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07

 

  군생활 중에 나는 두 개의 문학상을  받았다. 규모는 그럴 싸 하나, ‘사회’에서 하던 것들과는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니라 어디 내세울 건 못 되지만. 새로 온 대대장이 내게 관심을 가진 것은 그 무렵이었다. 하루는 집무실로 나를 불러 자신의 아들도 막 입대했다며 20대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을 해줬다. 요컨대 남은 군복무기간 동안 호연지기의 정신을 기르고 가라는 것이었다. 부대에서 동쪽을 보면 속초의 바다가 보이고, 반대편에는 외(外)설악의 장벽이 기암괴석을 자랑했다. 폐쇄적인 군생활이 익숙해져야 그런 것들이 보이기 마련이나, 나는 적절한 시기에 조언을 들은 경우였다. 그 무렵부터 연등(소등시간인 22시 이후부터 두 시간동안 제한된 인원에게 공부할 공간을 제공하는 것. 제대가 임박한 병사들에게 주로 주어지나, 보통 군·사단별로 자체적인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을 하게 된 것이다.


  부모님으로부터 거의 매달 책 소포를 받곤 했던 나는, 예컨대 <로스트 랭귀지>, <총, 균, 쇠>, 혹은 <세계문학의 천재들>과 같은 어려운 책은 거의 읽지 못했다. 마음을 다듬을 수 있는 책이 자연스럽게 손에 잡혔다. 장석주氏의 <느림과 비움>, 임현담氏의 <히말라야 있거나 혹은 없거나>는 마음을 배부르게 해준 고마운 책이었다. 치열한 지적논쟁의 기회는 대학공부 중에 얼마든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대학이, 연장자가, 혹은 사회가 나에게 제공할 수 없는 개인적인 사색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군대에서의 사색이라. 어불성설 같지만 해본 이들은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안다. 이런 독서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대대장의 ‘호연지기’처럼 담대해지는, 이런 책은 어떤 ‘정신적 약물’ 같은 것도 아니다. 그저 담백하게 “위로하는 책”이다. 고음을 내지르는 가수들의 노래가 아닌, 읊조림이다. 강한 타격이 아닌, “엄마 손은 약손”이다. 혹은 아버지의 뒷모습이다. 나를 위로하는 글들은 오히려 나를 가슴 아프게 한다. 내성이 생기면, 그 땐 견디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강해지진 않는다. 단지 촉촉한 눈시울을 만들어준다.
  “울 준비가 된 사람이 울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그래서 미술을 공부하려고 덤벼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임스 엘킨스의 <그림과 눈물>에서처럼 복합적으로 분석하진 않겠지만, 그래, 나도 도판연구를 한답시고 음악을 들으면서 꽤 많이 울었다.


  지금 읽는 책들에게 도타운 정을 주지 못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근래 읽은 <위도 10도>나, 지금 읽고 있는 <인종주의는 본성인가>, <핀치의 부리>, <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 리뷰를 쓰기 위해 복기 중인 <눈의 지혜>, <의무론>, <아인슈타인과 피카소> 등은 지식의 나열과 결론도출, 논점제시의 패턴을 가지고 있다. 학문적 논픽션이다. 많이 알수록 감상에 도움이 된다는 (역으로 감상이 조장되기도 하나, 복잡한 문제이니 여기서 괜스레 얕게 거론해볼 문제는 아니다.) 것을 미술공부를 통해 알았기 때문일까. 때론 지적 권위에 기대거나, 추천에 속아 넘어가기도 하면서 여러 지식을 동냥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러기에 책 읽는 내내 힘겹게 고민하는 모습을 잠시 떨어져 바라볼라치면 스스로가 애처롭기도 하다.


  콜드플레이, 라디오헤드, 후바스탱크, 더 프레이, 오아시스 등을 좋아하는 내게 친구 한 명이 해준 말이다. “록만 듣고 있으면 마음이 푸석푸석해지는 것 같아. 나는 발라드도 가끔씩 들어주는 것이 좋더라.” 음악‘잡식종’인 나는 그 마음이 이해가 됐다. 굳이 비유하자면 책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한 저명한 독서가처럼 “소설은 읽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진 않으나, “이왕 읽으려면 오랜 시간 공들여 논쟁적 지식을 탐닉하는 것이 좋다.”고 여기는 까닭에 픽션과 에세이에 눈길을 주는 때가 점점 줄어드는 듯하다. 독서편력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라지만 편식이 몸에 좋지 않은 것과 꼭 닮은 이치이리라.


  논쟁적 지식과 그를 다룬 책은 자극적일 수밖에 없다. 지적 공부는 그런 자극에 연이어 노출되는 것이고. 역사와 시대를 이해하려는 자기와의 공정한 투쟁에서 준수한 성적을 거두고자 야망을 가진, 소위 ‘지식인’들에게는 이런 말이 때때로 실없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따금 자극에서 벗어나는 것이 현명할 때가 있다. 좋은 자극도 마찬가지. 그렇다고 자기계발서나 멘토링북을 찾진 않는다. 상품용으로 인생과 지혜를 정리해놓은 책에는 도통 마음을 열기 싫다. 소소한 주제들로 엮인 에세이가 나에겐 제격이다.


  겉멋만 들어 빈 수레처럼 덜커덩 요란한 에세이가 아닌, 삶을 음미할 수 있는 책. 사유의 빈 공간이 허용되는 책. 내가 살지 않은, 살지 못할, 혹은 살 수 없는 삶들에 잠시 몸을 담가보고, 되도록 가장 낮은 자세로 겸손해질 수 있는 책. 자주 알라딘을 산책하지만 그런 책을 신간으로 만나보긴 힘든 듯하다. 저기 큰 서점들의 구석진 코너에 있는, 허름한 외장 탓에 견문의 망에도 걸려보지 못한 조그마한 어떤 책이 내가 찾는 그런 책일 수도 있겠다고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너도나도 읽는 인기만점의 책이 아니라, 운명이라 여길 만큼 우연히 발견한 어떤 작은 책 말이다.


  아, 나는 자유사상가이다. 우연이든, 운명이든 믿지 않는다. 수학적 확률이야말로 교교한 인망(人望)을 떠받치는 실체라고 여긴다. 그런데 이런 인연은 정말 교교하다. 책상 앞에 앉아 눈 돌리면 가장 먼저 보이는 (혹은 보는) 구석에 그런 책들이 몇 권 꽂혀 있다. 그들을 보면 나는 우연과 운명에 관한 어떤 ‘신학적 순리’의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책과 나의 관계를 수학이 아닌 종교적 조화로 생각해보는 일에 있어 나는 그다지 자유롭지 못한 듯하다. 자력(磁力)이 너무 강해 도무지 떼어낼 수 없는.


  올해 두 번째로 묶어 사는 책들도 실은 ‘촉촉한 책’이 아니다. 내 안에 있을지 모르는 잠재적인 지성의 힘을 끌어내기 위해 미학, 철학, 종교, 과학 등을 주로 접하며 나름의 계획을 실행 중에 있는데, 2012년의 계획을 위한 여덟 권의 책들을 사봤다.

 

 

 

 

 

 

 

 

 

 

 

 

 

 

 

 

 

 

 

 

 

 

 

 

 

 

 

 

 

 

 

#1. <미학 산책>은 제목 그대로 ‘산책’을 하고자 샀다. 어려운 논문들보다는 쉬울 것이고, 저자가 공들여 여러 시대의 미학을 간추려 놓았으니, 그동안 소홀했던 미학공부를 상기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꽤 근래의 일인데, 언젠가 미술블로그에서 잠시나마 현대미학을 다뤘을 때, 나는 “미학은 미술을 보는 눈이다. 미술사와는 다르다.”라는 새삼스러운 소개를 쓴 적이 있었다. 지금이야 미술사와 ‘미술지식(말 그대로 미술과 관련된 잡다한 지식들이다. 연계되기 힘든 지식의 조각들이, 즉 각주 정도로 실릴 정도의 내용들이 이 시대에는 교양인의 필수조건처럼 회자된다. 나는 <지식의 미술관>의 리뷰에서 그 문제를 언급한 적이 있다.)’을 쉽게 얻을 수 있지만 미학의 문을 두드리기 힘든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전히 어렵다. 조금이나마 미학을 경험해본 입장에서는, 관심이 있다면 “맨 땅에 헤딩”해보기를 권하나, 미학의 지혜를 삶의 영역으로 끌어오기 힘든 사람들에게는 이런 교양서가 안성맞춤일 것이다. 재밌게 읽고, 다른 미학서들과 비교해 언젠가 리뷰로 꼭 다뤄보고 싶다.


#2. <다윈 지능>은 <핀치의 부리>를 읽고 있는 지금 그와 관련된 흥미로운 신간이라 골라봤다. 최재천氏의 책이라 더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리뷰나 추천글, 100자 평 등을 하나도 읽지 않았기에 “다윈을 통해 그가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은 시대적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를 지금 이 순간에도 심하게 궁금해 하는 중이다.


#3. <종교의 바깥에서 의미를 찾다>는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를 사놓은 이때에 “둘을 붙여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들어 구매한 책이다. 여덟 권 중 가장 마지막에 선택한 책이기도 하다. 몇 번 밝혔지만 나는 자유사상가이므로 신의 현존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처럼 신이 없음을 확고하게 주장할 정도는 아니다. 차라리 칼 세이건의 “의심해보라.”라는 뉘앙스를 갖고 있다고 설명하는 편이 낫다. 이 책의 저자 앤드루 커노한은 무신론자들을 겨냥해 책을 썼다. 신을 믿진 않으나, 무신론자도 아닌 내가 이 책을 어떠한 방법으로 읽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예상하기 힘들다. 본성에 관한 탐구가 있다면 최근 천천히 곱씹고 있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에도 닿아놓고 같이 읽는 책이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4. <인문학, 세상을 읽다>는 박민영氏의 책을 왕창 살까 생각하다 아무래도 책값이 만만치 않으니 한 권만 추리자고 하여 고른 책이다. 나는 그의 글이 부럽다. 문체를 탐낸다는 것이 아니다. 단단한 사유로부터 시작되는 글이 마치 발원지에서 바다까지 흘러가는 물처럼 자연스럽기에 그 생각의 힘이 존경스럽다는 뜻이다. 궁할수록 기교를 부리는 법이다. 인문학과 철학을 다룬 책들 중 일부 저급한 것들에서는 쓸데없는 기교가 발견되기도 하니, 욕심 많은 젊음을 운영해야 하는 때일수록 이런 저자의 철옹성 같은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도 작법과 사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7회 우수 리뷰로 세 개의 글이 선정돼 적잖은 적립금을 받아놨는데, 그걸 방송개론과 작가론 책을 살 때 다 써버린 것이 못내 후회된다. 아니었으면 지금쯤 박민영氏의 여러 책에 내 지문을 찍어놨을 테니 말이다.


#5. 강신주氏의 책이 최근 인기라고 하지만 감히 읽어볼 용기를 내진 못했다. 동서양 지식의 균형을 맞춰가는 일은 퍽 어렵고, 서양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지난 3년의 대부분을 서양의 지식을 얻고자 쓴 터라, 관중, 공자, 장자, 노자 등을 깊게 읽기에는 마음의 시간이 부족하다 느꼈다. 그래도 한 권을 접해봐야 견문이 넓어지리라 여겨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샀는데, 이것도 창홍의 <미학 산책>처럼 간추린 부류에 속한다. 읽다가 유독 마음 가는 철학이 있으면 나름 깊은 독서를 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행여나 놓쳐버리는 양식이 있을까 경계하며 조심조심 읽어야겠다.


#6. 조르조 아감벤,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다 작년에 알게 된 이름들이다. 아마도 지젝 때문이었을 것이다. 알랭의 철학을 깊게 설명한 한 유명 블로거의 공간(가물가물한 기억에 그 블로그 이름이 ‘붉은 서재’였나 했을 것이다.)에서 며칠을 끙끙대며 머물렀던 기억이 있다. 그는 아마 철학도였을 것이다. 철학에 대한 동경이 내 머리 어딘가에 적어둔 이름들. 제대로 알고 있는 철학 하나 없는 나에게 저들의 책이 과연 얼마나 생소하게 다가올지, 아니면 의외의 깨달음이 있진 않을지, 온갖 잡상(雜像)들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그래도 용기는 나의 편이었더라. 기왕 지식으로 불태울 이번 학기 중에 왕복 3시간은 걸리는 등하교 버스 안에서, 가끔은 어둑어둑 해 저무는 황금빛 한강을 바라보기도 하며 머리 싸매고 읽겠노라 벼렸다. 결국 조르조 아감벤의 <세속화 예찬>, 알랭 바디우의 <비미학>,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을 샀다. 그 벽을 넘으면 무엇이 보일까. 또 다른 벽일 테지, 아니, 분명 또 다른 벽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서는 이런 점에서 좋다. 걸려 넘어진 허들이 있어도 110m를 달린 기록에 감점이 붙거나 하진 않으니. 지적 실험은 늘 나를 설레게 한다. (이런 식으로라면 나는 지젝과 아렌트, 파농도 곧 읽게 되지 않을까. 알고 있는 것은 이름과 몇몇 용어들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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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2-08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님, 안녕.

저는 오늘 국사공부를 너무 해서 머리가 지끈지끈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런데 이름 보니까 이 페이퍼가 더 어려워요. 이제 철학까지 섭렵하시고 대단해요, 독서량이. <위도 10도> 리뷰 잘 봤어요. 이제 <인종주의는 본성인가> 기대중^^ 글을 쓰려면 철학공부는 꼭 해야하는 것 같아요. 블로그에서 아는 의사 분이 철학 아카데미에 다니신대서 우와, 대단하다 했는데 요즘은 정말 이것저것 잘하는 분들이 한둘이 아니라 머리가 더 아파요ㅠㅠ

봄학기는 학교에 가는 거예요? 탕기님도 왕복 3시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탕기 2012-02-08 23:39   좋아요 0 | URL
이번 학기 열심히 다녀야죠. 책도 많이 읽고, 사유의 시간도 늘리고. 교양으로 러시아어나 독일어를 들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전공을 소홀히 하면 안 되니까, 졸업반 되면 배워볼 요량입니다.^^ 영어도 제대로 못 하면서 늘 바라는 건 많아서 큰일이에요.ㅎ 철학을 고리타분하게만 여기던 시기가 지나가는 듯하니, 저도 조심스럽게 '나의 글'을 쓸 때가 온 것이 아닌가 싶어요. 아이리님도 열심히 공부하시는 한 해 되시길.^^