지, 역자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대단히 많다. 특히 전자의 경우 uncle, cousin, aunt 앞에서 족보 따지다가 눈물 흘린 경험 있는 사람은 한 둘이 아닐 것이다. (물어보면 우리 부모님 세대도 잘 모르는 친족어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된다.) 의미 표현은 명사에도 적용된다. 고유명사는 암호와도 같다. 따라서 역자의 역량에 따라 설명의 문장을 뒤에 충분히 넣어 원문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한 예로, “journey to Canossa.”가 “무릎이라도 꿇으라면 꿇겠다.”라는 문장으로 번역된 걸 보고 나는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국어에 정통하여 속담들을 다수 알고 있는 역자들은 이런 의미 표현의 섬세함을 놓치지 않는다.


    여기서 이희재는 토박이말의 활용을 강조한다. 사전편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제 18장에 가까워질수록 글의 온도가 올라가기 시작한다. 저자의 어조가 가장 열정적인 제 18장은 사용빈도를 고려한, 그리하여 언어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사전이 많이 나와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를 보면 그가 백과사전형의 미국식 웹스터 영어사전보다는 언어의 변천을 담은 영국의 옥스퍼드식 영어사전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전자의 사전이 미국 현실에 기반을 두려는 의식에서 비롯됐다면서 긍정적인 평가도 한다.) 그런 저자가 영한사전 편찬에 바라는 바는 많다. 그만큼 문제가 많다는 것이리라. 그는 일곱 가지로 나눴지만 실은 들여다보면 아홉 가지로 늘어나는데, 사전 의존도가 높은 동아시아의 번역가들이 어떤 번역을 꿈꾸고 있는지 우리 독자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사전편찬과 번역은 다르다. 그의 말마따나 번역가는 우리말 대응어를 만들어내기라도 해서 번역해야 한다. 개념을 찔러 사전의 틀을 넘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우리말 대응어는 말 그대로 ‘풀이말’다. 후자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런 말이 원어의 진입 장벽을 낮춰줄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풀이말 사전 편찬의 수준이 높다. 저자도 그 점을 강조했는데, 이는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지금은 재야에서 노년을 보내고 계신) 한 방언학 교수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우리가 보면 낯설고 촌스러우며 인위적인 것 같아도, 이런 작업을 실험적으로나마 시도해볼 가치는 다분하다. 사실 이는 번역의 과제만은 아니다. 전문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장벽 낮추는 일, 흔히 말하는 ‘대중과 소통하는 일’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가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언어적으로 말이다.


    제 20장에 이르러, 드디어 시 번역이 나온다. 번역의 정수. 형식의 개량까지도 가능한 분야이며, 이를 잘 번역한 작가들은 흔히 대단한 정신의 경지에 오른 몇 안 되는 이들로 우리 독자들의 항간에 회자된다. 역량이 한참 모자란 나는 공부를 위해서는 논픽션을, 취미로는 픽션을 번역해봤지만, 시 번역은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어휘력은 둘째 치고, 영시의 경우 압운(rhyme)만 해도 골이 아프다. 톨킨 번역으로 수백 여 장을 써왔지만 그 사이 빈 칸들이 있으니, 그건 모두 시와 노래다. 하물며 높은 문학적 평가를 받는 대가들의 시를 번역한다는 건, 도대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러야 해낼 수 있는 것일까. 머리로는 짐작이 되지 않고, 마음으로는 그저 끝없이 좇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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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은 기계의 일이 아니다. 원문의 논리를 도입하는 일이다. 함부로 번역하는 건 위험한 일일 수밖에 없다. 저자가 ‘즉물적’이고 ‘맹목적’이라고 표현한 무비판적인 수용이 이제는 번역 문화에서 자취를 감춰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자기 눈으로 자기 현실을 분석하는 방정식”(이희재의 책 402쪽)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시대정신을 높이 쌓는 방법이므로. 번역이야말로 정신의 요람이요, 정신의 거울이다.


    노 교수께서 말씀하셨다. 말은 움직이는 생물이다. 입에서 기어 나와 귀로 들어가니, 말에 따라 마음과 몸이 움직이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대학시절 노트 모퉁이에 적힌 이 구절에서, 나는 들여다볼 것이 무수한 들판의 향기를 맡는다. 어찌됐든 우리는 독자, 읽는 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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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범한 시인들의 소동
    from Value Investing 2016-02-24 22:06 
    탕기 님께서는 '번역 공부'까지도 일부러 따로 하시는군요.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데 탕기 님의 이 글을 읽다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마주치게 된 '시 번역은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는 대목을 읽고 나서야 마침내(?) 안타까운 마음과 더불어 제게도 약간이나마 '덧붙일 말들'이 몇몇 떠오르는 걸 느낍니다.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평범한 시인들의 소동' 정도가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싶습니다. 어쩌면 시는 '번역' 뿐만 아니라 애시당초에 '창작' 부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