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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과 영원 - 푸코.라캉.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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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6일


    푸념. 우선 옮긴이의 말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독자가 푸코와 라캉, 르장드르에 대해 사전 지식을 갖고 있을 필요는 전혀 없다. 삶이 사회화되는 과정에 대한 지적 호기심, 성찰의 욕구가 있다면 읽을 수 있다.” (909쪽) 저자 사사키 아타루도 (특히 라캉 부분에서) 거듭 말한 바인데, 독자의 자질이라는 것이 있다. 단순한 지식의 양을 일컫는 말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느냐의 문제를 언급한 것이리라. 시각은 위험하다. 물론이다. 무엇이 시각을 구축했느냐의 여부가 문제다. 따라서 이 책은 사전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나 같은 이는 읽을 만하긴 하지만, 반면 여기서 언급될 라캉, 르장드르, 푸코 등 우리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세상을 기저에서부터 뒤흔들고 비판하는 이들에 대해 색안경을 낄, 그런 태세를 얼마든지 갖추고 있는 이들이 읽을 만한 하진 않다. 그것은 옮긴이 안천의 저 문장 중 후자에 해당한다.


    나는 어느 정도 욕구를 충족했다. 또 다른 욕구가 결핍을 낳는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여기서 시작될 여정은 여타의 독서로 도움을 받을 테니. 그러나 이 충족에는 피할 수 없는 푸념의 묘한 맛이 섞여 있다. 피하고 싶은 맛은 아니나, 굳이 사서 맛보고 싶은 맛도 아니다. 내가 어떻게 사회화되어 있는지는, 내가 이 사회에 어떻게 끼어들어가 있는지는 저들의 시각을 빌려 알게 되었다. 그 맛이 씁쓸하다. 그 전략적 장치들이, 아주 오래된 기술들이 만든 픽션의 견고함 속에 내가 들어 있다. 그 역사의 도박장 속에. 이걸 남에게 설명하기도 사실 뭐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개인’으로 취급된 적은 적었던 듯도 하다. 내게는 번호가 붙어 있고, 관리되는 상황이고, 규율 속에서 장기간 ‘조정’ 받은 적도 있었다. 자유롭다는데, 그걸 잘 모르겠다는 사람들 속에서 함께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유수 인문학자들의 날카로운 일갈로 “그래, 우리 사회는 그런 거였어.”라고 무릎을 친 적도 있다.


    그래서? 어디로 가자는 건가? 만약 내가 가다머였다면 분명한 어조로 “우린 우리 시대 바깥을 볼 수가 없어.”라고 대답하겠지만, 그래도 이 책을 읽었으니 “그건 아주 오래된 세계의 판본에 지나지 않아.”라고 반문할 것이다. 새로운 것은 없다고. 그런데 이렇게 알아본 결과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한다는 것일까? 저자가 ‘이로(理路)’라고 칭하며 제시한 이 두꺼운 논거들이 분명하게 말하는 바, 끝은 없다. 이제 ‘○○의 종말’이라느니 끝이 보인다느니 새 시대를 준비해야 된다느니 하는 말 따위에 나는 속지 않을 자신이 있다. 이 유치한 선언은 아마 그런 만큼이나 확고하게 오래도록 내게 새겨져 있을 것이다. 종말이라고 말한 자들이 선언한 새 시대도 르장드르의 표현대로라면, 또 하나의 ‘판본’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차라리 그걸 판본임을 모른 채 “오, 새 시대여, 내게 축복을!”이라고 외치는 게 살기에도 더 편하고. 하지만 이 책은 위험하다. 끝이 없다는 말만큼이나 우릴 막막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그렇지만 『야전과 영원(夜戦と永遠)』을 40여 장의 이면지에 꼼꼼하게 적어 곱씹고 고민하며 읽어온 나의 이로(理路)를, 아니, 정정한다, 나의 ‘이로(泥路)’를, 그 진흙탕길을 다시 한 번 돌아봐야겠다. 쓰다보면 이 책을 덮은 나의 첫 번째 막막함이 그래도 풀어지진 않을까, 이런 또 하나의 막막한 희망이다. 이 막막함은 상당히 물리적이다. 그렇다. 여기까진 술술 써내려왔는데, 이제부터 뭘 써야하는 것일까. 여기까지의 나와 이 아래의 나 사이에는 어떤 서어(齟齬)가 있을지도 모른다.




*   *   *




    말년의 라캉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털어놓은 ‘보로메오 매듭’을 시작으로, 우리는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처음으로 돌아간다. “당신의 처음은 무엇인가?”라는 도통 의미를 모를 질문을 받는다 하자. 물론 의미를 모르겠다는 건 ‘처음’의 정확한 지점이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라캉은 그걸 <거울>을 보는 시점이라 말한다. 거울을 보지 않은 말을 모르는 이, 그것은 인판스이다. 전제 군주, 그것도 아주 포악한. 미술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히에로니뮈스 보스의 세계”(44쪽)라고 설명하면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시기가 있냐는 거다. 저자는 그걸 소행적 도출일 수도 있다고 분명히 경고한다. 나도 사실 라캉의 이 분석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환희와 증오에 대해서는 딱히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만화 <호문쿨루스>를 본 사람은 생각해봤을까? 주인공은 욕망이 발달한 부분이 유독 크거나 눈을 달고 움직이는 기이한 세계를 보는 눈을 갖게 된다. 나는 저 원초성이 거울 앞에 선 이에게 그려지는 이미지이며, 주인공의 눈은 그 거울의 면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했다.


    주변은 접고, 다시 정리하자. 방금 논한 건 상상계의 일이다. 내 모습을 사랑하면서도 저 정지된, 죽은, 결여된 이미지를 보고 “바로 ‘너’가 ‘나’라니!”하며 놀란 가슴에 자아(소타자)를 공격하게 되는 이 막다른 골목 말이다. 이건 어떻게 끝나는가? 우린 저기서 살고 있지 않지 않은가? 여기서 상징계가 나온다. 판사의 판결봉. 대타자가 선언한다. ‘너는 ○○○이다.’ 상상계가 진짜의 개입, 즉 실정법의 개입으로 쓸모없는 망상이 되어 사라져버린 건 당연하다. 정신분석이 다루는 게 사회 속에 있는 걸, 개인의 병은 그리하여 사회의 병인 걸, 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선언에서 더 이상 더 갈 길이 없다. 라캉은 인간의 법을 언어의 법이라 결론한다. 그런데 저 둘은 닮았다. 법과 언어의 상징계에서 대타자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언이란 “너는 죽는다.”이고, 이미지와 애증의 상상계에서는 아예 거울 속의 소타자 자체가 죽음의 이미지다. 소타자에 대한 질투와 시니피앙의 무한 엔진, 그 용광로 같은 열광도 닮았다. 메커니즘이 유사하다.


    그렇다면 실재계는? 이건 없는 세계다. 세계는 상징화를 통해 구성되는데, 이것 때문에 못하게 된 것, 상실된 것, 그것이 실재계다.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우연을 기다려야 한다. 외상과의 우연한 조우가 있으면 주체는 주체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조우’를 뭐라 부르는가? 라캉의 네 접점 중 세 개, 즉 대상 a의 잉여 향락, 팔루스의 향락, 대타자의 향락이다. 향락은 쾌락과 다르다. 긴장을 재생산하며 지속하는 것이다. 라캉이 그 예로 든 그리스도교의 성인(聖人)들의 행동은 다소 충격적이다. 떨림과 긴장이 교차하는, (굳이 쓰자면) 똥 먹기, 나병 환자 씻긴 물 마시기, 이런 것. jouissance란 곧 죽음의 충동과 같다. 여기서 절대적 향락을 주목하자. 이 신화적인 향락은 근친상간, 살인의 금지와 딱 붙었다. “그건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고 싶다.”라는 긴장. 금지는 하라는 것이기도, 하지 말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충동을 치수(治水)하는 게 계율이다. 합법적 향락 만들기 프로젝트.


    팔루스의 향락도, 대상 a의 잉여향락도 모두 향락의 조정기, 즉 레귤레이터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것은 신체 기관에 대한 향락, 권력에 대한 향락, 그리고 찌꺼기에 대한 향락이다. 이런 것들이 합법적이라고? 물론이다. 팔루스의 향락은 상징에 대한 향락이다. 페티시즘과 무한 권력욕이 비합법적인가? 찌꺼기라도 향락하자는데, 가벼운 도착 행위, 여자옷 입기나 남자옷 입기나, 아니면 유니폼을 갖춰 입은 이 일상이나 그런 것들이 죄가 된단 말인가?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이 ‘코스프레’ 사회가? 아니다. 그럴 일은 없다. 단, 라캉이 이런 향락들을 모두 뒤로 하고 언급한 고귀한 향락이 하나 있다. 바로 여성의 향락, 대타자의 향락이다. 이 단어만은 끝까지 기억하고 이로를 따라가야 한다.


    우선 르장드르의 비판은 견지해놓자. ‘여성의 향락’이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교적이다. 그들의 신은 남자가 아닌가. 여기서 <여성>은 지극히 제한적 용어다. 사실 나는 이런 사람을 실제 본 적이 없다. 그래서 현실에 없는 건 아닌가 생각까지 해봤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법열에 든 여성을 본 적이 없다. 신을 사랑한다고는 누구나 말할 수 있다. 그게 신앙의 확증이요, 과시요, 또한 희열이라면. 그러나 정말 신을 사랑하여 저 베르니니의 조각상에서처럼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신비로운 그 표정을 한 여성은 못 봤다. 신과의 연애. 그 불온함. 신을 연모하는 그녀들의 말은 상징계에 속하지도 않아서 라캉은 그걸 ‘라랑그(Lalangue)’라는, 잘 모를 용어까지 고안해내며 “언어는 바깥을 내포하고, 언어 바깥에서 비로소 언어가 된다.”(207쪽)라고 말한다. 사실 이 의미를 잘 모르겠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안다는 뜻도 아닌 게, 그건 어쩌면 언어가 닿지 않는 곳이 있으리라 생각하는,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원제 : Die Weld Des Schweigens)>를 읽고 난 후 내가 갖게 된 어떤 감각적 추정, 아니 경외심이 어렴풋이 남아 있는 까닭이다.


    추억은 접고, 여하튼 이 향락을 추구한 신비주의자는 마리아가 되려고 했고, 그것은 사회와 세계를 낳는 진정한 혁명. 여기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라캉은 여러 비판을 받지만 그래도 이 ‘여성의 향락’을 제시한 공로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건 용감한 시도였다는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죽음의 냄새로 가득한 라캉의 방에서 창문을 열고자 ‘표상과 시체 : 하이데거·블랑쇼·긴츠부르그’라는 괄호의 장을 마련해 “표상은 시체다.”, “우리는 인형이다.”, “이것이 니힐리즘인가?”, “우린 원래 그렇다.”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새 인형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어느 정도 환기시킨다. 답답했던 라캉의 장에서 그렇게 작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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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로 넘어왔으니, 당연 르장드르는 정신분석을 맹비난하는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 아니다. 딱 옳다. 그러나 계보적 구축과 규범 시스템을 밝혀낸 공로는 인정한다. 그리고 사실 르장드르가 자신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도그마 인류학’의 그 ‘도그마’를 추출해내는 지점도 정신분석 비판의 안에 있었으니, 둘의 관계를 독자인 우리가 아주 삐딱하게 볼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럼 대체 도그마란 무엇인가?


    우선 르장드르도 상상계와 상징계의 붕괴를 말한다. 대타자와 소타자, 시니피앙과 이미지의 구별이 없으니 라캉의 저 <거울>이란 건 말과 이미지가 섞인, 아주 치밀하게 조립된 장치일 것이다. 그런데 라캉이 광학적 기능을 한 <거울>을 말했다면 르장드르는 더 나아가 그걸 사회와 엮어버린다. 사회=<거울>. 이미지는 그냥 비춰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거울> 면에 텍스트와 함께 직조‘되어’버린 것으로, 거울은 곧 텍스트가 된다. 우리도 텍스트다.


    그러면 남는 질문은 “대타자도 <거울>로 볼 수 있는가?”이다. 우리를 제어하는, 우리를 선언하는 자를, 아니, 신을? 신이 눈에 보일 리는 없다. 보인다면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대타자에게 “너는 ○○다.”라고 선언할, <거울>로 비춰줄 대타자는 없다. 신의 <거울>에서 보이는 건 세계다. <거울>을 봤는데 세계가 보인다니! 이런 (르장드르의 표현대로라면) ‘미친’ 상태는 분명 신화적이다. 따라서 신이라는 건 모든 거울보다 앞서 있는, 앞서 존재하는 <거울>이다. 이걸 르장드르는 <절대적 거울>이라 부른다. 이게 그의 도그마다. 인과성도 없다. 근거도 없다. 설명도 필요 없다. 그런데도 인과성과 근거와 설명이 개시되는 것. 이것이 바로 도그마적 <거울>이다. 인간은 여기서 만들어지며, 이것의 구체화가 엠블럼이고, 엠블럼이 우릴, 군중을 움직이게 한다. 아니, 우리가 엠블럼이다.


    이 도그마를 알았으니, 진짜 이런 게 우리에게 있는지 알아봐야할 차례인데 사실 별로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 있다. “근거율은 예술이고, 근거는 미적·감성적으로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295쪽)라는 말은 별 설명 없이 도그마적으로 설치된 엠블럼이 우리의 생사를 좌지우지하기까지 하는, 예로 들게 되면 아주 비근해지는 역사적 사례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이건 도저히 논리적이지 않아도 되므로 ‘자명한 일’ 역시 아니다. 왜 ‘1’을 ‘1’이라고 세는가? 아는 사람이 있을까? 최초의 시니피앙을 도입하는 것, 그 공허한 장소를 염두에 주는 것. 정치 기술들은 분명 이런 도움을 받고 있다. 근거율과 인과율이 분할되어 있다. 르장드르의 이 말은 법의 말로 분류된 우리 사회가 “그건 왜 그런 겁니까?”라고 묻는 순간 사상누각이 되어버리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제시한다. 그러니 증거가 되는 텍스트에도 우리는 반문할 수 있다. 아, 진리는 없는 것일까? 그리하여 텍스트만 있는 것일까? 르장드르는 그래서 책 제목도 『텍스트의 아이들』이라 한 것일까?


    법의 말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수취(收取)하는, 르장드르의 이로를 따라 엄밀히 생각해보면 맞긴 하나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모래 같은, 나약한 이 모습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르장드르가 하나의 ‘판본’에 지나지 않는다며 일격에 산산조각, 그 파편으로 만들어버리는 유럽의 긴 역사를 목격해야 했다. 사실이다. 난 그를 전혀 몰랐다. 라캉이나 푸코는 대학에 '들어는 본' 정도였고, 푸코는 약간 읽기도 했지만 르장드르는, wikipedia 검색도 순탄치 않은 그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무너져버린 ‘도그마 인류학에서의 아버지’라는 개념과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게 무너져버리는 모습에 무섭기도 했다. 아주 교묘한 책략과 “아버지가 아이를 낳는다.”라는 픽션과, “닮은 자가 닮은 자를 낳는다.”라는 오래된 법의 문구를 인용한 르장드르의 의도가. 흡사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모든 이가 죽어도 “<거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존재해야 한다.”(341쪽) 왜? 그게 삶을 다듬으니까. 이 위험하고도 피비린내 나는 도박판이, 다름 아닌 역사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서움은 안도, 절반 정도의 안도로 바뀐다. 결론은 이거다. 르장드르는 이 부분이 중요하다. 저 판본을 만든, 도그마의, 텍스트의 힘을 무시하는 자가 원리주의자다. 그는 전제적인 폭군이 된다. 나-텍스트의 경계도 구분하지 못하고 폭력으로 귀결된다. 오늘 우리는 그 모습을 본다. IS는 지난해 가장 뜨거운 단어였다. 그런 현상을 막기 위해서는 소격하는 자, 소격을 천명하는 자가 필요하다. 그렇다. 해석하는 자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꾸란>이 “죽여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짜 아무나 죽이라는 건가? 텍스트와 우리 사이에는 소격이 있어야 한다.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법자의 세상이 된다. 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싶지 않다.


    르장드르의 ‘도그마 인류학’에 따르면 우리는 제정되는 주체, 재설정되는 주체, 그렇게 무한 반복되는 주체들이다. 이렇게 주체가 만들어지는, <거울>과 주체의 관계를 ‘의례’라 부른다. 우리는 이 의례가 없으면 진짜로 ‘말’이라는 걸 할 수가 없다. 역설적이게도 그게 반드시 말일 필요는 없다. 춤이어도 된다. 언어적인 것만을 법이라 여기는 건 너무 유럽적이다. 이런 분위기는 <중세 해석자 혁명>이라 부르는 것에서 출현했다. 르장드르는 여기서 그레고리우스 7세의 개혁에서부터 법학자의 국가, 즉 법치국가의 출현에 이르는 역사를 설명하며 문자화된 법이 갖게 된 절대적인 위력을 보여준다.


    그 결말은 그리스도교의 교회법에서 세속화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단, 우리가 아는 그 세속화는 아니다. 종교와 떨어진 그것이 아니라, 여기서의 세속화는 “종교 자체의 본성과 관련된 광대한 연극적 총체의 일부”(377쪽)이다. 너무 어렵게 생각 말자. 그리스도교의 규범 공간이 더 오래 살아남고 싶어서 알리바이를 깔아놓은 것 정도로 생각하자. 유럽이 어떻게 세계를 정복했던가? 역사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아!’ 할 것이다. 신앙의 자유가 어디 진짜 자유던가? 세속화된 근대국가에 종교가 없던가? 이 정도로 말이다.


    여기서 결론이 나온다. 국가는 찰나다. 명운은 끝났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 <절대적 준거>가 만들어낸 한 형식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 형식주의는 사회과학의 위력과 함께, 기능주의의 추상과 함께 <국가>라는 개념이 소탕되는 소란을 틈타 같이 소멸된다. 그리고 실제로 국가의 멸망을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 우리를 ‘지배’하는 건 반드시 <국가>일 필요는 없다. 이 세계화의 시대에. 그것은 ‘매니지먼트’가 맡아도 된다. 그리고 매니지먼트는 국가를 비난한다. 그래야 자신들이 떳떳해진다고 생각하니까. 그렇다면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이거다. 매니지먼트는 믿을 만한가? 필연적인 결론인가?


    아니다. 저자는 살만 루시디 사건을 조망하는 벤슬라마를 잠깐 거쳤다가 다시 르장드르로 돌아오면서 매니지먼트의 보편성은 인정될 수 없다는 논조를 강력하게 조명한다. (벤슬라마도 중요하다. 원리주의-종교의 구별에 대해 논하기 때문이다. 이는 푸코의 말미에 다시 등장하는 문제이므로 기억해주는 것이 좋다.) <중세 해석자 혁명>이 가동시킨 텍스트의 정보화를 신봉하는 그들은 계보 원리는 몽땅 국가에게 떠넘겨놓고는 <법 권리>까지 밀어내려고 하는데, 이것이, 그러니까 과연 민영화가 재봉건화와 다를 바가 뭐가 있다는 것인가? ‘경영자-상사-부하’가 ‘주인-종자’와 뭐가 다른가? 우리도 그렇게 툴툴거리는데.


    게다가 이들은 “물음의 제도의 폐지를 고하고”(407쪽) 있다. 근거율이자 <거울>이자 소격인 ‘왜’, ‘사랑’, ‘자유’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건 국가주의자의 말이 아니다. 국가는 죽어도 된다. 하지만 해석은 살아야 한다. 텍스트는 얼마든지 픽션이 된다. 그것은 도박이다. 역사의 도박이다. 끝나지 않는 도박. 이 도박장에서 우린 살아남아야 한다. 절멸 금지. 이 도박장에서의 춤, 즉 법과의 열광적인 춤은 바로 사회와 세계를 낳는다는 라캉의 ‘여성의 향락’과 닮았다. 갱신의 희망은 얼마든지 남아있다.




*   *   *




    드디어 푸코다. 아니다. ‘갈팡질팡하는’ 푸코다. 저자와 함께 그 변화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나는 어떤 종류이겠는지를 잘 모를 감동 같은 걸 받았다. 진하진 않다. 푸코를 비난하는 쪽에서 들려온 이 세계의 목소리를 아주 모르는 바도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도 옹호해야 할 부분과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부분을, 가만히 멈춰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판단은 우리 몫이다. 하지만 일단 그 이로는 따라가야 한다. 초기의 푸코에서 후기의 푸코에 이르는 긴 길을 사사키 아타루는 정말 그대로 걸어간다. 설정했다가 폐지했다가 그럼에도 계속 고집을 이어가기도 하고, 아이처럼 맨손으로 정치 문제에 덤벼들었다가 ‘된통’ 당하는 그 모습을 거의 여과 없이 보게 된다.


    곁가지를 다 쳐내는 위험을 감수하자면, 푸코는 주권권력, 규율권력, 생명권력의 구분과 이후 그 구분이 ‘통치성’이라는 개념으로 와르르 무너져버리는 이로를 갖고 있다. 초기의 푸코는 주권권력을, <주권=법 권리>의 개념을 일관되게 비판했다. 너무 낡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감시와 처벌(원제 : Surveiller et punir)』에 제시한 권력은 규율권력이었다. 고문, 살해, 추방의 의례도 아닌, 죄와 관련된 기호를 각인시켜버리는 상징 설치도 아닌, 바로 감옥에 넣어 신체를 훈련시키는 규율. 이 책에서 푸코는 결론짓는다. 권력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만인을 본다. 권력의 기계. 장치. 기계. 정교함으로. 벤담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감옥은 실패하지 않았는가? 범인들이 더 이상 안 들어오던가? 아니다. 그건 범죄를 필연적인 요소로 설정하여 그 비행성을 감시하도록 한다. 아주 교묘하다. 그 positive가.


    이런 까닭에 푸코가 정신분석을 그렇게도 비판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주권적 메커니즘이 지배하는 ‘가정’이라는 개념을 중심에 뒀으니 “너희들은 낡았다.”라고 말이다. 그리고 규율 권력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정신의학의 여러 전략들을 꼬집는데, 아홉 개나 되는 항목을 읽고 있으면 주변에 정신의학 전문가나 지지자들이 있는 건 아닌지 눈치를 보게 되는 문구들이 산재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사키 아타루는 갑자기 선언한다. “푸코는 옳다.”(542쪽) 권력의 주구(走狗), 앞잡이, 개 정도로 정신분석이 격하된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인류학과 사회학 역시 같은 범주에 집어넣고 비판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근거가 제시된다. 근친상간, 인육식, 그의 상징과 같은 마리 앙투아네트 사건, 자위박멸 캠페인, 핵가족 고안(등장이 아니다. ‘고안’이다.) 등등. 정신분석은 부르주아에게, 사회학은 서민 계급에게 명령하며 사회를 만들어간다. 푸코는 분명하게 말한다. “금지는 틀림없이 지식인이 발명한 것입니다.”(557쪽) 그런데 규율에는, 푸코가 말한 그 권력에는 바깥이 없으니 안에서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사회는 이제 안으로, 미시적인 수준으로 봐야 한다. 그 안에서 투쟁의 울림소리를, 전쟁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던 푸코가 돌연 ‘생명 정치’라는 걸 발견하는 순간이 온다. 그건 그가 인종주의와 마주한 순간에 찾아온 개념으로, 인종주의-국가의 연결이 일어난 시에이예스의 ‘나시온(민족) 투쟁의 국가화’가 연관되어 있다. 홉스 비판에서 인종주의까지 연결되는 건 당연한 절차인 듯하다. 사회가 전쟁인데, 그 전쟁이 실제 어떤 판도로 일어나고 있는가를 고찰한 거니까. 그런데 이 ‘생명 권력’이라는 것이 묘하다. 규율 권력처럼 신체에 관여하여 훈련시키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큰 규모를 상대하기 때문이다. 바로 인구이다. 이 생물학적 집단에 관여하는 생명 권력은 폭주할 수도 있다. 원자 폭탄의 사례, 유전자 조작과 바이러스 생산의 사례. 이 권력은 대체 누굴 ‘죽일 수’ 있는가? 바로 인종주의가 여기 개입한다. 이어 나치스가 나오는 건 불 보듯 뻔하다. 전면적인 죽음으로 가는 국가. 자살 국가. 르장드르도 이런 국가는 없어야 한다고 했다.


    궁금하다. 과연 저 두 권력의 교차점에는 뭐가 있을까? 바로 성(性)이다. 신체와 인구의 교차점이지 않은가. 바로 이 성이 규격화 권력의 대상이요, 항상 감시 받는 대상. 성은 억압받지 않는다. 주권권력과 관계가 없으니까. 그리고 성 담론이 활성화되는 역사적 사례가 소개된다. 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진리 말하기’가 되는 현상까지도. 여기서 푸코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건 “권력의 법적·부정적 표상과 결별”(621쪽)하자는 것이다. 그건 네거티브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푸코는 흔들려 있다. 주권권력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주권=법 권리>를 논하며 나치스를 비판하던 그 모습은?


    푸코가 ‘통치성’이라는 것에 주목한 1978년 2월과 그 이전의 푸코는 분명 다르다. 통치성은 주권권력, 규율권력, 생명권력에 이르는, 그가 영토-신체-인구로 나눠 서로 다르다고 했던 세 시기에 고루 들어 있다. 통치술이 문제가 된다. 모든 시기가 그랬던 것이다. 주권과 영토를 중심에 둔 그리스의 신은 이제 그리스도교 사목의 ‘목인’이 되어 16~18세기 통치술의 출현 배경이 된다. “모든 양을 위해 일부 양을 희생하는 사목”(653~654쪽)인 국가이성이 있고, 또 하나로는 사법·군대·외교 이외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폴리스가 있다. (여기서의 폴리스는 아직 police, 경찰이 아니다.) 이윽고 출현하는 자유. 경제학, 자유주의, 자유의 출현으로 통치는 이제 자연에, 아니 경제에 철저하게 준거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 ‘자유주의’라는 새로운 통치성은 ‘작은 국가’를 표방한다. 국가가 손대지 못하는 대상을 지정하는 것이다. 이제 진리는 사법의 권한이 아니다. 시장에서 형성되니까. 진리는 가격이니까. 그런데 이런 자유주의도 실은 조작이다. 우리도 그건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짐작은 하고 있었다. 자유가 우리를 옭아매는 저 단어의 ‘역겨운’ 역설 말이다. 자유는 만들어진 것이다. 세큐리티 시스템이란 바로 그걸 효율적으로 만드는 장치다. 그것은 일상의 위험을 언급하여 우리를 규율적 생명장치인 자유의 안에 가두는 한편으로는 위험을 감수하고 “자, 어서 시장으로 나와라.”라고 설득한다. 자유의 생산은 통제의 생산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다름 아닌 시장의 가능성을, 그 힘을 확고하게 만드는 장치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이것 밖에 없다. 과연 시장에게 국가나 사회를 만들 만한 강력한 힘이 있는가? 구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시장의 교환 기능은 이제 필요 없어졌다. 교환은 다 하니까. 신자유주의에서 시장은 그것보다는 경쟁의 장소가 된다. 가치냐, 균형이냐 하는 것 따윈 버려둔다는 것이다. 우리도 알지 않은가? 경쟁과 독점, 그 특권적 형식이 뒤범벅되어 있어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때론 그 성공의 신화를 우러러보게 만드는 이 시대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민영화의 폐해를. 우린 그 위험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직면할 수밖에 없다. 왜? 자유가 이미 강제됐으니까. 창업가의 사회다. 벤처. 그렇다. 여긴 벤처의 사회다. 용감히 도전하라. (그 뒤는 알아서 하라.) 이건 통치술의 효과다. 사회가 자연스럽게 이렇게 됐다고? 픽션일 뿐인데. 저자는 푸코의 입을 빌려 헛소리는 집어치우라고 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그것은 픽션이기에 전복될 수 있다.


    규율적 생명정치. 실은 이것은 르장드르가 말한 의례 역사의 한 판본에 불과했다. 유럽의 판본. 푸코도 이를 깨닫고는 규율적 생명정치가 “거의 다 종교적 의례를 그 기원으로 한다.”(699쪽)고 수정했다. 이제 푸코는 새로운 권력이 나와 낡은 권력을 소멸시킨다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 여러 통치술이, 여러 장비가 마련된 역사의 도박장을 그린다. 그리고 이란혁명 때 시아파를 지지한 까닭에, 그 믿었던 이란이 끔찍한 사형을 연이어 실시한 까닭에 푸코는 엄청난 비난을 받지만 이미 깨달은 뒤였다. 낡은 것은 없다. 이슬람의 혁명적 힘을 가능케 한 그 종교의 빛이 정치무대에서는 사라져버림을.


    여기까지 온 푸코가 향한 곳은 저 먼 그리스였다. 사목 권력도 안 되더라는 것이다. 제한 없는 복종을 강제하던 그 통치와는 다른 통치가 필요했던 까닭일까. 푸코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중시한 그리스·로마의 통치에서 철학과 영성이 서로 얽혀 있는 모습을 보고 잠시 고무되었던 것도 같다. 여기서 생존의 기법, 자기에의 배려, 자기도야=문화=숭배, 이런 말들이 나오며 사회적 실천과 국가 통치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곧 폐지한다. 그런 고대의 문화도 실은 트렌드였으며 처세술이었음을 지적하면서. 저항과 혁명을 그것이 보증하던가? 그게 매니지먼트 문학과 뭐가 다른가? 자기계발이니, 정신세계이니. 이제 푸코에게 남은 유일한 문제는 소격을 유지시키는 몽타주의 여부다. 그 장치가 있어야 원리주의가 아닐 수 있다. 르장드르와 벤슬라마가 다시 소환되며, 원리주의-종교의 명확한 구분 가능성이 언급된다.




*   *   *




    괄호와 결론과 보론. 『야전과 영원』의 후미를 이루는 이 세 개의 장에서 나는 다소 난잡한 형상을 목격했다. 지금도 그 광경 탓에 떨리는 마음을, 가누지 못할 것 같은 심정을 강제로 달래는 중이다. 이렇게 글로 쓰면서. 괄호는 들뢰즈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범한 실수와 이를 『천 개의 고원』의 서문에서 시인하는, 즉 그 무엇도 끝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모습이 묘사된다. 동요하는 자본주의에서 혁명이 가능하다고 제시된 그 분열병적인 미래주의, 혁명 프로그램은 실은 불가능했던 것임을. 오직 투쟁은 라캉의 ‘여성의 향락’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결론에서 다시 소환된 들뢰즈로부터 우리는 언표-가시성의 분리와 그 둘의 강제적인 조우를, 역사상의 우발적 형성과정을 듣게 된다. 이건 르장드르가 앞서 말했던 텍스트와 다르지 않다. 제 3자와 같다. 다이어그램, 기계, 장치, 몽타주 등으로 불리지만 가시성-언표의 이 관계는 잡다한 문맥에서, 잡다한 다이어그램에서 마구잡이로 (하지만 대단히 세심하게 고안된 계획에 따라 치밀하게) 가져와 섞어 구축되는 새 다이어그램의 정착을 보여준다. 그것이 소멸한다고? 다시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그것은 옆으로 날아간다.”(767쪽) 이 표현이 딱 적절하다. 이미 존재했던 건물(가시성)이 범죄행위에 대한 언표와 조합되어 감옥이 되는 것은 ‘감옥 만들기’ 다이어그램에만 속하는 과정이 아니니까.


    저자는 이렇게 멀게 돌아온 이유를 여기서 말한다. 푸코와 르장드르와 들뢰즈와, 이 셋과 라캉의 물고 물린 비판의 구도는 “그들을 모두 불러 모아 한 식탁을 준비하기 위해”(770쪽)서였다고 말한다. 무슨 식탁? 내부에서 내부를 만들어내는 <바깥>의 식탁. 창조라는 도박의 행위. 다이어그램의 새로운 고안. 아니, 그것보다는, 나는 이 표현이 참으로 마음에 드는데, <밤>의 한복판에서 추는 텍스트와의 열광적인 춤 무대, 그 영원한 야전. 라캉을 빌리자면 바로 ‘여성의 향락’의 식탁. 소격의 진리를 견지한 자들이 펼치는 무한의 도박장. 그 역사를 본 것이다.




*   *   *




    그렇다면 과연 그 도박판에 뛰어든 사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이것저것 가져다가 새 다이어그램을 만들고는 “새 시대가 열렸다!”라고 선언하는 식으로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에 한해서 말하자면, 돈만 있으면 될 것이다. 사실 그 이상을 생각하는 건 어렵다. 하지만 푸코가 본 이상적인 도박 참가자는 따로 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디오게네스를 가로지르는 사유에서 그가 건진 것은 견유학파다. 형이상학, 즉 다른 세계의 문제를 탐구하는 정신이 있다. 다른 하나는 ‘생존의 문체론’으로, 이는 삶의 다채로움을, 다른 삶의 문제를 본다. 들뢰즈를 봤으니 하는 말인데, 이는 가시성과 언표의 문제이니 서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견유학파는 이 둘을 동물성=단련으로 연결시켜버린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푸코가 ‘초역사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까지 이 견유학파를 들여다봤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전회였을까. 초역사적 견유학파. 어느 시대에나 있다는 그 개들. “진리를 난폭하게, 폭력적으로, 파렴치하게 표명하는 삶의 양태에 관한 사상”(796쪽)인 그것이 우릴 다른 삶으로 이끈다. 이 집요한 개들이. 저항의 초역사성이. 타자의 감시와 자기의 감시가 같은 개의 삶이, 반항하는 주권자인 개의 감시를 통해서 우리는 저 도박판에서 씻겨 나갈 뻔한, 수도 없이 그럴 뻔 했던 소격의 진리를 수호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주석과 후기를 끝으로 책을 덮었다.


    이건 무엇일까?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문자들을 타이핑하며, 그저 마음을 좀 달래보겠다는 심산으로 서문과 본문과 이 맺음말 사이의 하루 이틀 간격의 서어를 반복하면서, 인정하긴 싫은 마음이긴 하나 도박을 해온 것이란 말일까? 그렇다. 나는 다이어그램을 만들 줄 모른다. 뭘 내걸어야 상대와 승패가 걸린 역사의 한복판에서 서있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럴 가능성이 있다면’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느끼는 안심에 대해 굳이 변론해야겠다. 『야전과 영원』으로 갖게 된 새로운 눈에 대해서 말이다. 아마 읽은 이들이 여기까지 나의 진흙탕길[泥路]을 따라와 줬다면, ‘무슨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는가?’라는 들리지 않는 질문에 나처럼 대답할 마음이 있지 않을까? 개처럼 살겠다고. 집요한 개로 <밤>을 살면서 텍스트와 영원한 <춤>을 추겠다고. 언젠가 이 말을 이해하게 될 날이 오겠다는 심산으로, 아직 나는 어리다며 유보해본다. 나는 대체 어디로 초대된 것일까.





p.s 몇 가지 오타로 보이는 것이 있어 지적한다. ① 인명 표기의 오류다. Emmanuel Joseph Sieyès의 음역이 두 개로 나뉘어 있다. '시에예스가' 579쪽에 나오고, 586쪽에는 '시에이예스'라고 되어 있다. 서로 다른 인명의 병기는 혼란을 줄 수 있다. 물론 시에예스든 시에이예스든 이 책에서는 딱 한 번만 짧게 나오지만. ② 집단명 표기의 아쉬움이 하나 있다. 보통 우리는 '수니파'라고 한다. sunnah에서 연원한다면 '수나파(703쪽)'라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그래도 집단명은 보통 'sunni'라고 한다. 더 엄밀히 표기하자면 '수니파'보다는 '수니 이슬람'이라고 밝혀주는 것이 더 좋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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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인문/과학/사회 신간 추천
















① <이슬람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 아얀 히르시 알리 / 추선영 옮김 / 알마


  맞으면 아프긴 하지만 통증, 멍, 상처, 장애 등 우리의 신체를 결정해버린 징표들보다 훨씬 오래 가는 것은 맞아서 '아픈 것'이 아니라, '맞아서' 아픈 것이다. 아픔은 맞음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현상이지만, 나는 왜 맞은 것일까? 왜 누군가가 나를 때렸던 것일까? 때릴 수 있었던 그 환경(체제, 제도 따위)과 내가 맞을 수밖에 없었던 환경(약자, 소수 등)은 결국 하나다. 분리될 수 없는 이 폭력의 전체성이 만연한 사회는 젠더전통, 근본주의 종교, 혹은 전쟁, 경제위기 등 특수 상황을 전면에 내세워 모든 폭력적 상황을 정당화시킨다. 아얀 히르시 알리의 책 번역 제목에는 두 개의 방점이 있다. 이슬람과 여자. 이슬람교와 아랍이 최근 IS 사태로 상당히 왜곡되고 있는 분위기가 안타깝긴 하지만 이 종교적 전통이 여자의 '참여적 태도'를 억압해왔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미국과 네덜란드 국적을 얻어가면서 이슬람에게서 분리된 이 정치인의 목소리는 그런 전통 속에서 희생된 여성 가치의, 아니 인간 가치의 존엄을 날카롭게 관통한다. 국내에 소개된 아얀 히르시 알리의 두 번째 책이며, 앞선 책의 번역을 맡은 추선영 씨가 또 한 번 귀중한 수고를 해주셨다.




















② <쌤통의 심리학> - 리처드 H. 스미스 / 이영아 옮김 / 현암사


  순전히 흥미로울 것 같아 고른 책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건 사실이다. 나는 다른 사람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운 적이 있었다. 물론 죽을 정도로 고통 받는 누군가를 본 적은 없고, 아마 그런 모습을 본다면 비위 약한 내 내장기관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적당한 고통(?)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다수가 공감할 것이다. 저 정도의 고통, 그것이 신체적이든 처지에서 비롯된 정신적인 것이든, 그만한 고통이라면 얼마든지 즐겁게 봐줄 수가 있다. 어두운 내면이다. 부인하지 않는다. 창 틈으로 이 사회의 쇼윈도우 안에 있는 누군가의 고통이 나에게는 쾌락을 준다. 고통은 때론 전시되는 것 같다. 관음증적 변태 환자다. 왜 나는 이런 걸까? 학습된 것일까? 타고난 것일까? 여러 분야에 걸쳐 대답이 나오겠지만 이건 분명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다. 찜찜하다. 그렇다고 나의 쌤통 심리를 정당화할 계획은 없다. 책에서는 정상이라고 말한다고 이미 스포일러가 떴지만. 일단은 되도록 줄여봐야지, 생각하는데 모르겠다. 우선 읽어봐야 할 것 같다.





















③ <모든 것의 역사> - 켄 웰버 / 조효남 옮김 / 김영사


  사실 이 책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책이다. 30대에 막 접어든 나에게 정신의 영역은 피상적인 관심과 이따금 발동하는 '멋부리기' 모드로 들여다볼 수 없는 세계임이 명확해졌다. 반성하는 중이다. 세상은 더 어려워졌고, 깊게 들어가려던 예전의 거만한 시도들은 봉쇄시켰다. 나를 둘러싼 정신 사이에서 운신을 줄이는 대신 주변을 둘러본다. 최근 애니메이션으로 개봉해 다시 항간에 회자되고 있는 생떽쥐뻬리의 <어린 왕자>에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바로 비밀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건 헤어짐과 죽음 등으로 필히 작별을 경험하게 되는 우리에게 위안을 주려는 말이지만, 실은 인간 정신의 정수를 보여준 종교와 철학의 대가들이 한 목소리로 던진 맑은 조언이기도 하다. 나 같은 사람들은 그런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켄 웰버를 알게 된 건 길희성 씨 덕분이다. 신비사상가라는 점에서 그를 주목하진 않는다. 나는 그가 '범우주적 시선'을 갖고 있다는 것에 매료됐다. 과연 그러할 지는 읽어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구분 없이 펼쳐져 있는 이 우주 같은 시선과 그 두 눈에서 쏟아져 나올 사상적 정수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12월의 추천 신간을 쓴다고 새해 벽두부터 느릿느릿 찾아본 수많은 책들 중 오랜 시간 붙잡고 모니터 옆에 꽂아두고 싶은 유일한 책이다. 2016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④ <역사교과서 국정화, 왜 문제인가> - 김한종 / 책과함께


  그래도 짚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과서 문제에, 아니 교육 문제에 정치권이 개입해 거국적 좌우 싸움을 벌이고, 안 그래도 선거구 확정 문제 등 다른 정치권 이슈들 때문에 도무지 아물어지지 않는 상처가 이미 오래 됐는데, 나는 뉴스를 볼 때마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위안부 관련 문제도 그렇고 연말에 참으로 속 거북한 소식만 들린다. 송구영신의 기분 뒤로 무겁게 깔리는 구름 같은 걸 걷어낼 수가 없었다. 교육 문제가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정치권은 늘 그랬듯이 그걸 가지고 싸움을 하지만 지금처럼 우리의 '생각' 자유의 문제가 정치적 카드에 든, 마치 만화 <포켓몬스터>에 나오는 카드들 속 귀여운 몬스터들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서로 공방했던 적이 있었나 싶다. 아니, 차라리 만화의 몬스터들은 귀엽기라도 했지. 그리고 또 하나 기가 막힌 건 교육의 현장에 있지 않은 이들이 왜 역사 교육이 좌우 편향을 나눠버린다고 예단하고 '피치 못할 결정'을 내리는 분위기를 조성한 뒤 그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시켰냐는 거다. 혹시 어린 학생들이 하나의 팩트로부터 다양한 해석을 내리지 못할 거라는, 혹 그들이 하나의 해석만을 습관적으로 외워 나중에 '그런 어른'이 되어버릴 거라고 지레짐작한 것일까? 만약 그런 거였다면 나는 이만한 국가적 실패도 없을 거라 확언한다. 왜 문제일까? 누가 모르나?





















⑤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 리사 랜들 / 이강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우주/과학 분야를 읽다 보면 정신의 분야를 들여다보는 착각을 한다. 모르는 것이 참 많다. 내가 모르는 것도 많은데, 나보다 훨씬 잘 아는 사람들조차 모르는 것이 많다. 생각하지 못한 것도 있고, 확인하지 못한 것도 있다. 그러니 '우주'라는 단어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도 불가능하다. 전문용어, 영단어, 기호, 수학 등, 왜 하필 이런 것들에 그리도 취약할까 싶은데, 지금의 내가 범접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그 세계를 설명하는 기본 요소들인데도 나는 우주를 좋아한다.


  최근에는 새벽에 아파트 사이로 높이 떴다가 시계로 치면 1시에서 2시 사이의 방향으로 지나가버리는 (대략 3시간 정도 걸리는데) 목성 보는 재미가 있다. 저기까지의 거리가 얼마일까? 검색해보면 나오겠지만 그 수를 내가 이해할 방법은 없다. 작정하고 뛰어본 거리로는 10km가 최고고, 근래 맛 들린 자전거로는 42km가 최고였다. 그런데 수 억 km면... 저 행성을 작은 점으로라도 볼 수 있다는 고마운 마음이 '과학적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눈이 된다. 나는 과학을 그런 눈으로 읽는다.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작아지고, 안으로 들어가고, 일치와 분리, 재결합을 느낀다. 리사 랜들은 유명한 과학자다. 너무 유명해서 굳이 유명하다고 하지 않아도 알 사람들은 다 안다. 미치오 카쿠, (故) 칼 세이건, 리처드 도킨스 등 과학 분야의 최전선에 서있는 전투적이면서도 사려 깊은 과학자이다. 쉽게 쓴 책이라고는 하지만 일반 독자들에게는 쉽지 않은 내용임을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제목을 보라. Knocking on Heaven’s Door. 과학의 시선으로 우리가 들여다보는 건 그다지 딱딱하지 않다. 우주-인간의 관계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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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철학의 역사 - 위대한 전술과 인물들, 개정증보판
조나단 윌슨 지음, 하승연 옮김 / 리북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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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3



    소심한 사춘기 소년이던 내가 학년을 거듭할수록 또래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있었고 군대에서도 금방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축구 덕분이었다. 축구는 내게 ‘조직 속의 역할’이라는 것을 직접 체득하게 해줬다. 개인기와 스피드로 상대방을 압도하는 것만 숭배하던 어린 나에게 팀을 위해 일정부분 희생하는 법과 팀에 녹아들기 위해 끊임없이 마음 쓰는 법을 알려줬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그리고 알면 알수록 축구는 어려워졌다. 신체와 본능을 믿는 직감적 축구에서 타인을 믿는 보다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면 이제 그 타인들과 어떻게 움직이느냐하는 문제에 부딪힌다. 그래서 축구는 전술로 완성된다. 축구팬들은 금요일 밤만 되면 ‘치맥’을 시켜놓고 느긋하게 자신의 팀을 응원하지만 필드에서는 두뇌와 육체의 전쟁이 펼쳐진다.


    대체로 그런 듯하다. 아는 만큼 보이게 된다. 지질학자들은 등산을 할 때 대다수의 산객들이 지나치는 암반의 표면을 보면서 근처 지역의 나이를 들여다보게 된다. 별자리를 아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밤하늘에서 더 많은 것을 본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수많은 책들이 연결되어 있는 거미줄 같은 책의 세계가 마음속에 그려진다. 만약 누군가가 “축구에 대해 아는 만큼 볼 수 있으려면 뭘 먼저 알아야 하죠?”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축구전문가들은 전술을 조금 공부해보라고 권할 것이다. 화려한 플레이와 웅장한 사운드가 TV 모니터에서 반복적으로 나올 때마다 우리의 눈은 그러한 것들에 홀리기 마련이지만 축구는 기본적으로 ‘누구를 어디에 배치시켜 어떤 지역에서 어떻게 움직이게 하느냐’의 싸움이다. 이 싸움은 축구가 제도적으로 정착된 이래 거의 140여 년 가까이 이어져왔다. 실패에서부터 일보 전진하는 우리의 삶과도 닮았다. 또한 축구의 지략가들은 전술을 예술, 과학, 문화 등과 같은 경지로 이끌었다. 축구를 제대로 보려면 그걸 알아야 한다.


    8~90년대 독일과 이탈리아 축구에 관심을 가졌던 지금의 4~50대 우리나라 해외축구팬들은 사실 소수였다. 유럽 축구를 중계해주는 다양한 채널도 없던 그 시절에 그들이 해외잡지와 별로 양도 많지 않던 소식통으로 바다 건너의 선진 축구에 관심을 가졌던 건 정말 대단한 열정이 아니면 할 수 없던 일이었다. 그런 것에 비하면 나와 같은 2~30대 해외축구팬들은 정말 복 받았다. 남아 있는 영상과 축구계 인사들의 증언을 통해 차붐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을뿐더러, 우리는 박지성, 이청용, 기성용, 손흥민, 그리고 이승우로 이어지는 한국 축구의 아이콘들을 직접 TV와 경기장에서 목격할 수 있다.


    선진축구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시대보다 높다. 그런 이 시대의 축구팬들, 그리고 축구를 좀 더 알아보고 싶은 일반인들에게는 그에 걸맞은 적절한 안내서가 필요하다. 딱딱한 전술 이야기와 훈련법에 대한, 너무 전문적인 것 같은 인상을 풍기는 그런 책 말고, 소설처럼 지루하지 않은 책. 조나단 윌슨의 <축구철학의 역사(원제 : Inversting the Pyramid)>가 딱 적격이다. 옮긴이 하승연 씨는 ‘축구오덕’이다. 대단한 열정을 갖고 번역했다. 두꺼운 책인데다 조나단이 예로 든 수많은 축구 일화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당연 생소할 수밖에 없는데, 술술 읽히도록 완역해냈다는 점이 읽는 내내 가슴 뜨거워지게 했다. 같은 ‘축구 유전자’를 공유하는 한 사람으로서 말이다. 이 책은 축구가 드리블 위주의 초보적 단계에 지나지 않았던 19세기 후반부터 시작해 최근 전 세계 축구 감독들에게 과제처럼 내려진 “바르셀로나 이기기”와 그것을 성취한 “바이에른 뮌헨 이기기”의 판도까지 훑어나간다. 열정으로 쓴 책이고 열정으로 번역된 것이니, 나 역시 모르는 것들을 하나둘 검색해가며 그림 그리고 메모하는 열정으로 읽었다. 완독한 이라면 그 누구든 축구경기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조나단의 책은 축구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명저다.




*    *    *




    말했던 것처럼 초기의 축구는 지금 보면 거의 엉망진창인 수준이었다. 아니, 비꽈서 말하자면 ‘영국적’이었다. 패스나 수비, 조직력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드리블 잘 하는 사람이 있으면 끝이었고, 행여나 공이 멀리 가버리면 골키퍼까지 뛰어가서 공을 잡으려고 아등바등했다. 놀랍게도 골키퍼가 공을 잡는 걸 페널티지역 안으로 규정한 건 1912년의 일이다. 그러니 축구가 제도적으로 도입되고 약 3~40년 동안 경기장의 광경이 어땠을지 상상하면, 축구규칙을 잘 모르는 여자연예인이 예능프로의 축구경기에서 핸드볼을 해놓고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마냥 웃으며 바라볼 것만도 아니다. 그러던 축구가 어떻게 지금처럼 기술과 전술, 체력과 열정의 치열한 전쟁터로 변한 것일까. 조나단은 그 과정을 이따금 유머를 써가며 장대하게 펼쳐놓았다.


    “축구의 사라지지 않을 매력 중 하나는 축구가 하나의 통일된 유기적 게임으로서 경기장의 한 부분에 조그만 변화가 생겨도 다른 곳에서 예상치 못한 심대한 결과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조나단 윌슨, <축구철학의 역사> 74쪽)


    볼을 그냥 앞으로 내지르는 것(흔히 말하는 ‘똥볼’을 차는 것)과 볼을 앞으로 내지르되 그걸 우리 편이 계속 소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개념 자체가 다르다. 전자는 걷어내는 것이므로 볼 소유를 상대팀에게 넘겨줘서 우리 팀이 계속 수비의 부담을 안게 하는 최악의 수다. 후자는 그 반대다. 하지만 과격한 신체 운동의 남성성을 미덕으로 삼던 영국 사람들은 좀처럼 패스앤드무브(짧은 패스 위주의 점유율 축구)를 할 줄 몰랐다. 할 수는 있었지만 그게 뭐가 멋있냐고 생각했다. 이런 축구가 지금의 형태에 아주 조금이나마 근접할 수 있었던 건 추상적 개념으로 축구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운동에 무슨 추상이냐고 묻겠지만 그게 엄연한 사실이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움직이는가? 얼마나 아름답게 움직이는가? 영국이 전 세계에 축구를 퍼뜨렸지만 그걸 받은 남미 사람들은 ‘길거리’라는 한정된 작은 공간에서 축구를 하며 어쩔 수 없이 개인기술들을 연마했고, 그게 필드에 나왔을 때는 일대의 파장이 일어났다. 지금은 흔하지만 당시는 충격적이었던 다이빙 헤딩, 힐패스, 바이시클킥 같은 건 모두 Made In Latin America이다. 노동자들로 구성된 우루과이 올림픽 대표팀이 1924년 파리로 가서 기술축구를 선보이자 유럽은 난리가 났었다.


    하지만 그게 유럽에 곧장 이식된 건 아니었다. 때가 때였는지라 파시즘 속에서 유럽 열강을 자처하는 나라들은 폭력적 축구를 미덕으로 여겨 상대팀 선수들을 부상 입히곤 했다. 그 시대의 이탈리아와 스페인 축구는 악명 높았다. 정도가 심해 그들을 일컬어 ‘라 푸리아(분노)’라 불렀다. 파시즘은 그걸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미화했다. 1950년대 전 세계를 주름 잡았던 헝가리가 그런 축구에 대한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기라도 하듯 완벽에 가까운 기록을 세워갔지만 오랜 성공 가도 속에 안일해져 이후 축구는 삼바, 혹은 카포에이라를 접목시킨 것처럼 화려한 기술축구의 천재들로 구성된 브라질에게 그 주도권이 넘어갔다.


    브라질의 축구 열정은 우리가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보여줬던 것 이상이다. 우리의 열정도 대단하긴 했지만 사실 브라질 사람들에게는 축구가 곧 삶이다. 우리도 일본을 원정에서 꺾으면 ‘대첩(大捷)’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국가적 승리까지 그 의미를 끌어올리지만, 브라질은 대표팀이 지기라도 하면 팬들이 자살을 하거나 선수들이 살해 위협을 받는다. 종교적 수준까지 올라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우루과이에게 밀려 준우승을 차지했을 때 그들은 공화국 건립 이후 브라질이 겪은 가장 큰 참사라며 대성통곡했다. 당시 결승전이 열린 브라질 축구의 심장 마라카낭(Maracanã)에는 (공식적인 FIFA의 기록은 173,850명이지만) 20여 만 명의 관중이 들어차 있었다. 브라질이 기억하기 싫은 순간이긴 하겠지만 그 시절에 축구에는 처음으로 ‘공격형 풀백’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측면 수비를 보다가 공격 시에는 전방까지 쭉 전진하는 이 특이한 개념은 이후 전술 변화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UFO슛으로 유명했던 호베르투 카를로스, AC 밀란의 전설로 얼마 전 자선경기에서 박지성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한 카푸, 현재 레알 마드리드의 핵심선수 중 한 명인 마르셀루 등이 이 개념을 충실히 이행한 역사적 선수들이다.


    이렇게 세계는 변화하는데 영국은 무슨 고집을 그렇게나 부렸느냐, 이게 조나단의 기본 입장이다. 비판조로 쓰인 부분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영국 나름대로 보수적 시스템 내에서 새로운 응용전술을 내놓긴 했다. 최전방에 다섯 명을 배치한 2-3-5 포메이션에서 한 단계 나아간 W-M 포메이션 중 영국 나름의 방식으로 진화한 사례들이 몇 있었다. 스코틀랜드 리그에서 3개 구단을 돌며 모두 리그 우승을 차지한, 스코틀랜드 축구의 오래된 영웅인 고든 스미스의 히베르니안, 박지성 팬들에게는 익히 알려졌을 전설 보비 찰튼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그리고 현재 손흥민이 뛰고 있는 토트넘 핫스퍼의 옛 시절이 일례들이다. 이때부터 영국도 패스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공간은 어떻게 창출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공간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우리가 보면 그때의 축구는 너무 느리다. 나도 가끔 Youtube에 들어가 전설들의 활약을 검색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이런 도발적인 생각이 났다. ‘저렇게 공간을 내주면 나라도 들어가서 패스하고 슛하겠다.’ 과거 축구의 전설적인 인물들이 과연 오늘날 숨 쉴 틈조차 없는 압박축구의 전쟁터에서 멀쩡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만큼 현대축구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 속에서 현실에 적응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금의 우리가 본격적으로 (이 책에서) 들여다봐야 하는 건 축구와 압박이 접목된 토탈풋볼(totaalvoetbal)의 시대부터다. 물론 1930년대에 스위스 축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오스트리아 출신의 카를 라판이 ‘베로우(verrou, 빗장)’ 시스템을 선보인 적도 있었고, 1940년대에도 소련 리그에서 시도된 적이 있지만 압박이 중시되기 시작한 건 지금으로 봐도 꽤 최근의 일이다.


    이런 말이 있다. ‘골을 넣으면 경기를 이기지만 골을 먹지 않으면 우승한다.’ 현대축구에서 수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명언이다. 이것이 명제이므로 축구를 연구하는 이들의 과제는 그 반대가 된다. 골을 넣으면서 우승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래서 최전방 공격수부터 상대팀을 압박하는 ‘전방압박’이 요구되었다. 상대팀 공격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오프사이드 라인 자체를 끌어올리고, 공격과 수비의 간격을 최소한으로 줄인다. 말은 쉬워 보이지만 실은 무시무시한 전술이다. 체력이 뒷받침되어줘야 한다. 그래서 스포츠 과학과 영양학의 발달이 축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들 말하는 것이다. 만약 저 말대로 아마추어 동호회 축구인들이 경기를 하면, 체력이 비교적 좋다는 가정 하에 말하건대 골키퍼를 제외한 선수 전원이 10분 내에 토를 하면서 쓰러질 수도 있다. 그런 축구를 네덜란드에서 해냈고, 그 중심에는 지금도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 중 한 명으로 회자되는 요한 크루이프가 있었다. 1970년대 초에는 쉴 새 없는 로테이션으로 상대팀을 압박하고 상대팀 진영에서 재차 공격을 시작하는 토탈풋볼의 네덜란드가 세계를 제패했다.


    그에 비해 브라질의 ‘아트풋볼’은 좀 특이하다. 이건 아마추어들이 따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단히 특출 난 선수가 있다면 말이다. 펠레, 제르송, 토스탕, 호베르투 히벨리누 등 오늘날 브라질 사람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라고 말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 열변을 토해낼 그 역사적 영웅들은 축구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천재들이었다. 그래서 브라질은 그들에게 “알아서 뛰어라.”라는 지시를 내리고는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이를 두고 ‘아름다운 플레이’라는 뜻의 조구 보니투(jogo bonito)라는 말이 태어났다. 이런 경우는 현대축구에서 두 번 다시는 없었다. 압박이 강박적으로 강조되면서 앞서 말한 천재들의 단독 플레이, 심지어는 유기적 플레이마저 허락하지 않으려고 했다. 우리가 그렇게 플레이하지 못할 바에야 상대팀 천재들을 필드에서 죽이면 되는 거였다.


    축구의 역사는 각 시대별로 정점에 올라가 있다고 평가받는 구단이나 국가의 축구를 어떻게 극복해낼 것인가를 고뇌하는 역사다. 그리고 전혀 재미없는 축구를 하면서도 이 과제를 성실히 수행해 놀라운 신화를 만들어낸 나라들이 심심찮게 나오곤 한다. 1998년 월드컵 조별예선에서 브라질을 꺾은 노르웨이가 대표적인 예다. 노르웨이의 상징 격인 에길 올센 감독은 193cm나 되는 플로(Tore André Flo)의 헤딩을 믿고 전방으로 롱볼을 계속 투입하게 했다. 브라질은 말도 안 되는 높이로 계속 대포를 날리는 노르웨이를 제대로 상대하지 못했고, 카푸, 로베르토 카를로스, 둥가, 히바우두, 호나우두, 베베투 등 최강의 라인업으로 상대했지만 1-2로 패하고 말았다. 축구 전문가들은 충격에 빠졌다. 비슷한 예로 그다지 강하지도 않았던 그리스가 EURO 2004 우승국이 된 적도 있다. 이가 없으면, 축구에서는 잇몸으로도 상대팀을 충분히 물고 늘어질 수 있었다. 전술에 대한 고뇌, 즉 필드의 철학 때문에 가능한 기적들은 엄연히 존재한다.


    압박이 강조되고 상대팀의 천재적인 선수들, 주로 ‘10’이라는 번호로 상징되는 이들을 막기 위해 현대축구는 자연스레 수비를 강화하는 진일보를 택했다. 아니, ‘진일보’라는 표현을 쓰면 오히려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축구전술의 대가들 중에는 아름다운 축구는 1980년대 이후 끝났다고 선언하는 이들이 많다. 심미주의와 낭만주의의 몰락. 더 이상 축구는 신비롭지가 않다. 아름다운 축구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며 지금도 여러 칼럼과 인터뷰에서 현대축구를 비판하는 요한 크루이프는 축구가 윙어를 윙백으로 내리면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주장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쉽게 말해 수비 일변도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창의력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사실 창의력이 떨어진 건 아니다. 축구천재들은 계속 나오고 있다. 크루이프가 비판하는 건 그들이 활동할 실질적인 공간이 필드에서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결과 위주의 축구가 축구의 미를 죽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1990년대에 들어서서 FIFA는 좀처럼 골이 시원시원하게 터지지 않는, 그래서 재미없어지는 축구 때문에 고민을 해야 했다. 고민 끝에 수비와 관련된 규정들을 더 엄격하게 만들었다. 백태클을 금지한 것이 바로 이때다. 이러한 규정들에도 불구하고 현대축구에서 살아남아 우승하는 팀은 대체로 수비가 강력한 팀이었다. 아리고 사키의 AC 밀란은 전설이다. 수비와 공격 사이의 공간을 무려 25m까지 줄여버린 이 말도 안 되는 전술은 코스타쿠르타, 바레시, 말디니, 레이카르트, 안첼로티, 도나도니, 굴리트, 반 바스텐 등 최강 라인업을 통해 실제로 구현됐다. 이탈리아 리그는 그래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유럽 최고였다.


    축구에서 이제 ‘아트’는 죽었다.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으로, 재미없는 축구를 한다고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는 루이스 판 할 감독은 90년대 네덜란드 아약스의 부활을 외치면서 옛 요한 크루이프 시대의 토탈풋볼을 가져와 현대식으로 개량한 인물이었다. 재밌는 건, 당시에도 재미없다고 비난을 받았다는 거다. 하지만 규율과 의사소통, 팀 빌딩의 삼위일체를 중시하는 판 할 감독의 강점은 수비에 있었다. 최전방 스트라이커에게 골 넣는 것 이외의 일을 시키면서 거의 전 포지션의 선수가 만능의 역할의 소화했다. 팀이 기계처럼 돌아갔다. 더불어 재미는 없어졌다. 지금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비슷하다. 리빌딩 과정에서 구설수에 거의 매일 오르곤 했던 판 할 감독이지만 맨유는 지금 리그 2위다. 그리고 가장 적게 실점한 팀이다.


    유럽에서는 이런 흐름이 이어졌다. 남미는 어떠했을까? 그곳에는 낭만주의가 아직 숨 쉬고 있진 않을까? 라틴인데? 그런 향수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남미도 이상적인 축구의 해답을 기본적으로는 압박에 찾았다. 현재 잘 나간다는 감독들에게는 ‘멘토’와도 같았던 마르셀로 비엘사는 공간을 내주지 않는 축구를 추구했다. 당연히 압박을 중시했으며, 여기에다 세트피스 훈련을 하면서 프리킥과 코너킥 등 정지 상황을 잘 활용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압박을 해서 볼을 빼앗되 공격상황에서는 황소처럼 무섭게 적을 향해 돌진하는 기술적 축구를 덧입히려고 했다. 그는 현대 공격축구의 대명사 같은 인물이다. 그가 이끌던 칠레 대표팀의 경기를 본 국내 축구팬들은 분명 그 칭호에 동의할 것이다. 비엘사는 남미 특유의 즉흥성(repenitizacion)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팀은 무시무시한 공격을 감행했다. 문제는 그 전술을 매 경기 쓰는 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었다는 거다. 그런 걸 ‘만화축구’라 부르곤 한다.


    잠시 축구에도 ‘아트’가 귀환했던 적이 있었다. EURO 2000은 그래서 많은 축구팬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아름다운 대회였다. 프랑스는 지단, 뒤가리, 앙리, 조르카에프를, 네덜란드는 젠덴, 오베르마스, 베르캄프를, 그리고 포르투갈은 피구, 루이 코스타, 주앙 핀투를 보유했었다. 압박의 시대에 숨을 쉰 적이 있는 보헤미안들이다. 그들의 플레이는 지금 봐도 정말 아름답다. 아니, 지금 그들처럼 아름답게 축구하는 톱스타들은 거의 없다. 이들을 ‘마지막 10번’이라 불러도 괜찮을까. 남미도 현대축구에 역행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 상징은 후안 리켈메다. 한 시대 전에 태어났어야 했던 그는 필드의 고독한 시인이었고, 10번을 질식시키는 유럽 축구에는 맞지 않았다. 우루과이의 레코바도 비슷한 선수였다. 이러한 10번을 ‘엔간체’라 부른다. 미드필더와 공격수 사이에서 창의성을 발휘하는, 마라도나 이후 다시 나타난 유형의 선수들이다. 이것이 불가능한 유럽에서는 피를로가 나타났다. 안첼로티 감독은 수비수와 미드필더 사이에 이 천재적인 선수를 배치시켜 팀을 후방에서부터 추진했다. (그런 피를로를 질식시킨 ‘현대축구 압박’의 대명사가 박지성이다. 팬들은 기억할 것이다. 퍼거슨 감독의 지시에 따라 박지성은 피를로를 거의 지워버렸다. 맨유는 피를로를 묶어놓고 승리했다.)


    축구의 천재는 상대팀의 수비와 미드필더 공간 사이에서 탄생하는 듯하다. 메시와 사비, 이니에스타, 메수트 외질, 에당 아자르 등 우리가 봤었고 현재 목격하고 있는 세기의 천재들은 다 그 공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줄 알았다. 현대축구는 ‘안티풋볼’의 오명을 쓰더라도 그들을 막아내려는 유혹을 상대팀 감독들에게 계속 심어준다. 그러다보니 전형적인 10번의 자리가 사라지는 대신 최전방 스트라이커의 위치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골잡이는 골만 넣지 않아도 됐다. ‘공격수’라는 개념은 더욱 세밀하게 나뉘어졌다. 시스템에 녹아 골 이외의 공헌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전방압박, 연계플레이, 수비 시 깊숙이 내려오는 헌신까지. 그렇게 폴스나인(False 9)이 태어났다. (사실 몇몇 정상급 구단이나 국가에나 적용가능한 말이지만) 이제 정통 스트라이커는 없어도 된다. 제공권을 노리는 키 큰 스트라이커도 필요 없다. 최전방에서도 세밀한 연계 플레이를 하며 상대팀 수비진을 농락하면 된다. 이를 4-6-0,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제로톱’이라 불렀다. 이건 가장 최근에 일어난 전술적 변화 중 하나다. 페르난도 토레스라는 걸출한 스트라이커가 갈팡질팡하는 사이 스페인 대표팀은 천재 파브레가스를 최전방으로 올려 세웠다. 그러나 그건 가짜였다. 미드필더의 패스플레이가 상대팀의 문전까지 이어지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면서 나는 제멋대로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저건 축구의 정점이다.’ 물론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이후 지금까지 축구는 바르셀로나와 바이에른 뮌헨으로 나뉘어 있다. ‘티키타카’는 축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한때 유행어처럼 번진 적이 있는 스페인어다. 짧은 패스를 수도 없이 하면서 볼을 계속 소유하는 펩 과르디올라 감독의 바르셀로나는 정말 최고였다. 5초 안에 볼을 되찾지 못하면 바로 수비로 전환된다는 점에서는 판 할 감독의 수비 축구와 비슷했지만 그들에게는 다름 아닌 메시가 있었다. 높은 위치의 압박은 비엘사가 가르쳐준 것이었다. 바르셀로나는 볼을 지배하는 만큼 골도 참 많이 넣었다. 그 어떤 팀도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볼 소유 시간을 늘릴 수가 없었다. 반대발 윙어가 배치되면서 드리블에 이은 패스와 슛 시도가 늘어났고, 메시는 폴스나인으로 뛰었다. 바르셀로나의 미드필더들은 키가 175cm를 넘지 않았다. 그런 왜소한 선수들이 세계 정상이 됐다. 그런데 이걸 바이에른 뮌헨은 ‘직선적 버전’으로 해냈다. 롱볼 플레이와 체격의 우위를 섞었더니 현재 세계 최강의 팀으로 군림했다. 같은 리그의 도르트문트는 그런 뮌헨을 상대하기 위해 최전방에서부터 맞불을 놓는 ‘게겐프레싱’ 전술을 썼고, 이를 도입한 위르겐 클롭 감독은 지금 세상에서 제일 ‘핫한’ 감독이다.




*    *    *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역사의 종말을 외쳤다. 그러나 지금까지 누구의 말도 적중한 적이 없다.” (위의 책, 564쪽)


    꼭 크루이프를 겨냥한 발언 같지만, 사실 크루이프 말고도 옛날의 축구가 죽었다고 외치는 사람들은 많다. 예술에서도 더 이상 그릴 것이 없는 절대주의까지 가자, 러시아의 그 텅 빈 무채색의 그림을 본 서유럽과 미국 예술가들은 “이제 뭘 해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예술의 종말을 외쳤었다. 그러나 예술은 이어지고 있고, 축구도 그렇다. 앞으로 전술이 어떻게 변화하게 될지는 알 수가 없다. 전술의 대가들은 바이에른 뮌헨과 바르셀로나와 같은 최정상 구단의 축구에 대한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조만간 그걸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의 선수들과 함께 필드에서 자신들이 성공했음을 입증할 것이다. 축구는 그런 식으로 변화하며, 또한 현실에 적응하는 거대한 세계다. 그리고 매 시대마다 한 질문 앞에 서게 된다. 효율과 아름다움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축구는 푸른 잔디 위에 펼쳐진 인간사의 집약과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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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1. <난폭한 독서> - 금정연 / 마음산책


    독서에 한창 빠져 있을 때는 그랬다. 남의 서평은 읽고 싶지 않았다. 아이 같은 욕심 탓이었다. 지금 읽는 바로 이 책을 나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물론 문학 강의를 듣거나 비평이론 같은 걸 읽으면서 '다른 눈'이 있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나는 나만의 눈을 갖고 싶었다. 그게 뭔지는 지금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고집은 서서히 사라지더라. 너무 많은 책이,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을 보는 눈이 있다는 걸 알았다. 세상을 알고 싶은 바닥 없는 욕망은 남의 눈을 빌려야 그나마 채워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은 남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몇 권이 집에 있지만 별로 성이 차지 않았던 터에 신간으로 <난폭한 독서>라는 제목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제목이 별로였다. 그런데 '난폭'과 이 책이 담고 있다는 '풍자'의 두 단어가 미묘한 케미스트리를 갖고 있었다. 그 결합 때문에 직감적으로 골랐다. 모르는 책들에 대해서도 좀 알아볼 겸, 사납다는 그 독서의 방식에 대해서도 좀 알아볼 겸.




















2. <말, 바퀴, 언어> - 데이비드 W. 앤서니, 공원국 옮김 / 에코리브르


    반사적으로 <총, 균, 쇠>가 떠오른다. '기마민족'이라는 테마가 매력적이다. 고고학, 언어학, 신화학, 인구학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한 역사서라는 점에서 분명 큰 기대를 갖게 하는 책이다. 국문학을 전공한 까닭에 제목의 '말(馬)'이 '말(語)'로 보이기도 하지만 언어적 뿌리가 같다고 추정되는 유라시아의 오래된 역사를 들여다보는 책이니 그렇게 보아도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미술이론과 역사를 공부하는데, 선사시대 미술을 검색해야 할 때면 Wikipedia나 Stanford Encyclopedia 등에서 고고학, 인류학 등 과학적이면서도 인문학적인 분야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매력적이다. 굳이 독자들이 이 두꺼운 책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면서 그 어려운 분야를 공부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까마득한, 그리고 알 수 없는 과거로 호기심을 던지는 그 순수한 마음이 지닌 가치를 확인했었다. 동심과도 닿아 있을 것이다. 살아 있는 화석인 '말(語)'과 고고학의 분석으로 이뤄진 이 책에서 선사시대의 광활한 초원이 어떻게 복원될 지 궁금해진다.






















3.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 - 김영란 / 창비


    딱딱하고 어려운 건 질색이었던 대학생 시절, 나는 내가 판결문을 서너 개 읽었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그것도 영어로 된 것이었다! 한창 마이클 샌델 열풍이 불었을 때였다. 그의 책을 전혀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도 유행하는 지적 흐름은 따라가고 싶은 욕심은 있어서 관련 강의를 들었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는 (정치철학의 피치 못할 관문인) 칸트도 읽고, Wikipedia 링크를 타고 들어가서 미국 법관들의 판결문도 읽었고, 내친 김에 마이클 샌델의 다른 책들도 3권 더 사서 읽었다. 그때 내가 '판결문'이라는 걸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대부분의 내용은 무척 지루하다. 둘째, 하지만 판결을 선언하는 마지막 문단에서는 가슴을 울리는 명언들이 나온다. 그 때문인지 나는 법이 지닌 차가운 이미지가 원칙을 고수하는 단호함에 있는 것이지 실은 뜨거운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물론 그렇지 않은 법 탓에 사회로부터 억압받는 많은 이들이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인본에 근거한 법의 근본은 기본권 보호다. 최초의 여성 대법관 김영란은 이미 유명하다. 나는 그녀가 제대로 된 의식을 갖고 있는 사회적 인물이라는 사실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그런 전 대법관이 사회적 이슈과 된 판결들을 모아 조곤조곤 설명해준 책이니 서재에 꽂아두고 읽지 않을 수가 없다.

    





















4. <IS : 분쟁전문기자 하영식, IS를 말하다> - 하영식 / 불어라바람아


    볼 때마다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다. 누리꾼들 중 대부분이 '아랍'과 '이슬람'과 'IS'를 여전히 혼동한다. 전형적인 '일반화'의 악습이 프랑스 파리 테러 사건 이후 또 도졌다. 심지어는 우리 사회에서 '이슬람'이라는 단어가 소수의 억압 받는 이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언어 폭력의 피해자까지 되고 있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IS는 이슬람이 아니다. 누가 봐도 가짜인 이슬람의 탈을 쓰고 정치적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폭력 집단이다. 일부 전문가들의 예측과 달리 IS는 서구 문화의 심장부 중 한 곳인 파리를 급습하는데 성공했고, 그 공포는 이제 미국 본토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도 반응을 했었다. 테러의 위협이 지근거리까지 왔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이슬람'이라는 단어는 오해받지 말아야 한다. 분쟁 지역을 찾아다니며 현장을 목격한 하영식 기자의 이 책은 IS 뿐만 아니라, 현재 터키, 시리아, 러시아 등과 연관되어 뉴스에 심심찮게 올라오는 '쿠르드'라는 민족, 그리고 이슬람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까지 담고 있다. 국내 이슬람 전문가들의 글은 다소 딱딱한 경향이 있는데, 현장감이 있는 기자의 글은 어떨지 기대된다.




P.S 예술/대중문화 분야에 읽어볼 만한 좋은 신간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 아쉽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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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 - 닫힌 종교에서 열린 종교로, 종교다원주의의 도전
길희성 지음 / 휴(休)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2015.11.20



    일본 작가 나카무라 히카루(中村 光)의 만화 <세인트 영 맨(원제 : セイント☆おにいさん)>은 천만 부 이상 팔린 성공 덕분에 2013년 5월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도 상영됐다. 도쿄의 타치카와(立川)에 사는 룸메이트인 예수와 부처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2009년에는 데츠카 오사무 문화상을 수상했고, 앙굴렘 국제코믹페스티벌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둘은 지구에서 휴가를 즐긴다. 예수는 쇼핑을 좋아하고, 부처는 만화를 좋아한다. 여기저기 구경도 다니고, 맥주도 마시며, 블로그도 한다. 예수가 목욕탕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가 하면, 흥분한 부처의 이마에서는 빛이 난다. 개그와 유머가 주가 되긴 하지만 슬라이브 오브 라이프(Slice of Life) 류의 소소한 분위기 속에 그리스도교와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가 녹아 있기도 하다.


    앞으로 오랫동안 종교와 인간에 대해 이모저모로 알아볼 계획이었던 근 몇 년 사이, 내가 <세인트 영 맨>을 보고 좋은 인상을 받은 건 당연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나오기 힘든 작품이다. 조직과 체계를 갖춘 종교보다는 조상을 숭배하는 신토(神道)를 따르거나 무종교인 경우가 훨씬 많은 일본이기에 큰 히트를 칠 수 있었을 것이다. 2006년 일본의 Dentsu Communication Institute가 실시한 조사를 보면 52%에 이르는 일본인이 신토, 혹은 무종교였다. 일본인들에게 ‘종교’라는 것은 개인적 신앙이 아닌 체계적 조직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2위는 35%의 불교였고, 4%는 조직화된 신토 신앙, 2%가 그리스도교였다. 종교적으로 보면 혼합주의(Syncretism)인 일본은 분명 종교의 조직화가 탄탄한 우리나라의 독실한 신자들이 이해하지 못할 종교 현상을 갖고 있다.


    내가 <세인트 영 맨>을 몇 번이고 돌려봤던 이유는 일본의 혼합주의(혼교주의)에 공감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각 종교의 이런저런 가르침들을 자신에게 적절하게, 혹은 유리하게 취합하는 일은 때때로 아전인수 격이 될 수 있어 위험하기도 할 것이다. 일련의 앎과 수련이 요구되기에 명사들의 가르침이 필요한 주의란 뜻이다. 한편으로 혼합주의는 절대가치가 해체된 오늘날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인문학적 정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거대 조직인 종교는 카렌 암스트롱이 <신을 위한 변론(원제 : The Case For God)>에서 말한 것처럼 여러 방면에서 공격을 받는데, 이는 절대적 진리의 포기(주로 유일신교의 교리 포기)와 그간 사회에 끼친 해악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공격이다. 혼합주의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종교란 진리를 가치개방사회에 녹여낼 수 있는 카리스마와 호소력을 가진 종교, 그리고 민주주의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 종교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의 종교는 비판받을 점이 많다. 종교계 내부의 양심적 인사들의 비판이 심심치 않음도 이를 대변한다.


    카렌 암스트롱의 <신을 위한 변론>에 이은 독서였다. 그녀는 현대의 종교가 어쩌다 이 지경의 궁지에까지 몰리게 되었는지 장구한 역사를 자신의 책에서 풀어냈다. ‘모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역설 속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상에 주목하기도 했다. 비움(케노시스)과 침묵의 중요성도 재차 강조했다. 나는 궁금했다. ‘그렇다면 비움의 종교는 어떤 모습이며, 앞으로 나는 종교에게 어떤 점을 바라야 하는 것일까?’ 신자로서 묻는 게 아니었다. 나는 신자가 아니다. 가톨릭 냉담자다. 내게는 종교가 보호하지 못하거나 그렇게 하기 꺼려하는 민주주의의 도덕적 가치가 종교의 진리보다 훨씬 중요하다. 개방성은 갈수록 문을 닫아가는 듯한 ‘열린 현대사회’의 아이러니 속에서 늘 강조되어야 한다. 나는 울타리 밖으로 나오는 종교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예컨대 법정 스님, 김수환 추기경, 달라이 라마 등.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종교다원주의를 정확히 봐야 한다. 길희성의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는 앞선 나의 질문에 답한 책이다. 화합을 원하는 원로학자다운 둥근 필체가 곳곳에서 보인다. 하지만 종교 조직과 일부 몰상식한 신자들을 향한 날선 일갈도 많다.




*    *    *




    인간이 만물의 정점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특별히 우월하다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물에서 살 수도 없고, 날지도 못하며, 시각과 청각은 형편없다. 다만 한 가지 특징은 독보적이며 결정적이라고 확증할 수 있다. 사고(思考)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Le Penseur)>처럼 앉아 과거를 들여다보고 현재를 고민하며 미래를 내다보는 존재는, 과학이 확인한 결과 아직까지는 인간밖에 없다. 과거 인간의 조상들은 발톱과 털을 포기하는 대신 조직화의 길을 택해 그에 필요한 두뇌의 힘을 기르는 진화의 경로를 밟기로 작정했던 모양이다. 유전자의 선택이다. 그 결과 인간은 고뇌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가지 피치 못할 잔인한 운명과 대면하게 했다. 존재와 의식을 구분할 수 있는 인간은 그 괴리 속에 ‘자기분열’이라는 예상하지 못했던 함정에 송두리째 빠져버렸다. 이제 인간의 한 개체가 평생을 다해 이뤄야 할 목표는 분열된 자기의 재통합이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욕구와 종교의 관계를 역설한 바 있다. 헌신적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을 물색해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걱정을 내심 하면서도 이상하게 현대사회는 자기성찰이 사치인 분위기다. 길희성은 이를 ‘의미의 위기’라 불렀다. 방법은 쉽다. 질문을 계속 던지는 것이다. 어려운 점은 그럼에도 확답을 구하고자 하는 과욕을 버려야 한다는 것. 인문학적 정신과 동일하다. 그런데 이것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사회이기에 권위와 확일, 그리고 순응의 사회로 변질되어간다. 쉽게 내 편 네 편 가르는 것도 그런 연유이리라. 왜 사람들 중에는 질문하는 것을 두고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툴툴거리는 이들이 있는 것일까? 대부분은 그보다 생계가 더 중요하다 생각하는 까닭일 것인데, 물론 우린 밥을 먹어야 살지만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분열된 자기’를 살려야 할 의무도 있다. 반쪽을 포기한 인생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은 뒤늦게 질문을 던지고 두려워한다. 후회도 한다. 힐링과 자기계발 열풍의 이유다. 자기의 삶을 묻는 50대 베이비붐 세대들의 도서 소비량이 확연히 늘었다. (교보문고의 지난 10년 간 연령∙성별 도서 구매 점유율 조사에 따르면 40~50대의 도서 소비량이 6~9% 증가했다. 1위를 차지한 40대 여성의 경우는 자녀교육 차원에서 학습서를 구해 큰 폭으로 오른 것이지만 50대는 자기계발에 집중했다. 20~30대가 취업과 경제적 이유로 독서를 포기했다는 분석은 못내 씁쓸하다.)


    또 하나 인간의 최대 고민거리는 죽음에서 비롯된다. 길희성은 죽음을 ‘곱하기 제로’의 존재라 했다. 도루묵이라는 거다. 죽음은 인간을 근본적 물음으로 끌고 간다. 타인의 죽음마저도 비극임을 아는 인간 특유의 감성 능력은 복이면 복이고 족쇄면 족쇄다. 카렌 암스트롱은 그 타인의 범위를 인간이 잡아먹어야 하는 동물에게까지 끌고 가서 종교의 태초를 해석했다. “종교적 삶이란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는 비극적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에 뿌리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카렌 암스트롱, <신을 위한 변론>, 41쪽) 그러면 우리는 인간 본연의 공포 앞에서 물어야 한다. 평소에는 외면하며 살 수 있지만 언젠가 자신이 밟게 되는 종착지에 대한 물음은 “죽음마저 넘어설 어떤 지고선에 대한 확신이 있는가.”(길희성,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 35쪽)이다. 이건 내세에 대한 확신이 아니다. 다음 삶이 있든 없든 피해갈 수 없는 그 존재를 초월할 수 있는 정신적 태도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의미한다.


    종교는 인간의 본성을 잘 설명해주는 하나의 현상이었고, 지금도 그렇게 유지되고 있다. 현재 과학기술로 내다볼 수 있는 가장 먼 미래는 11천년 기 정도다. 즉, 11,001년 무렵까지다. 그 이후는 과학모델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돌려 ‘대략 이런 모습이겠구나’ 하고 추측할 수만 있다. 영화 <아마겟돈>이나 <딥임팩트>의 가상이 현실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도 지구의 평화로운 연대기는 약 6억 년 정도면 산산조각 날 확률이 높다. 오존층이 상당 부분 없어져서 대량멸종이 불가피하며, 무엇보다도 그때가 되면 달이 궤도에서 이탈해 지금과는 전혀 다른 패턴을 생태계가 감당해내야만 한다. 광합성을 하는 식물의 99%가 멸종한다. 물론 이 시기에는 인간이 지구에 없을 것이다. 타행성에 정착하든 그렇지 못하든 언젠가 인간 종은 지구에서의 자리를 내줘야 한다. 그러나 나는 지구가 종교 발상지의 상징으로 끝까지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렇게나 중요한 종교의 오늘날 모습은 왜곡된 부분이 많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성급한 일반론으로 종교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사람들도 상당하다. 길희성이 책에서 언급한 대표적인 폐단은 기복신앙이다. 간절한 마음이야 짐작을 할 수는 있지만 내게 이해가 안 되는 그 마음의 하나가 수능기원 기도에 뛰어드는 학부모들의 마음이다. 원래 가지고 있는 종교이기도 하고 대입이 워낙 중요한 사회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은 분명하다. 산을 타는 나는 사찰에 들러 잠시 쉬어가는 그 시간과 사찰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하는데, 고3들이 수능이라는 걸 막상 실감하지 못하는 시기인데도 매년 4월이 되면 벌써부터 합격기원 기도를 올린다는 플랜카드가 여기저기 걸려 있는 모습을 본다. 지지난 가을 도봉산 망월사에 물을 마시러 들렀다가 본 학부모들의 기도행렬은 가히 장관이기도 했다.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다. 종교가 왜 우리 사회에 깊숙이 침투할 수 있었는지는 기복신앙을 내세우는 그들의 전략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고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 뛰어든 그들의 긍정적인 면을 간과할 수는 없다.)


    길희성은 일갈한다. “기복신앙을 주로 내세우는 종교는 존재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존재해서도 안 된다.”(위의 책, 47쪽) 심지어 그는 종교에서 복을 찾는 이들을 두고 예수와 부처의 뜻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라 비판했다. 이른바 ‘종교무식사회’라는 것이다. 나도 묻고 싶다. 그들은 어째서 예수와 부처가 소원을 들어줄 거라 믿을까? <세인트 영 맨>의 가상처럼, 약간의 각색으로 저 두 성인이 우리말을 배워서 할 줄 안다고 하자. 워낙 큰마음을 가진 터라 우리의 현실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기복에 빠진 모든 이들을 위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안타까움이 크게 자리 잡지 않을까. 자신들에게 소원을 들어달라는 기도는 애당초 그 시절에는 있지도 않았으니까. 참된 종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행복은 보이지 않는 초월적 실재와의 완전한 합일이다. 자녀가 대학에 합격하는 것, 부자 되게 해달라는 것, 올해는 시집장가 가게 해달라는 것은 항구적 행복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참된 종교는 또한 욕망의 크기를 작게 줄이는 심신의 도야 역시 주문한다.


    게다가 기적 자체를 바라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이따금 강렬한 체험을 해 신앙에 빠졌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보게 된다. 그러나 길희성은 기적을 ‘차별적 경험’으로 본다.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라는 태도다. 참된 종교의 가르침은 세상 모든 일을 기적으로 보게 만든다. 모든 것을 경외하고,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그렇게 마음을 비우는 정신은 보지 않고도 믿는 위대한 신앙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건 ‘기적’이라는 것이 정말 무엇인가에 대한 다른 시선이다. 보리슬라프 페키치의 <기적의 시대(원제 : Vreme čuda)>는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닥친’ 기적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비극적으로 풀어낸 독특한 시각의 작품이다. 너무 독특한 나머지 ‘이단소설(異端小說)’의 악명을 받을 소지까지 있어 번역을 맡은 이윤기가 별도의 장을 마련해 변론하기도 했다. 기복을 한다는 건 어쩌면 ‘나는 신앙적으로 아무런 준비도 안 되어 있다.’라는, 별로 드러내지 않아도 될 자신의 속마음을 겉으로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길희성이 이런 우리 사회의 왜곡된 모습과 대비한 것이 서구의 불자들이다. (그는 ‘백인불자’라는 단어를 썼는데, 인종적 차원에서 달리 들릴 수도 있으니 주의하자. 물론 그는 그런 맥락에서 쓴 건 아닐 테다.) 서양이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 까닭은 대부분이 개개인의 마음공부를 위한 소소한 의도 때문이었다. 당연히 기복신앙이 아니다. 양서를 꾸준히 읽고, 불교의 수행법을 실천하며, 검소하게 사는 이들이다. 불교가 서양으로 전파된 건 꽤 최근의 일이지만 우리의 불교가 이를 보고 배워야 할 점이 많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 까닭일 것이다. 한 종교관련 교양강의를 맡았던 교수는 내게 베르나르 포르의 <불교란 무엇이 아닌가>를 추천했다.


    기복은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신의 절대성’에 근거한다. 위험한 신앙이다. 신을 객관적 대상으로 삼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길희성은 어리석은 맹신과 독선적인 확신 사이에 올바른 신앙을 위치시킨다. 맹신과 확신이 더해진 광신을 최악으로 꼽는다. 문자주의도 위험하다. 언어초월적인 신을 격하시키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카렌 암스트롱도 말했다. 아니, 그녀가 책에서 언급한 여러 신학자와 철학자들도 동의한 바다. 신에 관한 모든 언어는 상징이다. 문자주의를 표방한 미국의 복음주의는 쉬운 교리를 원했기 때문에 그냥 언어에만 의존하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이를 일찍부터 깨달았던 위대한 현자들은 ‘신’이라는 말 자체의 사용을 지금의 우리처럼 남용하지 않았다. 다석 유영모는 신을 두고 ‘없이 계시는 분’이라 표현했다. 틸리히는 ‘존재의 근거(Ground of Being)’라 불렀다. 신은 암호화되어 있다. 그 비밀을 찾기 위해서는 영성의 대가들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한편 확신과 맹신을 경계하는 자세를 늘 유지해야 한다. 신에 대해 안다는 건 정보를 취득하는 게 아니다. 목표는 합일. 길희성은 이렇게 말했다. “깊은 영성의 소유자에게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의 암호가 된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서나 신을 만난다.”(위의 책, 89쪽)


    사실 위와 같은 삶의 모습은 우리의 일상과 너무나 다르다. 책을 읽으면서도 괴리감에 고민할 수밖에 없는 건 비단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영성을 중시하는 삶은 마치 모든 것을 피해 나만의 초월을 위한 소극적 삶처럼도 보인다. 초월의 자세가 이상하게 제한된 자세로 보이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한 명의 구성원이지 않은가. 가족을 위해서 해야 할 일도 있고, 발전과 정의를 위해 이 사회에 기꺼이 희생해줘야 할 일정한 부분도 분명 맡게 될 터이다. 물론 저자도 그렇다. 이순이 넘은 길희성도 그 고민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고백했다. 특히 강화도에 한 영성센터를 여는 과정에서 큰 내적 갈등을 겪었던 모양이다. ‘도피는 아닐까?’ 둘 중 무엇을 강조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런 고민에 있어 유교의 거대한 우산 아래 당연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떠올리기 쉽다. 나를 먼저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의 중책을 맡을 수 없다는 생각. 그러나 생각해보면 수신 자체도 끝없고 때론 답 없는 무궁(無窮)의 차원에 있다. 그것만 추구해도 모자라는 판에 언제 사회에 뛰어들어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 그래서 후자를 더 강조하는 사람들의 수도 만만치 않다.


    답이라고 못 박긴 뭐하고 그걸 ‘해결책’이라 둘러 표현해보자면, 그것은 아마 둘을 동시에 추구하는 일밖에 없을 것이다. 길희성은 이걸 ‘평화롭기’와 ‘평화 만들기’의 동시적 추구라 부른다. 맞는 말이다. 나를 알아가는 공자의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사회를 알아가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은 각각의 다른 주제 속에서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분명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직적 운동이 더해져야 하며, 별도의 결단력과 훈련, 그리고 그에 따른 분명한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종교가 사회에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이 결합된 카리스마적 성인이 필요하다. 말로만 신자들을 깨우쳐주는 일과 평화를 만드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아마 그래서 함석헌이 <간디자서전>의 서문 격으로 쓴 1961년 2월 ≪사상계≫에 발표한 한 글에서 “나는 이제 우리의 나갈 길은 간디를 배우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적은 것이리라.


    간디는 종교를 뛰어넘었다. 정(正)의 의미에서 본 혼합주의의 가장 이상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뜻으로써 열려 있는 사회를 꿈꾼 그에게 가치다원화의 사회는 그다지 위험하지도 않았고 우려할 만한 세태도 아니었다. 간디에게 최고의 적은 맹신이었다. 그리고 그 적에게 목숨을 잃었다. 종교가 작금의 상황을 제대로 직시한다면 앞으로 상생하기 위해 종교 간의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스스로도 진단할 것이다. 그리고 독점적인 진리의 가치를 포기할 것이다. 종교가 절대적 가치를 구축하며 성장하는 과정에서는 값비싼 대가가 필요했다. 도덕적으로 타락했고, 순수를 상실했다. 권력의 도움을 받았고, 권력의 도움이 되었다. 현대인은 그러한 근대적 종교를 외면한다. 종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순수와 진정성을 회복해 권력 없이 홀로 서는 법을 배워야 하며, 창조적 발전을 위해서라도 상대 종교와의 대화를 꾸준히 시도해야 한다. “모든 종교가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 진리의 척도란 존재하지 않는다.”(위의 책, 145쪽) 또한 민주주의의 근본정신과 가치와도 대화해야 하고, 종교비판을 받는 원인을 냉철하게 분석하기도 해야 한다.


    길희성이 이 책의 제목에 사용한 ‘같은 산’이라는 단어는 표면만 놓고 보면 혹 종교다원주의의 현실과 배리된 단어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나 그가 그런 비유를 쓴 이유를 들여다보면 납득할 수 있다. 그는 도덕실재론자이다. 종교적 진리 역시 실재한다고도 생각한다.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점이 있다는 것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도덕주관론(정감주의)의 위험성이다. 도덕이 상황마다, 혹은 사람마다 다르게 적용될 수 있다는 이 사상은 ‘살인’이라는 최악의 문제에 대한 우리의 비판력을 흐린다. 달라이 라마도 이런 점에서는 그와 노선이 같다. 비교적 최근의 저서인 <종교를 너머(원제 : Beyond Religion)>에서 그는 이타심과 배려 같은 인간의 도덕적 가치들이 과학의 도움으로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임을 입증 받고 있다면서 이른바 ‘현세적 도덕’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물론 달라이 라마가 말한 ‘현세’는 ‘세속’과는 다르다. 오히려 “모든 종교에 대한 깊은 존경과 관용”(달라이 라마, <종교를 너머>, 27쪽)을 뜻한다. 그는 분명 초월적 도덕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희망 담긴 대안을 내놓은 것이다.


    반대의 의견도 있어 옮겨본다. 이도 무시할 수 없는 시류이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가 과학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건 ‘모든 과학계의 도움’으로까지 확장시킬 수는 없다. 근대의 중요한 가치들이 현대사회에서는 무너졌다. 도덕도 예외일 수는 없다. 프란츠 M. 부케티츠는 <도덕의 두 얼굴(원제 : Wie Viel Moral Vertragt Der Mensch)>에서 절대적 도덕론에 극렬히 반대했다. 굉장한 비난조로 쓴 책이다. 아예 작별하자며 도덕의 독재와 결별을 선언하기까지 했다. “도덕주의자들의 치켜든 손가락이 인간의 이기심을 지적하지만, 인간 행동에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프란츠 M. 부케티츠, <도덕의 두 얼굴>, 53쪽) 모로 봐도 이는 도덕 창시의 상징과도 같은 소크라테스의 손가락을 겨냥한 발언이다. 권위주의와 결탁한 도덕, 그런 도덕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책무의 과중함에 대한 염증은 이렇듯 과학계의 예리한 목소리로 표출되기도 한다.


    한편 길희성이 종교적 진리의 실재를 주장하는 까닭은 신앙주의의 위험성이다. 종교적 경험은 주관적인 환상일 수도 있다. 저마다 다르게 체험된다는 뜻이다. 역사와 문화만 놓고 봐도 그렇다. 체험의 순간이 기억될 수 있는 건 언어의 개입 덕분이다. 우리말로 기억되는 체험과 영어로 기억되는 체험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괜히 번역에 애먹진 않으리라. 그럼에도 지금까지 제시된 참된 종교의 가르침을 보면 초월의 무언가, 즉 객관적 진리가 제시되었다. 과연 각 종교들은 동일한 목표를 지향했을까? 종교를 넘나드는 독서를 하거나 영성수련, 혹은 각 종교를 방문해 체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아마 대부분이 조심스럽게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예수와 부처와 공자의 말이 큰 맥락에서는 상통한다는 점. 이들은 야스퍼스가 ‘기축시대’, 우리 독자들에게는 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라는 제목의 책으로 몇 년 전 알려졌던 그 사상과 철학의 시대에 살았던 성인들이다. 이들이 제시한 도덕적∙영적 수준은 유사했다. 한편 고등종교들만 놓고 보면 일원론을 표방한다. 수많은 현상들에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 원리는 인격체로 표현되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영성의 측면에 있어 ‘합일(合一)’을 하나같이 강조했다는 점에서 위의 종교들을 묶을 수 있다. 교리 상의 유사점을 하나씩 열거해볼 수 있다고도 한다. 길희성은 여기서 희망을 찾는다.


    사실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에서 저자가 강조한 부분은 영성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종교의 변화보다는 그가 강화도에서 소수의 방문자들과 함께 추구하고 있는 영성의 변화에 더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유교의 예를 든 것일 수도 있다.) 우선 개인의 변화가 사회 전체의 변화, 그것이 아무리 부분적 변화라고 할지라도 쉽거나 순수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한편으로는 종교와 영성의 차이를 들 수도 있겠다. 종교는 집단적 현상이므로 필연 배타성이 약점이 된다. 게다가 지금 우리 사회의 종교 세태를 보더라도 “일반적 상식과 도덕성에도 미치지 못하는 신자들로 넘쳐나는”(길희성,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 189쪽) 현실이다.


    하지만 영성은 대체로 개인적이다. 법정 스님은 <홀로 사는 즐거움>이란 책에서 참나(眞我)는 타인과의 무경계라고 했다. 영성은 자발적 고독이자 침묵이자 부정으로, 그 모든 것은 자기 극복을 위한 것이다. 포장된 사회적 자아가 해체되고, 집착하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직시하며, 심층의 자아로 들어간다. 이 심층의 자아가 모든 종교가 함께 붙잡고 있는 진리의 세계에 있다. 종교가 외면 받는 사회라 할지라도 영성이 무시될 수 없는 까닭이다. 앞서 말한 에리히 프롬의 진단과 그에 대한 해결책이 여기서 제시된다. 길희성은 종교 위기의 사회가 오히려 영성회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본다. 그에게 앞으로의 길은 ‘제 3의 길’이 된다.


    영성회복의 길은 제 9장 ‘영성의 대가들을 만나다’에서 제시되는데, 오래 전의 종교와 현대적 분석의 용어들이 다소 어렵게 다가오는 독자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知訥)과 당나라 종밀(宗密)의 공적영지심(空寂靈知心)과 독일 가톨릭의 신비주의 계열 사상가인 요하네스 에크하르트(Johannes Eckhart)의 ‘지성(intellectus)’의 비교를 통해 둘이 실은 같은 맥락이며 잡다한 감각 대상에 휘둘리지 않은 인간성 그 자체, 본성, 혹은 본심을 강조하는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도의 라마나 마하리쉬(Ramana Maharshi)가 주장하는 절대적 주체인 ‘나-나(I-I)’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어려운 용어들이긴 하지만 이는 모두 영성수련을 통한 신비적 합일(unio mystica)을 이루게 된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 상대적이고 표면적인 나에서 심층적이고 절대적인 나로 들어가는 여정. 이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나는 나가 아니다.”라는 부정의 인식을 떠올려보면 된다.


    그러나 이건 말마따나 쉽게 당도할 수 없는 차원이다. 카렌 암스트롱의 말이다. “종교도 다른 기술들처럼 인내와 노고와 훈련을 필요로 한다. ……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의례와 수련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설명하기 힘든데, 이는 마치 스케이트 선수가 얇은 스케이트날로 빙판 위를 활주하면서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법칙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카렌 암스트롱, <신을 위한 변론>, 23쪽) 길희성도 그의 얇은 책에서 영성수련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대가들의 가르침을 받고 우리가 실천해야 할 일이기에 이는 현대적 일상의 도전받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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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만 헤세가 1922년에 완성한 소설 <싯다르타(Siddhartha)>는 함께 고행을 떠난 싯다르타와 고빈다가 어떻게 깨달음을 얻게 되는지 그 과정을 그려낸 작품이다. 헤세는 싯다르타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다 환상을 경험하게 된 고빈다를 통해 모든 것은 하나이고, 죽음과 탄생을 통해 끝없이 새롭게 태어난다는 진리를 표현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존재가 미소 짓는 싯다르타의 얼굴이라는 ‘가면’으로 묘사된다. “실체는 없지만 그래도 존재하는”(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220쪽) 그것은 길희성이 자신의 책에서 역설한 모든 종교를 관통하는 진리를 일컫는 것과 같다. 그 진리를 헤세는 미소라고 생각한 듯하다. 우울증 치료 기간 동안 전혀 집필하지 못했지만 그 기간을 자기체험의 기회로 삼아 완성한 역작이라는 점에서도 싯다르타의 미소는 의미가 있다. 영성의 수련을 통해 그 길에 닿을 수 있을까. “고빈다는 완성을 이룬 자들은 이렇게 미소 짓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위의 책, 220쪽) 본연에 닿는다는 건 무엇인가, 다시금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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