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그림 읽기
조이한.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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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2일 금요일




    전공은 아니지만 나는 미술사를 공부했다. 미술을 통해 세상의 복잡함을 알았다. 처음에는 파고들자는 욕심이 컸다. 글로 풀었을 때의 희열도 있었다. 하지만 열의가 차츰 식었고, 많은 분들과 교류했던 미술 블로그도 접었다. 지금은 이런 조촐한 공간에 ‘읽고 씀’을 실천하고자 글을 올리며 몰아붙이고 있지만, 그 시절에는 하루에 두 세 개의 미술글을 쓰고 수백 여 장을 읽었다. 작품을 모니터로 뜯어보는 건 몹시 피곤한 일이다. 돌아봐도 굉장한 열정이었다. 그간의 미술 글들을 모으니 책으로 네 권이 됐고, 귀찮은 탓에 정리를 미뤄둔 글들이 남아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글들을 읽지 않는다. 서재에 꽂아둔 수십 여 권의 미술책과 대학 도서관에서 출력한 논문들을 들춰보는 일도 별로 없다.


    관심을 두는 곳이 달라진 까닭이다. 하지만 왜 그렇게 변했는지를 생각해보면, 미술에게 나는 상당히 많은 걸 빚지고 있다. 우선, 미술은 역사다. 무엇보다도 일단은 ‘기술[art]’의 역사라 해야 한다. 미술을 교양 삼아 배우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냥 지나치는 시대가 구석기와 신석기다. 그쪽은 거의 고고학이 맡고 있어서 어려운 용어로 낯선 지명들을 쉽게 받아들이기가 (외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국내에 소개된 책도 거의 없다. (또한 대학에서도 미술사 전공의 십중팔구가 중세와 르네상스에 치우쳐 있다. 인기가 많으니까. 한편, 현대미술은 머리가 좋은 미학 쪽 사람들이 주로 들여다본다.) 그 시대의 전(前)미술단계 유물들을 보면, 확실히 미술이라는 것은 기술에서 출발했다. 그 목적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천재, 창조, 독창 등이 붙은 건 근대에 와서다.


    한편으로 미술은 사고(思考)다. 이 새삼스런 말이 내겐 중요하다. 작품이 생산되는 과정에서도 그러하고, 그것을 해석하고 비평하는 사람들의 텍스트를 통해 그 시대의 사고를 읽을 수 있다. ‘보는 방식’이라 부르면 편하리라. 미술에서 접한 이 두 단어, 즉 역사와 사고를 통해 나는 철학과 문학으로 선회했다. 솔직히 작품이라는 건, 배보다 큰 배꼽일 때가 많다. 무슨 말을 그렇게 많이 하느냐, 이런 불평도 이해가 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 많은 말을 배우고 작품을 여러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로 세상을 보는, 아니 읽는 방법을 교양 삼아 알아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천천히 그림 읽기』라는 책은 좋은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적잖은 독자들이 읽었겠지만. 저자는 조이한과 진중권이다. 우리나라에서 미술 공부하는 이들은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임영방’이라는 석자의 이름이 소위 ‘레전드’로 남아 있듯. 저 두 사람은 서양의 현대이론들을 국내로 들여오는, 일종의 수입 경로 역할을 맡으면서도 그 분야에서 우리말로 쓴 최고의 책이라고 소개되는 여러 책들을 직접 쓰기도 했다. 혹시 미술 공부를 할 이들이 있으면 도움이 될까, 이런 생각에 옛 공부를 추억하며 『천천히 그림 읽기』를 다시 한 장 한 장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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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미술 작품에서 한 권의 책이 생산된다. 백 수십 여 명의 인물이 그려진 유화든, 단조로운 색면회화든. 작가가 말이 많은 경우도 있고, 이미 세상을 떠나 작품만 콘텍스트 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우리는 ‘말’이라는 걸로 그림을 보게 되는데, “말로 본다.”는 이 이상한 표현은 사실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말’이 그 언어문화 속 개인을 보호하고 있는 (그래서 우리는 ‘모국어(母國語)’라는 표현을 쓰는데) 어떤 보이지 않는 방어막 같은 거라고 보면, 그 ‘말’이라는 게 통용되지 않는 다른 문화 속의 현상 대부분은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이탈리아의 한 오래된 천장에 붙어있는, 어떤 늙은 사람과 젊은 사람이 손가락을 맞대려고 하는 순간을 그린 그림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이런 농담을 하는 미술사가들이 있다. (<아담의 창조(Creazione di Adamo)>에 대한 이야기다.) 서양회화의 우월이니 하는 말이 아니다. ‘보는 것’, 즉 우리의 시각 능력에는 현저한 제한이 있다. 모르는 것을 보는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벽을 쳐다보는 것과 비슷한 막막함을 느끼니까.


    카를 융의 『인간과 상징(원제 : Man and His Symbols)』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윤기 씨의 번역이다.

    “문화적 상징은 아직도 그 본래의 신성한 힘numinosity 혹은 <마력>을 지니고 있다. 이 상징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깊은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심적 변화를 통해 이 상징들은 편견과 비슷한 작용을 한다. (…중략…) 따라서 심각한 손실을 감수하지 않는 한 이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카를 융의 책, 137~138쪽)


    결과적으로 우리는 말로 보게 되며, 미술사학과 미학, 그 외에 미술을 둘러싼 여러 해석학들은 그 ‘말로 봄’의 가치를 축적하고 증명해온 학문이었다. 그리고 그 가치라는 것은 “편견과 비슷한” 것들을 보다 심도 있게 분석하는 것이다. 다른 시대에는 또 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명제 하나만 갖고 있으면 된다. 독자들이 미술에서 교양 이상의 무언가를 얻어가고 싶다면, 그 깨달음을 갈구하고 한 두 개 정도의 예시들을 마음속에 넣어두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미술을 공부할 때도, 혹은 훗날 도래할 어떤 충격적인 미술 현상을 접할 때도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보다 투명해질 수 있다.


    내가 조이한과 진중권의 『천천히 그림읽기』를 미술 독자들에게 추천하는 이유는 별로 거창하지 않다. 국내에 이보다 쉽게, 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게 ‘보는 방법’에 대한 역사를 잘 정리한 책이 없기 때문이다. 이 분야의 책을 떠올리라고 하면 독자들은 대부분 『미학 오디세이』를 당연히 꼽겠지만, 그 책 실은 대단히 어려운 책이다. 『현대미학 강의』라는 진중권 본인의 책을 좀 쉽게 풀어쓴 버전이라고 하지만 그 분야의 용어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높은 난이도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책 『천천히 그림읽기』에 나오는 ‘보는 방법’들도 그 분야의 전문서들을 읽어보면 앞이 캄캄해진다.


    예컨대 이 책의 제 1장에 설명된 미술 형식 분석에서는 당연히 19세기 대가인 뵐플린이 나오는데, 그의 『미술사의 기초개념(원제 : Kunstgeschichtliche Grundbegriffe)』은 그걸 국내에 소개한 박지형 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재미없을뿐더러,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듣기 힘들다. 이는 비단 뵐플린만의 문제는 아니다. 다른 어떤 분야의 미술해석이든 상관없이 그림을 전문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쪽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건 순전히 교양의 후광을 등에 업은 탓이리라, 나는 지금껏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여기에는 약간의 환상이 덧씌워져 있다. 이 책은 그 환상을 좇는 이들이 실망하지 않고 미술을 들여다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책이다. 단순한 지식 나열에다가 화려한 컬러도판들, 깔끔한 도표 정리와 가독성 좋거나 특이한 폰트들로 치장한 작금의 미술 상식책들에서는 사실 별로 얻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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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식 분석, 도상해석학, 정신분석학, 사회학, 여성주의, 기호학, 그리고 현대미술 이론들이 등장한다. 거의 시대순과 일치하게 나열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형식 분석과 도상해석학은 전통이 백년은 훌쩍 넘은 것들로, 다른 해석학들에 비해 유치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그렇게만 치부하지는 말고 해석자 자신의 관점에, 그리고 분석할 텍스트에 충실하려고 한 흔적이구나, 이렇게 살짝 눈감아주면 어떤 독자라도 그 시대의 해석 방법에 흥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전자에서는 빙켈만, 뵐플린 등이 나오고, 후자에서는 파놉스키가 나온다. (최근 여러 알라딘 독자들이 파놉스키의 책을 소개하고 있다.)


    이 시대에는 단연 미(美)라는 것이 중심이 됐다. 그리고 그 미는 고대 그리스와 필연적으로 연결됐다. 그런 시대에서 창조, 천재, 독창 등의 근대적 개념들이 어떻게 등장한 것인지를 보다 깊게 알아보고 싶으면 오타베 다네히사(小田部胤久)의 『예술의 역설(藝術の逆說)』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일본이 미학 이론 생산과 번역에 있어서는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다.) 제 1장과 2장에 나오는 작품들은 서양미술의 상징처럼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읽으면서 위화감을 느끼거나 할 일은 없을 것이다. 특히 도상해석학을 접하게 되면 중세 미술의 수많은 작품들을 보는데 도움이 된다. 그 유명한 곰브리치는 이 학문에 대해 “당연해 보이던 재현적 의미는 곧 사라지고, 미술가가 창안한 형상이 늘 어떤 의미를 뜻하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에케하르트 캐멀린 편집, 이한순 外 옮김,『도상학과 도상해석학(원제 : Ikonographie und Ikonologie)』, 311쪽) 갖게 된다고 했지만, 사실 해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는 건 부인할 수가 없다. 상세한 논쟁에 대해서는 우리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관심 있는 사례들만 보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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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는 정신분석학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학문은 예술작품을 “예술가가 가진 동성애, 근친상간 혹은 살인충동 등을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방식으로 승화”(조이한·진중권의 책, 124쪽)시킨 것으로 본다. 근대미술사는 유수의 철학자와 비평가들의 힘을 빌려 미술이 비로소 본격적인 학문으로 한 가닥 분화를 일으킨 역사다. 그 시대에 예술가들은 천재의 반열에 오르게 됐는데, 이 흠숭의 분위기는 프로이트 이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여전히 예술과 천재성은 항간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을 거쳐 예술은 ‘광기의 산물’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이중의 의미를 갖게 됐다. 미쳐서 멋있거나, 아니면 그냥 미쳤거나. 현대예술은 분명 광기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저걸 들여다보려면 부득이하게 정신분석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물론 두 저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런 작품들을 보면서 감동을 받는가의 여부일 것이다.


    제 4장은 작품 활동에 영향을 끼치는 ‘바깥의 것’들에 대한 이론, 즉 사회학적 관점에 따른 미술이론을 소개하는 장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근래에 이를수록 점점 그 후광을 지워가는 작업을 해왔다. 심지어 르네상스를 허구라고 일컫는 이도 있었다. 그런 이론들이 6~70년대에 이르러 서양에서는 주류 연구자들을 배출했음에도 여전히 르네상스의 빛은 강하다.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전통의 힘은 무시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미 ‘르네상스’라는 단어 자체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도 확고해졌다. 그와 반대로 르네상스를 샅샅이 분석하는 이들은 그 놀라운 작품들이 어떻게 생산된 것인지 구체적으로 그 주변을 연구하면서 작품을 하나의 ‘생산물’ 정도로 본다. 그 내용이 제 4장에 나온다. ‘위대한 작품’이라는 표현보다는 “계약서에 따라 제작된 작품”(146쪽)이라는 표현이 훨씬 예술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연구는 예술을 내적으로만, 마치 자생력이 있는 하나의 유기체인 것처럼 보는 일련의 시각을 거부하면서 오히려 예술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를 넓혀줬다. 그리고 이렇게 예술의 ‘바깥’을, 아니 ‘환경’을 이해해야 예술이 왜 그 당시 그런 모습을 하게 됐는지를 알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린 때때로 마치 그 자체를 존숭하려는 사람처럼 예술을 마냥 우러러 보기만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예컨대 수학과 자연과학의 발달이라든지, 그에 앞서 이슬람 문화에서 유럽으로 고대 그리스의 유수 저서 번역본들이 들어왔다든지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그 위대한 르네상스는 불가능했다. 이는 르네상스를 하나의 단절된 역사로 보는 시각을 철저하게 금하는 최신 연구의 시각이다. 두 저자도 말한다. “사회학적 접근 방법은 우리가 예술에 대해 가진 협소한 생각을 깨뜨려 주는 장점이 있다.”(167쪽) 이와 관련된 최고의 저서는 백낙청 씨께서 국내에 번역·소개하신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원제 : 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다. 이 책 자체가 우리나라 비평계에 끼친 영향은 두세 번 곱씹어도 지나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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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페미니즘이 다시 우리나라 독자들 사이에 중요한 화두로 던져졌다. 혐오(嫌惡)에 대해서 보다 많은 이들이 생각해볼 기회이며, 소수와 권리, 그리고 젠더가 자신의 본래 뜻을 이 사회의 장벽 너머로 던질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TV 매체에서도 그러한 움직임에 동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방송작가 아카데미를 다녀본 경험으로 보건대, 역시 TV는 너무 많은 제약을 갖고 있는 매체다.) 여하튼 이런 환경 속에서, 나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아르테미시아 겐틸레스키, 안젤리카 카우프만 등 저 까마득한 옛 화가들과 수많은 곡해의 중심에 선 현대 전위 예술가들의 위상에 대해 재고할 기회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물론 이 예술가들은 모두 ‘여성’이다.


    “예나 지금이나 어떤 작품이 ‘여성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면, 그건 작품에 대한 치명적인 결함으로 간주된다. 반면 여성의 작품이라도 ‘남성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면, 그건 최고의 찬사로 여겨진다.”(181쪽)


    지금은 창작의 환경이 예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균등화되어 있다. 아니,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작가, 예술가, 가수 등의 앞에 ‘여자/여성’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남자/남성’이라는 말에는 괄호를 치는 사람들이다. 의식적으로 신경 쓰지 않으면 절로 그런 말을 쓰게 되니까. 따라서 여성 예술가들이 남성 예술가들과 같은 공간에서 교육을 받고 사회적으로 큰 지위를 누릴 수 있는 (비록 남성보다 그 가능성이 훨씬 떨어지긴 하지만) 환경이 아무리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남녀 두 성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에 기인하는지”(211쪽) 생각하는 각고의 노력을 통해 커튼 한 장을 더 치워버려야 한다.


    제 5장에 나온 여성주의 관점의 시각은 바로 제 3장의 정신분석학적 관점과 비교하면서 봐야 한다. 1980년대 여성예술가의 상징적 존재였던 신디 셔먼이 그러했듯이, 여성예술가들은 신체를 작품 속에 넣어 표현하면서 여성성을 규정하는 정신분석학, 달리 말하자면 그런 관념을 통해 남성성을 안정적으로 보장하려고 한 그 학문을 부정했다. 또한 정말 오래도록, 그리고 지금까지도 값이 매겨지는 여성의 신체를 거부하려는 움직임으로 그 신체를 혐오하게 제시했다. 급진적인 페미니즘 전위 예술가들이라면 거의 그렇게 했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최근 독자들 앞에 제시된 젠더, 인종, 소수 등의 문제를 함께 고민했던 모든 예술가들의 공통분모이기도 했다.


    그런 것들은 보기 힘들다. 당연하다. 기존의 것을 해체하는 작업은 눈으로 보기에도 힘들뿐더러, 그걸 받아들이는 것도 거의 어렵다. 하지만 유수의 학자들이 지금도 끊임없이 생산해내고 있는 전통적 미술사에 대한 책을 읽거나 그런 작품을 보는 것보다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더 중요한 건 제 5장의 내용일 것이다. 근현대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의 양태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부분이 저항의 모습, 즉 운동성을 띠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많은 예술가들이 매체의 도움, 전시회의 성공, 세미나 개최 등으로 유명세를 탔지만 저항하는 이들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 생각하는 독자인 우리들에게는 그녀/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들여다봐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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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호학으로 미술을 보는 관점은 제 6장에 소개되어 있는데, 이 분야는 거의 암호 해독이다. 흡사 영화 『다 빈치 코드』에 나온, 이런저런 정보들을 모아 역사를 기억해내고 단서를 찾아가는 흥미진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쉬운 분야가 아니다. ‘알레고리’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수준이면 족하다. 그보다 더 들어가려면 서구 문화의 전통 자체를 통째로 들여다봐야 한다. 하나의 상징이 수많은 상징들과 얼개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시공을 넘나든다. 또한 기호학은 필연적으로 언어학과 연결되기 때문에 기표, 기의, 지시, 함의 등의 전문용어를 소화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이 책에 소개된 여러 해석 분야 중에서는 가장 학문적이라 할 수 있다. 미술 전문가들 중에서도 이 분야를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소개해줄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마지막으로 제 7장. 현대미술이다. 개략적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맛보기로 몇 가지 사례들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허술한 마무리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 정도로 보는 것이 좋다. ‘현대미술’이라는 단어는 워낙 많은 걸 담고 있다. 만약 조이한과 진중권이 이 부분에 대해 할 말을 다하려고 했다면, 이 책은 뒤에 『미학 오디세이』를 덧달고 나왔을 것이다. 둘은 관심 삼아 보려는 독자들에게 알맞은 수준으로 마무리했다. 강조해야 할 것이, 이 장에서는 우리가 ‘저항’이라는 단어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운동이다. 물론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극과 극으로 나뉠 단어다. 전시관에 걸린 작품이 무슨 운동을 하는가, 시와 소설은 그저 시와 소설일 뿐이다, 이런 불평을 하는 이들도 오늘날 수많은 독자/관객들 중 한 부류를 이루고 있으니까. 나 역시 예술을 혁명에 가져다대는 것에 움찔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하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건, 우리가 주변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도덕에 맞도록 행동을 옮기는 것, 즉 수많은 흐름 속에서 저항하는 것이 지니고 있는 힘이다. 그 힘은 분명한 운동성을 갖는다. 마음이 불편하다든가, ‘이건 아니야.’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다든가. 예술은 그걸 우리에게 보여주거나 들려주거나 읽게 한다. 그녀/그들이 하나의 운동을 생산해내기 위해 쏟아 부은 시간과 정성은 일반인에 비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그걸 철칙으로 알고, 그 창조적 작업을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니까. 예술에 대해 실망하면서 불평하는 이유는 알겠지만, 예술이 우리와 함께 저항에 동참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 자체를 마음속에서 지우지 않았으면 한다.


    우스꽝스러운 것도 많다. 저건 나도 그릴 수 있겠다든지, 저런 쓰레기를 (실제 쓰레기를!) 작품이라고 전시한다고, 그래서 돈을 번다고 분통을 터뜨리든지. 그러나 그녀/그들은, 특히 제 7장 이후 지금까지 예술의 궤적을 그려오고 있는 이들은 십중팔구 우리의 기대를 벗어난다.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 거칠고 불편하고 낯선 것들이 끊임없이 생산된다는 것은, 우리 주변이 너무나도 확고한 모양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그문트 바우만에 비유하자면 ‘고체 사회’라 해도 될 것인데, 예술은 바로 우리의 그 경직된 도형 같은 주변에 균열을 내고 물이 새게 하는 가장 근사하고도 합법적인 (때론 비합법적이기도 한) 수단이자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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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2 21: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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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2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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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 우주와 과학의 미래를 이해하는 출발점 사이언스 클래식 25
리사 랜들 지음, 이강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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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0일



    이곳은 좌표로 설명하기 애매한 지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이곳의 좌표를 애당초 모르고 있다. 모른다는 건 부끄러울 일이 아니지만, 내심 답답한 것이다. xyz의 공간 사이로 무수한 선분들이 뻗어나가고, 나는 그 선분의 흔적 위에 서있는데, 모르겠다. 그래도 내막을 소개해야 하니 정리하자면 이렇다. xyz 중 뭐든 상관은 없다. 첫째는 도킨스 류의 필진들을 통해 국내외 가릴 것 없이 비판받는 종교에 대한 반감이고, 둘째는 카렌 암스트롱과 같은 보다 신중한 학자들이 옹호하는 ‘참종교’에 대한 믿음이며, 마지막은 아예 과학 쪽으로 기울어 있는, 가장 분명하게 도드라진 마음이다. 첫째와 둘째는 서로 맞물리는 지점이 있다. 공통주제가 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 과학은 다르다. 종교와 핀트 자체가 완전히 어긋나 있다. 나는 저 셋의 한가운데 있다.


    설 연휴에 위령미사를 지내고 왔다. 제대 후 7년 만에 간 성당이었다. 어렸을 적 몸에 익은 의례들이 내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걸 보고 놀라면서도 그 공간은 확실히 옛날과 다르게 느껴졌다. 신부가 미사 집전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우주의 조화와 지구 모든 피조물은 ‘주님’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님’의 정의는 생각보다 명확하지 않다. 그리스도교가 서양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와중에 펼쳐진 그 정의의 전쟁, 말 그대로 승리와 패배로 이뤄진 ‘정의하기’의 맹렬한 싸움은 오늘날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은 그저 하나의 이미지로 각인될 뿐이다.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고 그 용어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신자는 거의 없다. 일상에 익은 말은 생각해볼 필요가 없는 것처럼. 그러니 분명 내가 있던 그 오후의 공간에서 신부의 말을 일말의 의심 없이 받아들인 사람은 한 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질문을 확장하지 않는다.


    나는 우주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수많은 현대인 중 한 명이다. 다큐멘터리와 책을 접하고, wikipedia와 Google에서 하릴없이 ‘우주여행’을 한다. 몰라도 보게 된다. 아마 시각적으로 사로잡힌 까닭일 것이다. 과학자들의 감수를 받아 만든 우주 가상 이미지도 그렇고, 한편으로는 새벽마다 창밖으로 보이는 일점의 목성도 그렇다. 그 까마득함의 ‘보임’이라…… 내가 저걸 눈으로 보다니…… 가만히 보면 달은 그 얼마나 유난한 것인가 말이다, 이런 생각들. 이 감정은 종교를 통해 본질로 들어가려는 마음, 혹은 철학에서 향하는 그 마음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강렬해서 얼마간 우주를 생각하고 있으면 ‘근본’이라는 단어가 그 옷을 완전히 갈아입어버린다. 입자물리학에서 말하는 기본요소, 우주론에서 말하는 수많은 우주들의 생성과 죽음까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단어다. 당연히 여기서는 누가 우주를 만들었는가, 혹은 왜 생성되었는가, 우리는 누구인가와 같은 질문이 하나의 공통화폐로 통용되지 못한다. 그 값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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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사 랜들의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원제 : Knocking on Heaven's Door)』는 과학이 무슨 질문을 하는지, 그리고 그 질문은 어떤 진리를 향하는지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일종의 교양서다. 하지만 내용이 교양 수준일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예의 과학 교양서들을 나열해놓고 보면 이 책은 확실히 사려 깊은 설명, 유머러스한 비유, 간혹 지나치다고까지 생각될 정도로 반복·강조하는 저자의 버릇 등 독자들에게 ‘쉬운 책’이라 느껴질 법한 요소들을 거의 다 가지고 있다. 문제는 입자물리학과 관련된 내용의 난이도다. 과학을 좋아하거나 과학을 대학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공부한 이들에게 이 책은 더할 나위 없는 보물 상자다. 나는 지금껏 LHC(대형강입자충돌기)를 이 정도로 상세히 설명해놓은 과학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리사 덕분에 그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실험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어 표준모형 속 입자들을 발견하는 것인지 알게 됐다. 이것은 앞으로 일어날 수많은 발견들을 우리가 비교적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이점을 준다. 즉, 그것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분명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곧 맞이하게 될 것이다. 놀라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책의 상세한 내용을 들여다보기에는 자신의 과학 상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디 책을 덮지는 않았으면 한다. 물론 리사가 도킨스 수준의 달필은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녀가 들려주는 ‘과학하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과학의 입장은 중요하게 읽어봐야 할 내용이다. 책의 대부분이 입자물리학과 LHC와 관련이 있긴 하다. 하지만 과학이 어떤 방식으로 진화하는지, 어떤 이론이 더 가능성 있는 것인지, 앞으로 과학이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지, 상향식 접근과 하향식 접근은 무엇인지, 이런 다소 사변적인 의견이 들어간 부분이 오히려 이 책의 방점이 찍힌 곳이라 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모르는 것들과 아는 것들을 나누는 경계를 넘기 위해 천국의 문을 두드린다.”(60쪽) 리사의 책 앞뒤에 포진하고 있는, 중간 내용들보다 훨씬 뭉뚱그린 면이 있는 글들이 우리 비전문가들에게는 더욱 중요한 내용이다. 칼 세이건의 경험을 빌려 말하건대,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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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제목에 ‘Heaven’이 들어가는 걸 보고, 처음에는 오해를 했다. 관심을 끌려고 했겠지. 아니면 celestial의 의미가 있는 건가? 아니었다. 반가운 카렌 암스트롱이 이 책에도 나왔다. 리사는 카렌과의 대화에서 과학과 종교의 대립이 문자주의에서 시작된 것임을 확인했다. 갈릴레이를 둘러싼 논쟁이 우리의 생각보다 그다지 뜨겁지 않았다는 사실은, 생각해보면 놀라울 정도다. 한편, 그 충돌은 오해에서 비롯된다. 과학적 사실 때문이 아니라. 과학은 물질 우주에 적용된다. 근본구조와 요소에 대한 학문이므로 당연히 유물론적이다. 여기에 ‘초월’이라는 종교의 단어가 들어가면 논리가 어긋난다. 우리나라는 다행이긴 한데, 미국은 이 충돌로 야기된 폭력사태나 교육논란, 특히 교과서 수정과 도입 문제가 굉장히 첨예하다. (도킨스도 바로 저런 문제를 겨냥하여 비판의 수위를 극도로 높인다.) 그런 와중에 리사는 분명한 입장을 취한다. 과학은 경험에 근거하고, 종교는 계시에 근거한다. 둘은 근본이 다르므로 양립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은 과학과 성경이 서로 다른 목표를 갖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방책이었다.


    “과학은 우리가 무작위적으로 작동하는 우주 공간에 버려진 존재이며, 무작위적으로 주어진 크기를 가진 수많은 물체들 중 하나에 불과함을 늘 상기시킨다.”(113쪽)


    그런 리사가 이 책에서 명백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건 기본요소이다. 교양으로 알게 된 과학지식들 중 가장 기본적인 것들, 예컨대 원자, 원자핵, 중성자, 전자와 같은 것들에 대한 복습으로 시작하다가 어느 순간 전문지식으로 넘어가버리지만, 잘 따라가면 길이 보인다. 모르겠다면 건너뛰어도 좋다. 리사도 본인의 입으로 “이곳은 넘어가도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으니까. 중요한 건 우리 독자들이 ‘스케일(scale)’이라는 용어를 잊지 않는 것이다. 그 정도면 족하다. 그리고 사실 이 단어는 우리에게 그다지 낯선 것도 아니다. 또한 이 책이라고 해서 전혀 다른 용도로 언급된 것도 아니다.


    입자물리학자인 리사는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를 2011년 9월에 냈다. 번역과 국내 발간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다. (그녀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여하튼 그녀는 두 달 뒤에 하버드에서 이 책을 주제로 한 짧은 강의를 하나 했다. 그 강의에서 리사는 스케일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에게 친숙한 1~2m 단위에서 점점 작은 스케일로 옮겨갔는데, 그 와중에 이런 표현을 썼다. much smaller. 하지만 이 표현도 부족했는지 곧 far far smaller라고 정정했다. 대체 얼마나 작기에. 펨토미터. 0을 세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굉장히 작은 이 원자핵의 세계에서 우리는 앞으로 계속 듣게 될 쿼크를 만난다. 제임스 조이스의 광팬이라면 알아볼 단어다. 『피니건의 경야』에 나오는 단어니까. 하지만 이 세계는 결코 우리에게 익숙해질 수가 없다. 별 상관이 없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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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사는 일단 작은 세계를 소개해준다. LHC가 무슨 일을 하는지 설명하려면 필히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이 작은 세계를 보려면 고에너지가 필요하다. 파장이 짧고 진동수가 높은 파동일수록 에너지가 높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은 우리에게 그걸 가르쳐줬다. 리사는 그 이론을 일컬어 “근본적인 이론일 것이다.”(286쪽)라고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혔다. 이 이론의 도움을 받은 실험가들은 LHC에서 매우 작은 세계를 본다.


    그 작은 세계라는 것은 표준모형에 들어있는, 이름도 생소한 여러 입자들을 일컫는다. 단, 힉스 보손은 2013년 3월 14일에 CERN(유럽원자핵연구평의회) 측에서 공식적으로 발견했다고 밝혔기 때문에 이 책을 낸 시점에서 리사는 그 입자를 이론적으로 추정할 뿐이다. 쿼크와 렙톤으로 이뤄진 페르미온(반정수 스핀을 갖는 입자)과 입자들 사이의 묶이는 힘을 전달하는 게이지 보손(정수 스핀을 가짐)이 표준모형에 들어가며, 전하의 여부, 질량의 경중에 따라 또 세부적으로 나뉜다. 이 모형은 거의 확실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큰 난제들이 있다. 리사의 책에도 부분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두 번에 걸쳐 소개되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이 무슨 문제를 풀고 싶어 하는지 별 무리 없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LHC에서는 무슨 일을 할까? “쉽게 접할 수 있는 세상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숙고하고 연구하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 중 하나라는 데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195~196쪽) LHC는 바로 그 ‘훌륭한 일’을 하는 기계다. 대폭발 이후 1/1조 밀리초 후에 일어난 일을 재현하는 곳이며, 그걸 또 1/1만mm 단위까지 쪼갠다. 순간(瞬間)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뭔가 머쓱해지는 순간이다. 이 짧은 순간이 두 양성자가 충돌해 (대부분은 서로 빗겨가지만) 어떤 사건들이 벌어지는 시간이며, 학자들은 그걸 컴퓨터로 분석하여 어떤 입자들이 생성됐는지를 알아낸다. 새로운 입자를 기대하면서. LHC의 규모, 개발 에피소드, CERN의 이야기, 과학자들이 희열을 느낀 순간 등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LHC에서 블랙홀이 생길 수도 있다는 괴담의 과학적 반박까지 곁들이면 더욱 좋다. 리사는 별도의 장을 마련해 LHC가 얼마나 안전하게 위험을 관리하는지, 그리고 어느 수준까지 불확실성을 검토하는지 설명해준다. 이 충돌기를 둘러싼 오랜 갑론을박의 온도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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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을 넘겨도 좋다고 리사가 (대놓고) 말한 유일한 부분이 바로 LHC의 세부적인 설명이 담긴 3부 13장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이 과연 그녀의 조언을 들을 수 있을까? 이 기계가 뭘 하는지 알았으니, 어떻게 작동하는지 궁금해지는 게 당연한 수순인데. 고에너지 영역의 그 무엇이든 포착해내려고 하는 인류 최고 기술의 과학기계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좋은 기회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리사의 하버드 강의는 YouTube에서 볼 수 있다. 밑에 링크를 걸어두겠다. 강의 25분 즈음에 LHC의 3D모델이 스크린에 뜬다. 책의 그림과 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면 그 영상을 잠깐이나마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CMS와 ATLAS는 무엇인지, 리사가 “갱의 조직원들”(358쪽)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던 ‘제트(jet)’라는 현상은 무엇인지, 전자와 광자의 에너지와 위치 정보를 산출하기 위해 사용되는 텅스텐산납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알아보면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13장에 널려 있다. 트리거(trigger) 역할을 하는 컴퓨터를 일종의 스팸메일 필터에 비유한 리사의 유머러스한 설명도 이해를 돕는다.


    13장을 읽고 14장, 즉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을 읽으면 마음이 훨씬 편할 것이다. 아, 저 기계에서 생성되는 입자는 이런 것들이구나. 하지만 도표로 차분하게 정리된 것과 달리 이 입자들은 전혀 ‘표준적’이지 않다. 오히려 난잡하다. LHC의 검출기에 찍힌 입자들의 궤적을 그래픽으로 보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하기는커녕 현대미술의 한 작품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다. 리사는 진리를 아름다움과 곧 연결시키곤 하는 우리의 전통에 반기를 든다. 동의할 수 없다. 진리란 “어지러운 현상과 잡다한 입자”(373쪽)다. 아름다움은 우리의 주관. 과학이 알려준 진리는, 우주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이덕환 교수의 강의가 떠올랐다. 국문학도인 나는 당시 발끈했다. 시인의 노래를 과학의 입장에서 폄하한 것 같은 뉘앙스를 느낀 까닭이었다. “우주는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말의 뜻을 이제는 안다.


    그렇다면 과학에서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어폐가 있긴 하다. 그러나 과학의 미, 즉 추구하는 방향은 분명하다. 그것은 우선 대칭성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대칭성이 깨지는 것까지 포함한다. 이 역설의 관계에서 이론은 풍부해진다. 또 하나의 미는 단순성이다. 물리학자들은 만물의 기본요소가 단순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론과 입증을 통해 반복적으로 알게 된 까닭이다. 그쪽의 표현을 빌리자면, 출발점의 입력값이 적으면 예측력이 강해진다. 이 두 가지 기준을 바탕으로 이론은 공방의 장에서 주목을 받았다가 도태된다. 그래서 아주 강력하다고 알려진 표준모형마저도 그 너머의 이론에게 자리를 내어주거나 통폐합될 가능성이 있다. 리사가 몇 번이고 강조한 과학의 진화 방식에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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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칭성 이론, 테크니컬러 힘, 여분차원. 모두 계층성 문제, 즉 ‘중력은 다른 기본 힘들에 비해 왜 약한가?’에 대한 문제를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것들이다. ‘미세 조정’으로 다듬을 정도가 아니라, 정말 터무니없이 약해서 과학자들이 수 십 년 간 머리를 싸맨 문제다. 중력. 0을 열여섯 개나 찍어야 될 정도로 큰 차이. 그래서 아주 작은 스케일에서는 중력을 아예 무시해버려도 됐다. 양자역학과 중력의 문제는 그 정도로 심각한 것이어서 일부 과학자들은 둘을 붙이려고 시도하는 이들을 무모하다고 무시하기도 한 모양이다.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원제 : The Elegent Universe)』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 중 한 쪽에 집중적으로 매달리면서, 다른 쪽에서 들려오는 경고성 메시지를 애써 무시해왔던 것이다.”(브라이언 그린의 책, 22쪽) 브라이언은 그 책에서 둘을 통합할 초끈이론을 설명하는데, 그 이론은 바로 계층성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한때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리사는 “한 풀 꺾인 과제”(475쪽)라고 평가했지만 3부 20장을 시작하면서는 두 분야의 지속적인 공동 연구를 희망했다.)


    일단 독자의 입장에서 ‘계층성 문제’라는 걸 대략 짐작은 했으니 그걸 물리학자들이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는지는 들어봐야 할 것이다. 리사가 제안한 비틀린(warped) 여분차원은 그 점에서 흥미롭다. 끈이론이 제시한 brane, 그건 물기가 맺힌 샤워 커튼에 비유된다. 그 막과 막 사이를 리사는 ‘the bulk’라고 부르며, 이 네 번째 차원의, 거리가 굉장히 좁은 공간이 중력brane과 약력brane 사이의 차이를 만든다. 즉 이 사이로 중력자의 파동이 급격하게 줄거나 늘어난다. 여분의 차원으로 중력이 빠져나가 극미세 스케일의 중력이 무시해도 될 수준으로 약해진다는 이론이다. 물론 리사의 말마따나 이건 사변적인 이론일 뿐이라 검증할 수 있을지 여부가 불투명하다. LHC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분야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사변적인 이론에서 실증 단계의 아이디어와 개념들이 나오기도 한다. 그걸 쓸모없다고 하면 리사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생각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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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우주로 나아간다.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는, 그런 생각은 터무니없을 뿐인 작은 세계에서 숨이 턱 막힌 채 한참을 읽다가 드디어 우주로 나아간다. 하지만 산뜻함이 느껴지진 않는다. 막막함이 찾아온다. 내가 새벽마다 목성을 바라보며 느끼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1~2m 정도가 딱 좋다. 아무리 강력한 기능을 지닌 관측기계라 하더라도 우주의 끝을 발견한 적은 없다. 얼마나 크기에. 수평선·지평선(horizon)은 관측자나 관측도구가 전진할수록 뒤로 물러나는 법. Observable Universe는 그래서 우리에게 더 큰 우주의 규모를 상정한다. 우주의 끝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건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끝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있는데 못 찾았다는 것. (후자의 경우는 우주의 모양이 문제가 될 것이다.) 리사는 이 거대한 우주가 점차 팽창하고 있다는 과학적 발견을 거쳐 우리가 볼 수 없는 96%의 우주까지 밀고 나간다. 작은 곳에서는 오래 머무른 그녀가 우주에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속도를 높인다. (물론 전문분야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속도는 흡사 급팽창 이론에 대한 오마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작은 세계에서도 두 가지 불확실성 문제, 즉 계통과 통계의 문제로 물리학자들은 여전히 많은 것을 모른다고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리사도 그걸 별도의 장을 마련해 설명했다. 그러나 우주론이라고 해서 사정이 다른 건 아니다. 조셉 콘레드의 『암흑의 핵심』을 빌린 리사는 우리가 보는, 말 그대로 관측하는 우주는 전체의 4%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 dark보다는 invisible이라 해야 옳지만. 여하튼 이 96%의 압도적인 ‘모름’ 때문에 우주의 스케일 역시 텅 빈 공간이 된다. 마치 원자의 대부분이 텅 빈 것처럼. 리처드 파넥은 『4퍼센트 우주』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우주는 저 밖에 존재하는 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리처드의 책, 13쪽) 인류는 고도의 기술과 뛰어난 두뇌들의 조합으로 지금까지 굉장히 많은 것을 밝혀 왔으나, 여전히 많은 것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종교의 단어로 포장하진 않는다. 그저 그녀/그들은 문을 두드릴 뿐이다. 언젠가 열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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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사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미스터리하지 않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아주 작은 세계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에서는 실현될 일이 전혀 없다. 예컨대 원자 안에서 전자는 한 궤도를 돌다가 갑자기 다른 궤도를 돌기 시작한다. 그걸 눈으로 본다면 전자가 갑자기 ‘사라진다’고 착각해버릴 지경이다. 미국 FOX TV에서 방영된 ≪Cosmos : A Space Time Odyssey≫에 그 모습이 그래픽으로 잘 구현되어 있다. (관심이 있다면 5화를 보라.) 그런 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우주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며, 우리가 아는 것에서 벗어나는 현상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재미있는 무언가를 의미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리사의 책, 558쪽) 그리고 발견되지 않은 그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바로 과학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우주는 우리보다 항상 똑똑하다는 걸 입증한다. 칼 세이건도 그의 생전에 인기리에 방영된 TV 시리즈 ≪Cosmos≫에서 “우리는 우주가 스스로를 알아가는 방법입니다.”라고 말했다.


    오랜만의 과학 독서였다. 늘 그랬다. 과학책은 덮고 나면 묵직한 설렘을 안겨줬다. 그녀/그들이 글을 훌륭하게 써서 그런 건 아니었다. 도킨스가 예외이긴 한데, 대부분 과학자들은 글을 너무 정직하게 쓰는 나머지 패턴이 빤히 읽힌다. 깊게 해석해야 할 문구라는 건 도무지 찾아볼 수도 없다. 하지만 과학은 그런 꾸밈과 사유가 필요 없다. 오히려 그런 정직함이 진리를 향하는 확실함, 확고함, 굳건함, 이런 느낌의 분위기를 풍긴다. 물론 그녀/그들은 도무지 정확하지 않아 걱정이라고 한탄할 뿐이지만! 일말의 오차마저도 허용치 않는 그 정신은 우리네 도공(陶工)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런 과학이 3년 전 힉스 보손을 발견했다고 선언했을 때, 내 기억에 세상은 그다지 시끄럽지 않았다. (나는 당시 작은 기사 몇 개를 읽었을 뿐이다. 이해는 둘째 치고.) 샴페인 터지는 소리는 의외로 작았다. 아마 외계인을 발견했다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리사도 입자물리학의 인지도에 대해 꽤 신경을 쓰는 눈치다. 그렇다면 이 책,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는 한편으로 우리의 문을 두드리는 과학계의 노력이라고 봐야 한다. 나는 뒤늦게나마 그 환호에 한 소리를 보탤 순 없을까, 궁리하는 것이다. 지금의 이야기들이 수 십 년 뒤에는 어떻게 회자될 지를 기대하며. 달 없는 밤일수록 찬란해지는, 일점의 목성을 바라보는 일은 그다지 헛되지 않을 것이다.



링크 : Lisa Randall : Knocking on Heaven's Door - Great Teachers (Harvard University)


p.s 505쪽에 "관측되 우주"라는 오타가 있다. 다음 개정판에서는 수정되었으면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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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0일




    그러나 왕은 친구가 될 수 없었다고 한다.


    다자이가 한 말이 아니다. 그는 「달려라 메로스(走れメロス)」를 덜컥 끝내버린다. 메로스와 세리눈티우스는 죽지 않았다. 왕은 둘을 살려줬고, 둘은 부둥켜안은 채 엉엉 울었다. 군중은 환호했다. 짧은 이야기는 깨끗이 끝났다.



*   *   *



    어디 보자, 남은 것들을 주섬주섬 챙기다 별로 든 것 없는 두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점심이나 먹어야지, 설이니까 가족과 만둣국을. 오후에는 미학을 읽었고, 밤에는 친기즈 아이뜨마또프와 만났다. 그래서 추웠다. 이불을 덮고, 새벽에는 니체를 읽을까, 하다가 다시 다자이를 펼쳤다. 왜. 뭔가 결단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럴 순 없다. 내 주제에 무슨 칼날을 들이대려고. 하지만 손에 든 것이 없었다. 미련 탓에 다시 읽었다. 세 번을 읽었다. 네 바퀴 째가 되자, 창밖으로 목성이 비스듬한 직선인양 둥글게 지나갔고 ㅡ


    ㅡ 졸음이 몰려왔다. 내일은 니체를 읽어야지. 빈 주머니도 있는 법이야. 내가 언제부터 야무진 척을 했었나. 누웠다. 등으로 방바닥의 온기를 머금으며 늘어지며 늘어지다, 시의 교각이 기초공사도 없이 올라가는 것처럼, 늘 그러했듯, 나는 생각했다. 제 3자로 밀려나버린 왕의 모습이 순식간에 밀려들어왔다는 말이다.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겠나? 부탁이니 너희와 친구하고 싶다. 제발 들어주면 고맙겠다.”(다자이 오사무, 김욱송 옮김,「달려라 메로스」, 237쪽) 그리고 왕은 말이 없었다. 다자이는 왕을 침묵에 가두고 군중을 환호시킨다. 세리눈티우스가 메로스에게 말을 건다. 친구를 살리기 위해, 하지만 자신은 죽기 위해 맹렬히 달려온 메로스는 알몸이었다. 그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소설이 끝난다. 그리하여 왕은 둘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왕의 등 뒤에 조용히 서있었다. 환호하지 않았다. 군중아, 떠들어라. 그 환호를 틈타 왕의 얼굴을 보고 싶다. 중무장한 근위대가 곁에 있으니 쉽게 볼 수 없다. 이름을 불러볼까. 전하!, 하고 외치면 돌아봐줄까. 불을 켜고, 조용히 앉아 다시 읽었다. 글을 써내려갔다. 왕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무래도 알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핑계 삼아 이런 혼잣말을 하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왕은 친구가 될 수 없었다고 한다.


    메로스와 세리눈티우스의 우정, 그 이야기는 어찌됐든 상관없다. 그럴 줄 알았다. 모를 독자가 어디 있나. 둘 중 하나가 죽고, 남은 하나가 왕을 죽이는 기상천외한 복수극이나, 뭐 둘 중 하나의 유령이 갑자기 소환되는 허무맹랑한 미스터리로 전락할 일은 없겠지. 『인간실격』의 다자이가 그런 파렴치한 작가일쏘냐. 눈총으로 읽으며 벼렸던 모든 예상은 보기 좋게 맞아떨어졌고, 그래서 뭐든 주워가려고 했던 나, 이 독자의 주머니는 수확을 마친 보람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다 옳은 이야기. 아무런 결함도 없는 이야기. 이 매끈매끈함이 주는 현기증. 표면에 반사되는 밝은 빛의 거북함.


    어떻게든 틈을 찾아보자. 독자의 몫이란 그런 것이니까. 도대체 이 소설에서 빠져나갈 검은 구멍이 어디에 있는가. 이런 마음이 새벽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그렇다. 너무나도 큰 균열이 있다. 누웠다 발견해서 깜짝 놀랐지만. 근묵자흑을 이런 자리에서 빌려보면, 어두울 때만 보이는 게 있는 법이기도 하니. 여하튼 갑작스런, 하지만 충분히 그럴싸했던 환호가 무지막지한 데시벨로 균열을 지워버렸던 것이다. 의심해본다. 왜 거기서 군중이 마치 짜고 친 한 동패처럼 우르르 소리를 몰아갔어야 했나. 왜 환호로 대답이 지워져야만 했는가. 의도했든 안 했든, 결과는 이미 나왔다. 지금으로부터 75년도 더 지난 옛날에. 다자이는 왕을 지워버렸다. 교묘한 작업이다. 그리스 이야기를 읽었거나 실러를 읽었거나 했으리라. 그렇다면 그 이야기의 전말도 훤히 알았을 것. 거대한 우정 속에서 지워진 한 장면. 소설에는 없다. 그것은 다자이가 할 말이 아니었을지도.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조용히 다른 장소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왕은 친구가 될 수 없었다고 한다.


    다시 앞으로. 왕의 폭정에 분노한 메로스가 왕을 죽이려다가 역으로 죽을 입장이 된다. 왕은 어이가 없다. 위엄 있게 말은 하지만 속으로는 “네놈이 말이냐?”(218쪽)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더니 돌연 고독을 아느냐고 묻는다. 대체 무슨 고독이 사람을 죽이는 일로 이어지는가. 그 고독을 사람을 불신하여 사람 사이에서 느끼는 감정이라고, 통째로 번역해본다. 왕이 죽이려고 하는 건, 따라서 사람이 아니라 불신 그 자체다. 그 비열한 영토를 제거해야 고요해질 것이다. “나 역시 평화를 바라고 있다.”(218쪽) 침착한 어조와 한숨에 섞여 나온 이 말의 뜻은 그렇게 해석된다. 메로스가 비웃으니 폭군은 “입으로는 무슨 말인들 못 할까.”(219쪽)라고 외친다. 보고 싶다는 뜻이다. 서로가 서로를 믿는 모습을. 하지만 끝까지 의심한다. 그래, 너 메로스와 네 녀석의 죽마고우라는 세리눈티우스의 목숨을 놓고 한 판의 실험을 해보자.


    이제 뒤로. 메로스는 세리눈티우스와 포옹을 한 뒤 집으로 돌아가 급박하게 여동생의 혼사를 치러주고는 죽음의 길에 오른다. 다리가 끊어진, 맹렬한 바다와 같은 강물을 건너고, 산적 셋을 만나 물리친다. 목이 말라 죽을 뻔했지만 다시 달린다. 달려라, 메로스. 의지가 꺾일 때마다 번뇌한다. 세리눈티우스, 내가 늦어버리면 자네는 나 대신 죽고, 그러면 나도 죽을 것이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있을까. 사람들아, 나를 비웃어라.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 여동생네와 함께 살 것이다. 땅도 있다. 그 부부가 이 몸을 내치진 않겠지. 하지만 메로스의 의지는 불굴이다. 질풍으로 달려 도착하고, 세리눈티우스를 살려낸다.


    왕은 어떠했을까. 상황을 보아하니, 이미 형장에는 명이 떨어진 후였다. 세리눈티우스는 목이 졸려 죽을 판이었다. 군중들은 동요했다. 살려줘라. 용서해야 한다. 그러나 왕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목소리는 안에서 나오고 있었다. 살려줘야 한다. 용서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친구가 되고 싶다. 그는 “군중들 뒤에서 두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236쪽) 있었다. 권세의 거드름 따윈 없다. 그토록 바라던 신뢰의 증인을 살리고자 하는 건 그의 오래된 바람이었다. 그 반대의 일이 그를 폭군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 반대의 일이란 무엇이었나? 한 노인의 증언을 다시 듣는다. “그래, 처음에는 자기 여동생 남편을 죽이더니 그 다음에는 세자를 그리고 여동생과 그 여동생의 자식들을 죽였지. 그리고 황후도 죽였어. 그러고 나서 그 어질고 충성스러운 알렉스 님까지 말이야.”(217쪽)


    의심. 저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일방적인 닫음. 곁에 있는 이에게 가장 먼저 자물쇠를 걸어버리는 일. 폭군 디오니스는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이다. 누군가 고자질을 한 것일까? 아니면 거짓부렁을? 왕이시여, 실은 제가 은밀히 들은 바인데 말입니다… 신뢰의 벽에 균열을 내는 건 대단히 쉬운 일이다. 추호의 의심도 없다?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건 맹신이다. 사람을 맹신하지 않는 한, 우리는 버릇처럼 의심한다.


    디오니스는 병들었다. 믿지 않는 병이 그의 권세와 결합하여 연쇄적 죽음을 불러온다. 왕족 일가를 죽이고, 충신을 죽이고, 볼썽사나운 귀족들도 죽인다. 그는 죽음으로도 걷어낼 수 없는 의심의 백야 속에서 뜬눈으로 밝은 밤들을 지샜을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죽일 거라는 의심이 아니었을까. 몸수색을 너무 쉽게 받아버린 메로스의 경우로 보건대, 그랬을 것이다. 권세와 권세가 겨루는 장에 대해서는 우리도 잘 아는 바이고. 덧붙이자면, 이 소설에는 디오니스가 백성을 죽였다는 기록은 한 군데도 없다. 그런데 백성 메로스가 와서 자신의 의심을 거둬줄 줄이야. 왕은 그리하여 매우 기뻐했지만 ㅡ


    그러나 왕은 친구가 될 수 없었다고 한다.


    둘이 거절했기 때문이다. 「달려라 메로스」의 원판은 이렇다. 피타고라스학파인 다몬과 퓌티아스가 시라쿠스(고대 그리스어로는 수라쿠사이)를 찾았다. 당시 시라쿠스의 군주인 디오뉘시우스 1세는 폭군이었다. 정의의 퓌티아스가 이에 항거할 뜻을 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거사가 발각되어 사형이 언도됐다. 그는 타향에서 횡사할 운명을 달래기 위해 고향에 가서 가족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했다. 왕은 거절했다. 하지만 다몬이 대신 잡혀있겠다고 나서자 허락했다. “네 벗이 오지 않으면 네 목숨을 빼앗겠다.” 퓌티아스는 고향에서 돌아오는 도중 해적에게 배와 함께 통째로 잡혔다가 바다에 내팽개쳐졌다. 하지만 불굴의 의지로 살아서 제때 도착했다. 왕은 둘을 살려줬다. 실은 대단히 감동했다.


    그래서 간절하게 원했다.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겠나? 부탁이니 너희와 친구하고 싶다. 제발 들어주면 고맙겠다.”(다자이의 소설, 237쪽, 재인용) 그러나 거절당했다. 믿음을 확인한 그는 믿음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다몬과 퓌티아스, 아니, 메로스와 세리눈티우스의 한복판으로. 왕위는 무엇이고, 영토는 또 무엇이며, 그 모든 것의 위를 덮은 자신의 권세는 무엇이냐,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성취한 바가 없다. 믿음은 확인했다. 그러나 거절당함으로써 그는 다시 의심의 공간 속에 방치된다.


    다시 말해, 그에게는 아무런 친구도 없다. 머리를 조아리며 죽음의 판결을 기다리는 이들만이 남았다. 이 소설, 하나도 좋게 끝나지 않았다. 형장에 남겨진 왕이 스스로 목을 매는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죽을 수가 없다. 의심하는 나를 죽이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끝까지 살아남는다. 메로스와 세리눈티우스도 잠시나마 그랬던 적이 있다. “다몬과 퓌티아스(Damon and Pythias) 같다”는, 우리 식대로 하면 막역지우(莫逆之友)를 뜻하는 관용어 안에서마저 불현듯 튀어나오는 게 의심이다.



*   *   *



    새벽이 지나간다. 왕의 뒷모습을 보고 일어나 지금껏 왕을 생각했다. 비슷한 처지가 아니었다면 애당초 쳐다보려고 하지도 않았겠지. 나 역시 한 명의 군중에 지나지 않았을 것. 하지만 그렇다. 왕을 보게 되는 독자들이 있다. 독자의 몫을 찾으려는 이들. 소설의 빈틈을 찾아 그곳을 뚫고 나가려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이들이 있다. 넘어졌다는 고백을 하려니, 창피하다. 알몸으로 선 메로스만큼이나 얼굴이 붉어진다. 하지만 지금은 새벽. 목성도 이미 건너편 아파트 옥상 너머로 사라졌고, 오늘은 달도 없다. 불을 끄고 누우면, 다시 일어나면 사라질 부끄러움이다. 이제 그만 눕자. 나는 ㅡ


    ㅡ 낮과 함께 이 책의 우정으로 돌아왔다. 이제 해가 지려고 한다. 어딘가 시공의 틈이 있어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의심의 가스를 환기시키는 것이 우리의 삶임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나는 오늘도, 그리하여 굳건하게 버텨왔다.


    그러나 언젠가 다시 왕을 만나러 나는 이 형장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렇다. 나는 ‘의심’이라는 이름이다. 이 이름을 거쳐왔으니,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는 다른 방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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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9일




    남의 공간에 배설된 흔적을 더듬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책의 권위를 믿는 보수적인 사람일 수도 있겠다 싶다. (이 못된 버릇을 고치지 못해 늘 안타깝다.) 그런 생각이 드는 때가 종종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책’은 몹시 제한된 단어이지만.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는 시대 안에서 우리 독자들이 감내해야 하는 끈질긴 검색, 그 번거로움은 응당한 대가이기도 하다. 하물며 사기를 치는 전문의들이 상품 선전하러 토크쇼에 나온다는 항간의 괴담이 사실인 시대. 노출 빈도와 인기가 눈앞의 막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턱턱 막힐 때도 있다. 무엇에 근거해야 하는가를 판단하는 힘이야말로 필수요, 불가결이다.


    이렇게 보면, 휘둘리는 사람들은 참 많다. 차라리 부유한다는 생각으로, 나처럼 정착의 빈곤을 그러려니 생각하며 고전과 철학과 과학과 종교와, 인류의 지적 재산과 지혜의 보고를 더듬고 다니는 불량한 독자의 신세가 더욱 낫다고 하겠다. 나는 적어도 내가 건초더미에 올라앉은 어리석은 무리는 아니라 생각한다. 오만일까. 그래도 좋다. 광기의 한 동패에서 일탈하려는 몸부림도 일종의 광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까. 방향만 다를 뿐, 미친 건 매한가지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수레 구르는 소리가 들리는 정도의 거리에서 본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 속 위치가 죽기 전의 우리를 결정하리라, 그런 생각이다. 그것은 도무지 내 힘으로 된 일이 아니기에 나는 더욱 읽고 생각할 수밖에.



*   *   *



    그런 생각으로 스쳐지나가던 여러 흔적들 중에 내가 안타깝게 바라본 것은, 그 중 단연 가장 애처로이 바라본 건 ‘글쓰기’에 대한 여전한 목마름이다. PR과 사무적인 일로 글을 쓰는 것이라면, 그건 당연히 배워야 마땅한 것이다. 그런 글들은 오히려 ‘안 그렇게’ 써버리면 이상하니까. 목적이 뚜렷한 글은 그걸 드러내는 시퀀스들을 외워버리면 끝이다. 하지만 그 외의 글들은 무슨 까닭에 배우려고 하는 것일까. 심지어 본인이 시나 소설을 쓸 것도 아니면서 마치 어떻게 글을 써야만 한다고 스스로 빠져 있는 그 강박의 끈적거리는, 불쾌하기 그지없는 기분을 한사코 유지하려고 하는 까닭, 나는 모르겠다.


    일단 그런 생각을 하는 그녀/그들은 과연 많이 읽는가. 다독 다작 다상량. 이런 말이 있는데, 순서가 잘못됐다. 달리 해석해보자. ‘다상량’이 혼자 세 글자라 가장 마지막으로 밀려난 것일 뿐이다. 단, 첫 번째는 맞다. 뭘 읽어야 쓸 수 있다. 이걸 아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녀/그들이 자신에게 정말 솔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쓰는 걸 과감히 관둘 것이다. 과감할 필요도 없다. 절로 관두게 된다. ‘포기’라고 표현하면 좀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오에 겐자부로는 하루 여덟 시간을 쓴다. 와~, 할 일이 아니다. 그가 얼마나 읽겠는가, 혹은 읽었겠는가를 생각하고 탄식을 내뱉어야 할 일이다. 탄식의 호흡이 더 길어야 하는 까닭은, 뭔가를 읽는다고 바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나 쌓여야 제 값을 다할 수 있는지 모르는 것이 독서다. 아니, 대체 그 값이란 있는 것일까, 의심이 들 때도 있다. 중요한 건 이거다. 독서는 독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나름의 링크를 만들기 때문에, 상당한 집중을 한 상태라면 그 독자는 책과 책을, 분야와 분야를 넘나드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 링크는 본인이 통제할 수가 없다. 그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지경에 이르러서도 글을 쓰긴 힘들다. 설령 짧게 토해냈다고 하더라도 그런 글은 값어치가 없을 수도 있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이어야 한다. 잇는다 하더라도 결국 맺어야 한다. 하지만 맺고 나서 몽땅 지워버릴 수도 있는 게 작(作)의 전체 과정이다.



*   *   *



    가벼운 투정이라면 상관없지만, 대체 이 분위기는 뭔가 싶다. 누군가가 자꾸만 조정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대놓고 출판사와 일부 작가들을 겨냥하진 않겠지만, 그런 부류가 아니면 또 누가 그렇게나 독자들에게 “글을 쓰시오.”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 그녀/그들을 안달이 나게 할 수 있겠는가, 묻고 싶은 것이다. 대관절, 왜 또 글은 잘 써야만 하는가? 답은 이미 있다.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러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거리낌이 없을수록, 다시 말해 솔직할수록 강하게 남는 글을 쓰기 마련인데, 뭔가를 자꾸 덧대려고 한다. 옷을 입고, 화장을 한다. 단어를 몰라 말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단어를 ‘골라’ 말을 못 하게 되어버리는 형국이다. 아니, 파국이다. 대체 얼마나 정교한 연금술사가 되려고?


    작품을 할 게 아니면 그냥 뱉으면 된다. 놀라운 일이 이어지니까. 뱉다보면, 이상하리만치 정교해진다. 난폭한 글은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고운 속살을 가지고 있다. 그런 글은 섣불리 건드리기 어렵다. 눈으로 요리조리 피하고, 밤기운에 몰래 들어와 다시 펼쳐보고, 그러는 것이다. 독자와 소위 ‘밀당’을 하는 거다. 이 정도의 거리낌 없는 마음가짐이 없으면, 도무지 글이라는 건 쓸 수가 없다. 사전을 쓰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런 말은 하등 관계가 없겠지만.


    둘째, 다상량에 대한 오해는 지워야 한다. 박박 긁어서 떼어버려야 한다. 다상량은 글에 대해 생각을 하라는 게 아니다. 내뱉을 것들에 대해 뭔 생각을 그리 많이 하는가. 읽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라는 좋은 가르침이다. 조용히 써내려가며 생각을 이어보고, 낙서 속에서 균형과 조화를 찾는다. 하지만 아예 빗나간 것일수록 좋을 때도 있다. ‘차원’이라 하면 정확하진 않지만, 어쨌든 우리에게는 그런 느낌으로 다가오는 틈의 벌어짐이 낙서 속에서 불현듯 나타날 때가 있다. 이건 분명 위험한 방법이다. 멀리 간 것일수록 이질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도발이든 퀴어이든, 그런 것들. 여기서 눈 가리지 않고 귀 막지 않으며 입 닫지 않는 그녀/그들이 다상량의 진면목을 본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할 줄 알았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다독도 대단한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그 못지않은 집중과 인내가 필요한 때가 바로 다상량의 시간이다.


    그에 비하면 다작은 먼 궤도를 도는, 그 크기가 왜소한 행성과도 같다. 그러나 그 궤도의 행성을 돌리는 힘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해 ‘본질’이라고 밖에 표현할 도리가 없는 다독과 다상량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궤도는 분명하지 않다. 어디서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애당초 ‘궤도(軌道)’라 했으니, 돌고 도는 것이지 않은가. 하지만 오히려 궤도라 다행이다. 작(作)이라는 것은 일선처럼 반듯하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것들을 의도치 않게 반복적으로 만나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 만남을 이미지로 기억하든, 단어로 기억하든, 혹은 향으로 기억하든, 그건 쓰는 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메커니즘은 그렇다. 돌고 돌 때마다 우리가 강조하고 싶은 자신 안의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주제가 된다. 글이라는 것은, 때문에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척도다. 품격이니 뭐니 하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과격한 니체는 강의실에 들어가면 ‘소녀 모드’였다. 글에서 우리가 느끼는 건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무엇에 집중하고 어떻게 접근하며 얼마나 생각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진한 맛이 날수록 우리는 그녀/그들을 신뢰해야 한다. 그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물수제비처럼 얕게 튕겨 지나가는 글들은 읽을 가치도 없다. 다독의 아까운 기회를 날리는 것이다. 우르르 몰려가서 읽지 말고, 읽기 전에 다상량의 실천이 있었는지 먼저 생각해볼 일이다.



*   *   *



    생각이라는 것은 읽고 생각하고 쓰는 전 과정을 통해서 사방으로 나아간다. 넓게 퍼지며 면적에 따라 그 깊이가 얕아지는 것 같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결과적으로 깊어진다. 그 와중에 단어의 범주도 넓어지고, 표현 역시 농익는다. 자신도 모르게 발현되는 순간들인 것이다. 그 과정 자체가 워낙 긴 시간을 필요로 하기에, 그런 일은 얼마든지 그런 식으로 일어난다. 많이 읽는 이들은 이걸 안다. 그래서 그녀/그들 중 대부분은 쓴다는 것에 대해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는다. 누구에게 글 쓰는 법을 배웠냐고 묻는다면 그녀/그들은 십중팔구 이렇게 답할 것이다. ‘스승이 너무 많아 누굴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시 말해 그녀/그들은 어떻게 쓰는지 자신도 알지 못한다.


    글을 쓴다는 건 문제될 것이 없다. 창의적인 글쓰기? 그런 학원 간판을 볼 때마다 생각하는 것인데, 그런 것에 돈을 쏟는 사람들의 손에 그 값의 양서들을 쥐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사람들은, 즉 우리는 평생을 독자로 살아야 한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끝나지 않을 과업이다. 언젠가는 얼마나 많이 읽었는가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순간이 온다. 우리가 문제 삼는 건 그 사이의 일이다. 그 사이의 길이, 그 길의 흔적이 글로 남기 때문에, 아마 우리는 쓴다는 것을 그토록 두려워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상술의 속내에 빠져 돈의 손을 잡든, 맹렬히 독서를 하며 여전히 아무런 글도 쓰지 않는 수행을 하든, 우리는 모두 끝 있는 삶의 한계 속에서 뭔가 얻어 보고 그걸 표현해보려는 욕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이왕이면,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것의 힘을 느껴볼 양으로 그 분투의 한복판에 뭐라도 손에 쥐고 뛰어들 생각이면, 대가의 법을 따르는 것이다. 오로지 정직함으로. 모르면 반복해서 읽고, 알겠다 싶어도 다시 읽어 모름을 알고, 그렇게 한없이 부딪히면서 난폭하게 책의 외관을 열쇠로 긁어도 보고, 새벽을 쓰며 증오하고, 자신을 비췄다가 그 거울을 부숴보고, 온갖 미친 짓을 해가면서 어느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건 하나의 실험일까? 실험이라 해도 별 수 없는 것이, 결과를 모르니까. ‘그래서 결론이 어쨌다는 것인데?’ 이런 질문을 한다 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누군가 알았더라도 그녀/그들은 이미 세상에 없고, 당신과 나만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사람은 쓰지 않으면, 읽지 않으면, 그리고 생각하지 않으면 밖으로 나가떨어진다. 처절하게 굴러다닌다. 차라리 나가떨어지고 구를 바에야, 좀 더 낯설고 무시무시한 자기 안이 그 장소임이 더 낫지 않은가.


    글은 그 안의 '내'가 쓰는 거다. 그래서 부끄러운 일이고, 그 위에 갑옷을 입히고 껍질을 덧붙여 버젓한 한 생명으로 치장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살아 있다는 건 무엇인가. 누가 살아 있는가. 갑옷과 껍질인가, '나'인가? 미생인 나도 알겠는데, 전자는 확실히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한 판 시원하게 걸며 건초더미 수레에서 뛰어내리겠다. 어딘가가 아픈데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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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인문/과학/사회 신간 추천














1. 『혐오에서 인류애로』 - 마사 C. 누스바움 / 강동혁 옮김 / 뿌리와이파리


    『혐오와 수치심(원제 : Hiding from Humanity)』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마사는 마이클 샌델을 배우다가 미국 법철학에 관심이 생겨 찾아보던 차에 알게 됐다. 마사의 그 책은 미국에서 2004년에 출간됐는데, 찾아보니 국내에는 작년에 번역 소개됐다. 10년이 넘었으니, 그녀의 영향력에 비하면 굉장히 늦은 거다. 생각해봤다. 우리 사회의 보수적 장막을 출판계가 의식하고 있던 건 아닐까? 어쨌든 그쪽은 책을 '파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뭔가 주저함이 느껴진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근 몇 년 사이에 소수와 혐오라는 단어의 멀어지고 가까움,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개념의 '유동'이 유난했다. SNS로 논의들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소수의 복권은 여태 한 번도 없던 일이지만, 희망을 갖는 소수들이 있다. 나는 나를 소수라 생각하지 않는다. 요컨대 소수와 다수의 구별을 별로 의식하지 않았다. 이게 나의 함정이다. 감정의 결여. 마사는 그걸 경계한다. 법학자로서 감정에 주목한다. 그 감정이 없으면 그녀가 말하는 인류애로 나아갈 수 없다. 『혐오에서 인류애로(원제 : From Disgust to Humanity, 미국 2010년 출간 / 옥스포드 대학교)』는 가장 날이 선 책이라 한다. 그것도 김영란 前대법관이 그런 추천을 했다. 한참 사사키를 읽으며, 르장드르와 푸코를 읽으며 언어인 법이 지닌 힘을 수많은 사례들로 확인했다. 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말. 그것의 감정을 생각해봐야 한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마사의 입문서로 읽어보고 싶다. 누구에게 추천하기에는, 부끄러워지는 책이다.

















2. 『덕후감』 - 김성윤 / 북인더갭


    그렇다. 나는 덕후다. 톨킨 덕후다. Banjion.com이라는 LOTRO(The Lord of the Rings Online) 국내유저 사이트에 가면 내가 번역해놓은 게임 스토리들이 있다. 게시물은 1천여 개가 넘는다. 덕후심에 한 번 자랑해본다. 그런 '덕질'을 한 사람은 우리나라 온라인 상에 나밖에 없다. 톨킨 원서들은 스무 권 가량 있다. 앞으로 네 권을 더 사야 한다. 영화 《호빗》 3부작이 끝나자 한동안 우울했다. '중간계' 6부작 확장판 영화를 다 번역해 가족들과 한동안 계속 돌려봤다. 언젠가 톨킨이 그리지 않은 중간계의 다른 이야기를 2차 창작으로 한 편 멋지게 쓰고 싶다는 생각에 청사진을 짜놓기도 했다. 단어 암기는 최악인 내가 톨킨 세계관에 나오는 수많은 단어들을 암기한다. 어느 정도 번역을 마치면 요정어(신다린)를 공부할 생각이다... 이런 사람을, 나 같은 사람을 덕후라 한다. 그리고 나는 덕후가 창조의 토양을 다져간다고 생각한다. 문학과 철학, 인문학, 과학, 미술 등을 공부하면서 한편으로는 고급과 대중 사이의 거리를 줄이는 작업을 꾸준히 한다. 덕질로 연마한다. 덕후들에게 오해를 갖지 않는 나는,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얼마나 축복 받은 사람이란 말인가! 나는 흔히 '구조'라 부르며 쉽게 가르곤 하는 두 '구조' 사이의 혼탁한 지점을 안다. 그래도 이 덕질을 10년은 훨씬 넘게 해왔으니, 뭔가가 보일 때도 됐고. 대중문화를 두고 비생산적이라 일축하는 고고한 이들의 논리는 사절이다. 서재 한 구석에 『인간이 상상한 거의 모든 곳에 관한 백과사전(원제 : The Dictionary of Imaginary Places)』이라는 대단히 두꺼운 책이 한 권 있다. 그곳이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분명 어슐러 르귄파다. 『덕후감』이라니! 나를 위한 책이 아닌가!



















3. 『글쓰는 여자의 공간』 - 타니아 슐리 / 남기철 옮김 / 이봄


    네이버에서 2~3년 간 미술 블로그를 할 때, 내 공부글과 미술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준 이웃의 대부분이 여자였다. 낯선 경험이었다. 나보다 많은 경험을, 그리고 나는 결코 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할 경험을 지닌 그녀들의 댓글과 반응에서 정말 많은 걸 배웠다. 새벽이 내리고 목성이 희뿌연 달을 좇아 아파트 머리 위로 떠오를 때면, 옛 미술 공부의 추억이 떠올라 대가들의 그림을 펼쳐볼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여자의 공간'이다. 내게 그것은 새벽과 같다. 기억의 절차고 뭐고 간단히 무시해버리는, 반드시 찾아오는 여명 말이다. 남자인 내게. 위험한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여자는 신비하다. 그래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것이다. 생각했다. 블로그에 찾아오는 분들과 작은 온라인 카페로 소통하던 차에 현대미술의 여성 작가 100인을 추려 소개해드리면 좋겠다, 싶었다. 반응은 좋았다. "저는 소니아 들로네가 참 멋져 보여요.", "아이더 애플브루그의 작품속의 여인의 모습이 기묘하면서도 왠지 자꾸 시선을 붙드는군요.", "트레이시 에민.. 작품 저거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ㅋㅋ". 그 기획을 연재하는 동안 나는 나에게 익어 있는 남성 위주의 미술사로는, 그 어조로는 도무지 100인의 작품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작가의 사진과 작품 하나, 짤막한 일대기 정도로 마무리했다. 지금 『여성, 미술, 사회』를 읽으면서 반쪽짜리 미술을 배웠구나, 생각한다. 이제 그 생각을 문학으로 가져간다. 얼마간 열심히 읽고 쓰는 중이니, '여자의 공간'을, '글쓰는 여자의 공간'을 들여다보고 싶다. 김애란과의 대담, 오정희와 권지예의 단편들, 여러 기억이 떠오른다. 아, 그렇다. 『글쓰는 남자의 공간』이라는 책이었다면 쳐다도 안 봤겠지. 공간. 그것은 여자와 잘 어울리는 단어다. '품'이라는 뜻이니까.


















4.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김명남 옮김 / 창비


    동생은 SNS를 한다. 폰보다는 책이라며 그저 읽고 쓸 뿐인, 이 불성실한 오빠는 그래서 사람들이 요즘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른다. 힘들다, 힘들다, 하는 오프라인 말이 아니라, 빅데이터처럼 뭔가 한 단어에 반응해서 뻗어나가는, 헐겁고 즉각적이지만 그 나름의 진실이 묻어나는 온라인 말을 잘 모른다는 뜻이다. 민감한 온라인의 말. 동생은 지금이야말로 페미니스트 선언의 적기라고 보는 듯하다. "오빠가 어딜 가든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 나는 페미니즘을 공부해본 적도 없고, 아니, 공부해보긴 했는데 그건 대학 1년 차에 어떻게든 학점을 채워야 해서 한 남학우와 쭈삣쭈삣 거리며 들어가 수많은 여학우들 사이에서 낯설게 체험해본 정도고, 그 개념을 생각의 한복판에 세워둔 적이 없다. 그런 사이 얼마나 많은 오해들이 혈관에 쌓여 생각의 흐름을 막고 실핏줄들을 터뜨렸을까. 그녀/그들은 벌써 저어만큼, 저어어만큼 생각을 하고 논의를 펼쳐 행동하고 있었다. SNS에 올라온 글이라며 동생이 보여준 글들을 읽어보다 아찔했던 적이 여럿.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2016년이야말로 문학과 경전의 해라고 '선포'까지 해놓은 차에 '소수'와 '여성'이라는 단어가 서재에 들어갈 줄이야. 예상 못했었다. 그만큼 급박하게 찾아온 단어다. 기회를 놓쳐 후회한 적이 많다. 삶은 강물을 주시하는 거라 생각한다. 漢詩를 읽다 유일하게 전율이 돋았던 적도, 그 강물이 흘러가면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구절의 접했을 때였고. 그런 새삼스러움이 위험하고, 나를 망치더라.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아직은 낯선 이름. 나이지리아의 유망한 그녀의 글로 한 번 만나보고 싶다. 호모 페미니우스? 호모 페미니쿠스? 이런 단어가 도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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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6-02-03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님!!! 존경합니다.
요정어를 공부하실 생각이라니요???? 아아아아 요정어!!!!!
님은 진정한 덕후이십니다. ^^
친구신청했습니다. 축생이라고 퇴짜는 아니겠지요??? 호호호

탕기 2016-02-03 16:28   좋아요 0 | URL
숨겨왔던(?) 저의 덕후심을 반가워해주실 분이 알라딘에 계실 줄이야...

미야자키 하야오도 좋아합니다.
덕후까진 못 되겠지만 전편 다 보고 아트북을 사놨지요.
제게 동심이 있다면 그건 동화보다는 미야자키 덕분일 겁니다.

사람보다는 축생을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